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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탑 모니터 불빛만이 형형하게 밝히는, 태환의 방은 늘상 그렇듯 담배 연기만 을씨년스럽게 피어 올랐다. 꽁초가 가득 쌓인 재떨이에 또 하나의 담배 꽁초를 비벼 끈 태환은, 남자에 어울리지 않게 묶어 넘긴 긴 뒷머리를 흔들거리며 고개를 조금 들었다. 낮이라도 빛 하나 들지 않게 가린 커튼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태환은 이번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돌을 깎아 만든 것처럼 조각된 거대한 인간 형상이 큰 창을 들고 바다를 누비는 모습. 포스터의 배경에는 흐린 날씨 속에 빗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마치 ‘실버레인’처럼.
“…….”
삐-. 삐-. 삐-. 삐-.
적막하기 그지 없는 방 안에서 들려오는 경고음. 태환은 자신의 머릿속도 경종이 울리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몸이 굳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것을 뿌리치기라도 하듯 바닥을 발로 차 의자를 뒤로 쭉 밀었다.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난 의자는 그를 근처 책장으로 안내했고, 태환은 방금 소리 냈던 호출기를 집어들었다. 짙은 회색 빛의 조그만 직육면체 모양이었지만 태환은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며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것이 울렸다는 건… 그리고 이것을 울릴 만한 단 한 사람은…….
태환은 이번엔 모니터 옆 핸드폰을 집어들었고 급히 전화번호 저장란에서 선영의 이름을 클릭했다. 신호가 가지 않았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라는 알림음만 들려올 뿐이었고, 태환은 불안감이 현실로 나타났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녀에게 보냈던 ‘수호천사’는 다름 아닌 위치추적이 되는 무선 호출기였다. 초소형의 그것은 주머니에 넣거나 허리끈 부근에 열쇠고리처럼 매달아서 잘 발견되지도 않게 가지고 다닐 수 있다. 최후의 상황에 사용하기 용이하지만 그것이 작동됐다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라는 뜻도 된다….
태환은 이마를 짚고 빠르게 생각했다. 사실 더 판단할 것도 없었다. 그는 이 때가 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고 있었고, 단지 쉽지 않은 모든 일이 그렇듯 몸이 받아들이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급박한 상황은 그런 여유분을 별로 제공하지 않기에 태환은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의자에서 일어섰다.
- 자, 그럼 남성을 사로잡는 귀여운 춤. 아리 춤을 우리 모두 한번 배워볼까요? 자리에서 일어서서 가볍게 인사하는 것처럼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
하얀 롱티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침대 위에 앉아, 커피땅콩을 와작거리던 예나는 갑자기 침대 밑으로 내려와서 불쑥 섰다. 그리고는 TV에서 나오는 멘트에 집중하며 똑같이 따라하기 시작했다. 안녕? 하는 것처럼 손바닥을 내밀고.
- 그 손바닥을 유지하며 천천히 원을 그리듯이 팔을 앞으로 돌려요. 다른 쪽 손도 마찬가지로 번갈아가며. 그러면서 다리는 문워크를 하듯 제자리에서 가볍게 스텝, 스텝. 꼬리는 그냥 살랑살랑 흔들어주면 돼요 -
- 선생님, 우린 꼬리가 없잖아요 -
- 아하하. 미안해요. 그만큼 정말로 아리가 되어본 기분을 느껴보라는 의미에서 말씀 드린 거구요. 엉덩이만 약간씩 흔들어주세요 -
“까고 있네. 어디서 되도 않는 드립을. 빨리 다음, 다음.”
예나의 독설을 들은 것마냥 아리 춤을 선보이는 선생(?)은 곧 다음 동작을 선보였다.
- 두 주먹을 살짝 쥐어 오른팔을 옆으로 쭉 뻗고, 왼팔은 이렇게 머리 위로 흔들면서~ 허리를 양 옆으로 흔들어주세요. 두 번 흔들고 손을 바꿔 흔들고~ -
“이렇게? 이렇게?”
한동안 TV에서 나오는 동작을 따라해보던 예나는 잠시 후, 방 한 켠에 놓여진 전신 거울 쪽으로 걸어가서 한번 더 아리 춤을 추어보았다. 기억을 돌이키며, 또 아리의 모습을 자신과 매치시켜보며 추던 그녀는 이윽고 한 손을 허리에 얹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비춰보면서 ‘후’하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정말 이러면 나도 귀여워 보이려나?’
