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을 비비며 힘겹게 책상에 엎어져있던 몸을 일으켜세웠다.
하품을 하며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니 과연 수업이 모두 끝났을 시간이었다.
방금 나를 깨워준 눈 앞의 친구 녀석이 혀를 차며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키는 날 갈구어댔다.
"야, 임마. 너 오늘 수업 내내 퍼자던데. 어젯 밤에 대체 뭔 짓했냐?
너 이 자식, 혹시 딸딸이 3번 정도 친거아냐?"
"……공부 했어, 임마."
"지랄하고 있네."
나도 뭐라고 확실히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할 말도 궁핍했거니와, 사실 그 녀석의 말이 반 쯤은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젯 밤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글쎄, 솔직히 어제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중요한 사실은
내가 어제 버스에서 처음 본 그녀의 뒤를 쫓느라 거의 1시간 정도의 시간을 소비했다는 것이다.
어제 그녀가 들어섰던 그 미용실 앞에서 한참을 못 박힌듯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때는 이미 12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고 한심한 일이다.
어지간히 성에 굶주린 나이라고는 해도 어떻게 버스에서 잠깐 재미삼아 눈에 담은 여자의 뒤꽁무니를 쫓느라
황금같은 시간을 그렇게도 허비했단 말인가.
게다가 거기서 끝난 것도 아니다.
1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선 직후 공부는 커녕, 컴퓨터로 온갖 포르노 야동을
감상하며 격렬하게 욕구를 해소하느라 시간은 물론 온 몸의 에너지까지 철저하게 소비해버린 것이다.
친구 녀석의 말처럼 딸딸이를 세 번이나 친건 아니었지만 하여튼 자위를 한 것은 사실이었고
덕분에 지금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모두 다 순전히 어제 버스에서 보게 된 그녀 때문이었다.
그나마 오늘이 토요일이라서 다행이었다. 고3 이라서 비록 조금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찍 마치는 날이니까.
나는 어제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미용실로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그 뒤로 내가 그 자리에서 꽤 오랜 시간을 머물렀음에도
다시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용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볼까하는 생각도 그땐 잠깐 해보았지만 그렇게까지는 할 마음이 도저히 생기지 않아서
정신을 차리고나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미용실 직원일까?'
그런데 왜 그렇게 늦은 시간에 가게에 들어간 것일까.
잠시동안 쳐다본 것만으로 이렇게 끌리는 그 여자가 너무 궁금했다.
어찌나 강렬하게 박힌 첫 인상인지 제대로 가까이서 본 적도 없음에도,
잠깐 보았던 그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자태가 아직까지 생생하게 머릿 속에 그대로 새겨져있었다.
귀여우면서도 도도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얼굴, 흠을 잡을려고 해도 전혀 잡을 수가 없는
완벽한 S 라인의 몸매, 가느다란 허리선을 지나 타이트한 바지 위로 탄력있게 조여져
걸을 때마다 실룩이던 그 빵빵한 엉덩이……
'윽, 또 서는구만.'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가방을 챙겨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이, 조성재. 어디가 짜식아! 이제 자습 시작하는데!"
뒤에서 날 부르는 친구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몸은 이미 교실 문을 나서고 있었다.
자율 학습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저 자식, 저거 왜 저래?"
물론 친구 녀석이 그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일부러 어제 하교할 때 탔던 버스와 똑같은 번호의 버스를 기다렸다가,
마찬가지로 일부러 우리집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어제와 똑같은 정거장에서 하차했다.
이 부근의 지리는 잘 알고 있어서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찾아갈 수 있을테지만,
행여나 만약 못 찾을 경우를 생각해서 그렇게 확실한 루트를 밟은 것이다.
"여기서 저 모퉁이를 돌았었지."
어젯 밤 그녀의 뒤를 밟았던 그 길을 기억해내며 지하철 역 앞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기억나는대로 어제와 같은 길을 걷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찾던 그 건물이 나왔다.
나는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어제 그녀가 안으로 들어섰던 그 미용실이 분명했다.
"……."
나도 모르게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순간 멈칫했다.
들어가서 뭐하려고? 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던 것이다.
잠시 혼란스러워진 나는 공연히 시계를 내려다보고 주위를 서성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일단 그녀가 이 미용실 안에 있을지 없을지도 지금으로선 확실히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흘끗 고개를 돌려 벽이 유리창으로 장식된 미용실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상당히 큰 미용실이었다. 장사도 꽤 잘 되는지 의자가 제법 있었음에도 손님들이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직원들의 수도 상당했기 때문에 미용실 안은 부산스럽게 북적대고 있었다.
