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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말야, 여기, 좀 이상하지 않아?"
갈색 머리 소녀의 말이었다.
"흐흥..."
P군의 이상한 웃음 소리에, 갈색 머리 소녀는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P군을 쳐다보았다.
"왜... 왜 웃어?"
"아... 아니."
"왜 웃었어?"
"아무것도 아냐."
"궁금하잖아. 왜 웃었냐구..."
앞서 가던 긴 생머리 소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세린아, P군 좀 괴롭히지 마라. 지금 자기 이름도 생각이 안 난다는 애야."
"아니, 난 그게 아니구..."
어느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그녀였다. 얼굴도 새하얀 데다, 눈도 커서 눈물이 고이니 영락없는 사슴이었다. 그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한편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여 P군은 적잖이 당황을 했다.
'아니, 뭐야, 이게 울 만한 일인가?'
P군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멈칫했다.
'어이쿠! 큰일날 뻔했네. 나도 모르게 그만...'
그는 슬쩍 눈을 돌려 양갈래 머리 소녀 쪽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째려보고 있었다.
'완전히 변태로 낙인찍힐 뻔 했네. 어허허...'
"알았어. 말해 줄게. 근데 정말 별 거 아냐. 니가 울지 않고 그렇게 긴 문장을 말하는 건 처음 들어서 갑자기 그게 웃겼다. 왜."
"뭐야, 정말 별 거 아니네..."
갈색 머리 소녀는 또 금세 기분이 풀렸다는 듯, 웃는 낯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아까 워낙 눈물이 많이 고여서 그랬는지, 한 줄기가 주르륵 하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말 별난 녀석이구나... 엄청 잘 우네?'
"근데 말야, 그보다 이상하다는 건 뭐야?"
"아, 그게 말야..."
갈색 머리 소녀는 이번엔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이 되어 P군을 응시했다.
"우리, 울릉도로 가고 있었잖아? 그런데 여긴 야자수 투성이잖아. 그게 이상해. 분명히 울릉도로 가는 루트에 있는 섬이라면 이런 열대림이 있을 리 없으니까."
"그... 그러네. 그러고 보니 좀 더운 것 같기도 한데 기분 탓인가 했었지..."
앞서 가던 긴 생머리 소녀도 관심을 보였다.
"흠... 그럼 우리가 좀 더 남쪽에 조난당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포항 근처라거나."
"아냐. 이 수종은... 포항 정도의 위도에 있을 법한 수종이 아닌 것 같아."
갈색 머리 소녀가 나무들을 자세히 관찰하며 대답했다.
"그럼 어딜까나..."
양갈래 머리 소녀가 생각에 잠겼다. P군의 눈에도 과연 나무들의 생김새가 영 이상해 보이긴 했다.
"그럼 제주도 근처려나?"
"글쎄... 제주도라도 그런 나무 아닐 텐데. 그런데 우리, 그렇게 멀리 떠내려왔을 리가 있어?"
또박또박 말하는 갈색 머리 소녀의 모습이 귀엽고 영리해 보였다.
"그러게..."
양갈래 머리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순간이었다.
"배고파. 목말라."
안경 소녀가 명랑하게 말했다. 그제야 일동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앞으로 발걸음을 뗐다.
"참, 그렇지. 우리 목적을 잊으면 안 돼."
긴 머리 소녀가 말했다.
"너희들, 눈을 크게 뜨고 '시냇물'이 있는지 잘 찾아봐. 며칠 안에 여기서 나가지 못할 거라면 식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거든. 아참, 물을 찾았다고 해서 무턱대고 마시면 안 돼.
유독 성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냄새를 맡아보거나 손등에 발라볼 것!"
"너 정말 믿음직스럽다."
P군이 진심으로 감탄하는 말에, 긴 생머리 소녀는 자랑스러운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음... 사실 나 걸스카우트였어."
"물이다!"
양갈래 머리 소녀의 새된 외침에 앞을 바라보니 과연...
수풀에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폭 1m 남짓의 작고 귀여운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 물고기가 사는데? 그럼 마셔도 되는 거지?"
"음 어디 보자... 정말이네! 마셔도 돼."
일행은 물을 보자 그제서야 자신들이 얼마나 목이 말랐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겁지겁 시냇가로 달려가 손을 컵 모양으로 오목하게 만들어 정신없이 퍼마시기 시작했다. 모래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맑은 물이었다.
"흐읍.... 하아... 맛좋다..."
"어머... 나 이렇게 목 말랐었나... 꿀꺽.."
"꿀꺽... 꿀꺽..."
"아앙, 시원해!"
양갈래 머리 소녀가 물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야! 뭐하는 짓이야! 더럽게!"
"하지만 덥단 말야?"
양갈래 머리 소녀가 걸어들어가자, 물의 정확한 깊이를 알 수 있었다. 꽤 얕아 보였는데 의외로 허리까지 왔다.
"이야, 이렇게 깊은 물이었구나! 그런데 바닥이 보인다니 참 맑네!"
"P군, 지금 감탄할 때가 아니야. 아영이가 들어가서 더러운 물이 됐다구."