그녀에게 얻어맞았던 (친구의 헌팅을 도와주려다 되려 낚인(?))청년이 들었다면 마시던 물을 뿜을 법한 생각을 해보던 예나. 그녀는 갑자기 아래층에서 들려온 익숙한 부름 소리에 자리를 박차듯 바로 문 쪽으로 뛰어갔다. 목소리는 익숙하지만 어조는 익숙하지 않다. 필시 담배 심부름 따위가 아닌, ‘그것’의 발동일 것임을 그녀도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나는 꽤 낯선 광경을 보게 되었다. 언제까지고 방 안에 틀어박혀있을 것만 같던 오빠가 거실로 나와있는 것도 사실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이따금씩 화장실이나 샤워하러 가는 것을 제외하면 2년 넘게 방 안에만 틀어박혀있는 완벽한 히키코모리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던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종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외투를 걸치고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긴박한 상황임을 알고 있는 예나로서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해? 예나야, 빨리 차에 시동 걸어. 시간이 없다.”
“어…? 어, 어….”
예나도 그제서야 걸치다 만 재킷을 허둥지둥 여미었고, 현관쪽으로 앞장 서 달려나갔다. 태환은 신발장 한 켠에서 기억 속 자신의 신발을 겨우 찾아 신으면서 2년 전 평범하게 외출을 할 때의 자신 모습을 상기해나갔다. 시간이 지나도 몸은 기억하고 있는 느낌이군. 몇 년 더 틀어박혀있으면 달라지려나?
하지만 태환이 인간의 적응력에 관한 신비로움을 만끽할 여유 또한 없는 게 사실이었고, 그래서 바깥의 찬 겨울 밤공기가 살갗에 와 닿는 생소함도 그대로 흘려버려야 했다. 그는 주택 앞마당 잔디에 깔린 디딤돌들을 조심스레, 하지만 빠르게 밟으며 전진하였다. 어느 새 차를 현관 앞으로 몰고 온 예나는 내려서 부축할까 생각하다가 태환이 됐다는 의미로 손을 흔들자 몸을 뻗어 조수석 문만 열었다. 태환이 승차하자 예나는 고개를 돌려 오빠를 바라보면서 걱정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괜찮겠어, 오빠?”
“응. 뭐, 바깥 세상도 별다를 게 없네. 2년 갖고 되겠어? 20년쯤은 차단해야 면역력이 좀 없어지든가 하지, 하하.”
그렇게 말하는 태환의 턱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고 예나는 차를 출발시키려다 기어를 붙잡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이제 완연하게 어두워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 하지만 가로등 광원 때문에 주황빛의 그곳을 올려다보며 -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나야 뭐 오빠 명령이니까 무조건 따라하지만서도… 도대체 그 은선영인가 하는 애가 뭐길래 과거에도 오빠를 힘들게 하고, 현재에 와서도 이렇게 무리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단 말야. 직장에서 짤리고 오빠가 이런 상태가 되었다 할지언정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버린 그 선영인가 하는 년. 만나면 내가 먼저 뺨이라도 갈겨 주고 싶을 정도라고.”
“그만해. 예나야.”
“오빠는 도대체 그런 여자한테 왜 그렇게 집착해?”
“집착이 아냐…. 내가 이렇게 됐기 때문에 떠난 것도 아니고.”
예나는 따지듯 뭐라고 더 물어보려 하려다 태환이 고개를 돌리고 창 밖만 바라보고 있자 입을 다물었다. 더 대답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짐작한 그녀는 이 모든 게 선영 때문이라고 속으로 되뇌면서 거칠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리고 그녀는 흥분 속에서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떠올리곤 앙칼진 목소리를 내었다.
“아무리 솜씨 좋은 운전수라도 목적지를 모르면 제 기능을 못하죠. 실력 발휘 좀 하게 해주실래요, 오라버니?”
“스필라크 신시가지. 건물명까지는 잘 모르겠군. 뜨지 않는 걸 보니 신축건물 같긴 한데 일단 그쪽으로.”
