소설리스트

18화 (18/39)

누군가 유경에게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 언제였느냐고 묻는다면, 비록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할지라도

분명히 그녀는 주저없이 이 날의 경험을 떠올릴 것이다. 자신의 새오빠에게 소중히 지켜온 순결을 강제로 

파괴당하던 처절하고 끔찍했던 그 지옥같은 시간을. 

설령 유경을 강제로 범한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차마 신고는 물론이고 남에게 말조차 꺼내지 못할 처지라는 것을 

현준이 처음부터 계산하고 있었을만큼 그가 영악한 인물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 남자는 그저 과도한 양의 알콜이 가져다주는 주체할 수 없는 술의 취기와 평소 유경에게 비정상적인 성욕을 

언제나 끝도없이 품어왔던 뒤틀린 소유욕, 집착, 광기와 같은 불순한 욕망들에 한데 뭉친 그 어마어마한 충동욕구

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도 미처 깨닫지못한 채 그러한 짐승같은 본능을 직접 행동으로 옮겼던 것일 터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유경은 그런 끔찍한 겁간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엄청난 사실을 결코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현준과 자신은 이미 법적으로는 남매였던 것이다.

오빠에게 겁간을 당한 여동생이라는 억울한 멍에를 쓰게되는 순간부터 그녀의 삶이 어떻게 망가질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어쩌면 자신 뿐만 아니라 윤아의 인생까지 망쳐버릴 위험이 있었다. 

밤이 지나고 수능 시험날의 아침해가 밝아오고 있었지만 유경의 방 침대 위에서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소녀의 입을 틀어막은 소리없는 흐느낌과 울음소리만이 간간히 새어나오고 있었다. 

"...당연히 수능 시험같은건 결과가 좋았을 리가 없었지. 난 끝에가서 그렇게 허무하게 학창생활을 망치고 

말았던거야. 그렇지만 중요한건 그것 뿐만이 아니었어."

그녀의 입에서 하염없이 흘러나오는 그 아픈 상처로 가득한 이야기를 듣고있던 나는 그 모든 것이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무겁고 잔혹한 한 여인의 지독하기 짝이없는 과거사가 

가져다주는 충격에 머릿 속이 아찔해져왔다. 차마 어떠한 위로의 말도 꺼낼 생각을 못하고 나는 그저 그 뒤의 

일을 물어볼 뿐이었다.

"그, 그래서요? 그 뒤엔 어떻게 됬죠?"

"...비록 내 인생은 그렇게 비틀리기 시작했지만 난 넋놓고 있을 틈이 없었어. 그대로 가만히 있다간 그 남자가

윤아에게까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생각했지. 어떻게든 내 동생만은 지켜내고 싶었거든. 

그래서... 난 결국 윤아와 함께 그 집을 나와버렸어.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둘이서 살기 시작했단 건가요?"

"맞아. 지금 생각해보면 진작에 그랬어야했었지... 난 그때까지 내 자신과 동생의 인생까지 혼자 책임지기에는 

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고, 그런 막연한 불안 때문에 선뜻 그 집을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거야.

어찌보면 한낱 어리광에 불과했었지. 하지만.... 그래, 분명 진작에 그랬어야 했어..."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은요?" 

"아마도 그 때쯤 양아버지는 상속세를 포탈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어떻게 재산을 가로챌까 한참 고민하고 

있었겠지... 조금이라도 더 늦었더라면 난 부모님이 남겨주신 재산을 손놓고 그대로 빼앗겨야 했을 거야."

마치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비련의 사정들을 낱낱이 털어놓는 유경 누나의 이야기에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는 정녕 그런 인간쓰레기들이 진실로 존재했단 말인가...

"집을 나왔다기보다는 그 남자에게서 도망쳤던거겠지. 난 미용실에 일자리를 구했고, 윤아는 고등학교에 

입학했어. 그렇게 3 년... 그럭저럭 아무 일도 없이 살아올 수 있었어."

"하지만... 그 남자는 다시 나타났단 건가요?"

"응... 겨우 잊혀질만 했는데, 어느날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일하던 미용실에 찾아왔었지. 너무 놀랐었어...

이제 간신히 다 잊고 윤아와 함께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가려 했는데 말야."

"그, 그럼... 앞으론 어떻게하실 생각이에요? 그 남자는... 도망쳤잖아요."

