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39)

".....가 줘. 그리고 다시는 오지마."

'ㄱ' 자 모양으로 되어있는 골목길의 입구 부근에 서있었던 나는 휘어진 골목 안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져서 굽이진 부분 끝자락에 서서 골목 안을 흘끗 들여다보았다.

물론 언제라도 자연스럽게 길을 걷던 사람 행세를 할 준비를 하고.

"하하,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하는거 아니야?"

"서로 보는 일 이제 없었으면 좋겠어."

남자의 목소리와 여인의 목소리가 섞여나오고 있었다.

벽에 기대고 고개만 빼꼼 내밀어 흘끗 그 남녀가 누구인지 확인한 순간, 내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그녀잖아?'

남녀의 목소리 중 여인의 것은 다름아닌 바로 내가 찾던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몸을 감추고있는 방향에서 반대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있었지만 그 뒷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매정하구만. 난 자주 보고 싶은데 말이야."

"다시는 오지마. 여기 내가 일하는 곳이야."

그것은 분명 내가 알고있는 그녀의 그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내가 들었던 

그 사근사근하고 친절한 목소리가 아니라 냉정하고 차가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무뚝뚝한

음성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일종의 냉랭한 한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들키지않게 조심해서 이번엔 남자 쪽을 살펴보았다.

도대체 저 남자는 누구길래 그녀에게서 저런 차가운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일까?

"나도 니가 일하는 곳까지 찾아오고 싶진 않았어. 얼굴 보기가 워낙 힘들지만 않았어도 안 그랬을걸?

가끔 집에 좀 들어오지 그래?" 

"상관 마. 내 집은 이제 따로 있어."

"그래, 가출했다 이거야? 그렇담 내가 오빠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 안그래?" 

굽이진 골목 입구 쪽에서 몸을 숨기고 그 대화를 엿듣던 나는 순간 놀란 나머지 그 남자를 보기 위해

나도모르게 골목 안쪽으로 튀어나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오빠, 분명히 오빠라고 말했다. 그녀의...?

"그렇게 뻔뻔한 소릴 하면서...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지?"

"크큭, 내가 틀린 말 한건 아니지 않나?"

"나쁜 자식..."

그녀의 냉랭한 목소리에 은은한 분노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화낼 것 같지 않던 천사같은 그녀가 그렇게 분노하는 모습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잠시 주저하다가, 이내 매몰차게 몸을 홱 돌렸다.

"당장 가버려. 다신 나타나지 마. 특히 윤아 앞에는 절대로."

"하핫, 그러고보니 우리 귀여운 막내 동생이 있었지. 그 애는 요즘 어때? 너만큼 이쁘게 컸나?"

"경고했어. 내 동생 앞에 절대 나타나지 마! 가만 두지 않을테니까."

듣는 사람이 다 오싹해질 정도로 차갑게 쏘아붙인 그녀는 등을 돌리고는 찬바람이 불 정도의 빠른 걸음으로 

골목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 바람에 하염없이 그 대화를 엿듣고 있던 나는 갑자기 그녀가 이쪽으로 다가오자

심장이 떨어질 것처럼 놀라 잠시 엄청나게 당황했다. 

원래 계획대로 골목 반대편으로 지나가는 사람인 척 하며 빠져나가려고해도 그녀와 마주친다면 그녀가 

날 알아볼 수도 있었다. 애초에 말소리를 엿듣기 전엔 골목 안쪽의 사람이 그녀임에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생각을 고쳐먹고는 골목 반대편 대신 내가 들어왔던 골목 입구로 냅다 잽싸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그녀가 'ㄱ' 자의 골목 굽이를 돌기 전에 입구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휴우... 간 떨어질 뻔 했네.'

입구로 빠져나와 미용실 옆 건물 쪽으로 몸을 숨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 순간, 그녀가 내가 나온 골목 입구에서 걸어나왔다.

그녀는 표정이 차갑게 굳어진 채, 재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미용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많이 화났나보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너무너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또 바로 그 다음 순간, 골목 안에서 이번엔 그 남자가 걸어나왔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남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찢어진 청바지에 구겨진 티셔츠를 대충 걸쳐입은, 째진 눈이 조금은 날카롭게 생긴 인상의 남자였다.

나이는 20대 중후반 쯤 될까... 솔직히 전체적으로 기분 나쁘게 생긴 남자였다.