태환은 그런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했던 것처럼 거의 동시에 대답했고,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위치 추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 집중할 여건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혈기왕성한 예나의 상황 처리 능력이 발동되며 아드레날린이 쏟아지는 듯 거침없이 액셀을 밟고 기어를 당겨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분노의 질주와도 같았고, 그래서 태환은 네비게이션 역할조차 쉽사리 수행하지 못하고 2년만의 외출이 마치 폭카족과 함께 하는 가차없는 드라이브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선영은 레게 머리 남자가 자신을 덮칠 때까지도 기식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자기 위에 올라탄 남자가 가슴을 만질 때까지만 해도 고개를 젖혀 멍하니 기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 이성의 끈을 붙잡아 위치추적 호출기를 발동시키고 난 후, 그 남자가 자신의 원피스 치맛자락을 걷어올리자 움찔 하고 떨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강간하는 입장으로 하여금 흥미를 돋우는 촉매제가 되었을 뿐이었다.
“호오…? 이것 봐라. 반응은 하는데.”
선영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내리려 하자 레게 머리 남자는 손가락으로 그녀 아랫도리를 가리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같은 패거리들도 그런 그의 모습에 한바탕 왁자지껄한 웃음을 터뜨렸다. 몸집은 작지만 간사하게 생긴 불량배 한 명이 각목을 주차장 바닥에 탕하고 내려치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 거참. 얼른 좀 쑤셔 박아보지 그래. 다음은 나라고. 니 혼자만 생각하냐?”
“가만 있어봐. 이런 건 전희가 중요하다니깐. 여자랑 할 때 전희가 중요하게 작용한단 말 못 들었냐? 이 새끼네 섹스 할 줄 모르네.”
“그런데 다음이 너라면 기식은 언제 하냐? 우리 다 하고 나서 걸레가 된 보지랑 할 건가? 크크크….”
잘들 논다. 기식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들의 잡담을 한 귀로 흘려버리곤 바지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주차장 기둥에 기대어 서서 연기를 길게 한모금 내뱉은 그는 슬쩍 차가운 시선을 선영에게로 향했다. 고개를 젖힌 채 흐트러진 머릿결 사이로 힘겹게 기식을 바라보는 선영. 그런 그녀의 눈물 가득한 표정과 마주치자, 기식은 픽하고 웃었다.
눈물이 많아진다는 것은 현실을 인정하게 된다는 뜻이지. 결국 내 ‘의도’가 제대로 먹혀들어간 건가? 하지만 기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입에서 실낱같이 나온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기식 씨. 제발 그러지 말아요. 당신은 그런 분이 아니잖아요. 그런 분이….”
기식은 마치 쓴 것을 토해버리듯 침을 옆으로 뱉었다. 그리고는 담배를 거칠게 씹어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년이야? 저 남자가 지금 네 팬티를 벗겨내고 있는 것도 느껴지지 않나? 차라리 비명을 지를 것이지, 정말 못 봐주겠군. 기식은 그녀에게 한걸음 다가가며 나지막하게, 하지만 또박또박 제대로 들으라는 듯 말했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하, 그래. 당신은 끝까지 내 거짓된 친절함을 진실이라 믿고 싶은 것 같은데, 그럼 이렇게 말해드리죠. 당신이 날 믿는 것만큼 내 말에 담긴 진실성도 믿어주시죠. 나.는.당.신.을.복.수.의.대.상.으.로.보.고.이.런.상.황.에.빠.뜨.렸.습.니.다.”
그리고 기식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검지와 중지에 담배를 낀 손을 슬쩍 들어올려 보이며.
“뭐 날 원망하기 싫으면 당신의 내면에 있는 그 본래의 자신을 원망하든가요.”
“전 본래의 그녀를 원망하지 않아요. 그리고… 기식 씨, 당신도…….”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기식은 그만 분이 확하고 치밀어올라 그녀를 향해 다시 거칠게 몸을 돌렸다. 기식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이없는 모습이었다. 선영은 이젠 아예 - 여전히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지만 - 미소까지 띠는 모습으로 한결같이 기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끝까지. 한줄기 희망을 갈망하는 모습으로.
기식은 이런 미친 바보 년을 어떻게 욕해줄까 머리를 굴리다 문득 그의 시선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레게 머리 남자가 자신의 울퉁불퉁한 좆을 꺼내 들고 그녀의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는 모습이었다. 이미 팬티가 완전히 벗겨져서 한쪽 발목에 두르듯 걸쳐져 있는 모습은 그녀의 파멸을 예감함과 동시에 시작되는 상징을 내포하고 있었다.
기식은 고개를 숙여 기다란 백금발 앞머리칼로 자신의 눈가를 숨겼다. 그리고는 히죽 하고 웃었다. 그의 가지런한 치아가 살짝 빛을 발하는 듯하다. 피던 담배를 옆으로 던져버린 그는 감정을 억누르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당신에게 이 세상의 현실을 직시시키기엔, 당신은 아직 너무 어린 것 같군요. 예. 제가 졌습니다. 이건 참… 다른 의미로 지독하군요. 대체 이런 상황에서도 당신은… 당신이란 여자는…… 하…….”
