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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로 고마워. 나는 도움만 받는구나."
채하진은 우경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엔 여드름 투성이인 얼굴도, 살찐 몸집도 다 싫었는데 이젠 어느새 익숙해졌다. 아니, 익숙함을 넘어 호감까지 갔다. 그에게는 빚진 것이 너무나 많았다.
"괜찮다능... 그렇게 빤히 바라보지 말라능."
"응?"
"사촌누나 생각이 난다능."
"그렇구나... 많이 친했어?"
"음."
채하진은 대뜸 질문을 던졌다.
"좋아했어?"
"......"
분명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정곡을 찌른 거라 채하진은 생각했다.
'좋아했구나. 그 사람.'
"그동안 그쪽 말고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능. 어쩌면 나머지 사람들은 다 죽었을지도 모른다능..."
"아이, 말 돌리지 말고. 좋아했어?"
채하진은 왠지 심한 질문이라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
"좋아했지?"
'내가 왜 이러지...? 집요하게...'
그때였다. 갑자기 우경철이 벌컥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하라능! 너는... 너처럼 예쁜 사람은 보통 성질이 이렇게 드럽다능! 그래 좋아했어! 적당히 눈치 줬는데도 자꾸 들쑤시고, 괜히 놀리는... 그런 나쁜 취미는 어디서 배웠냐능?? 누나랑 닮았지만 전혀 틀리다능!!"
"아..."
직격탄을 맞았다.
"미안해..."
"..."
채하진은 갑자기 기운이 빠져 견딜 수가 없었다.
'... 닮았지만 전혀 틀리다능!!'
우경철의 한 마디가 그렇게 상처가 될 수가 없었다. 한참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경철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내가 미안하다능. 너무 흥분해서 심한 말을 한 거 같다능... 신경쓰지 말라능."
"아니 내가 미안..."
겉보기에는 화해가 된 것 같았지만, 채하진은 이미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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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많이도 걸었다."
"여기쯤?"
P군과 여자들은 그들을 해안이 바라다보이는 나무 밑에 앉혔다.
"좋아. 안전해 보이는데... 우리들이 사는 곳으로부터도 멀고."
P군과 강아름, 서유라는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체격이 커서 지금풀어주었다간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른다. P군이 말했다.
"너희, 여기 그냥 두고 갈 테니까 알아서 풀어. 적당히 느슨하게 묶었으니까 아마 애를 쓰면 풀 수 있을 거야. 다시는 우리 근처로 오지 마 다시는!! 다시 왔다간 정말..."
P군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죽인다. 너희들이 말한 것처럼."
"..."
P군과 강아름, 서유라는 박성규와 최기훈을 뒤로 하고 걸었다.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아마 반나절 정도 고생하고 나면 풀겠지."
서유라는 경멸의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몸을 뒤척이며 매듭을 풀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보다 서유라. 고생했어. 저놈에게 미인계를..."
"어쩔 수 없잖아."
서유라는 P군을 보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P군은 서유라가 최기훈에게 애교를 부리는 연기를 하던 것을 떠올리고 혼자 쿡쿡 웃었다.
'서유라... 당차고 기발한 구석이 있단 말야.'
바로 그 순간 P군은 남아 있는 두 여자들이 자기 얘기를 하고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저기... 아영아. 발은 괜찮니?"
"응."
윤아영은 발목 근처를 스스로 마사지하고 있었다.
"너야말로 괜찮아? 아까 큰일날 뻔 했다면서..."
홍세린의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리면서 눈에는 눈물이 맺히려 했다.
"응... 생각하기도 싫어..."
"아. 미안 미안... 생각하지 마. 잊어라."
"그래도 P군이 구해 줘서..."
"응... 다행이지."
"저기."
홍세린은 갑자기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왜 그래? 뭐 말할 거라도?"
"혹시 P군이랑...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윤아영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그러나 왜인지 P군에게 업힌 기억, 비를 피하며 P군에게 기대 잠들었던 것, 그리고 티격태격하면서도 P군에게 의지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왜?"
"너는 왜 P군을 그렇게 싫어해?"
"변태니까?"
"음... P군은 변태 아닌데... 혹시..."
"??"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야?"
"뭐?"
윤아영은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절대! 절대! 절~대!!!"
"그렇구나..."
홍세린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럼... 내가 좋아해도 될까? P군..."
<-- 오덕의 첫키스 -->
"... 그, 그러든지..."
"아영아, 혹시 화난 건 아니지?"
"아냐. 내가 화를 낼 리가 있어?"
"그치만 목소리가..."
"그냥. 니가 아까워서 그러지..."
"그렇지 않아, P군은 정말 좋은 애인 것 같아..."
"그... 그만!"
윤아영은 더 들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럼, 응원해 줘."
홍세린은 생긋 웃으며 윤아영을 바라보았다. 늘 소심하고 겁이 많은 울보였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니 얼굴에 생기가 도는 듯했다.
P군과 강아름, 서유라가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왔어. 배고프지? 밥이나 먹을까?"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더 의식하게 되어 버린 것인지, 평소와 다름없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도 홍세린은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버렸다.
"괜찮아?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P군은 아까의 충격으로 홍세린이 충격을 받았을까봐 마음을 써 주었다.
"괘... 괜찮아."
"별로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요즘 말 잘했잖아. 그런데 다시 더듬고..."
"정, 정말 괜찮아!"
홍세린은 달아나듯 자리를 떴다.
"너무 충격받지 않았어야 하는데..."
"내버려 둬. 걘 괜찮으니까."
뒤에서 윤아영의 시니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어떻게 알아? 우리 이모가 상담원을 하셔서 아는데 그런... 종류의 폭력을 경험하면 충격이 나중에 나타난다고!"
"그건 그렇긴 한데... 내가 보기엔 괜찮아 보여서 그랬지."
"그건 본인밖에 몰라."
"아아, 그러셔? 그럼 넌 어떻게 아는데? 네가 세린이야? 그보다, 이모 직업은 기억하면서 아직 자기 이름도 기억 못하다니 정말 웃기지 않아?"
윤아영의 가시 돋힌 말투에 강아름이 우뚝 멈춰 섰다.
"아영아, 그건 좀..."
"됐어. 내버려 둬."
P군은 피곤하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고 가버렸다.
"왜 그랬어? P군한테."
"몰라..."
윤아영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고,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