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는 그녀 생각에 그저 아무 생각없이 교실에서 튀어나간 것인데...
주말 내내 신경도 안쓰고 있었건만 설마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그녀의 명함 덕분에 한없이 상승세를 타던 기분이 순간 난데없이 봉착한 이 전혀 예상못한 난관에
한풀 꺾이고 말았다. 나는 그저 두려운 마음으로 앞으로 곧 다가올 담임의 징계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아픈 것은 둘째치더라도, 거의 팔뚝만한 굵기의 몽둥이로, 게다가 머리를, 그것도 노처녀 담임에게
툭툭 얻어맞는 것은 어떻게봐도 썩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상을 험악하게 굳힌 채 몽둥이로 연신 머리를 목탁 두드리듯 딱딱 내려치는 그 모습에서 학생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모습 따위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 모습이 내가 애초에 예상했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기분이 더러워졌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는 않겠지."
"...예."
북 두드리듯 회초리로 머리를 딱딱 내려치며 묻는 담임의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수그리는
내 신세가 참 처량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냐?"
"아니요."
"그럼 간덩이가 부었냐?"
"아니요."
"대학 포기했냐?"
"아니요."
제기랄, 어지간하면 몽둥이 좀 치우고 얘기하지.
말을 하는 도중에도 매를 내려치는 손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담임.
얼굴이 못 생겼으면 성격이라도 고와야 시집을 가던 말던 할 것 아닌가.
'그러니까 맞선을 30번 봐도 전부 딱지를 맞지.'
이렇게 한마디 쏘아붙여주지 못하는 내 불쌍한 신세라니.
어찌됬건 담임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 체벌도 없이 풀려날 거라는 기적은 애시당초 기대조차 하기
무리인 듯 싶었다. 벌을 내리든 말든 나는 그저 어서 이 매질이나 끝내주길 간절히 바랬다.
'역시... 세상엔 그 누나처럼 천사같은 여자도 있는 반면 이렇게 조물주의 실패작 같은 여자도 있는 법이지.'
극과 극을 달리는 비교. 아니, 이건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노처녀 담임과 그 누나를 비교한다는 것은 그 누나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 누나의 발끝 만큼만 닮았어봐라, 시집을 가도 진작에 갔지.
"무슨 딴 생각을 하는거야? 내 말이 우습냐!?"
버럭 소리를 지르는 노처녀 담임의 성화에 나는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다시 한번 매로 머리를 내려치려는 담임의 모습에 나는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하늘이 날 도운 것일까.
"이 선생! 잠시 그 학생 좀 빌려주게."
구원의 손길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의외의 인물에게서 뻗어나왔다.
그곳을 마침 지나가던 머리가 훤히 벗겨진 중년의 학생주임이 노처녀 담임을 부른 것이다.
대머리가 유난히 반짝이는 나이 50대의 학생주임은 손가락으로 날 가르키며 담임에게 말했다.
"특별구역 청소 인원이 필요한데 이 녀석 좀 잠시 데려가지."
"...."
담임은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날 돌아보고는 거의 으르렁거리듯이 낮게 한마디 내뱉았다.
"운 좋은 줄 알아."
"...."
이거 빨랑 졸업하던가 해야지... 더러워서 학교 생활 하겠나, 원.
어쨌든 운이 좋다면 상당히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렴 노처녀 담임에게 계속 깨지는 것 보다야 차라리 대충 청소를 하는 편이 나으리라.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학생주임의 뒤를 쫓아 교무실을 나서려는데, 앞서 걷던 주임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화단 쪽을 청소해야겠는데, 혼자서는 좀 넓으니까 한명 더 붙여주마."
"아, 네."
별 것 아닌 배려였지만 노처녀 담임에게 쉴 새 없이 깨지고 있었던 나로서는 학생주임의 그런 사소한 배려가
심지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주임은 교무실 내에 어디 또 데려다 쓸만한 인력이 없는지 잠시 살펴보더니 인문반 담임석 방향으로 걸어갔다.
"장 선생! 거기 그 학생 좀 잠시 데려다쓰겠네."
그 시간, 한편 교무실의 한쪽에서는 또 다른 양상의 국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송윤아. 내가 대체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겠니?"
문과반 2학년 2반의 담임 장선주 선생은 인내심이 많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교사 경력 10년만에 처음으로 접하는 이 어이없는 초유의 사태에도
비교적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는 참으로 난감할 뿐이었다.
