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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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왜 그래요?”

“아니, 저… 방금 뭔가 제가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을 누구한테 보여버린 기분이…….”

선영은 알 수 없는 꺼림칙함에 조수석쪽 백미러로 흘긋거리며 뒤쪽을 살폈다. 운전하던 기식은 그런 선영을 잠깐 보고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 시선이 느껴졌나요? 별 것 아니겠죠. 아니, 어쩌면 당연할지도요.”

“당연하다뇨?”

“선영 씨는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상당히 뛰어나고 매력적인 미모거든요. 게다가 근래에 저랑 만나면서 옷을 코디하는 솜씨도 매우 좋아진 것 같아요. 아마 우리는 아까 거리를 걸어오는 도중 매우 화사하고 그럴듯한 연인으로 보였을걸요?”

선영은 그런 그의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여… 연인이라니! 기식 씨와 내가…. 선영은 그만 얼굴이 빨개져서 조수석의 푹신한 시트 속에 폭 파묻히듯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고 선영은 이미 다 들키고 있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 들키려고 필사적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기식은 안절부절 못하는 선영을 다시금 흘긋 바라보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파멸의 길로 들어서면서 자신이 마치 천국에 와있다고 착각하는 눈뜬 봉사 같군.

“와, 이곳은 신시가지인가 봐요. 저도 여기까지 와본 적은 없는데, 건물들이 다들 깔끔하네요. 기식 씨 사무실은 이쪽에 있나요?”

“…아직 좀 멀었습니다만, 어쨌든 그 부근도 여기와 비슷합니다.”

선영은 기식이 설령 대답을 안 했다 하더라도 전혀 표정변화가 없을 것 같은 행복한 얼굴로 헤헤 웃으며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 계획의 그 장소로 다가갈수록 점차 초조해지는 기식과는 달리 선영은 빨리 그곳에 도착해서 ‘스피어’ 프로게임단 계약을 맺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기식과 종종 만나면서 언제까지고 데이트하고 싶은 아쉬움도 자리잡고 있었다. 본격적인 구단 활동을 시작한 후로도 이런 달콤한 사적인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을까 싶은.

기식이 어떻게 생각하든 선영은 현재 그를 완벽한 이상형으로 보고 있었다. 전생에 열렬히 사랑하던 사이가 아니었을까 싶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녀에 대한 사전조사부터가 이미 철저하고 연애에 뛰어난 스킬을 갖고 있는 기식은 선영이 바라는 것을 늘 100%에 가깝게 충족시켜주고 있었다. 언제나 따뜻하고 친절한 미소. 싫어할만한 소리는 절대 안하고 그녀로서는 신세계인 데이트 코스도 늘 새로 짜서 설레게 했다. 항상 집에 바래다주면서 키스 한번 하지 않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는 그에게, 선영은 설령 기식이라면 그 이상의 것을 주어도 괜찮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기식 씨, 날 가져요.’와 같은 망상 속으로 허우적댈뻔한 선영은 제풀에 화들짝 놀라며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허둥지둥 쓸데없는(?) 생각들을 날려버리기라도 하듯 선영은 자신의 뒤에 타고 있는 두 명의 스탭원들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런데… 계약을 하는 데 많은 절차가 필요한가요? 처음 보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서….”

“아니요. 뭐 아주 간단한 건 아니지만… 절차는 저희가 다 알아서 합니다. 은선영 분께서는 동의서 작성과 사인 정도만 해주시면 됩니다.”

형준은 준비했던 사무적인 멘트를 능숙하게 말했고 선영은 “그렇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앉았다. 사실 선탠이 짙게 돼있는 벤츠라 승미와 희주, 그리고 윤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뒷좌석엔 이미 두 남녀가 함께 타고 있었다. 한 명은 형준이었고, 다른 한 명은 중간에 갑자기 끼어든 경희. 계획의 시작점임을 알리는 합석과도 같았다.

