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39)

자꾸만 머릿 속에 아른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는 사이건만 그 아름다운 얼굴은 왜 이렇게 선명히 떠오르는지 참.

머리 자르는걸 싫어하는 나였지만 지금만큼은 또 자르러 가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머리카락을 자르는게 목적은 아니지만 말이다.

"휴.. 운동이나 하고 와야겠다."

도저히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고 이럴 때 더 앉아있어봐야 제대로 될 리도 없었다.

거기다 하늘의 계시인지, 마침 딱 때맞춰 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철호라는 친한 친구 녀석이었다.

[여보세요.]

[야, 조성재! 농구 한 겜 어때.]

[새끼.. 타이밍 한번 죽이네.]

철호 녀석과의 짧은 통화를 마치고, 난 생각할 것도 없이 대충 옷을 걸치고 집 밖으로 나왔다.

"야, 너 머리 잘랐냐?"

운동장에서 날 보고 철호 녀석이 대뜸 내뱉은 첫 마디가 그것이었다.

"어."

"머리 자르는거 싫어하는 놈이 웬일이냐? 너 근데 어제 야자는 왜 튄거야?"

"......"

머리 자르느라 야자 튀었다고 대답하면 이 놈이 어떤 표정이 될까?

난 대충 얼버무리고는 운동장에 모인 대여섯 명의 친구들과 편을 나누어 

뜨거운 뙤약볕 속에서도 죽어라고 농구 코트 위를 뛰어다녔다.

하지만 역시 기온이 오를대로 오른 무더위의 태양열 때문에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다들 그늘진 곳에

퍼질러앉아 음료수나 들이키는 꼴이 되고 말았다.

"헉, 허억, 제길, 더럽게 덥구만."

"후우, 이 날씨에 농구 하는건 미친 짓이라고."

다들 그늘진 스탠드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는데 그 와중에 철호 녀석이 내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성재 너, 그 소문 들었냐?"

"...뭔 소문?"

10초도 안되서 금새 텅 비어버린 포카리 캔을 구겨서 멀찍이 떨어진 쓰레기통에 던져넣어버렸다.

철호 역시 캔을 집어던지며 투덜거리는 듯한 인상으로 말을 이었다.

"태진이 녀석 알지? 유태진."

유태진. 절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 꽤 알고 지내는 친구 녀석이다.

"그 녀석이 왜?"

" 얼마 전에 뒈지게 맞았다더라."

뒈지게 맞아? 싸움이라도 했단 건가?

"누구한테 맞아?"

"그게 웃기게도 말야, 2 학년한테 얻어맞았대."

"뭐...? 진짜야?"

"모르지. 소문은 그래." 

태진이 녀석이 2 학년 후배에게?

좀 어이가 없기도 했고 웃기기도 했다. 어디가서 맞고 다닐 녀석은 아닐텐데 후배한테 뒈지게 맞았다는건가?

"푸핫, 그거 웃기네. 그 녀석 그렇게 안봤는데."

"근데 더 웃긴건 또 따로있어."

".....또 뭔데?"

그것보다 더 웃긴 거라니? 나는 호기심이 동해 철호 녀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하. 그게 말야, 믿기 힘들지만..."

철호도 이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2 학년 후배가 여자였대."

"......뭐?"

순간 나는 웃음이 나오기보단 어이가 없어 표정이 딱 굳어졌다.

".....너 지금 웃길려고 농담한거야?"

"아니. 들은 소문 그대로 말한거야."

난 철호 녀석이 혹시나 개그라도 한건가 싶어 녀석의 표정을 찬찬히 뜯어보았지만 

아무래도 농담같지는 않았다. 

난 너무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요약해보자면...

"그러니까 2 학년 여자 후배하고 태진이하고 싸워서 태진이가 신나게 얻어맞았다, 그 말이야?"

"아니. 싸운게 아니라 태진이 녀석이 그 여자 후배에게 관심이 있어서 졸졸 따라다녔나봐.

근데 그 애가 싫어하는데도 계속 끈질기게 쫓아다니니까 걔가 하도 짜증나서 태진이를 두들겨 팼다더라."

"........"

어이없는 사실의 연속이었다. 

