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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친구의 장점 중 하나는 편하게 얘기함으로써 가라앉은 기분을 회복시켜준다는 데에 있다. 특히 여자들 경우엔 수다란 행위가 상당한 특효약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눈 녹은 거리를 거닐면서 그러한 친구의 장점을 한껏 부각시키려는 두 여자, 승미와 희주의 노력에도 쉽사리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한 여자가 있었다. 포림대 피부미용학과 1학년 - 겨울방학이기에 이제 2학년으로 접어드는 - 나윤지는 그녀들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침울한 표정 그대로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제 좀 기분 풀어, 윤지야. 네가 그러고 있으니까 우리까지 기분이 다 다운된다.”
“…….”
“야, 야. 실연의 아픔이 그리 쉽게 사라지겠냐. 더군다나 얘한테는 대학교 와서 처음 제대로 사귀어본 사이일 텐데. 첫사랑이라 해도 무방하다구.”
윤지의 왼편에 걷던 승미의 말에 오른편에서 걷던 희주는 손을 내저으며 윤지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가운데에 걷는 윤지가 하루라도 빨리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있었다. 윤지는 양 옆의 친구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자신이 어디에 와있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멍하니 걸어갈 뿐이었다.
결국 승미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힘없이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렸다.
“괜히 데리고 나온 것 같다야. 그래도 거진 한 달이나 지났으면 어느 정도 회복은 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열렬한 사이인 줄은 몰랐지 뭐. 그런데 동혁선배도 너무하네. 어떻게 그렇게 자기 좋아하는 후배를 일방적으로 뻥 차버릴 수가 있어?”
승미는 점차 말이 없어지며 윤지의 기분에 동조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었지만 희주는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윤지라도 된 것마냥 대신해서 분노를 일으키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상황을 정리하다보니 한동혁이란 그 퉁퉁한 선배가 못돼 처먹은 나쁜 놈처럼 윤색되고 있었다.
“듣기론 윤지가 뭐 말할 틈도 없이 연락 끊고 잠수 타버렸다며? 하, 방학 기간이니까 학교서 마주칠 일도 없고 시간이 해결해주길 기다리는 건가? 진짜 무책임하네. 기말고사 때쯤부터 슬슬 연락을 피하는 게 수상하긴 했어. 아니 그럼 헤어지는 이유라도 좀 속시원히 말해주던가. 우리한테라도 말야. 혹시 다른 여자라도 생긴 건…….”
“그만… 해, 희주야.”
조용히 있던 윤지가 겨우 목소리를 내어서 제지했다. 하지만 희주는 “그딴 선배는 욕을 처먹어도 싸. 아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우리 셋이 전부 몰려가서 담판을 짓자고. 동혁 선배 집 알지?”라며 길길이 날뛰어서 승미가 진정시키는 데 애를 좀 먹어야 했다.
희주가 주변 지나가는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는 척, 그리고 승미의 제지에 못이기는 척 흥분을 삭일 때쯤 윤지는 눈을 내리깔고 나지막이 중얼거였다.
“이제는 오빠가 왜 헤어지자고 했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를 곱씹어보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그럴만한 여력도 없고. 하지만… 단 하나, 어떠한 기점이 자꾸 마음에 걸려. 오빠가 그날… 그러니까 엠티 때 술김에 선영 선배한테 실수를 저질렀던 것. 나는 그걸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넘어갔어. 물론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 아니지만… 분위기상 그러하기도 했고 한번의 실수로 놓치기에는… 솔직히 오빠가 너무 아까웠으니까. 그런데 그게 이제 와서 헤어짐으로 작용하는 걸까. 난 그때 오빠하고 그 문제에 관해서 확실히 따져두어야 했던 걸까. 내가… 어떻게 대처했어야…….”
윤지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금 눈물을 글썽이려 했다. 때문에 승미는 이제 희주에게 쏟던 힘을 위로로 전환하여 윤지를 다독이는 데 써야 했다. 그렇게 승미가 피곤한 뒤처리를 모두 감당하고 있을 즈음 어느 정도 진정된 희주는 차가운 가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물론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으나 윤지와의 절친인 만큼 동혁의 성향 데이터도 머릿속에 심어져 있는 상태였기에, 가장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다 부차적인 것들일지도 모르지. 동혁 선배는 딱히 도리라든지 도덕성에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털털하고 시원스런 그의 성격에 너도 반한 것 아니니? 단지 그 엠티 사건에서 이면으로는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는 척해야 교내에서 번진 뒷소문으로 인한 이미지 실추를 회복시킬 테니까. 확실히 수완 하나는 인정해줘야 해. 어떨 땐 성진 선배보다도 더 무섭다니깐, 그 선배.’
결국 내 친구, 윤지만 불쌍하게 됐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희주는 다독이는 승미를 도와주기라도 하듯 함께 윤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윤지의 사고방식을 긍정적인 쪽으로 전환하는 시도를 하였다.
“자책할 필요 없어, 윤지야. 네가 잘못한 건 아~ 무것도 없어. 그런 경우엔 남자가 잘못했다고 죽자살자 매달려야 정상이야. 동혁 선배가 실수한 거지, 네가 실수한 거야? 적반하장으로 먼저 연락 끊는 그 개새끼 따위 그냥 차버려.”
