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0)

<-- P군과 소녀들 -->

"확실히 장마인가보다."

"아까까지만 해도 맑더니.. 왜 하필!"

두 소녀가 이런 대화를 나누며 빗속을 뛰어가고 있었다. 장대같이 내리는 비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은 채. 날씨 때문인지 늘 인파로 북적이던 거리인데, 오늘은 사람이 없다.

쇼윈도에 진열된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서울 ㅇㅇ구 소재 ㅇㅇ고등학교 1학년 5반, 12반 학생들 70명이 탄 배가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전원 실종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들이 떠난 수학여행지는 울릉도이며... 〉

"쟤들 다 죽었겠지?"

"다는 아니라도 꽤 많이 죽지 않았을까?"

〈지도교사인 최ㅇㅇ 씨와 윤ㅇㅇ씨는 인근 해역에서 구조되었습니다. 다른 반 학생들이 탄 배는 무사히 도착하여 모두 귀가한 상태로, 더욱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지고, 커다랗게 틀어 놓은 TV 소리도 뒤쪽으로 멀어져 갔다.

그들은 한결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분위기의 고요한 해변. 해변가 여기저기에는 파도에 떠밀려 온 듯한 사람들이 죽은 듯이 널부러져 있다.

제일 먼저 정신이 든 건 갈색 머리의, 유난히 얼굴이 창백한 소녀였다.

"으... 음....."

여기까지 떠밀려 오는 사이에 갖은 고초를 겪은 모양인지, 옷의 이곳 저곳이 찢어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상의와 하의 가릴 것 없이 구멍이 나 흰 속살이 드러나 보였다.

"음.... 여긴.... 어디....?"

가늘게 눈을 뜨긴 했지만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다. 잠시 말없이 두리번거리는 그녀.

눈 앞에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야자수 숲이 보일 뿐이다. 바람이 불어올 적마다 살랑거리며 이파리가 흔들렸다.

곧이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빽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널부러진 친구들을 보고 놀라서 지르는 소리였다.

그 새된 소리에, 쓰러져 있던 형체들이 하나 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뭐야... 좋은 꿈 꾸고 있었는데...."

"으으응...."

"아아... 엄마...."

"뭐야...? ... 아으으..."

해변에 쓰러져 있던 사람은 갈색 머리 소녀를 제외하고 총 네 명. 남자 하나, 여자 셋.

"다... 다 괜찮은 거지?"

처음에 소리를 지른 갈색 머리 소녀가, 이번엔 울음을 터뜨렸다. 창공에서는 갈매기가 끼룩하고 우는 조용한 해변가에, 그녀의 곡이라도 하는 듯한 울음 소리가 메아리쳤다.

정신을 차린 나머지 여섯은 그녀를 바라보다, 서로를 바라보다 하며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우리가... 왜... 여기 있는 거지?"

"혹시...."

"기억 안 나? 그 파도...."

양갈래 머리를 한 새침해 보이는 소녀의 말이었다.

"그래... 우리는 조난을 당한 거야..."

이번엔 안경을 쓴 소녀가 중얼거렸다.

"조난..."

"그럼 다른 애들은 어디 있지?"

"담임은?"

"어... 어떡해......"

"야, 울지마."

갈색 머리 소녀가 다시 울먹이자 긴 생머리에 카리스마 있어 보이는 소녀가 말을 끊었다.

"운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아.... 그보다.... 넌 정신이 드냐?"

이곳의 유일한 남자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음."

"그래, 그럼 좋아... 누구 아픈 데 있는 사람?"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믿음이 가는 구석이 있어, 모두들 그 목소리를 통해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

"아무도 없다니 다행이네. 근데 남자."

"응?"

"넌 우리 반이 아닌데?"

"아, 난 5반이야."

안경 낀 소녀가 끄덕였다.

"맞아. 우리 반이랑 5반이 같이 탔었어."

"그렇군... 넌 이름이 뭐야?"

"나? 나는 그냥..."

남자는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갑자기 강한 통증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아아...."

"괜찮아?"

긴 생머리의 소녀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남자 쪽으로 허리를 굽혔다.

"어.. 응... 나는... 내 이름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 미안. 생각이 나지 않아."

갈색 머리 소녀의 커다란 눈이 더 커다랗게 되면서, 그녀는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바보야, 왜 니가 겁먹는 거야. 남자, 괜찮아.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조금 놀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지... 음...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 이름 영문 이니셜에 P가 들어갔던 거 같아.. 그거 외에는 떠오르는 기억이 없어..."

"P?"

"P."

"그럼 우리가 너를 P군이라고 부르면 되겠다."

"그러든지..."

긴 생머리 소녀는 고개를 까딱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소개를 할게. 우리는 전부 12반이고, 내 이름은 강아름이야. 여기 갈색 머리는 홍세린이고, 우리 반 반장. 안경 쓴 애는 서유라, 양갈래 머리는 윤아영."

"안녕."