난 미용실 옆 건물 대리석 안쪽에 기대어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 남자가 킬킬 웃으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흐,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구만."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그녀의 미용실을 한번 쓱 돌아보더니 킥킥 웃으며 

길거리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의 인파 속에 섞여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나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어쩐지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느낌에 인상을 찡그렸다.

저 남자... 어쩐지 더럽게 재수없는 느낌이다.

무더운 한여름의 더위가 식을 줄을 모르는 7 월의 중순. 어느새 여름방학이 찾아왔지만 고3 수험생인 

우리에게 있어 방학이란 그저 부족한 과목을 따라잡기 위해 더욱 처절히 노력해야하는 힘든 시간일 뿐이었다.

학교에선 보충수업이란 명목으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수업을 계속 진행했고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학교 마치는 시간이 약간 일찍 당겨졌다곤 하지만 그 이후엔 독서실이니 뭐니 해서 그저 정해진 루트를

기계처럼 뱅글뱅글 돌기만하는 무미건조하고 힘겨운 일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휴가나 피서, 지금 우리에겐 전혀 다른 세상의 얘기였다. 

하지만 그런 괴로운 나날들도 수능이 가까이 임박한 이 시점에서는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분명 달력의 D- day가 엊그제 볼 때와는 달리 순식간에 10 자리 단위로 확확 줄어들어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느새 3 주 정도의 시간이 유수처럼 흘렀다. 

20 일이 조금 넘는 애매한 기간. 나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 길이를 이리저리 재어보았다.

머리는 신기할 정도로 빨리 자라는 편이었다. 어디선가 야한 상상을 많이하면 머리가 빨리 자란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게 사실인걸까? 

'....좋아.'

6시를 가르키는 시계바늘과 함께 자습시간의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나는 마음을 굳혔다.

드디어 오늘, 그녀를 만나러 가는 거다.

기다리기 힘들 정도로 길게 느껴졌던 지루한 시간이었다. 

이 삭막하게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요즘 내 마음 속에 신선한 작은 활력소 하나가 생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루 빨리 그녀를 만나러 미용실에 가고 싶다는 그 기대감 하나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방학 보충수업 중의 야간자율학습은 말 그대로 자율이었다.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안하고 싶은 사람은 안하는 것. 물론 안할 경우 담임의 따가운 눈총이 쏟아지기도 했고 고3 수험생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자습을 하긴 했지만 학교에서 강제적으로 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덕분에 6 시까지의 정규수업과 같은 보충수업과 필수 자습시간만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

마음을 굳힌 나는 오늘 모처럼 야자는 물론이고 독서실에 가는 것까지 생략하고 서둘러서 바로 집에 돌아와 

이것저것 멋을 내기 시작했다. 머리 손보러 가는 미용실에 가면서 머리에 멋 부리고 가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이상한 놈처럼 느껴졌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꾸미고 옷까지 이쁘게 차려입고는 단단히 준비를 했다.

마치 고2 때 친구들과 미팅 나갈때 차려입었던 것처럼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준비를 마친 나는

벌써부터 두근두근 떨려오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집을 나섰다.

"어서 오세요."

ML 헤어라인의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카운터에 서 있던 여성 직원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손님용 쇼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직원이 물었다.

"찾으시는 디자이너가 있으신가요?"

평소라면 이 질문을 받았을 때 고개를 저었겠지만, 오늘은 조금 경우가 달랐다.

나는 내 쪽에서 먼저 누군가를 지목한다는 것이 어쩐지 쑥스러워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용기를 내서

지갑에서 유경 누나의 명함을 꺼내들어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이 누나요."

나는 결코 흑심이 있어서 이 누나를 찾는게 아니에요, 라고 말하듯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말하려고 했지만

어쩐지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여직원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쭈욱 길게 늘어진 의자들을 

가로질러 직원실 문으로 걸어갔다.

"유경 씨. 호출이네요."

"....네?"

직원실 안쪽에서 아름다운 음율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왠지모르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누가 절 찾으세요?"

"호호, 유경 씨 찾는 손님이 어디 한둘인가."

역시나 이 미용실에 오는 고객들 가운데 그녀를 찾는 남자들이 많은 것 같다.