“어이, 기식. 이제 좀 그만 말하지 그래? 집중이 안 되잖…….”
“그리고 이건 제 속죄입니다.”
콰악-!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식은 몇 발자국 순식간에 그녀에게 걸어오나 싶더니, 레게 머리 남자의 턱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무릎 꿇고 앉아있던 레게 머리 남자는 그의 발차기에 강제로 다리가 펴지면서 상반신을 뒤로 쭉 펴며 나동그라졌다. 말하던 혀는 그대로 씹혔는지 비릿한 피가 그의 입안을 가득 머금다가 바깥으로 쿨럭거리며 토해져 나온다.
“……!”
“……!”
레게 머리 남자는 물리적 충격과 정신적 충격에 휩싸여 주차장 바닥에 허우적대었다. 그는 잠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각하지 못하는 듯하다가 별안간 기식을 노려보며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연이어 그는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도로 쓰러졌다. 어찌나 제대로 턱을 맞았는지 뇌까지 흔들린 기분이었다.
이어서 뒤쪽에 군집해있던 패거리들이 하나 둘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뭐냐, 기식. 지금 뭐하는 거야?”
“지금 네가 고용한 우리 패거리를 친 거냐?”
“아주 죽으려고 환장했구만?”
파직-!
기식의 벤츠 앞유리가 찌그러지듯 금이 가며 깨졌다. 보닛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각목으로 강타한 것이었다. 기식은 쓰러져있는 선영 앞에 서서 등을 보인 채 낮은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빨리 옷이나 추슬러 입고 내 뒤에 서요.”
“기식 씨…?”
선영은 멍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기식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선영이 비척비척 일어서서 흐트러진 옷을 추스르며 묻는 시선을 보낼 때도 돌아보지 않았다. 선영은 그의 이름을 한번 더 부를까 생각했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뭐였을까. 왜 그에게 말을 건넬 수 없는 걸까. 언제까지고 친절한 미소로 답해줄 것만 같던 그에게 말을 건넬 수 없는 이유…….
선영은 아주 어렴풋이, 마치 성인이 다섯 살 때의 기억을 들추어보는 것처럼 희미한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 그건 본심이었다. 기식의 내면 속에 끝까지 감춰진, 정작 기식은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그런 본심. 강간의 향연으로 선영을 몰아붙이고 ‘이것이 내 본심이었다’라고 했지만 그것 또한 가면 속의 가면이었을 뿐. 진정한 본심을 드러낼 때는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더욱더.
기식은 여태까지 한낱 바람둥이 같은 가볍고 능숙함을 자신의 본모습이라 여기고 만족하고 있었다. 그것을 너무도 오랫동안,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기에,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춰진 또다른 본심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짜’일 수도 있던 것을. 그러나 때때로 타인의 눈에는 자신도 모르는 본심이 비쳐질 수도 있는 법이고, 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것을 발견하기 쉽다. 경희나 유라가 그런 경우였다.
그러나 그런 여자들처럼 평범한 인간이 아닌 선영은, 더군다나 두 번의 가면을 거친 그의 친절함만 바라보던 선영의 입장에서는 극한 상황이 되어서야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더불어서 기식이 왜 그런 감정을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선영 자신 때문에 원하지 않는 내면이 끄집어내어졌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 죄책감 때문인가 하는, 보다 표면적인 감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이건… 언제부터인가요.”
“…방금.”
“아니요.”
그러나 이해는 할 수 없어도, 통하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선영은 그가 자신을 언제부터 구할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를 단문적으로 물었고 기식은 대답했다. 그리고 선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부터일 거에요. ‘열쇠 없는 집’이란 영화를 보고 식당에서 저에게 화를 냈던 그 당시. 평소완 다르게 보였던 그 때의 모습이… 이상하게 잊혀지지 않았어요. 어쩌면 그 전부터 제가 눈치채지 못했을 순간에, 그 비슷한 감정이 들었는지도…….”
기식은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툭하고 내뱉고 말았다.
“예리하시군요. 그러니 절 미워하시면 됩니다. 그러고도 계속 당신을 속여온 거니까.”