기식은 경희가 계획에 참여한다는 것을 형준한테 들었을 땐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철저하게 의심을 지운다는 명목 하에 여자 스탭원처럼 가장하기로 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천경희 저 년은 이 계획에 끼려는 거지? 뭐 차인 그녀가 뭘 어떤 방식으로 도와주든 간에 난 그녀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얼굴만 좀 반반하다고 그걸 믿고 끈질기게 붙들어지는 여자 또한 내가 한두번 만나본 줄 아나? 기식은 천경희로부터 신경을 끄곤 포커페이스를 일관하며 운전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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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동-♪ 딩동-♪

커피를 마시던 혜진은 초인종 소리에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다. 그녀는 황급히 마우스 쥔 손을 놀려 데스크탑에서 실행되던 다운로드 창을 끄고 폴더를 닫았다. 그리곤 본능적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그럼 그렇지, 아직 1시간이나 남았는데. 오빠가 벌써 올 리가 없잖아. 다른 누군가란 얘긴데…. 시간 약속을 칼에 비유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정확히 지키는 성진의 성격은, 이럴 경우 혜진에게 반대로 의문점을 제공하고 있었다.

현관으로 걸어가면서도 혜진은 오빠가 아닐 것이란 예상을 거의 확실하게 하고 있었다. 그저 인터넷으로 구입한 에로 동영상을 디지털 다운로드하던 중 제풀에 놀라 꺼버린 게 약간 아쉬울 뿐이었다. 97%까지 받은 걸 ‘중지’로 했어야 했는데 ‘취소’ 버튼을 눌러버렸어. 다시 1%부터 받아야 하잖아. 속상해. 근래 들어 내 불건전한 취미를 눈치채기 시작한 오빠 때문이야.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잘못을 성진에게 뒤집어씌우며 혜진은 바깥을 향해 물었다.

“누구세요?”

대답은 없었다. 혜진은 고개를 갸웃하곤 다시 한번 물어볼까 하다가, 황급히 정리(?)하느라 지체된 시간을 자꾸만 끄는 것도 바깥 손님에게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안전고리를 걸어놓고는 현관문을 빼꼼히 열어보았다.

의외의 손님이었다. 여자는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고, 혜진은 놀란 표정으로 입을 가린 채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안전고리를 빼어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는 난처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물어보았다.

“여… 여긴 어떻게 알고……?”

“어떻게 알기는.”

그녀는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단발머리 - 라고 하기에는 약간 긴 머리 - 를 가리키며 고개를 옆으로 까딱해보였다.

“이 미선 님의 정보력을 우습게 보면 안 되지. 이래 봬도 알만한 루트는 몇 가지 있다구.”

혜진은 그 귀여운 모습에 그냥 따라 웃으면서도, 그녀가 정확한 대답은 피하고 있음을 짐작했다. 미선의 단아하면서도 귀여운 외모는 지나가는 남성들로 하여금 한번쯤 돌아보게 만들 법하지만, 실상은 비밀스러운 내면이 존재하고 있음을 몇 명은 알고 있었다. 혜진도 그것을 아는 몇 명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자신의 오피스텔을 찾아오리라고는….

그러나 혜진은 곧 주변 다른 친구나 성진 오빠한테 들었을 것이라 넘겨짚고는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미선은 총총걸음처럼 현관 앞으로 폴짝 뛰어들어왔다.

“헤헷. 고마워, 혜진아.”

혜진은 문득 그런 천진난만한 듯한 미선의 미소에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성진 오빠를 좋아했었지. 가끔씩 만나 식사나 얘기를 할 때마다 거의 그런 내용이었으니, 오늘도 그런 대화를 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곤란한데…. 이제 곧 1시간 후면 성진 오빠가 도착할 텐데. 아무리 싫은 감정으로 헤어진(?) 게 아니라지만 분명 좋은 분위기로는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혜진은 미선을 위한 차를 내오면서도 그녀를 1시간 내로 내보낼 미션을 머릿속으로 짜고 있었다.

“우와. 이 인형, 팬티 다 보인다. 피규어라고 하던가? 몸매가 굉장해.”

“어? 어, 어…….”

혜진은 하마터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하고는 조심스럽게 차를 엎지르지 않게 테이블 위에 놓았다. 미선은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여유 공간’이라면 어김없이 피규어들이 들어차있는 혜진의 방을 신기한 듯 이리저리 돌아보고 있었다. 실제로 혜진의 방은 웬만한 피규어 수집광 못지 않게 손가락 크기에서부터 수십 센티미터 길이의 피규어들을 즐비하게 장식해놓고 있었다. 성진이야 이미 그런 모습에 익숙했으나, 처음 와본 사람이라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미선은 피규어의 옷 재질이 궁금한 듯 살짝살짝 건드려보다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끔씩… 나는 혜진, 네가 굉장히 여성스럽다가도 어떨 때는 남자 같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매사에 활달하고 자신감 넘치는 행동들 하며… 으응, 기본적으로 너무 예쁘니까 그렇게 적극적일 수 있는 거기도 하겠지만.”