10년간의 어느정도 되는 교사 기간 동안 꽤 많은 경험을 쌓은 그녀였지만 이런 경우는 경험하기는 커녕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한 경우였기 때문이었다.
"헤헤, 그냥 한번 봐주시면 안되나요?"
게다가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당당히 말하는 여학생의 태도는 장선주 선생을
더욱 허탈하게 만들고 있었다.
"윤아야, 나도 담임을 몇번 해봤지만 이런 경우는 듣도보도 못했단다.
세상에 선배를 두들겨패서 양호실로 보내는 후배가 어디있니? 그것도 여학생이..."
"헤.. 그게 어쩌다보니.."
사태의 심각성 따윈 전혀 모르겠다는 듯 배시시 귀엽게 웃는 여학생의 이름은 송윤아.
몇일 전 남학생 3학년 선배를 인정사정없이 후드려패서 양호실로 보내버린 경악할 만한 사건으로
순식간에 2학년 2반의 요주의 골칫거리로 당당히 등극한 무지막지한 여학생.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장선주 선생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인형같이 귀엽고 순진하게 생긴 여자 아이가 남학생을, 그것도 선배를,
그것도 목검으로 무식하게 두들겨팼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지금 자신의 눈 앞에서 헤헤 웃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그런 폭력적인 모습과는 정말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보였다. 개미 한마리 못 죽일 것 처럼 깜찍하고 순수해보이기만 했다.
그러나 문제는 윤아가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데에 있었다. 너무나 당당히 말이다.
"그치만 선생님, 그 선배가 잘못한 거라구요. 몇날 몇일을 밤낮으로 쫓아다니면서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걸요.
스토커로 신고할까 하다가 그냥 몇 대 때린 거에서 그친 거에요. 헤헤~"
"....."
'잘했죠?' 라는 듯한 표정으로 방긋 웃는 윤아의 모습에 장선주 선생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웃는 얼굴이 침 못뱉듯이, 학생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오히려 더 난감해진다.
그렇게 장 선생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한숨만 쉬고 있는데, 때마침 학생주임이 멀리서 그녀를 불렀다.
"장 선생! 거기 그 학생 좀 잠시 데려다쓰겠네."
"네? 무슨 일이시죠, 주임 선생님?"
"화단 청소하는데 한명 더 필요해서 말일세. 바쁜 일 없으면 그 학생 좀 잠시 빌려가지."
장선주 선생은 잠시 윤아와 학생주임의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다시금 한숨을 연거푸 쉬고는 윤아에게 손짓했다.
일단 자신도 잠시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가보렴."
"우... 청소하기 싫은데에..."
윤아는 그러는 와중에도 울상을 지으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나와 함께 귀찮은 화단 청소의 임무를 부여받게 될 타이밍 안좋은 인물이 과연 누구일지 답은 금방 나왔다.
처음 주임이 2학년 담임석에서 학생을 데려오길래 속으로 쾌재를 불렀었다.
어쩌면 그 운 없는 2학년 후배에게 거의 다 맡겨놓고 나는 대충 쉬엄쉬엄 넘어갈 수 있을거란
약삭빠른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임이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여학생'을 데려옴으로써 나는 그 생각을 조금 수정해야했다.
아무리그래도 여후배에게 짬밥 내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둘이서 별관 뒤뜰의 화단 좀 청소해라. 봉사시간 점수 가산시켜주마."
"네."
"으... 청소 싫은데..."
나야 원래 담임에게 한창 깨지다가 탈출하듯 풀려나온 것이니 별로 불만이 없었지만
그 여학생은 학생주임의 뒤를 따라오면서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닌지 연신 투덜거리고 있었다.
발걸음도 질질 끄는 모습이 퍽이나 애처로워 보였다.
여학생과 둘이서만 청소를 한다는 것은 비록 좀 귀찮긴 하겠지만 어찌보면 나름대로 꽤 괜찮을 것이다.
아무렴 칙칙한 남자 녀석이랑 하는 것 보다야 나을테지.
나는 슬쩍 특기인 곁눈질로 그 후배 여학생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조그맣고 동글동글한 얼굴에 초롱초롱 맑고 큰 눈. 마치 인형을 연상시키듯 귀엽고 앙증맞은 외모.
아담한 키에 포니테일 스타일의 묶어내린 생머리.
'...엥?'