그리고 선영은 그 순간, 경희나 유라가 느꼈던 기식의 내면 깊숙한 본모습을 그녀도 확실히 알아챌 것만 같았다. 선영은 갑자기 아까와는 다른, 하지만 더 큰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역시…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고. 그를 연모하게 된 자신의 감정은 옳았던 것이라고. 그 순간 마주보고 있지 않는 둘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궁극적인 무언가가 단단하게 엮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와 닿고 있었다.
기식도 그런 걸 느끼고 있었으나, 사실 그에겐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상황이 그러하지 않았다. 그가 고용했던 패거리는 이제 그의 목숨마저 위협하는 살기가 되어 대면한 상태였다. 또한 선영과는 다르게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결벽증이 존재하는 기식으로선 여전히 그것을 인정하도록 두지 않았다. 그는 그저 복수의 대상에게 갖지 말아야 할 싸구려 연민이 불러온 감정이라고 자신만 탓하고 있었다.
“기… 기식. 너 미친 거냐? 어… 어쩌려고 그래?”
옆에서 지켜보던 형준 역시 놀라움에 노트북을 떨어뜨릴뻔하곤 재차 고쳐잡으며 그와 불량배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 형준은 패거리 중 한 명이 물러나라는 눈짓을 보내자 주춤주춤 기식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멀찍이 떨어져있는 경희한테까지 다다라서야 한숨을 쉬었다. 물론 불안한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형준은 문득 경희를 돌아보았다. 어찌된 것인지 그녀는 주차장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무표정으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이동하여 형준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허둥지둥 다시 노트북을 껴안으며 앞쪽을 바라보았다. 패거리들과 기식은 이제 한두 발자국 앞까지 가까워진 상태였다.
가장 앞쪽에 선 사내가 주머니에서 슬쩍 손을 빼 드나 싶더니 거칠게 전방을 향해 휘둘렀다. 기식은 상체를 약간 뒤로 빼면서 한 스텝 뒤로 물러나 공격을 피했고, 동시에 순간적으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손에는 불룩불룩해 보이는 검은 너클이 끼워져있었다.
수발자국까지 뒤로 물러나 있는 선영이 비명도 못지르고 숨을 들이키는 것도 잠시, 간사한 인상의 사내가 옆쪽으로 치고 들어오며 각목으로 기식의 무릎 뒤쪽을 공격했다. 타악-! 백금발 머리칼이 눈가를 가리며 기식은 이를 아득 물었다. 그는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한 걸 간신히 버텨내곤 팔꿈치로 그 사내의 코를 가격했다. 피가 흩뿌려지며 그 피가 주차장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건장한 사내가 곧바로 돌진해들어와 주먹을 날렸다.
복싱 경력이 있는 사내였다. 민첩하고 정확한 타격에 기식 또한 입술이 터지며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아픔을 느낄 사이도 없었다. 패거리들은 곧바로 다음 공격을 쉴새 없이 퍼부으며 들어갔고, 자칫하면 곧바로 일방적인 몰매 양상이 될 것이었다. 너클을 낀 사내의 펀치와 각목들이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며 휘둘러졌다. 기식은 있는 힘껏 바닥을 차 뒤로 길게 몸을 빼내었고, 순간 주차턱에 한쪽 다리가 걸리며 상체가 뒤로 쏠리었다.
“합…!”
선영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다시금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삼켰다. 기식은 재빠르게 몸을 움츠려 뒤로 한 바퀴 구르듯 낙법을 쳤다. 보통 사람이 보기엔 혀를 내두를만한 솜씨였으나 사실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패거리들은 순식간에 그에게 다가가서 그가 일어서기도 전에 사정없이 얼굴을 올려쳤다. 그의 고개가 뒤로 꺾임과 동시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내가 주먹으로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퍼억-!
“끅…….”
불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기식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비틀거렸고, 조금 사이를 두곤 옆구리를 각목으로 후려치는 결정타에 털썩 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쿨럭…!” 거품과도 같은 침이 그의 입에서 떨어져내렸다. 앞쪽에 모여든 패거리들 사이에서 간사한 인상의 사내가 피가 흐르는 코를 훔치며 각목을 들고 걸어 나왔다.
“이 새끼가…!”