혜진은 언젠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와 만났던 때를 떠올려봤다. 혜진은 여전히 피규어에 시선을 두고 있는 미선에게 차분한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그녀의 두 어깨에 양 손을 살며시 얹었다.

“난 중학교 때부터 메이크업 학원을 다니곤 했어. 미모는 타고나야 한다고들 하지만… 사실 그런 노력도 어느 정도 반영되는 게 현실이기도 하니. 그런데 미선, 넌 기본적으로 이쁘고 귀여우니 그렇게 남한테 부러움 같은 건 느낄 필요가 없다고 보는데.”

“이런 피규어들을 모으는 취미 하며. 이런 건 사실 남자들끼리도 밝히기 꺼려지는 소위 오덕스런 취미잖아? 뭐 그래도 네가 하니까 이것조차도 매력포인트가 되겠지만.”

이 녀석, 안 듣고 있군. 혜진은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블라우스 앞에 가슴을 모아 팔짱을 꼈다. 그리고 살짝 한숨을 내뱉을 즈음 미선이 그녀를 쓱 돌아봤다. 반쯤 앉아서 피규어를 관찰하던 터라 미선의 시선은 혜진을 조금 올려다보는 각도가 되었지만, 혜진은 흠칫했다. 마치 자신의 말 뜻을 모르는 건 네 쪽이 아니냐는 듯한 느낌.

미선은 쿡하고 웃고는 좌식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혜진이 내어온 차의 향을 음미하였다. 왠지 자신의 방이 아니라 미선의 방에 들어온 것처럼 쭈뼛거리며 테이블 맞은편으로 걸어간 혜진은 다음에 나온 그녀의 말에 다시금 뜨끔해야 했다.

“혜진, 넌 알고 있지? 내가 성진 선배 많이 좋아하는 거.”

“어? 어… 알고 있지.”

“그리고 너에 대해서도.”

그 말에 담겨진 함축적 의미를 사실 혜진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볍게 웃어넘기려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깔아 테이블 위 자신의 차로 시선을 떨구었다. 녹차의 은은한 향이 계속해서 피어오르고 있었으나 그녀는 아직 차에 입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잠시 후, 혜진의 입이 조용히 툭하고 열렸다.

“그래…. 언젠가 이것에 관해 진지하게 얘기해야 할 때가 오리라고는 생각했어. 미선 네가 성진 선배와 나의 관계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물러서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히 끝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생각보다 복잡한 감정이 네 안에 들어차있었던 거야. 네 입장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현실로 드러났을지도.”

미선은 녹차를 한모금 꼴깍 마시고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그렇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행복해하는 것을 보는 데에서 오는 대리만족이랄까. 그런 것도 있어서 나쁘진 않았어.”

“정작 네 가슴 속은 공허함으로 가득 차있던 건 사실이잖아. 그래서 그 공허함을 메꾸기 위해 이따금씩 굉장히 센 성적 농담을 친구들 혹은 선배들한테 흘리고 다니기도 했고. 그래서 말인데, 미선아….”

띠리링-♪ 띠링-♪

혜진이 뭔가 나름대로 생각해왔던 중요한 말을 하려던 찰나, 데스크탑 책상 옆에 놓여진 그녀의 핸드폰이 울려퍼졌다. 혜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미선은 애니송이 흘러나오는 핸드폰 벨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 혜진답다는 생각을 하며 녹차를 빨아들이는 미선을 뒤로한 채, 혜진은 허둥지둥 일어서서 책상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곤 발신자 표시를 먼저 확인했다. 역시나 성진 오빠.

“나… 통화 좀 하고 올게, 미선아. 잠시만.”

