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39)

"어떻게 해드릴까요?"

마치 귓가에 녹아드는 것처럼 사근사근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내 넋을 빼놓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어깨에 가운을 둘러주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닿자 

나는 지금의 이 행운이 선뜻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론 새삼 실감날 수 밖에 없었다.

"아… 그, 그냥 조금 정리만 해주세요."

넋을 놓고 있다가 그녀가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재빨리 대답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약간 당황해버린 모습이었겠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카락 길이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약간 숙이자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그녀의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몇 가닥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알싸한 샴푸의 향기인지 비누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어깨 너머의

그녀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잔잔한 그 향기에 심장이 아찔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눈앞의 거울을 통해 내 머리를 손질하기 시작하는 그녀의 비추어진 모습을 흘끗흘끗 살펴보았다.

이렇게 한걸음 정도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서 보게되니 정말이지 천사가 따로 없었다.

내게 특출한 미술 실력이 있어서 화폭에 이상형의 여인을 그려보았다고 하면 딱 저런 모습이 나왔을까.

외모부터 시작해서 몸짓이나 말씨, 분위기, 심지어는 손 끝의 섬세한 움직임까지도 그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움이라 생각될 만큼 온 몸 구석구석에서 짙은 매력을 드러내는 그녀의 모습은

내 눈에 그야말로 황홀 그 자체였다.

'끝내준다… 세상에 이런 여자도 있구나.'

"고등학생이신가 봐요?"

겉으로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속으로는 줄기차게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을 거듭하고 있는데,

옆머리를 가위로 손질하고있던 그녀가 난데없이 사근사근하게 말을 붙여왔다. 

깜짝 놀란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네? 아, 네.."

"혹시 문학고 다니세요?"

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학교 이름이 나오자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을까?

"맞아요. 어떻게……?"

"후훗, 교복보고 알았어요."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가위를 앞머리 쪽으로 가져갔다.

앞머리를 자르느라 팔을 약간 앞쪽으로 돌려야 했기 때문에 그녀의 몸이 약간 숙여지며

내 목덜미 부근으로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그 무엇인지 모를 옅으면서도 기분 좋은 향기가 조금 더 확실히 느껴졌다.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듯한 그 잔잔한 향기가 

마치 그녀의 체향이라도 되는 듯, 그 향기조차도 그녀가 지니고 있는 수많은 매력의 일부분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바로 앞의 거울을 통해 꼼꼼히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처음부터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도도한 눈매, 그리고 약간 집중하고 있는 듯한 깊고 맑은 눈동자.

저렇게 매력적인 눈이 있을 수 있을까.

우아함과 귀여움이라는 서로 이질적인 매력의 조화를 가능하게 하는 그 아름다운 눈.

문득 뭐라도 말을 좀 붙여보고 싶다는 생각에 별 시덥잖은 화제로나마 대화의 흐름을 제시했다.

"저희 학교 교복 아시나보네요?"

"음, 대충 알아요. 남학생 교복은 몇 번 못봤는데, 그래도 보니까 알 것 같네요. 후훗."

말 한 마디마다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운 말씨가 배어나왔는데 미용실 일을 하면서 붙은 

일종의 습관적인 친절함 같기도 했고, 원래 그녀가 가지고있는 자연스런 목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아무래도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업무용 친절' 이라고 한들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뭐 그거야 알 수 없는 노릇이긴 했지만 말이다.

"여학생 교복은 많이 보셨어요?"

나긋나긋한 그 매력적인 목소리를 좀 더 듣고 싶었기 때문에 난 아무 생각없이 계속 말을 끌어갔다.

손님과 종업원 간의 그저그런 잡담일 뿐이었지만, 귀를 즐겁게해주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 해도 그게 어디인가. 

게다가 그녀가 우리 학교에 대해 약간이나마 알고 있다는 사실 또한 내겐 좋은 일이었다.

별 것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대화를 지속할 수 있는 마땅한 공통 화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행운이라면 확실히 행운이었다. 