순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곁눈질로 살펴봐야한다는 것도 잊고는 다시 한번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다.
아니, 본 것 같은게 아니라 분명히 본 얼굴이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말이다.
나는 순간 목구멍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경악성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어라?"
그 여학생도 내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날 마주보다가 허공에서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는 자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린 그렇게 잠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힘겹게 침묵을 깨고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넌, 어제 그..."
'그 누나 동생...' 이라고 말하려고 했건만, 그 여학생은 도중에 내 말허리를 무참하게 끊어먹고 말았다.
"아! 어제 그 칠칠맞은 남자!"
날 가리키며 소리치는 여학생...
"이 콩만한게 누구더러 칠칠맞은 남자래!"
나는 순간 울컥해서 그렇게 맞받아치고 말았다.
대충대충 청소를 하겠다는 내 계획은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남으로써 애시당초 박살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변수라는 것이 얼마나 거대한 것이었던지, 오히려 지금 나는 죽을둥 살둥 빗자루를 쓸고 있는 중이다.
"야, 너 청소 안해?"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화단을 쓸던 빗자루를 잠시 멈추고는 돌계단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곳엔 내 파트너랍시고 당첨된 여학생 후배가 빗자루를 손에 쥐기만한채 나몰라라 걸터앉아 있었다.
그 건방진 꼬맹이 후배는 이런 내 질문에 봄날 햇살처럼 화사한 미소를 방긋 지으며 말했다.
"더워서 싫어."
"...."
젠장, 그럼 나는 지금 추워서 청소하고있냐?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신경질적으로 화단 돌층계를 빗자루로 틱틱 쓸었다.
청소 시작하고나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않고 돌계단에 앉아만 있는 저 건방진 꼬맹이를 한대 쥐어박기라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나는 애써 꾹꾹 눌러참았다.
물론 생긴건 귀엽게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후, 그 누나 동생만 아니었어도 진짜 콱!'
문제는 저 꼬맹이가 그 누나의 동생이라는 점이었다. 만약 저 꼬맹이에게 잘못 보여서 저 녀석이 자기 언니에게
나에 대한 안좋은 말을 늘어놓는다면 그건 정말 참담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네 언니 봐서 내가 참는다, 참어. 에휴.'
나는 끝없이 궁시렁거리며 속으로 그 유경 누나와 저기 퍼질러 앉아있는 윤아라는 아이에 대해 비교해보았다.
둘은 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신비할 정도로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보였다.
언니와 동생 양쪽 다 아직 나와 서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이긴 했지만 이건 더 두고볼 것도 없이
확실한 사실임에 틀림없었다. 자매라는 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뭐... 이쁜 여자라는 건 공통점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저 윤아라는 아이와 그 언니와의 유사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쁘다는 것,
그것 하나 뿐이었다. 하긴, 언니가 그렇게나 아름다운데 그 동생이 못 생겼을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더 자세히 뜯어보면 심지어 그 '아름다움'에서조차도 둘은 각각의 분명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언니 쪽은 이 세상 어떤 남자가 보더라도 가슴이 두근거릴만큼 매혹적인 매력을 가졌다.
그것은 한가지의 매력만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움이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세련미라던지 성숙미라던지
그런 한 단어로 꼬집어서 나타내기가 불가능했지만, 그러한 다양한 매력들이 한데 모여있다는 바로 그 점이
그녀의 가장 강력한 매력이었다. 남자들에게는 제각기 서로 다른 다양한 여자취향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녀라면 남자가 어떤 취향을 갖고있던지간에 상관없이 모조리 매료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 동생 쪽은 누가 보더라도 첫눈에 바로 '귀엽다' 라는 인식을 심어줄만큼 깜찍하게 생겼다.
마치 인형을 보는 듯한 그 귀여운 외모는 남자에게 어필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만 했다.
귀여운 여자를 좋아하는 남성들의 눈에 이 윤아라는 아이는 더없이 매력적인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언니 쪽의 매력은 딱히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그런 겹쳐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한다면,
동생 쪽은 그 매력을 귀여움이라는 한 마디로 가장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둘의 차이점이라 부를 만 했다.
누가 더 이쁘냐 라는 질문은 둘째치더라도 그렇게 그 둘은 성격과 매력에서도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뭐 그건 둘 다 이쁘니까 그렇다고 쳐. 그런데 왜 성격은 저렇게 다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