혜진은 현관쪽 통로로 걸어갔다가 아예 바깥으로 나가서 완전히 안 들리게 통화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곤 문을 열고 나왔다. 고급스럽고 깔끔한 복도 타일을 지나쳐 끝 쪽 창가로 걸어간 혜진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현관문이 닫히자 미선은 얼마 남지 않은 녹차를 쪽쪽 들이키다가 슬쩍 그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

미선의 까맣고 깊은 눈동자가 빛난 건 그 시점이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컵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현관 쪽으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문득 그녀는 옆 선반에 놓여져 있는 바니걸 코스프레 피규어를 돌아보았다. 발랄함을 상징하는 듯한 모습이다. 한 손을 번쩍 들고 뛰어오르는 포즈의 그 피규어는 휘날리는 머리카락까지 모두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미선은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중얼거리듯 조용히 말했다.

“참을 수 없는 아름다움. 그래서 한쪽은 포기해야 하지. 집착인 줄은 알지만 놓칠 수 없었고,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을 거라 믿어.”

미선은 엄지와 검지로 그 피규어를 향해 ‘빵!’하고 총을 쏘는 시늉을 하더니, 1분 후 방 안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응, 응. 뭐 사오냐고? 음…. 늘 먹는 것. 그래, 그거. 호시유메 케이크~. 그리고 새콤달콤한 것도 땡기는데. 귤? 딱이지. 역시 오빠, 내 입맛을 안다니까.”

몇 마디가 더 오갔고 혜진은 행복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는 시늉을 했다.

“아아. 그런 것 걱정하지 말고 가득 사와. 건강한 혜진은 아무거나 잘 먹어요♡”

통화가 끝나자 그녀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 배경 화면으로 지정한 성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 사진에 살짝 키스한 혜진은 서둘러 자신의 호실로 돌아갔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도어락 비밀번호를 빠르게 누른 후 문을 열어젖히는 혜진.

“미… 미안, 미선아. 사실 조금 후에 손님이 올 예정이라…….”

‘그 손님이 누군데? 혹시 성진 선배?’와 같은 반응에 대비하려던 혜진은 갑자기 굳은 듯 현관 앞에서 멈칫하고 말았다. 그녀의 시선은 바로 밑 신발 벗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고, 미선의 것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곤 얼른 통로를 지나 방으로 들어가보았다. 역시나… 없어?

언제 나간 거지? 말도 없이… 내가 통화하는 사이에 나갔나?

오빠가 올 것을 먼저 눈치채고 빠져준 것일까. 하지만 그녀의 목적은… 아직 중요한 할 말이 남았을 터인데.

미선에게 건넸던 녹차 컵이 비어있는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혜진. 그녀는 곧 서둘러 정돈하고 머리를 다듬으며 - 더불어 이번엔 불건전한 책들을 좀 숨기기도 하며 - 성진을 맞을 준비를 했다.

포림대 대학가에서 출발한 기식의 벤츠는 약 1시간 반을 계속해서 질주했다. 선영이 살짝살짝 졸 때쯤 속도를 서서히 늦춘 벤츠는 이윽고 거대한 살구빛의 건물 뒤편으로 들어섰다. 신시가지 중에서도 외곽 지역에 위치한 만큼 인적이 뜸하고 주변은 공사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겨울이란 계절은 빠른 휴식을 취하고 싶은 듯 밤이란 커튼을 벌써부터 드리우고 있었다. 우뚝 솟아있는 하츠로 멘션은 얼마 없는 빛마저도 흡수하는 거대한 그림자를 내리깔았다.

기식의 벤츠는 지하주차장을 향해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잠시 후 주차장 입구에 쌓여있는 나무토막과 널빤지, 드럼통들 사이에서 숨어있던 인영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기식이 고용한 패거리들이었고 그들은 눈짓과 간단한 손짓으로 빠르게 사인을 보내더니 입구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드럼통을 배치해서 공사 테이프를 둘렀고, 표지판을 세웠다. 어차피 신축 건물이라 안에 주차된 차도 몇 없었고 만에 하나 누가 온다고 해도 공사중이라 생각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형준을 놀려대던 패거리들도 이번만큼은 그의 정보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법이군, 이런 장소를 다 찾아내다니.

“음… 다 왔나요?”