이쯤되면 이건 이미 그냥 웃고 넘어갈 만한 일도 아니었다.

아니, 그러니까.... 남자 선배가 여자 후배에게 일방적으로 치근덕거리다가 

화가 난 여자 후배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는건가? 

"그게 말이 되?"

"하하.. 나도 모르지. 줏어들은 소문일 뿐이야."

"그래.. 그냥 소문이겠지. 세상에 그런 여자가 어딨겠냐."

"근데 만약 사실이라면 태진이는 어떻게 되는거냐?"

"어떻게 되긴.. 완전 쪽박찬거지 뭐. 얼굴 들고 다니기도 힘들걸."

"푸하하! 그게 사실이면 정말 가관이겠다. 뭐 사실일 것 같지는 않지만."

옆에서 듣고있던 다른 친구들도 대화에 끼어 서로서로 말을 꺼내며 웃어제꼈다.

나도 그 어이없는 소문이라는게 하도 우스워서 웃기는 했지만 그다지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어차피 소문이란 과장에 과장이 더해지는 것이고 때로는 없는 사실도 만들어내는 것이지 않는가.

고작해야 태진이 녀석이 여자 후배에게 찝적거리다가 차였다는게 어쩌다 부풀려진거겠지 뭐.

"풋!"

어차피 사실일거라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상해보니 웃겼다.

설마 세상에 그런 여자는 없겠지, 하하~

터텅! 텅!

죽도가 밀짚인형을 후려패는 둔탁한 소리가 넓은 검도장 안을 가득히 메웠다.

사람이라고는 없는 텅 빈 연무장 안에서 오로지 한 소녀만이 밀짚인형의 주위를 

쉴새없이 움직이며 죽도로 인형을 사정없이 계속해서 강타하고 있었다.

퍼억!

육중한 힘이 실린 강격(强擊) 이 밀짚인형의 머리에 정확하게 꽂히자 인형의 머리가 부서지며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그러자 밀집의 파편들이 이리저리 흩날리며 사방으로 잔해가 튀었다.

그제야 직성이 풀린 듯 죽도를 휘두르던 그 소녀는 움직임을 멈추고는

뛰어다니느라 이리저리 엉망으로 풀린 긴 생머리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묶기 시작했다.

"하아.. 힘들어."

기온이 후덥지근하게 오른 이 날씨에 도장에서 죽도를 휘두른다는건 분명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도 건장한 남자도 아닌 앳되어보이는 귀여운 소녀가.

머리를 대충 묶은 그 소녀는 도장 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져있는 밀짚의 잔해들을 쓸어담아 정리하고는

땀에 젖은 검도복을 순식간에 벗어버렸다. 더 입고 있기가 찝찝했던 것이다.

검도복 안으로 감추어져있던 늘씬한 몸매가 숨김없이 드러나고 말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검도장 안에는 그녀 말고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보고 감탄할 사람도 없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크고 서글서글한 맑은 눈망울, 길게 기른 생머리를 묶어내린 소녀의 모습은

한눈에 척봐도 영락없는 귀염상의 깜찍한 얼굴이었다.

방금 전까지 죽도로 인정사정없이 밀짚인형을 처참하게 박살내놓은 인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을만큼 말이다. 

아무도 없다고는 하지만 넓은 도장 한가운데서 다 큰 처녀가 알몸으로 서있기는 좀 꺼림칙했던지

소녀는 잽싸게 샤워실로 쪼르르 뛰어들어갔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치고 수건을 몸에 두른 채 샤워실에서 나온 소녀는 탈의실에서 벗어놓았던 

자신의 옷들을 챙겨입으며 옷 속에 들어있던 핸드폰을 꺼내 새로 온 메시지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다 순간 소녀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어휴.. 내가 이 인간 때문에 참 지긋지긋했지."

몇일 전까지의 메시지 수신 기록에 거의 절반 이상이 '유태진' 이라는 이름이 찍혀있었다.

정말 찰거머리같이 징그럽게도 달라붙었던 남자였다.

"뭐 그만큼 혼내줬으니까 이젠 안 보내겠지."

소녀는 핸드폰 플립을 닫고는 탈의실 거울을 한번 들여다보았다.

조금씩 기른 생머리가 이젠 정말 많이도 길었다.