"안녕."

"흑..."

갈색 머리도 인사를 하려고 한 것 같은데 다시 흐느꼈다.

"울지 말라니까? 이 바보!!"

긴 생머리 소녀가 다그쳤다.

"어, 나는 5반의 P군...."

"됐어. 자기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뭘 소개를 하려고 그래. 그리고 그 정도는 우리도 이제 아니까."

이제 P군의 머릿속은 제법 또렷해졌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것만 뺀다면 말이다. 마치 긴 잠을 잔 뒤 완전히 잠이 깬 것 같은 상태가 되어,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네 소녀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 보았다. 그녀들은 햇살을 등지고 서 있었다.

키가 크고, 발육 상태가 좋아 보이는 긴 생머리 소녀는 클래식한 미인이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정의감 넘쳐 보이는 얼굴.

갈색 머리의 얼굴 창백한 소녀는 굉장히 호리호리한 타입으로, 금세라도 다시 울어버릴 것 같은 여린 표정 때문에 가장 기억에 남는 타입. 순정만화에라도 나올 것 같은 미소녀다.

안경 낀 소녀는 만화에서 갓 튀어나온 것 같은 느낌의 귀여운 미소녀로, 성격도 좋아 보이고, 어딘지 모르게 똑똑해 보인다.

양갈래 머리의 소녀는 눈꼬리가 올라가 새침해 보이고 말투도 조금 그런 편이지만, 은근히 챙겨줄 것 같은 부류의 세련된 미인.

'어? 미소녀들 뿐이네. 아, 그보다...'

양갈래 머리 소녀의 흰 세일러복 반팔 아랫부분에 무언가 흰 것이 치렁치렁 늘어진 것이 보였다.

"너, 팔 밑에 그게 뭐야?"

"응?"

여자애들이 모두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표정의 안경 소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야, 너 브라..."

양갈래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갑자기 P군쪽으로 발길질을 해댔다. 느닷없는 모래 세례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래 투성이가 된 P군...

"이 변태!! 보지마! 보지마!!!"

"뭐? 내, 내가 변태라고??!!!!!!"

파란만장한 무인도 표류기의 시작.

<-- 물! 물을 찾아라! -->

"뭐야, 이렇게 발길질을 해 대다니... 전부 모래 범벅이 돼 버렸잖아. 봐. 젖어 있는 티셔츠에 모래가 달라붙어 버렸어. 어떻게 할 거야. 이거 한 벌 뿐이라고."

P군은 짐짓 화난 듯 중얼거렸다.

"그래. 아무리 부끄러워도 그렇지, 좀 오버한 거 아냐? 지금 우리는 무인도일지도 모르는 섬에 조난을 당해 있는 거라구. 좀 더 이성적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

긴 생머리 소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P군에게 사과해."

"뭐?"

양갈래 머리 소녀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저 변태한테 사과하라고?"

"내가 왜 변태야?"

"변태지!"

"뭔 소리야?! 솔직히 니가 지금 무슨 일로 나한테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P군의 목소리가 앙칼진 양갈래 머리 소녀의 목소리에 지지 않고 해변가에 쩌렁쩌렁하니 울려퍼졌다.

'흠... 나 연기 좀 되는데?'

"그... 그래?"

약간 머뭇거리는 듯한 양갈래 머리 소녀의 목소리. 화가 나서 돌아선 P군의 귀에, 여자들끼리 조그맣게 속닥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 남자애들은 모를 수도 있어."

"... 이 나이에? 우리 고등학생이잖아."

"... 뭐 여러가지 타입이 있으니까..."

"... 아냐. 저건 순 거짓말이야..."

"... 거짓말이라도 네가 좀 심하긴 심했다..."

잠시 후, 돌아선 P군의 어깨를, 양갈래 머리 소녀가 가볍게 두드렸다.

"흐,흠... 어쨌든 미안해. 우리 이 정도로 하고 끝내자. 다신 이 얘기 하고 싶지 않아."

"좋아."

그때였다.

"목말라. 배고파."

안경 소녀가 폭탄 선언을 했다. 그녀의 원초적인 두 마디에 일동은 사색이 되었다. 조난당한 신세에 있어 이보다 더 무서운 말은 없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흐... 흐흑......"

"내가 아까부터 그만 울라고 했지."

갈색 머리 소녀가 자동적으로 다시 흐느끼기 시작하자 긴 생머리 소녀가 이번엔 약간 짜증난다는 투로 꾸짖었다. 그러는 그녀들을 보며 P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도 짜증이 나겠다.'

"울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저 숲 속으로 들어가 물이라거나 먹을 것을 찾아보자."

긴 생머리 소녀의 의젓한 말이었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그리고 너... 갈색 머리. 그만 울어."

"으... 으응...."

P군의 말에, 갈색 머리 소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울음을 삼키는 성의를 보였다.

"그럼 들어가보자."

일행은 야자수 이파리들이 늘어져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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