선영은 지하주차장 깊숙한 곳에 벤츠가 멈춰 서자 고개를 조금 휘저으며 졸음을 쫓고는 말했다. 하지만 미소 띤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곧 몰려오는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 전등은 모두 꺼져 있었고 휑하니 비어버린 듯한 캄캄한 내부는 입주자도 하나 없을 것 같았다. 아직 공사가 덜 끝난 건물 같은데 이곳에 정말 기식 씨의 사무실이 있나? 신생 프로게임단이라 했으니 스탭원도 뒤에 앉은 분들이 전부고, 그래서 아무도 없으니까 불을 다 꺼놓았나? 갖은 방면으로 추리해보는 선영에게, 기식은 차의 시동을 끄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선영 씨.”

“…네?”

“내리세요.”

딸깍-. 딸깍-.

뒷좌석에 앉아있었던 형준과 경희는 벌써부터 문을 열고 내리고 있었다. 선영은 다 오긴 왔나 보다 생각하며 자신도 조수석 문손잡이를 잡았다. 문득 선영은 기식의 음성이 낯설다고 느꼈다. 그녀는 미소를 지우며 기식을 슬쩍 바라보았지만 그는 시선을 피한 채로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선영이 점차 이상하다고 느낄 즈음 조수석 문이 열렸다. 형준이 바깥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나오시죠.”

“예…? 예…….”

선영은 주춤주춤 벤츠에서 내렸다. 워낙 주변이 어두워서 기식의 흰 벤츠만 어느 정도 돋보이고 다른 차들은 있는지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선영은 하마터면 바닥을 잘못 밟아 옆으로 넘어질 뻔했다. 원피스 자락 한쪽을 붙잡은 채 힐을 고쳐 신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형준은 그만 픽하고 웃으며 말했다.

“옷차림이 그게 뭡니까? 여기가 노는 데인 줄 아시나요?”

“아, 저… 죄송, 죄송합니다.”

선영은 갑자기 무서워지며 황급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뭐, 실제로는 노는 자리가 될 테니 상관없겠죠.”

형준은 자신의 노트북을 한 팔에 걸치고 다른 쪽 손으로는 허리를 짚은 채 그렇게 말했다. 선영은 그의 말뜻이 이상하다는 기분을 받았지만 일단은 재차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기라도 하듯 기식을 찾으려 몸을 돌렸다. 언제인지 모르게 기식은 차 안에 없었고, 바깥 어디쯤에 있나 하고 선영이 찾아보려는 순간 눈앞이 환해짐을 느꼈다. 경희가 한쪽 벽으로 걸어가 지하주차장 불을 켠 것이었다.

가장 안쪽 전등만 켠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어둠 속에 익숙해지려던 선영의 눈에는 마치 환한 조명이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바로 밑에는 코트를 벗고 나간 것인지 긴 티셔츠만 입은 기식이 홀로 서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슬림한 티셔츠라서 늘씬한 기식의 멋진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보였다. 조명 빛을 반사시키는 초록색 바닥 에폭시는 그를 마치 무대 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선영 앞에서, 기식은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두 손을 양 옆으로 살짝 펼쳤다.

“은선영 씨. ‘열쇠 없는 집’을 기억하시나요?”

문득 내어진 그의 말은 주차장의 넓은 공간 내부에서 이리저리 반사되듯 나지막하게 울려퍼졌다. 선영은 홀린 것처럼 그를 보다가 자신한테 질문했음을 깨닫고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여… 영화 말인가요?”

“그 영화의 마지막은 선영 씨도 아시겠지만 주인공을 집 안에 가두고 죽이려고 했던 자는 다름 아닌 주인공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죠. 아마 선영 씨는 그 장면을 가장 분노하며 봤을 겁니다. 후에 식당에서 그런 감평을 말하셨으니까요.”

선영도 그때를 떠올렸지만 왜 기식이 그 얘기를 이 시간, 이 장소에서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선영은 가방을 한 팔에 걸친 채 다른 쪽 손을 조금 들어올려 머뭇거렸다.

“기… 억하긴 해요. 그런데 저어… 사무실로 들어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여기 다른 분들도 계시니….”

하지만 주변을 둘러본 선영은 더욱 의아해졌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가만히 서있는 형준과 경희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한 건, 저벅거리는 부산스러운 발소리들과 함께 주차장 저편 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발견했을 때였다. 정확히는 험악한 인상의 사내 무리들. 몇 명은 각목을 들고 있었고 선영은 그런 불량배들의 모습과 그걸 보고도 동요하지 않는 기식, 형준, 경희를 보고는 당황해버렸다.