윤지는 눈물 고인 눈으로 희주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납득한 표정은 아니지만 분명 동요하는 모습이었고 희주는 강하게 밀어붙이는 자신의 위로 스타일이 먹혔다고 생각했다. 윤지는 떨리는 입술을 떼면서 처음으로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렇지? 내가 잘못했던 건… 아니지?”
“당연하지! 세상의 반이 남잔데 니가 뭐가 아쉬워서 방학 내내 끙끙 앓아야 해? 교내에 퍼지고 있는 소문들도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오히려 남자 성향을 이해 못하는 년들이나 유토피아란 환상에 사로잡혀 방방 뛰지. 그렇게 쉽게 헤어질 거면 애초부터 사귀질 말라고.”
“윤지야. 난 네가 자랑스럽다.”
승미도 미소를 띠며 거들었고 그제서야 윤지는 두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 나아진 윤지는 추운 것처럼 슬그머니 승미의 팔짱을 껴왔고 승미는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희주에게 잘했다는 눈짓을 보냈다. 희주는 생긋 웃으며 오늘의 분위기메이커는 자신인 것마냥 검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우리 기분전환 겸 나이트나 한번 땡길까?”
“좋지. 시간이 너무 이르니까 일단 밥부터 먹고 놀다 가자. 준비도 하고.”
“그럴까? 그럴까?”
둘은 윤지에게 대답을 재촉하는 제스처를 계속해서 보였다. 목석처럼 뻣뻣하게 거닐던 윤지는 결국 그녀들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 엷게 웃으며 OK사인을 보내려 했다. 아마도 그 순간 의외의 인물이 눈에 띄지 않았다면 이 절친한 여자 3인방은 그날 하루를 아주 즐거운 추억으로 전환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셋은 길 저편에서 걸어오는 누군가를 발견하곤 시선을 한데 모으고 있었다. 정확히는 두 명이었고 그 중 한 명은 그녀들도 익히 알고 있는 같은 대학 선배이기도 했다. 약속이나 한 듯 감돌아버린 침묵 속에서 승미의 입이 툭하고 열렸다.
“저거… 선영 선배 아냐?”
확실했다. 수십 걸음 떨어져있는 곳이라 그녀는 아직 이쪽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같은 포림대의 선배 은선영이 확실했다. 그리고 승미가 그녀의 이름을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자 희주도 덩달아 멍청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게. 그런데 옆에 있는 키 크고 잘생긴 남자는 누구지? 세상에… 어디 밴드부 활동이라도 하는 것 아냐?”
“우리 학교 학생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둘이 사귀기라도 하나? 선영 선배 옷차림이… 학기 중엔 전혀 저런 옷 안 입었잖아.”
“언뜻 보기엔 좀 수수해보이는 원피스에 가디건 코디지만… 내 직감이 맞다면 저건 분명 저 남자에게 잘 보이려고 신경 쓴 차림이야.”
승미와 희주의 그런 숙덕거림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런 멋진 남자, 즉 기식과 얘기하며 걷던 선영은 입을 가리곤 밝게 웃었다. 둘의 모습이 어찌나 산뜻한 한쌍인지, 연인이 적잖은 대학가 주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습만 부각돼 보이는 것 같았다. 특히 깔끔한 슈트 자켓에 슬림한 청바지를 입은 기식의 모습은 주변 여성들로 하여금 눈길을 흘긋거리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 여자 3인방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들은 한쪽 구석에 세워진 고급스러운 우윳빛의 벤츠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기식은 친절한 미소로 직접 조수석의 문을 열어서 선영에게 안내했고, 선영은 쑥스럽게 다소곳이 차에 올라탔다. 기식은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운전석쪽으로 걸어 돌아간 후 자신도 차에 탑승했다. 벤츠는 곧 특유의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화려한 대학로를 질주해갔다.
“…….”
승미와 희주는 잠시 할말을 잊은 채 자신들의 앞을 지나쳐간 그 벤츠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당혹감이 물든 목소리로 희주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함께 수업도 듣고 프로젝트도 하던…… 선영 선배 맞나? 사고 이후로 눈에 띄게 말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언제 저런 멋진 남자를…….”
“너… 너무 대단하지 않니? 대박이야. 마치 드라마 속에서나 볼듯한 연인처럼…….”
그녀의 말에 맞장구치던 승미는 문득 잊고 있던 걸 깨달을 것마냥 “아!”하고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희주도 거의 동시에 몸을 돌렸다. 선영과 그 기식이란 남자를 관찰하느라 자신들도 모르게 몇 걸음 앞으로 걸어나왔었고, 그래서 뒤에 홀로 떨어진 윤지가 어떤 기분을 받고 있을지 그제서야 자각한 것이다.
“윽… 윽…… 끅…….”
“아, 저…… 윤지야? 사람마다 연애가 잘 되고 안 되는 주기가 있는 거고, 선영 선배는 현재를 탔나 봐. 유… 윤지 너도 동혁 선배랑 잘 되는 시절이 있었잖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희주의 강하게 밀어붙이는 위로도 이번에는 먹히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말을 하는 희주의 목소리부터 이미 불안감에 떨리고 있는 게, 옆의 승미가 보기에도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 결국 윤지는 녹아가는 눈으로 인해 질척질척해진 바닥도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