나는 내 자신도 전혀 다를 바 없이 그런 사내놈들 가운데 하나라는 걸 스스로 알고있으면서도 

그런 부류와 같은 손님으로 인식되었나 싶어 어쩐지 이유없이 찝찝해졌다.

"저 쪽 손님."

여직원이 내가 앉은 쇼파를 가르켰고 곧 직원실 안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천사같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근 3 주 만에 보게되는 그 매혹적인 자태에 얼이 빠진 것처럼 그녀를 넋놓고 바라보았다.

그녀도 직원에 안내에 내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고는, 그 순간 서로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더니 잠시 후, 그 예쁜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는 그녀. 

먼저 인사라도 해야하는건가 싶어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어색하게 앉아있는 나.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혹시 안 오시는건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너무 늦게 오셨네요?"

"하하.. 그럴리가요."

어깨에 가운을 둘러주며 살짝 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은 이 3주라는 시간 동안 내가 매일마다

애타게 떠올렸던 그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게나 다시 보고 싶었던 그 미소를 마침내 눈 앞에서 

마주 대하고 있으니 기대감으로 떨려오던 가슴이 이젠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혹시나 만남이 어색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내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자연스럽게 날 맞이해주었다.

"후훗, 오시나 안오시나 매일 살펴봤는데 도통 안 오시더라구요."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한 그녀의 말에 심장이 두방망이질쳤다.

물론 그녀가 내가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만, 나를 특별히 신경쓰고 

있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좀 바쁘게 살고 있어서요. 하하."

"아.. 그러고보니 고3 이셨죠? 많이 힘드실 것 같네요."

내 머리카락 길이를 이리저리 재보던 그녀는 문득 내 어깨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 때 다친덴 좀 어떠세요?"

"네? 아아, 이거..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때 떨어진 목검에 얻어맞고 다친 어깨. 3 주 정도가 지난 지금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그 당시의 일이 다시 떠올라 나도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너무 죄송해서 자꾸 신경이 쓰였는데.. 별 탈은 없으셨어요?"

"그럼요."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무척 착해보였다.

그리고 한편으론 그 착한 성격과는 극명하게 대조적인 그녀의 시건방진 동생이 순간 떠올랐다.

"참, 그러고보니... 동생이랑 만난 적이 있어요." 

"아, 들었어요. 얼마 전에 윤아가 제게 얘기해주던걸요."

"네? 그 애가요?"

"청소하다 만났다고 그러던데요?" 

난 그 윤아란 아이가 언니에게 나에 대한 말을 했을거란 생각은 못했기에 조금 불안해졌다.

혹시 어떤 안좋은 말이라도 늘어놓은건 아니겠지?

"하하, 저보고 뭐라 그러던가요?"

"글쎄요.. 약간 귀엽고 밉살스런 남자라던가?"

"....."

귀엽고 밉살스럽다니.... 도대체 그 애매한 평가는 뭐지?

시건방진 녀석, 이왕이면 좋은 말만 좀 해줄 것이지. 그리고 귀엽다는건 또 뭐야? 

"후훗, 제 동생이 좀 철이 없는 성격이지만 나쁜 애는 아니에요. 이쁘게 봐주세요."

"하하.. 물론이죠."

솔직히 그 애가 생긴건 이쁘긴 하지만.

훗, 그래도 이렇게 자기 언니처럼 성격까지 착하면 얼마나 좋아? 

"공부는 잘 되세요?"

"2학년 때 까진 놀다가 올해들어 공부 시작했는데 쉽지는 않네요, 하하."

"힘내시고 열심히하세요. 그러고보니 수능이 얼마 안남았죠?"

"네, 좀 있으면 50 일이에요." 

"저도 고등학교 다닐 때 날짜 수 세보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후훗.."

그녀의 고등학교 시절이라... 

문득 그녀가 여고생일 때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교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 무지무지 이뻤을 거야, 분명. 흐흐.

"뭐, 결과는 별로 안좋았지만요..."

"네?"

그녀는 들릴락 말락하는 조그마한 중얼거림과 함께 옅은 쓴웃음을 지었다.

난 혹시 그녀가 고3 시절 수능을 잘 못 보기라도 한건가 싶어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과가 안좋으셨어요?"

"네... 사실 그 때 좀 힘든 일도 있었고... 사정이 별로 안 좋았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왠지모를 우울함이 언뜻 스쳐지나감을 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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