안경 소녀가 눈썹을 찌푸리며 양갈래 머리 소녀에게 물을 튀겼다.
"나가! 나가라구! 목말라 죽겠는데 뭐하는 짓이야!"
"내가 더러워? 내가 더럽냐구?"
"더럽지! 마시는 물에 뛰어드는 사람이 어딨어!"
"난 더러운 여자야? 그런 거야?"
"궤변 늘어놓지 말고 빨랑 나와."
양갈래 머리 소녀는 안경 소녀에게 물세례를 맞아 이미 옷이 전신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여름 교복은 세일러복이다. 남색 두 줄이 간 넓은 카라가 달린 흰색 상의, 그리고 그 두 줄의 색과 같은 색의 치마. 물에 젖자, 흰색의 상의 아래로 살빛이 비쳐 전체적으로 흰색이 아니라 살구색
옷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에잇, 맛 좀 봐라."
양갈래 머리 소녀가 안경 소녀의 손목을 잡고 힘껏 끌어당겼다.
"아앗!"
그녀는 첨벙하고 물 속으로 엎어졌다. 물 속으로 온 몸이 들어갔나 싶었는데, 다시 금세 푸우 하고 머리가 나왔다.
"아아! 이게 뭐야!!"
그녀는 넘어지면서 안경이 벗겨진 모양이었다.
'핫....'
P군은 두 번 놀랐다.
첫 번째로 그녀가 그 정도로 미소녀일 줄은 몰라서 놀라고, 두 번째로는 물에 젖어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녀의 바스트 사이즈 때문에 놀랐다.
<-- 오타쿠와 소녀, 그리고 불 피우기 -->
"내.. 내 안경 어디 갔어."
그녀는 더듬거리며 안경을 찾아 헤맸다.
'이름이 유라라고 했던가...?'
아까 한꺼번에 소개를 받아 이름이 잘 안 외워지는 p군이었다. 하긴, 그는 평소에도 사람 이름을 잘 못 외우긴 했다.
"어이, 서유라, 여기 네 안경 있어."
P군은 그의 앞쪽으로 냇물을 따라 흘러 내려온 안경을 주워 흔들었다.
"으응...?"
그녀가 냇물을 따라 철벅거리며 이리로 걸어왔다. 시력이 꽤 나쁜지 가까운 거리인데도 손을 뻗어 더듬거리며 가의 돌을 잡고 왔다.
"으응... 어디 있어?"
P군이 막 안경을 건네주려 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짜릿한 느낌이 전신을 스쳐지나갔다...!
엉뚱하게도 그녀가 손을 뻗어 중요 부위(!) 근처에서 휘젓고 있는 것이었다.
'어헉...'
"아니... 거기가 아니라..."
P군이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안경을 건네 주자, 서유라는 몇 번 더 헛손질을 한 뒤에 안경을 건네받았다. 일단 안경을 쓰자 평소와 같은 태도로 돌아왔다.
"너 정말 눈이 나쁘구나...?"
"응. 이 안경 없이는 못 살아."
가까이 다가온 그녀를 보자, 자연스레 바스트로 눈길이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방금 전의 예상치 못한 접촉도 그렇고, 하나같이 강도가 센 자극이라 P군은 전심전력으로 건전한 생각을 하려 애썼다.
'양을 셀까나...'
"어쨌든 우리는 한시름 놓은 거야. 마실 물도 찾았고 물고기도 있으니까..."
양갈래 머리 소녀, 아니 윤...
"너 이름이 뭐랬더라?"
"윤아영! 변태는 머리도 나쁘니?"
"..."
... 윤아영이 말했다. 왠지 미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P군은 어쩐지 우울해졌다.
'이거 구조될 때까지 계속 이럴 것 같은데? 역시 첫인상은 중요하군.'
"그런데 불은 어떻게 피우지? 누구 라이터 없어?"
갈색 머리 소녀 홍세린의 말이었다.
"바보... 누가 라이터를 가지고 다녀?"
"우리 고등학생이잖아."
"아 그렇네..."
홍세린이 머뭇거리다가 문득 P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곧이어 다른 소녀들도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뭐지, 이 시선은?'
"P군은 라이터 없어?"
"뭐, 뭣? 내가 담배라도 피울 것 같다는 뜻이야?"
"그건 아니지만..."
홍세린의 말을, 서유라가 명쾌하게 끊었다.
"사실은 그래."
"... 없어! 없다고! 게다가 라이터는 물에 젖으면 못쓰게 돼..."
"방수 라이터라던가?"
"없다고!!!!!!!!!"
"할 수 없네..."
'뭐지? 저 기분나쁘게 모두들 풀이 죽은 모습은? 내가 라이터를 당연히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1/10000의 확률로 없는 것을 확인하고 실망한 듯한 저 얼굴들은?'
"걸스카우트에서 배운 대로라면 나무의 마찰열을 이용해도 된다고 했는데..."
긴 생머리 소녀 강아름의 말이었다.
"뭐야? 왜들 또 나를 쳐다보는 거야?"
"..."
"알았어. 알았다고..."
그로부터 장장 5시간 동안 P군은 근처의 마른 나뭇가지 중 적당한 것을 주워 열심히 비비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