"음.. 간만에 언니네 미용실이나 한번 가볼까?"

그러고보니 다듬은지 꽤 오래된 것 같다.

소녀는 발걸음도 가볍게 탈의실을 나와 도장 문을 나섰다.

"잘 가라, 조성재."

"그래. 가라."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 점점 뜨거워지는 태양빛의 열기 때문에 

택시라도 한 대 잡아타려고 지갑을 꺼내들어보았다.

"......"

지폐라곤 하나없고 오직 동전 몇개에 하나로카드만 꽂혀있는 지갑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그러잖아도 요즘 지갑 사정이 궁했는데 어제 어쩌다보니 머리까지 자르느라 돈을 쓰고 나니

정말로 빈털터리 신세가 된 것이다.

"에휴."

어쩔 수 없이 버스를 기다려탔지만 그마저도 좌석이 없어 서서 가야만 했다.

제길, 역시 어제 머리를 자르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 그래도, 후회는 절대로 안하지.'

그렇게 황홀하게 예쁜 누나를 알게 되었는데 천원짜리 몇장이 대수랴.

나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애써 짜증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마음 한구석에서 또 괜한 욕구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제길, 또 보고싶어. 아, 미치겠네. 진짜.'

열심히 한판 뛰고나면 좀 나아질까 해서 이 뙤약 볕 밑에서 일부러 죽어라고 운동까지 했건만

금새 이렇게 다시 떠오르는 그 아름다운 모습이라니.

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 위로 귀여우면서도 도도한 그 얼굴이 아른거리는 것만 같다.

사근사근하고 매혹적인 웃음소리도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

'진짜 이거 왜 이래? 중독인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면서 왜 이렇게 자꾸만 생각나고 떠오르는걸까.

이게 말로만 듣던 첫눈에 반했다는 뜻인가? 

'하하.. 뭐 그렇게 순수한 말로 표현할수는 없겠지만.'

솔직히 얼굴만 떠오르는게 아니라 몸매 구석구석까지 떠올리며 엉큼한 상상이란 상상은 다 하고 있으니

'반했다' 라는 마냥 듣기좋은 말로만 표현하기에는 좀 그랬다. 큭큭. 뭐 어때.

'아무튼...'

그녀의 환상적인 몸매의 굴곡을 떠올리며 그 탄력 넘치는 엉덩이를 마음껏 움켜쥐고 주무르는 상상에 

아랫도리를 세우고 있다보니 버스가 금새 집에서 세 정거장 띄워놓은 구역까지 와있었다.

분명... 집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내리면 멀지않은 곳에 '그녀' 가 일하는 미용실이 있었지.

'무슨 생각하는거야, 나도 참. 오늘은 가봤자 머리 자르는 핑계로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머리를 자른게 불과 어제의 일인데 이 머리로 오늘도 버젓이 들어갈 수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하고 있는 나는....

치익.

한참 고민하고 있던 내 귀에 버스의 후문이 열리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손님들이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하자 내 갈등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에라, 제기랄!'

나는 결국 오늘도 일부러 집에서 두 정거장이나 떨어져있는 곳에서 내리게되었다.

후... 도대체가 나란 놈은 무슨 생각인지.

'그래, 먼 발치에서 그냥 한번 쳐다보기만 해야겠다.'

벽이 유리창이니까... 지나가다 한번 쓱 보고가면 되겠지. 

"그래서 또 검도 연습만 하다 온거야?"

"응."

한편, 지금 누군가가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차다 못해 음란하기 짝이 없는 상상까지 하고 있음은 

당연히 알 리가 없는 '그녀'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아.. 도대체 내가 언제쯤 우리 윤아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게 될까나."

"헤헤, 언니. 공부도 좋지만 건강이 더 중요한거라구."

다만 오늘은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랜만에 자신의 미용실을 찾아온 동생의 머리를 다듬어주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윤아' 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의 동생은 깜찍한 외모가 돋보일 정도로 귀엽게 방긋 웃으며 말했지만 

언니인 그녀는 그저 작은 한숨만 쉴 뿐이었다.

"맞는 말이지만 윤아 넌 너무 건강만 챙기니까 탈이잖니."

"알았어, 알았어~ 이따 집에가서 공부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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