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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여긴 어디지?"
속눈썹이 길고 볼에 홍조를 띤 몸집이 작은 미소녀가 눈을 떴다. 그녀의 눈 안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끝없이 푸른 하늘과 작열하는 태양이 들어왔다.
"아... 아앗, 눈부셔."
그녀는 떴던 눈을 잠시 다시 감았다.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그녀의 볼과, 전신을 시원하면서도 다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아아, 시원해... 음? 시원?'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누운 자세에서 고개를 15도 정도 들어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니, 실오라기 한 점 걸친 것이 없었다...
'헉, 누가 오면 어떡해...'
불운하게도 그녀의 걱정은 즉시 현실로 나타났다.
"아, 일어났냐능?"
그녀가 남자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멀리서 검은 형체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 안돼,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 소리 질러 버릴거야!!!!!!"
"훗."
검은 형체의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사람이 없어서 소리를 질러도 손쓸 도리가 없다능...."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잠깐, 잠깐... 농담 좀 해 본 거라능. 가까이 안 갈 테니까 일단 진정하라능. 배고프면 이쪽으로 오라능..."
의외로 순순히 물러난 검은 형체는 숲 쪽으로 멀어져 갔다.
"뭐야? 저 사람은... 으음... 그나저나 어떻게 된 일이지?"
그녀의 이름은 채하진. 12반이다.
"아아 그래, 난 수학여행을 떠났는데... 현아랑 갑판에서 바다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놀랄 만큼 바람이 세게 불기 시작했지. 그러면서 갑판 위에 있는 비품들이 굴러다니고... 갑자기 바람에 비가 섞이기 시작하면서... 천둥도 치고..."
꺄아악, 으앗, 하는 비명소리가 갑자기 생생하게 귀에 울려퍼졌다.
"맞다... 그 집채만한 파도..."
그제서야 하진은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다들 어떻게 됐을까? 용케도 그 와중에 난 살아남았네..."
문득 왼팔이 쓰려왔다. 보니 아주 가늘고 길게 찢어진 상처가 보였다. 그 외에는 아픈 곳도, 불편한 곳도 없었다. 이 정도면 거의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해안가의 한 야자수 그늘 아래 누워 있던 그녀 곁에는 그녀의 팔에 난 상처를 닦아 준 듯한 물휴지가 보였다. 아까 그 검은 형체의 남자가 분명했다.
'흠... 나를 구해 준 건가? 상당히 신경을 써 줬네...'
그녀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다음 순간,
'뭐야? 알몸을 본 거야?'
대단히 화가 나고 당황해 버렸다...
'흥, 배고프면 오라고? 절대로 안 갈 거야! 안전하다는 확신만 생기면 당장 신고해 버려야지... 그나저나 여긴 어디?'
앉아서 주변을 둘러 봐도, 한쪽은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요, 다른 한 쪽은 숲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모양의 식물들이 한가롭게 바람이 불 적마다 나부끼고 있었다.
'뭐지... 여긴 저 사람만 사는 섬인가?'
"배 안고프냐능~?"
멀리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부아가 치민 그녀는,
"안 고파, 이 변태야!"
라고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어떤 변을 당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안 고프냐능?"
목소리가 다가왔다.
"오, 오지마...."
"내가 근처를 뒤져서 옷을 하나 찾아 고쳐왔다능. 이거면 되겠냐능?"
그가 멀리서 옷가지처럼 보이는 것을 휙 던졌다. 그것을 하진은 멋들어지게 받았다.
"오, 나이스 캐치."
그것은 찢어진 여자 교복 상, 하의를 군데군데 기운 옷이었다.
"뭐야, 내 옷을 찢은 거야...? 왜 옷을 찢어 벗겼다가 다시 주는... 이런 이상한 짓을 해?"
채하진은 갑자기 온몸이 떨려왔다. 혹시 저 사람이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내 옷을 찢은 뒤 이상한 짓을 하고... 알몸으로 내팽개쳐 뒀다가 다시 기워서 주는 거라면? 정신병자는 아닐까?
"노노, 니 옷 아니라능... 바닷가에 쓸려 온 찢어진 옷가지들을 적당히 모아 꿰맨 거라능..."
"그... 그래? 그렇담 고마워."
'그치만 누구 옷일까... 이 옷의 주인들은 괜찮을까?'
그녀가 옷을 입자, 다행히도 적당히 맞았다. 이제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검은 형체 쪽으로 걸어갔다. 검은 형체가 가까워지면서, 서서히 그 모습이 드러났다. 그 정체는!
중키의 살찐, 얼굴에는 여드름이 꽃핀 안경 남학생이었다...
"어? 너... 우리 교복을 입고 있잖아? 여기 사는 사람이 아냐?"
"아니라능... 여기 무인도 같다능... 나는 먼저 이곳으로 표류해온 뒤 네가 떠내려오면서 정신을 잃은 걸 보고 헤엄쳐서 구해 왔다능..."
"음?"
채하진은 그의 몸매를 위아래로 다시 훑어보았다.
"왜, 왜 그런 눈길로 음흉하게 보냐능?"
"헐...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수영해서 구한 거 맞아?"
당장 자기 자신도 구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과체중이었다...
"흐음... 시, 실은 떠내려오는 걸 보고 건져서 그늘에 눕히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능..."
"그럼 그렇지..."
"알몸은 거의 보지 않았다능!"
"그걸 왜 강조해?!"
그녀는 화가 났지만, 신고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왠지 이 안경 쓴 녀석은 만만한 느낌이었다. 해를 가할 것 같지 않다.
"어쨌든 고마워..."
"뭐, 괜찮다능. 이 정도야..."
'뭐야, 또 금방 콧대가 높아지기냐!'
"근데 정말 무인도?"
"아마도..."
한낮의 햇살이 내리쬐는 해안가는 야자수 몇 그루가 무리지어 서 있는 그늘 부분만 제외하면 아주 더워 보였다. 평화롭고, 한적하고, 숨막히다...
"나가려면?"
"모른다능..."
"하아..."
그때 꼬르륵, 하는 소리가 하진의 뱃속에서 나왔다.
"뭐 먹겠냐능?"
"아아 좋아..."
"일단 이거 먹고 있으라능..."
"스, 스닉커즈?"
"물고기가 있어서 구워 먹으면 맛있겠다능. 잠시 기다리라능!"
"불은?"
"라이터 있다능."
"헐..."
스닉커즈에 라이터에... 그러고 보니 옷도 꿰매져 있고...
"이봐, 정체가 뭐야."
"정체?"
안경 너머로 의아하다는 표정의 눈이 보였다.
"나는... 12반 우경철이라능."
"응? 12반? 너 12반이었어?"
"그렇다능... 나 모르냐능? 나는 그쪽 아는데..."
"아니, 잠깐 잠깐,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어떻게 이 모든 걸 갖고 있냐는 거야. 라이터라거나 초코바라거나... 반짇고리..."
"아, 그건 설명하자면 길다능. 일단 스니커즈 먹겠냐능, 안 먹겠냐능?"
"흐,흥! 먹겠어!"
"좋다능. 그럼 먹고 있으라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