선영은 애타는 동작으로 기식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놀란 발걸음은 주인의 목적에 부합해주지 못했고, 그래서 선영은 발을 헛디디며 바닥에 꽈당 하고 쓰러졌다. 섬뜩하도록 시린 주차장 바닥이 피부로 와 닿는다고 느낄 무렵, 기식은 쓰러진 선영 앞에서 느긋하게 남은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영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 발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현실이 영화보다 더 처참하고 시린 네러티브로 다가오기도 하죠. 제가 그때 식당에서 했던 말 기억하시나요? 누군가가 당신의 이익을 위한다며 나선다면 먼저 의심을 해보는 게 중요하다고요. 그러나 선영 씨는 그것을 귓전으로 흘려버렸죠.”

선영은 여전히 지금 무슨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저벅거리는 발소리들이 가까워짐에 따라 공포에 젖은 가녀린 팔은 다시금 미끄러지며 그녀를 엎어지게 했다. 기식의 말은 그녀의 몇 발자국 앞쪽에서 계속에서 들려왔다.

“그래서 그것을 제대로 가르쳐드리려고 합니다. 선영 씨는 아직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예전의 당신이라면 전혀 이런 상황으로 내몰려지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뭐 개인적으로도 예전의 당신에게 당한 적이 있고.”

선영은 엎드린 상태에서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만 들어 기식을 올려다보았다. 백금발 머리칼 사이로 차갑게 내려다보는 기식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알던 그 멋지고 자상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고 경멸섞인 눈초리였다. 선영이 황당함과 두려움에 목소리를 낼 수 없어서 입만 뻐끔거릴 즈음, 기식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가슴에 못을 막는 발언을 했다.

“충격이 생각보다 좀 많이 큰가 보군요. 상황 인지를 못하시는 것 같으니 확실히 말해드리죠. 저는 당신을 속였습니다.”

선영의 눈이 커졌다. 킥하고 웃는 형준의 웃음소리가 그녀 뒤에서 들려왔고, 기식은 마치 바람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양 옆으로 펼친 손바닥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애초부터 당신과 ‘카잔 전쟁’ 경기장에서 만난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습니다. 저 뒤에 똑똑한 친구가 엄청난 정보력으로 당신의 행동반경을 모두 꿰뚫었고 과거를 파헤쳤습니다. 저는 당신이 기억을 잃은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당신의 고백을 모두 처음 듣고 이해하는 것처럼 연기했습니다. 당신은 그것에 전율하듯 감동 받으며 눈물까지 흘렸지만 말이죠. 정말 멋지지 않나요? 아마 당신은 바로 조금 전까지 저한테 모든 걸 걸고 삶의 희망을 찾고 있었을 겁니다. 제가 존재하지도 않는 프로게임단으로 당신을 마음을 갖고 장난치고 있었다는 것도 모른 채….”

“무슨 소리하는 거예요, 기식 씨? 아하하하. 장난치지 말아요.”

저벅, 저벅, 저벅. 드르르르르…….

거친 발소리와 각목을 주차장 바닥에 끌면서 몰려오는 무리들이 바로 뒤에 군집할 때까지도 선영은 이 모든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녀의 머리는 아직도 기식이 장난치고 있다고 되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현실 감각에 견디지 못해 자꾸만 아래로 처지고 있었다. 기식은 한 손을 청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다문 입으로 짧게 한숨을 쉬었다.

“저는 이제 본래의 당신에게 당했던 것을 현재의 당신에게 복수하려 합니다. ‘열쇠 없는 집’ 영화의 결말마냥 말이죠. 당신이 저에게 걸었던 희망은 배신이라는 이름으로 되돌려져 당신의 마음을 산산조각 낼 것입니다.”

그리고 기식은 선영 뒤에 몰려서있는 패거리들에게 눈짓을 했다. 누가 먼저 윤간의 시작줄을 당길 것인지는 모종의 내기로 이미 다 합의와 결정이 이루어진 듯 레게 머리의 남자가 히죽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그는 자신의 바지 허리띠를 붙잡으며 음흉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정말 나부터 해도 되는 거냐, 기식아?”