아까 전에 그녀의 차례가 자신에게 돌아오길 빌고 있었던 그 대학생으로 보이는 녀석이 여기서

한 서너자리 떨어진 곳에서 자꾸만 이쪽을 향해 시기 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거 좀 그만 째려보지…. 그렇게 부럽나?'

하긴, 입장바꿔서 저 대학생 녀석이 지금 여기 앉아있고 내가 저기 앉아있었으면 

아마 나도 그런 심정이었을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확실히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가보다.

'큭큭, 실컷 부러워해라.'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자꾸만 그 남자 대학생이 질투 섞인 눈으로 흘끗거리고 있다는 것이

못내 부담스러웠지만 거울에 비추어진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눈에 담기에도 바쁜 이 마당에 그런 데다 신경쓸 

하등의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네, 제 동생도 문학고 다녀요."

그 대학생 녀석을 속으로 비웃느라 일순간 정신을 딴데 팔고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무슨 말인가 싶어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가, 순간 표정이 쩍 굳어버렸다.

"…네? 동생요?"

"네, 지금 2학년일 거에요."

생긋 웃으며 말을 건네는 그녀의 표정과는 달리 난 입을 딱 벌리고 표정이 굳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맙소사.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들 하지만, 세상에 살다살다 이런 우연도 있단 말인가?

버스에서 처음 보고 첫 눈에 끌린 여자. 

거의 스토킹을 하다시피해서 쫓아와, 아주 운 좋게 만나게되어, 아주 운 좋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거기에다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내가 어제부터 자기를 거의 스토킹하다시피해서 이 가게까지 오게 되었다는 뒷배경 따위는 

전혀 알지 못한 그녀는, 그저 이 사실을 약간 흥미로운 얘깃거리 정도로만 여기는 모양이었다.

'흠.. 동생이 있단 말이지?'

잠시 그 뜻밖의 사실에 놀라기는 했지만 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뭐 세상엔 별의 별 우연이 다 있으니깐...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지.

그런데 동생이 남자일까, 여자일까?

남동생인지 여동생인지가 갑자기 못내 궁금해졌다.

물어보면 이상하게 보일까?

아냐, 같은 학교라는데 그런거 물어볼 수도 있는거지 뭘.

"아, 제 후배겠네요. 남동생이요?"

그래도 눈치보여서 나름대로 말을 좀 꼬았다.

"아니요. 여동생이에요."

오호... 이런 대박을 보았나. 여동생이라..!

이런 엄청난 미인의 여동생이라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 동생 역시도 상당한 미인일 것이다.

하지만 눈 앞의 그녀가 남긴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그런지 그 동생이 언니보다 더 빼어난 미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에 이 여자보다 더 매력적인 미인이 있을거란 생각이 지금은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2학년이라고?'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다. 갑자기 호기심이 솟구쳤다.

흠.. 월요일부터 전교를 한번 뒤지고 돌아다녀볼까? 

뭐 이름을 모르니까.. 어렵겠지만.

"후훗, 제 동생은 공부 되게 안하던데."

"원래 고3 되기 전에는 거의들 놀죠 뭐.. 하하."

그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보니 처음의 그 어색한 기분이 많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시종일관 잔잔하면서도 매혹적인 웃음을 입가에 띄우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매혹적인 웃음을 띄면서 가위를 다시 움직이는 그녀.

어제 버스 안에서 내가 그녀의 환상적인 몸매를 훑어보며 온갖 음탕한 상상을 다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아름다운 웃음이 과연 어떻게 변할까? 

그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겠지만, 심지어 그녀는 어젯 밤 내 딸딸이의 메인메뉴가 되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몸매에 서서히 눈이 쏠리기 시작했다.

특히 어제도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미끈하게 빠졌다는 말이 너무나도 어울리는 하체의 환상적인 

라인은 정말 압권이었다.