유경 누나를 겁간하려다 실패하고, 날 찌르고 도주한 그 남자는 분명히 지금쯤 어딘가에 숨어 잠적하고 

있을 것이다. 그 남자가 버젓이 살아있는 한 유경 누나는 절대 그 위기의 늪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비록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대로 무슨 수를 쓰지 않는 이상 유경 누나는 

계속해서 불안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글쎄... 그 남자가 내게 그런 짓을 하긴 했어도 그건 아무런 뒤탈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겠지만...

너한테 그런 상처까지 입혔으니 이제 쉽게 나타나진 못할거야... 적어도 당분간은 말이지..." 

"그래도 그 놈은... 제정신이 아니잖아요. 그럴거라고 확실히 장담할 순 없어요."

"맞아... 차차 생각해 봐야겠지..."

경찰에 신고는 고사하고 그 남자를 찾아내는 것 조차 어려운 이 상황에서 아무런 뾰족한 대책이 없는 답답한

상황에 나는 한없이 가슴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유경 누나에게 무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뭐라고해도 가장 불안하고 힘든 사람은 그녀 자신일테니까...

"그런 이야기를... 저한테 해주셔도 괜찮으세요?"

물론 나는 그 애달픈 과거의 일들을 숨김없이 모두 털어놓아준 그녀의 마음이 고마웠다.

하지만 차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 숨겨왔던 그 깊고 아픈 비탄의 상처를 겨우 나같은 놈에게 

처음으로 솔직하게 얘기해주어도 괜찮은 것인지 그녀가 걱정될 뿐이었다. 

"넌 내 은인이잖아."

그녀는 옅은 한줄기 웃음을 지었다. 비록 그 상황에 맞지않는 미소는 너무나 처연하고 가련해보였지만은...

나는 그 미소에서 그녀의 진심어린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직도 살며시 떨리고 있는 그녀의 작은 손을 나는 힘겹게 손을 뻗어 꼭 쥐어주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내가 이렇게 주제넘는 말을, 이렇게 유치한 말을 과연 그녀에게 해도 되는 것인지 자문했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꼭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내 말을 어떻게 듣건간에 상관없이...

"무슨 일 생기면... 또 구해드리러 갈게요. 아무 일 없을 거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생각하기에 내 입으로 내뱉고도 참으로 낯뜨거울 정도로 민망한 말이었는데다, 배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있는 처지에 자신있게 내뱉을 소리도 아닌 것 같았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이것이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말이라 생각했다.

"고마워..."

"그럼... 푹 쉬고 있어. 나 또 올게."

"바쁘신데 굳이 오시지 않아도 되요."

"그런 말이 어딨니...? 내일 또 올거야."

난 의자에서 일어서는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역시 마음대로 움직이기에는 아직 약간 불편했다.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발을 딯는 내 모습에

유경 누나는 당황하며 날 다시 침대에 눕히려고 했다.

"그, 그냥 누워있어. 움직이지말구."

"괜찮아요. 크게 찔린 것도 아닌데..."

사실 주머니칼의 면적이 작았기 때문에 무사헀던 것이겠지만, 찔린 상처는 그다지 깊지는 않았다. 

피를 많이 흘려 약간 어지럽긴 했어도 굳이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부모님께 연락 해야하지 않니? 병원 측에서 벌써 했을지도 모르지만..."

"글쎄요... 그래도 바로 오시지는 못할거에요. 전 부모님하고 떨어져서 혼자 살거든요."

"정말...?"

작년에 직장에서 부산으로 발령받으신 아버지를 따라 우리 가족은 전부 부산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나는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를 끝까지 다니고 싶은 마음에 여기에 홀로 남았다.

나와 떨어지기 싫으셨던 부모님께서는 어떻게든 부산의 고등학교로 날 전학시키려 했지만 

굳이 전학을 가고싶지 않았던 나는 원룸을 얻어 이른 나이에 가족으로부터 독립하고 말았다.

물론 혼자 살기 시작한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럭저럭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부산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어서 부모님도 자주 찾아오시니까.

"누난 집으로 가실거에요?"

"응. 그래야겠지..."

"괜찮으시겠어요?"

지금 이대로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이 못내 불안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그 남자... 당분간은 나타나지 못할거야. 그렇게 대범한 사람은 아니거든."

나를 칼로 찌른 그 행위는 명백한 범죄행위였고 지금이라도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나는 그 남자를 

감옥에 처넣을 수도 있었다. 물론 나는 유경 누나의 입장 때문에 잠시 보류하고 있지만은 그런 사정을

모르는 그 남자로서는 분명 앞으로 쉽게 나타나진 못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잠적하기 위해 계속해서 도주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그 남자는 제정신이 아닌 놈이기 때문에 확실히 장담은 못할 노릇이었다.