그는 기식의 관자놀이를 겨냥해서 각목을 들어올렸다. 배를 감싸쥐고 무릎을 꿇고 있던 기식은 순간 한 손을 들어올려 손바닥을 펼쳤다. ‘잠시’라는 제스처에 사내의 각목이 멈춘 건, 사실 이성이라기보다는 뒤에서 까무잡잡한 피부의 건장한 사내가 그의 손목을 잡아 제지한 결과로 봐야 옳을 것이었다. 레게 머리 남자는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를 제외한 네 명의 패거리들은 기식 앞에 일렬로 서서 어떻게 하나 보려는 듯 가만히 있었다.
기식은 잠시 후, 들었던 손을 내리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내 변심이 일으킨 잘못이다…. 계획은 취소다. 사과하지. 미안하다….”
“그뿐?”
미안하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패거리 중 한 명이 거의 곧바로 물었다. 그리고 기식 또한 재빠르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두 배다. 계획이 완수되었을 때 지급하기로 했던 돈 두 배를 내겠다. 그러니 저 여자와 나를… 조용히 보내주기 바란다.”
갑작스러운 소란만큼이나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지하주차장 내부에서, 다시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너클을 낀 사내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자신의 손에 끼워진 그것을 점검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기식은 그때까지도 백금발 머리칼로 눈가를 가리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얼굴을 쳐들며 고함치듯 외쳤다.
“어차피 네 녀석들 돈이 목적이 아니었나? 그래, 좋아. 애초의 계획에 따른 재미를 못 보는 대신, 그리고 다친 몇 명에 대한 치료비까지 감안해서 세 배다. 세 배! 아니, 네 배를 지급하겠어! 이 정도면 어때? 이것도 부족하나? 얼마를 원하나! 말을 해! 말을 해야 합의를 볼 것 아냐!”
몇 발자국 떨어져있던 선영은 여전히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왠지 기식이 저렇게 버거운 상황에 직면한 게 자신의 탓만 같았다. 선영은 누구 잘못을 떠나 이 상황을 모면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라도 돈을 같이 보태고 싶었다. 그러나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험악한 공기에 몸이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복서와도 같은 몸놀림을 보여주었던 까무잡잡한 피부의 건장한 사내가 허연 이를 드러내며 한 손을 허리에 얹고 말했다.
“열 배를 지급할 수 있나?”
“……뭐?”
“아니…. 설령 네 녀석이 열 배의 돈을 지불한다 해도 우리가 쉽사리 합의를 보게 될 것 같지 않군. 이쪽 상황이 훨씬 좋거든.”
기식은 갑자기 울컥해서 벌떡 일어섰다. 얻어맞은 부위의 통증이 그를 다시 주저앉히려는 듯 쑤셔대었으나, 기식은 온몸으로 전해지는 호소를 무시하며 그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의 목구멍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웃기는 소리 마…. 누가 쓰레기 같은 네놈들한테 그런 거금을 지불한대? 상황이 이렇게 놓이니 만만해보이나? 똑바로 제안해. 뚫린 입이라고 터무니없는 액수를 쉽게 내뱉지 말고!”
하지만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내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여유 있는 웃음을 계속해서 흘리고 있었다.
“이해를 못하나 보군. 그런 액수를 쉽게 내뱉을 만한 자금주가 이쪽에 있다는 뜻이라니까.”
악에 받쳐서 다시 아무렇게나 내뱉으려던 기식은, 간신히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며 멈칫했다. 자금주…? 나 말고 그런 사람이 있었나?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내는 이제야 상황판단이 되냐는 표정으로 더욱 짙은 미소를 띠었고, 다른 패거리들도 시시덕거리며 기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이 녀석, 이거 재미있는 녀석이네. 물론 기식은 그런 그들의 야유를 돌이켜볼 여유도 없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몇 발자국 물러섰다.
“애초에 기식, 너는 기대하지도 않았어. 우린 그런 자금주에게 옮겨 붙은 지 오래니까. 네 녀석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한테 준 모욕까지 합한다면 적어도 열 다섯 배? 스무 배도 모자랄지 모르지.”
“그게… 누군데……?”
무의식적으로 물어보듯 중얼거리던 기식은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주차장 한 켠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패거리들도 그게 정답이라는 것처럼 키득거리면서 같은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공포에 떨고 있던 선영도 차츰차츰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게 됨으로써, 그곳에 모여있던 모든 이들은 ‘중심점’이 되는 인물을 제외하곤 한 곳으로 집중하게 되었다.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 무심하게 서있는 경희 앞으로, 노트북을 한 손에 쥔 채 터벅거리며 걸어나오는 인물. 신형준은 경악한 기식의 표정을 본 듯, 주차장 불빛을 안경으로 반사시키며 조용히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