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39)

"첫째는 우리 집에서 이렇게 깽판쳐놓은 거, 둘째는 넌 원래 살려줄 가치가 없는 쓰레기라는 거, 

셋째는... 우리 언니한테 또 그딴 지랄같은 짓을 할려고한 거. 이것만 해도 넌 충분히 사형감이야."

아담한 체구의 인형같은 얼굴의 소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굉장히 터무니 없을 정도로 맹렬한 폭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의 화자가 개미 한마리 못 죽일 것처럼 생긴 너무나 귀엽게 생긴 18세의 여고생이라는 점이 

그런 독설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현준은 여전히 능글맞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흐흐, 거친 입담은 여전한데. 하긴 난 예전부터 네 그런 성격이 맘에 들었지."

아무래도 현준은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이 소녀에 대해서는 그다지 경각심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소녀는 자신에게 어떤 물리적인 위협도 되지 않을 것임을 내심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누가봐도 그럴 것처럼 당연한 사실로 보였다.

"언니 못지않게 매력적인걸. 얼굴도 귀엽게 컸고 말야. 하지만 이걸 어쩌나? 타이밍이 조금 안좋았어."

현준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발걸음을 옮겨 서서히 윤아에게 다가오는 그 모습에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던 남학생이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야, 송윤아! 너 뭐하는거야? 당장 도망가!"

유경에 이어 윤아까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성재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지만 

윤아는 여유가 넘치는 듯한 태연한 표정으로 교복 치마 주머니를 뒤적거려 손수건을 하나 꺼내 그에게 휙 던졌다.

"시끄러워. 피나 닦아."

"....."

도대체 저 건방진 계집애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뭘 믿고 저렇게 태연자약한 것인지 성재는 갑갑해서 

목이 멜 지경이었다. 하지만 성재가 미처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이미 현준은 윤아에게 가까이 다가와있었다.

두 명 다 전혀 긴장이라고는 없이, 마치 서로 방심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여유로워보였다.

"언니 닮아서 참 매력적이란 말이야. 이거 아무래도 오늘은 언니하고 너, 둘 다 즐겨봐야겠는걸." 

"아하하! 그건 좀 무서운 얘기인데...."

윤아는 얼빠진 사람 마냥 상황에 맞지않는 웃음을 터뜨리며 턱 언저리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마치 잔상이라도 남기듯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흑단 목검이 그림자처럼 휘둘러졌다.

- 뻐억!

그 번개같은 기습을 예상하지 못한 현준은 간신히 팔을 들어막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더욱 결정적인 실수였다.

윤아는 목검을 휘두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작고 앙증맞은 발을 들어 현준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차버린 것이다.

물론 어린 여고생의 각력 자체는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급소를 허용하고만 현준은 

급히 자세를 뒤틀며 뒤로 서너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윤아는 날렵하게 그 간격을 따라붙으며 그보다

더욱 심한 엄청난 급소에 인정사정없는 발차기를 꽂아넣었다. 뒤로 몸을 빼느라 현준의 양다리 사이가 

슬쩍 벌어져버린 그 틈사이에 냉정한 발차기가 깨끗하게 꽂혀들어갔다. 

- 퍼컥.

끔찍한 소리가 한차례 울려퍼졌다.

낭심에 발차기가 꽂힌 현준은 순간 벙찐 얼굴이 되더니, 그 순간 직후부터 해일처럼 들이닥치는 엄청난 

고통의 파도에 눈을 부릅뜨며 입을 크게 벌렸다. 신음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한계를 넘어선 극도의 고통은 

성대의 자유마저 빼앗아가 버렸다.

"뭘 그렇게 놀래? 이거 내 필살긴데."

앞에서 상대한 계단에서의 사내에게와 마찬가지로 사내의 치명적인 급소인 사타구니 낭심을 서슴지 않고 

깨끗한 킥으로 가격한 윤아는, 앞의 그 사내처럼 역시나 입을 쩍 벌린채 부들부들 떨며 무너져가는 

현준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낭심을 두 손으로 감싸쥔 채 정신이 혼미해지는 고통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현준의 고개 숙인 목 뒷덜미를 윤아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흑단 목검으로 무자비하게 내려찍어버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현준의 몸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맥없이 바닥에 그대로 볼썽사납게 엎어져버렸다.

사타구니를 힘껏 걷어채인 고통만 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인데 거기에다가 추가로 묵중한 중량의 

흑단목검으로 목 뒷덜미를 내려찍힌 그 잔인한 데미지에 온전히 버텨낼 수 있는 '남자'는 없었다. 

그렇게 앞의 계단에서의 사내에 이어 현준까지도 무지막지하게 잠재워버린 윤아는 잠시 낭심을 감싸쥔 자세 

그대로 혼절해버린 현준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다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곧 작은 발로 자근자근 

그 등을 밟아대기 시작했다.