나는 어쩐지 그 남자와의 악연이 여기서 끝이 아닐 거라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윤아는 어디에있나요?"

"글쎄... 너 수술 받을때까지 옆에 있었는데... 잠시 나갔다 온다고 하더니 없어져버렸어."

"설마 그 남자를 쫓아간건 아니겠죠?"

"...아닐거야. 그렇게 무모한 애는 아니거든."

아닐거라고 말은 했지만 그녀도 자신의 동생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병실 문을 나서는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가려고 걸음을 한보 내딛는 순간 옆구리가 약간 뜨끔해왔다.

"윽."

"괘, 괜찮아? 그러게 누워 있으랬잖아..."

갑자기 옆구리를 감싸는 내 모습에 유경 누나가 놀라며 내 팔을 부축해주었다.

유경 누나의 가슴에 닿은 한쪽 팔을 통해 너무나 뭉클한 감촉이 느껴져왔다. 

나는 삽시간에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잠시 뜨끔해서... 어쨌든 나가죠."

난 유경 누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따라 병실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춰선 그녀와 나는 잠시 말이 없이 그대로 서있었다.

그 침묵을 깨고 유경 누나가 말했다.

"너하고 만날때마다 널 다치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해."

"무슨 말씀이세요. 두 번 뿐인데... 게다가 누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전 괜찮아요. 미안하단 말은 하지 마세요."

잘못도 없는 자신을 자꾸만 탓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단호한 내 말에 그녀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벨소리를 울리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다른 말을 할게."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르 열리자 그녀는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마주보고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네? 뭐가요?"

"그냥... 전부 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에 나도 그저 마주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미소짓는 내 입술에 무언가 부드러운 감촉이 살짝 닿았다 떨어져나갔다.

'....?'

맞닿았던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멀어져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방금 내 입술에 닿았던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정확히 무엇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 그럼... 나 갈게. 내일 봐."

"...."

수줍게 얼굴을 물들인 그녀가 엘리베이터 안에 몸을 싣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면서도 나는 아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서서히 닫히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만 그렇게 넋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고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겨우 손을 들어올려 

입술을 더듬어보았다. 말랑말랑하고 감미로운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녀의 입술이 맞닿았던 자리를 손끝으로 짚어보며 그 여운에 몸을 떨었다.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인과의 짧은 키스를 나누었단 사실이 아직도 실감나지 않았지만 괜스레 황홀경에 

몸이 붕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저렇게나 예쁜 애인을 둬서 너무 좋으시겠네요."

복도를 지나가던 간호사가 농담처럼 내게 말을 던졌지만 지금 내 귀에는 그 말소리조차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유경 누나가 병실을 떠나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곧이어 또 다른 한 명의 문병객이 병실에 찾아왔다.

"너 언제 깼어?"

"아까 전에."

윤아는 병실 안을 휙 둘러보고는 다시 내게 물었다.

"언니는?"

"집에 가셨어. 넌 어디있었던거야? 누나가 찾던데."

"뭐 잠깐 바람 좀 쐬고 왔어."

그러고보니 병실 한구석에 언제나 윤아가 가지고 다니는 흑단 목검이 비스듬히 세워져있었다.

그녀가 목검을 집어드는 모습을 보고있던 나는 나도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 남자가 누군지... 누나한테 들었어."

"...."

목검을 집어든 윤아는 이내 침대로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언니가 말해줬어?"

"으응."

"....그래? 그럼 아마도 처음이겠네. 언니한테 그 얘길 들은 사람은."

조금 의외라는 듯 윤아는 흑단목검의 날을 만지작거리며 선뜻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문득 더없이 순진하고 귀엽게 생겼지만 외모와는 다르게 언제나 목검을 휘두르고 다니는 이 알 수 없는 아이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왜 항상 그걸 가지고 다니는거야?"

"왜긴... 너도 봤잖아. 가끔 필요할 때가 많다구."

하긴 그녀의 실력이 없었다면 나와 유경 누나 모두가 위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 이 작은 소녀가 그렇게나 검도의 길에 빠져든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검도에 매달렸다고 들었어. 무도가가 되고 싶어서 그런거야?"

"응? 무도가?"

그 말에 그녀는 작게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거 아냐."

"....그럼?"

"언니도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지. 난 그 때 대답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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