꽤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좀 더 자세히 유리창으로 미용실 안을 살펴보았다.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살피다시피 관찰하던 내 눈이 별안간 크게 확대되었다.
있었다. 그녀가!
비록 거리가 좀 떨어져있었고 유리창 안으로 보는 것인데다가,
심지어는 겨우 어제 처음 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멀리서도 확실히 그녀라고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녀의 미모는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부드러운 머릿결이 그녀를 알아보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적당히 큰 키와 수려하게 쭉 뻗은 매끈하고 날씬한 몸매는 불과 몇 미터 떨어진 정도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손님들의 머리카락을 쓸어담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윽고 손을 들어 머리카락의 길이를 재어보았다.
일부러 자르지않고 기르기 시작한게 꽤 되어서 그런지 상당한 길이였다.
"그래… 뭐, 가끔 정리하는 것도 괜찮지."
절대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머리를 정리하러 들어가는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하는 듯
한번 되뇌어보았지만, 내 자신이 생각해봐도 솔직히 그 다짐은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유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가게 안의 많은 직원들이 인사를 했다.
"머리 자르시겠어요?"
한 여직원이 내게 다가와 공손히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 직원은 나를 손님들이 기다리는 동안 앉아있는 소파로 안내했다.
사람이 꽤 많긴 했지만 소파까지 만원일 정도는 아니어서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소파에 앉았다.
'차 한잔 드릴까요' 라고 묻는 직원의 말에 괜찮다고 대답했고,
그 직원이 다른 손님의 머리를 커트하러 자리를 떠나자 그제서야 미용실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과연 얼마 지나지않아 '그녀' 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방금 막 바닥 정리를 끝냈는지 다른 손님의 머리를 정리하기위해 의자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까보다 좀 더 가까이서보니 틀림없는 그녀였다.
그저 어제 잠깐 곁눈질로 살펴본게 전부이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저렇게나 매력적인 여성이 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용실의 밝은 조명 아래에서, 어제처럼 곁눈질할 필요도 없이 정면으로 자세히 바라본
그녀의 모습은 정말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어두운 버스 안이나 길에서 뒷모습만 보았을 때 보다 한층 더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만 시선을 유지하며 그녀의 외모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았다.
밝은 곳에서 보니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오목조목하게 조화된 얼굴이 아주 귀여워보였다.
사근사근하고 붙임성있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어제 느낀 대로 특히 눈매가 아주 매력적이었다.
귀여운 느낌의 얼굴에 저렇듯 도도한 눈매는 분명 처음 본 남자라도 순식간에 가슴을 설레게 만들 수 있으리라.
지금 내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예쁘다… 진짜 이뻐.'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하기에는 좀 어색했지만, 첫눈에 강하게 끌린 것만은 확실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물론 환상적인 저 몸매까지 포함해서 다른 여자는 흉내내지 못할 것만 같은
우아하고 고고하면서도, 동시에 뇌쇄적이며 요염한 저 자태가 도저히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어떤 아주머니의 머리 모양을 봐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계속 눈으로 쫓았다.
오늘의 그녀는 어제처럼 타이트한 스키니진을 입지는 않았지만, 쭉 뻗은 다리에 달라붙듯
피트되는 고혹적인 얇은 검은색 레깅스와 함께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스커트라고 해도 안으로 레깅스를 받쳐입어서 맨다리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얇고 매끄러운 사이드라인의 검은색 레깅스가 부드러운 각선미의 멋을 더욱 살려주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몸매가 더욱 매력적으로 돋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컨셉인지 의도적인 패션인지 하늘거리는 얇은 소매와 더불어 검은색 브래지어 끈
한쪽을 어깨와 함께 살짝 노출시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섹시하여 무척 자극적이었다.
어제의 모습과 오늘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컨대, 아마도 그녀는 직접적인 노출은 피하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고도 은근하게 그녀의 섹시한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데 탁월한 센스가 있는 것 같았다.
얼굴과 눈매가 그러하고, 또한 환상적인 몸매와 은근한 옷차림이 그러하듯,
청순함과 섹시함의 서로 이질적인 매력을 아주 자연스럽게 동시에 표출해내는 그런 느낌이랄까.