"....."

그 졸도할만큼 경악스런 광경에 성재는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괴, 괴물이다...'

마룻바닥에 처참하게 쓰러져버린 째진 눈의 남자를 한참동안이나 지근지근 밟은 윤아는 

그 놈이 거의 넝마처럼 후줄근한 꼴이 되고나서야 겨우 발길질을 멈추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놈은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린 듯 혼수상태에 빠져 바닥에 쓰러진 채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휴... 암만 패줘도 속이 안풀리네."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거리는 그 모습에 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저 인형같이 깜찍하게 생긴, 성격이 좀 건방지긴 하지만 그래도 약간 특이한 정도의 여자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히 깡패잖아!'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 째진 눈의 남자에게 영락없이 당하는 줄 알고 가슴이 오그라드는 공포를 느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째진 눈의 남자가 혹시 죽은건 아닌지 염려를 해야할 지경이었다.

나는 이 위기를 심하게 극적인 모습으로 구해준 눈 앞의 소녀에게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이 어처구니없고, 현실과 지독할 정도로 동떨어져 보이는 눈 앞의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서 

가만히 쩍 굳어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이 정도로 외모랑 행동에서 극과 극이 느껴지는 비현실적이고 난폭한 소녀가 있을수 있는거지?

발차기로 남자의 거시기를 사정없이 까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뒤통수를 목검으로 후려치고 

마무리는 현란한 짓밟기...

과연 이게 정말 18 세의 여고생이 저지른 짓이란 말인가? 그것도 저렇게 귀엽게 생긴 애가? 

"근데 넌 괜찮은거야?"

윤아는 패닉에 빠진 날 돌아보며 심드렁하게 한마디 던졌다. 평소의 나같았으면 나이도 한살이나 어린게 어디서

반말이냐고 떽떽거렸겠지만, 지금의 나는 차마 그런 소릴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어설프게 고개만 

끄덕여야했다.

"어... 괘, 괜찮아."

"넌 어떻게 안 끼는데가 없는 것 같아? 허구헌날 자꾸 마주쳐."

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곧 이쪽으로 다가와서 아까 던진 손수건을 집어들더니 온 몸에 기력이 빠져

뻗어있는 내 눈가의 피를 슥슥 닦아내주었다.

"그래도 고마워."

"으, 응?"

"언니 구해줘서. 덕분에 언니가 무사했잖아."

눈 언저리의 상처를 닦아내는 그 따가움에 살짝 인상이 찡그려졌지만 나는 그저 가만히 누워있을 뿐이었다. 

아직도 실감은 나지 않지만... 아마 이 아이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피떡이 되어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난 내 스스로의 무모함에 새삼 놀라고 말았다. 대체 무슨 깡으로 이렇게 뛰어든 것이었을까?

'말로만 듣던 사랑의 힘인가?'

속으로 그런 닭살이 돋는 유치하기 짝이없는 생각이나 떠올리며 긴장이 풀린 몸을 대자로 바닥에 눕힌 

내게 윤아가 질문을 이어왔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알고 언니 구해주러 온거야?"

"그, 그건..."

말하자면 상당히 복잡하고 뻘쭘한 일이었기 때문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현관문이 덜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집 안으로 다급히 뛰어들어왔다.

윤아와 내가 동시에 그 쪽을 돌아보니 숨을 헐떡이고 있는 유경 누나였다.

"언니, 밖에서 쉬고 있으라 그랬잖아. 왜 들어왔어?"

"유, 윤아야. 그렇게 갑자기 혼자 가버리면 어떡해!"

윤아를 발견한 그녀는 하얗게 질린 창백한 얼굴로 주위를 불안하게 둘러보았다.

동생이 걱정되어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이 집안 어딘가에 아직 그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볼썽사나운 자세로

혼절해 쓰러져있는 그 놈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된거야?"

"뭐, 보는대로야. 상황 정리됐어."

어깨를 으쓱이며 길다란 흑단목검 끝으로 쓰러진 놈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윤아.

어떻게 된 것인지는 잘 이해가 안되는 듯 했지만 어쨌든 정신을 잃은 그 남자와 무사한 동생의 모습을 

확인하니 어느정도 안도가 되었는지 누나는 일순 무리하게 움직인 다리에 다시 긴장이 풀려 쓰러지려는 것을 

간신히 벽을 잡고 지탱했다. 그리고 곧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는 날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달려왔다.

"괘, 괜찮아?"