스커트 밑으로 레깅스에 은은히 감춰진 채로 쭉 뻗은 그 매끈하고 날씬한 다리는 뭘 입던지간에 

그 굴곡을 감출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검은색 레깅스는 다리에 아주 착 달라붙어 수려한 각선미의 자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는데,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솔직히 맨다리를 드러내놓고 다니는 것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섹시미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그녀의 다리를 흘끗흘끗 쳐다보는 대신에, 앞의 거울을 통해서 비추어진 

그녀의 전신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머리 손질에 열중하고 있었는데다가 나도 그저 시선을 거울에 자연스럽게 두고있는 것으로만 

보였기 때문에 마음놓고 그녀의 몸매를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끝내주네. 분명 애인도 있겠지?'

아무래도 이런 끝내주는 미인이 솔로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모순되는 느낌일지는 모르겠으나, 이 정도로 매력적인 여인을 가질 법한 

남자가 이 세상에 있을거란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이것 또한 그녀의 이질적인 매력의 일부분일까?

"이쪽으로 오세요."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을 스펀지로 살짝 털어주고나서 그녀가 손짓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가위질이 끝나있었다.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약간 당황하며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물 온도는 괜찮으세요?"

"아.. 네."

천장을 보고 반듯이 누워 목만 빼꼼히 내민 나는 생긋 웃는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물 온도고 자시고 간에 지금 이 묘한 상황이 더 문제다.

미용실의 샴푸대에 앉아본게 한두번도 아닌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부담스러운 것인지.

얌전하게 누워 정면으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게다가 머리를 감겨주느라 상체를 많이 숙여서 그런지...

'가, 가슴이...'

굴곡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옷은 아니었지만 원래의 크기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녀가 머리에 샴푸칠을 하느라 상체를 크게 앞으로 숙였을 때 

한순간이지만 그녀의 가슴이 불과 몇 센티도 떨어지지 않고 눈 앞에서 닿을락말락 다가온 것이다.

참다못해 눈을 다른데로 슬쩍 굴려보았지만 자꾸만 다시금 눈이 돌아가곤 했다.

게다가 한쪽을 살짝 노출시킨 검은 브래지어 끈이라던지, 사슴같은 목선이라던지, 

섹시하게 드러난 쇄골의 모습들은 날 거의 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거기다가 아까보다 더욱 가까워진 탓에 한층 더 짙어진 그녀의 몸에서 은은히 느껴지는 그 향기라니.

'미, 미치겠다. 설 거 같아.'

설 것 같은게 아니라 실제로 아랫도리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흥분 안할 남자가 어딨겠는가.

나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인지 고통인지 딱 잘라 말하기가 힘들었다.

참다못해 아예 눈을 감아버린 그 순간, 공교롭게도 물줄기가 멈추며 그녀가 내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주기 시작했다.

'휴.. 다행이다.'

약간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상태에서 자지가 섰더라면.. 

정말 그 뒤는 수습 곤란일테지.

"후훗, 다 됐어요."

어느새 머리카락을 다 말려준 그녀에게 나는 수고하셨다는 말 한마디를 간신히 꺼낼 수 있었다.

그녀는 아까 내 머리에 가위질을 할때 바닥에 흩어진 내 머리카락들을 치우러 저 쪽으로 가버렸고,

나는 참을 수 없는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그녀에게 다시 말을 건네지는 못했다.

이름이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런 사적인 대화를 입으로 내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아마도 앞으로 이 미용실을 자주 찾게 될 것이라고.

일요일의 아침이 밝았건만, 모처럼의 주말도 수험생인 내게 그다지 큰 기쁨이 되지는 않았다.

남들 다 가는 여름 휴가나 피서는 커녕 게임 한판도 맘놓고 못할 처지에 주말이 뭐가 대수겠는가.

점심 때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꼴에 수험생이라는 자각은 있었는지,

나름대로 공부를 해보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젠장."

그러나 역시 10분도 안되서 때려치고 말았다.

세수라도 할 맘으로 화장실 거울 앞에 서보니 머리가 조금 짧아진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짧아진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괜히 킥킥 웃음을 지었다.

"그 누나.. 또 보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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