그렇게 정신없이 그녀의 자태를 감상하고 있을 때, 문득 소파 옆에서 남자 두 명이 쑥덕이듯이
소근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야, 야. 저기 왼쪽에서 두번째 여자 진짜 죽이지 않냐?"
"……왼쪽에서 두번째? 크크, 야, 나도 아까부터 저 여자 보고있었어."
"그렇지? 킥킥, 진짜 섹시하다."
"그러게 말야. 저 몸매 좀 봐라. 큭큭, 다리가 아주 예술이야."
흘끗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손님으로 보이는 대학생인 듯한 남자 둘이서 서로 킬킬거리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소파에서 불과 한자리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는 아니지만 대충 그들이 뭐라고 하는지는
귀로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왼쪽에서 두번째 여자'가 나 역시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그녀'라는 사실을 곧 알 수 있었다.
"다리 뿐이냐? 얼굴도 끝내주지. 완전 얼짱 몸짱 아냐."
"킥킥, 뭐야. 반했냐?"
"저 정도면 충분히 반하고도 남지. 안 그러냐? 큭큭, 내가 한번 대시해봐?"
"푸하하, 관 둬라, 니 말대로 얼짱 몸짱 미녀께서 너같은 놈을 쳐다보기나 하겠냐?"
"그거야 모르지, 자식아. 후, 내 순서에 저 여자가 걸려야하는데……."
나는 그 대학생을 흘끗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그 놈 역시 '그녀' 에게 열렬한 관심 혹은 흑심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순간 기분이 언짢아졌지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또한 내 마음 역시 그러한 흑심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속으로 욕하기도 뭐한 입장이어서 입에 쓴 맛만 다셨다.
문득 고개를 들어 가게 안을 한번 전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직원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이 여직원들이었다.
미용실 직원 답게 예쁘장한 여직원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아무래도 이게 손님이 이렇게 많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기사 남자 손님이라면 당연히 이런 미인들이 있는 가게를 찾고싶을테니.
그래도 그 이쁘장한 직원들 중에서도 내가 보고있는 '그녀' 는 가히 군계일학이라 할 만 했다.
마치 꽃밭 속에서 특출나게 아름다운 한 송이의 꽃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많은 무리 속에 섞여있더라도 혼자서 빛을 발할 것만 같은 독보적인 아름다움은 마치 여신과도 같았다.
다시 흘끗 아까 그 대학생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 놈은 지금 자신이 커트할 순서에 '그녀'가 자기 차례에 걸리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듯 했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소파에 남은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고 슬슬 '그녀' 또한 지금 담당 중인
아주머니의 차례가 거의 끝나가고 있는 듯 싶었으니, 몇 남지 않은 손님을 다른 직원이 담당하고나면
그녀의 순서가 그 놈에게 돌아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젠장. 무슨 러시안 룰렛도 아니고.'
보통 미용실에서는 들어서는 순간에 '찾으시는 디자이너가 있으십니까?' 라는 식의 질문을 종종 던지지만,
그렇다고 그 상황에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게 특정인을 지목하기는 좀 어색하기 때문에
자신의 머리를 정기적으로 돌봐주는 헤어 디자이너가 아닌 바에야 으레 아무에게나 맡기기 마련인 것이다.
아무래도 그 대학생 녀석의 경우도 그런 듯 싶었다.
나는 솔직한 심정으로 '그녀' 의 차례가 그놈에게 돌아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에게 그 차례가 돌아왔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게 그렇게 될까?
그렇게 '제발 나한테 걸려라' 라는 말을 수도 없이 되뇌이며 초조하게 앉아있었다.
이윽고 한 직원이 이쪽 쇼파로 다가왔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아있던 그 대학생 녀석을 향해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그 대학생은 잠시 동안 '그녀' 가 아닌 다른 직원이 자기 차례에 걸렸음에 인상을 조금 찡그리며
아쉬워하는 듯이 그 직원을 따라 걸어갔다. 나에겐 아무래도 잘 된 일이었다.
'어?'
속으로 그 운 없는 대학생 녀석을 비웃어주며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순간 놀라서 앉아있던
소파에서 펄쩍 뛸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자신의 앞에 어떤 여직원이 서있었다. 난 고개를 들어 그 직원을 올려다보았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 였다.
순간 너무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동작도 취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은 나에게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생긋 지으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청아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내 귓가에 파고드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이 그리 운없는 놈은 아닌 모양이라고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