"네... 괜찮아요 전."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던 나는 힘없이 괜찮다고 대꾸했지만 유경 누나는 내 눈 언저리에서 아직도 흐르는 

핏방울을 보고는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내 긁힌 상처보다는 블라우스가 갈가리 찢겨진채 

앞섬이 끊어질 듯 말듯 아슬아슬한 속옷을 겨우 걸친 채로 새하얀 살결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안쓰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유경 누나가 더 걱정되었다.

"많이 다쳤어?"

"별 거 아니에요. 누나는 다친데 없어요?"

"난 괜찮아... 네 덕분에..."

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하는 유경 누나에게 반팔 위에 걸치고 있던 내 조끼 후드를 벗어 건네주었다.

"일단 이거라도 입으세요."

"으응?"

"그거... 앞에."

차마 직접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서 나는 내 가슴팍을 톡톡 두드렸다.

그제야 유경 누나는 자신의 종이조각처럼 찢어발겨진 블라우스를 내려다보고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난 좌우로 뜯어진 블라우스의 천을 여미는 그녀에게 힘겹게 몸을 일으켜 직접 조끼를 덮어주었다.

"고,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정말 어떻게 됬을지..." 

"뭐 다행이죠.."

"그러게 내가 집에 온다는걸 왜 마중나온다고 해가지구... 그냥 안에 있지 그랬어, 언니."

윤아가 분이 풀리지 않는듯 연신 씩씩거리며 유경 누나에게 다가왔다.

"윤아야, 넌 다친데 없어? 걱정했잖아... 갑자기 뛰어가버려서."

"걱정은 무슨... 설마 내가 이런 변태놈에게 다칠려구."

윤아는 흑단 목검으로 괜시리 다시 한번 쓰러져있는 째진 눈의 남자를 쿡 쑤셨다.

난 아직도 이 비현실적인 소녀의 모습에 도저히 적응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이 놈을 이제 어떡하지?"

윤아의 물음에 유경 누나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잘 힘이 들어가지 않는 상체를 겨우 일으키며 누나에게 말했다.

"경찰에... 신고하는게 좋지 않아요?"

"....."

무슨 이유에선지 유경 누나는 나의 물음에 그저 안색을 굳힌 채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바닥에 쓰러져있는 그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어우, 저 자식 진짜 왜 또 나타나가지고! 정말 지긋지긋해."

윤아는 씩씩거리며 투덜거렸고 나는 마루에 쓰러져있을 그 째진 눈의 남자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눈이 야구공만큼 크게 부릅떠졌다.

"야! 피해!"

나는 윤아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뒤에서 그 놈이 어느새 정신을 차린 것인지

부스스 몸을 일으켜 윤아에게 달려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윤아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순간 내 말을 이해했는지 급히 뒤를 돌아보려했다.

하지만 이미 남자는 몸을 날려 윤아에게 달려들어오고 있었다. 

유경 누나의 짧은 비명소리를 들으며 나는 반 탈진한 몸을 날려 윤아를 몸으로 밀쳐내었다.

나와 윤아의 몸이 뒤섞여 마룻 바닥을 구르며 아슬아슬하게 그 놈이 날린 주먹을 가까스로 피해낼 수 있었다. 

윤아는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흑단목검을 쥐어들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게...! 골로 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윤아는 다음 순간, 그 놈이 오른손에 들어올리는 물건을 보고는 눈쌀을 크게 찌푸렸다.

놈이 은색 빛이 반짝이는 그 주머니칼을 들어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친 놈!"

나는 여자아이를 상대하면서 칼을 꺼내드는 그 미치광이같은 놈의 모습에 버럭 고함을 질렀다.

비열한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어떻게 칼을 꺼내들 생각을 할 수 있는거지? 그것도 여자를 상대로!

놈은 짐승처럼 눈을 번득거리며 주머니칼을 단단히 꼬나쥐고 서서히 걸음을 떼고 있었다.

분명 제정신이 아닌 듯한 모습이었다. 그 놈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득달같이 이쪽으로 달려들어왔다.

윤아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흑단 목검을 들어올렸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놈은 윤아를 상대하지 않고

싸울 태세를 하고있는 그녀를 곧바로 휙 지나쳐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현관문을 향해서 달려가버리는 그 모습에 나는 그제야 놈이 밖으로 도망쳐나가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굳이 그 도주를 저지할 생각을 하지는 못했지만 내 위치는 이미 현관문으로 통하는 길목에

누워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몸을 일으키던 나는 스스로 미처 인식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그 앞을 막아서고 

말았다.

"비켜, 이 새끼야!"

놈은 광폭하게 소리지르며 손에 들고있는 주머니칼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물론 그것은 결코 찌를 생각은 없는 단순한 위협용 움직임이었겠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자리에서 간신히 일어서긴 

했어도 이미 탈진상태였던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위협용으로 대충 휘두르는 놈의 손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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