기식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게 머리 남자는 선영의 바로 옆까지 와서 섰고, 엎어져 있는 선영의 턱을 발로 들춰 올리면서 말했다.

“그런데 좀 아쉬운데. 반항을 해야 밀어 넘어뜨리는 맛이 있는데, 제풀에 넘어져서 아무것도 못하는 꼴이라니. 재미없게시리.”

선영은 운동화 신은 그의 발에 턱이 받쳐진 채 입술을 파들파들 떨었다. 그러다가 그 틈새로 가느다랗게 애처로운 목소리를 내었다. 조그만 음성이었지만 적막하기 그지없는 신시가지 외곽 지하주차장에는 그런 작은 목소리도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기… 기식 씨. 저 정말 당신만 믿어요…. 기식 씨는 절 어떻게 할 분이 아니란 걸 알고 있어요. 어서 계약서에… ‘스피어’ 프로게임단 계약서에 사인을…….”

멀뚱히 그런 선영을 내려다보던 레게 머리 남자. 잠시 후, 그와 형준과 뒤편에 몰려있는 무리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장대소하듯 폭소했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사이에서 선영의 눈물이 은방울처럼 뺨을 타고 한 가닥 흘러내렸다. 레게 머리 남자는 그녀의 턱을 받치고 있는 자신의 발등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조소가 담긴 음성을 내었다.

“어이, 아가씨.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 날라리 같은 대장의 감언이설과 연기에 한치의 의심도 없이 속아넘어가버릴 수가 있지? 아가씨가 멍청한 건지 기식이 너무 잘난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구먼. 좋다. 이토록 순수한 아가씨에게는 보다 직설적으로 알려드리는 게 예의지. 우리는 모두 한 패이고 당신을 돌림빵하기 위해 여기까지 끌고 왔고, 이제 난 아가씨의 보지 속에 좆을 쑤셔 넣을 거야. 물론 외부의 도움 따윈 기대하지 마. 주차장 입구에도 우리 패거리들이 완전봉쇄하고 있으니까. 잊을 수 없는 밤을 만들어드리지.”

그는 바닥에서 허우적대는 선영의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거기에 걸쳐져있는 가방을 쉽게 뺏어 들어 옆의 형준에게 넘겼다. 형준은 그녀의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찾아 들었고, 전원을 끄는 방식을 생각할 것도 없이 아예 배터리를 분리시켜 던져버렸다.

기식은 이제 한가롭게 주차장 기둥에 기대어 서서 강간의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영의 뒤편에 군집했던 네다섯 명의 패거리들도 제각기 벤츠 보닛이나 주차턱 등에 걸터앉고는 구경꾼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레게 머리 남자는 무릎을 굽혀 앉은 후 엎어져있는 그녀의 몸을 돌려 눕혔다. 눈물선이 맺혀져 있는 그녀의 보드라운 뺨 아래에, 기식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정성 들여 루즈를 발랐을 엷은 입술이 조명등 빛에 윤기를 발한다.

“호오…….”

살짝 감탄사를 내뱉은 레게 머리 남자는 큼지막한 손으로 그녀의 가디건을 양 옆으로 풀어헤쳐버렸다. 흐트러진 가디건 위로 얼룩빛의 하늘하늘한 원피스가 그녀의 젖가슴을 부각시키듯 툭 튀어나왔다. 남자는 그 가슴을 가만히 쥐어보았다. 브래지어 위로도 느껴질 정도로 상당히 부드럽고 탄력적인 가슴. 그 밑으로는 레이스가 달린 치맛자락 아래로 힐을 신은 그녀의 살색 스타킹 다리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흠…….”

레게 머리 남자는 의외로 큰 젖가슴에 관능적인 여대생 특유의 몸매를 보고 성욕이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선영의 위로 올라가 그녀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자신의 허리띠를 끌러 내렸다.

찰칵거리는 허리띠의 금속음 소리를 들으며 선영은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찾아 한 손을 주춤주춤 허리 뒤로 돌렸다. 차가운 바닥과 맞붙은 허리 틈새에서 조그만 물체가 만져진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되고 제대로 작동할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선영은 창오빠가 택배로 보내주었던 ‘수호천사’ 버튼을 간신히 찾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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