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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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의식 부재(不在)가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느낄 때쯤, 선영은 어떠한 공간에 우두커니 서있음을 깨달았다. 그곳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한밤중에 방의 불을 끈 직후와도 같았다.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시야로 인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그러한 기분. 하지만 그녀는 공포를 느꼈을지언정 당황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은 언젠가 그녀가 한번 들어와보았던 곳이기도 하기 때문. 붉은 비가 주륵주륵 내리는, 무의식의 심연.

선영은 허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째선지 예전에 한번 들어왔을 때보다 붉은 비가 내리는 게 눈에 띄게 줄어든 기분을 받았다. 선영은 의아했지만 고민해봤자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기가 상관할 문제 같지는 않아서 곧 신경을 껐다. 그것보단 자신이 왜 여기에 다시 들어와있는지를 추측해보는 편이 나을 듯했다. 예전에 이곳을 들어왔을 때는 성진이 내 기억을 되찾아주려고 사고 현장으로 데려갔었지. 하지만 이번엔 정신적 충격을 받을만한 뭔가가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저 잠을 자고 있었던 것뿐…. 섹스를 하거나 비슷한 뭘 했던 것도 아니고.

- 내가 불렀어 -

그 의문을 해소시켜주기라도 하듯 간단하게, 직관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선영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또 다른 자신. 아니, 실상으론 진짜의 자신, ‘본래의 나’란 존재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앉아있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그녀는 허공에 마치 의자라도 있는 것처럼 앉은 자세로 몸은 조금 뒤로 눕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치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듯한 그녀는 그 상태로 고개만 조금 돌려서 ‘현재의 선영’을 바라보았다.

- 편해 보이나? -

선영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몸과 의자(?)에 앉아있는 본래의 선영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역시나… 자신은 아직 평상복을 입고 있지만 그녀는 나체의 몸이다. 자신은 아직 현실 세계에서 연결고리가 끊어지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하고선 약간은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현재의 선영은 본래의 선영을 다시금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본래의 선영은 그게 묻는 시선이란 걸 알고는 재미있다는 듯 킥하고 웃었다.

- 궁금한 게 많겠지. 알고 있어. 먼저 이곳에 대한 설명을 좀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군. 내가 어떻게 이런 이상한 자세로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할 테니 -

그리고 그녀는 더 편한 자세로 (거의 눕듯)앉아서 허공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 언제부턴진 모르겠지만 난 이 공간에 깨어있는 채로 활동하게 되었어. 무의식 속에 깨어있다는 말이 좀 웃기게 들리겠지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음…. 우리가 잠을 자면 그건 무의식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지만 꿈을 꾸면 무의식속에서 다른 형태로 깨어있다는 것으로 분류하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네. 어쨌거나 난 여기서 현실과 비슷한 오감이라든지 시간 개념을 느껴. 물론 그것도 꿈과 마찬가지로 진짜 감각이나 시간과는 좀 다르게 흘러가지만 -

현재의 선영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붉은 비는 내리고 있었지만 분명 예전에 한번 들어왔을 때보다 뜸하다. 가랑비 같다고 해야 할까. 강의하는 듯한 본래의 선영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 여기도 오래 있다 보면 여러가지를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지지. 무의식의 심연 속은 현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가령 이렇게 편한 의자에 앉아있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그렇게 자세를 취하고 정신적으로 편안해지지. 따뜻한 커피를 먹고 싶다면 이렇게 손을 기울이며 마신다고만 생각해도 정말로 먹었다는 기분이 들어. 섹스도 마찬가지. 손을 이렇게 다리 사이에 놓고 자위하듯 움직이면, 현실에선 그냥 자위지만 이곳에선 정말로 상대방과 교감을 나눈다는 기분을 받아. 만족할 만큼 할 수 있지 -

현재의 선영은 표정 없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본래의 선영은 그런 그녀를 마주보지도 않고 자기 혼자 먼 곳을 응시하는 시선 그대로 계속해서 말했다.

-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냐고? 말 그대로 무의식이 지배하는 공간이니까. 정신적 갈망을 물리적으로 따라갈 수 없는 현실과는 차원이 달라. 하지만 이게 궁극적인 건 아냐. 완전히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간 공간은 아니라는 것. 이곳은 그저 잠시 머무는, 불완전한 세계야. 그래서 앞서 말했듯 ‘현실의 경험을 바탕으로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거지. 진짜 ‘죽어서’ 바깥으로 나간 곳은 현실의 경험이고 뭐고 없어. 모든 게 완벽해져.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완전한 행복과 만족감으로 가득 채워지지. 물론 이것도 내가 아직 그곳까진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이곳 경험을 바탕으로 비슷하게 ‘그런 것이다’라고 추리할 수밖에 없는지도. 어쩌면 모든 게 다 충족되어서 그냥 자신이란 존재감마저 상실하게 되는 걸지도 모르고 -

현재의 선영은 여전히 그녀한테 묻는 시선을 계속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본래의 선영은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떼는 것처럼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는 한쪽 손바닥을 그녀에게로 향한 채 위아래로 내저으며 키득키득 웃었다.

- 알았어, 알았다고. 이곳도 이렇게 편한데, 완전히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하면’ 얼마나 편할까 상상하게 되어서 좀 많이 설레었어.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진 것 같네. 음… 이제 질문을 해봐. 어떤 질문이 나올지 예상은 되지만 계속 이러면 무시하고 혼자 떠들기만 하는 기분이 드니까 말야. 자기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몹쓸 짓이잖아? -

그리고는 그런 논리가 재미있는지 본래의 선영은 깔깔대며 웃었다. 현재의 선영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묘하게 바라보다가, 이곳에 재차 들어온 이후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날 왜 불렀지…? -

본래의 선영은 헤픈(?) 웃음을 지우고, 현실이라면 수많은 남자를 홀릴만한 매력적인 미소를 싱긋 지으며 이쪽을 곁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조금 사이를 둔 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현재의 선영 표정을 더욱 묘하게 만들었다.

- 네가 만나는 이기식이란 남자 말야 -

그녀의 말이 끝나진 않았지만 현재의 선영은 반사적으로 자르고 물어보았다.

- …내가 기식 씨를 만나는 걸 너도 알고 있어? -

- 이런이런, 알면서 묻는 투 같은데. 현재 현실은 네가 살아가고 있는 게 맞긴 해도 여전히 본체는 나야. 네가 경험한 것들은 나에게 전해지지 -

- 하지만 그것은 네 자신이 현실로 한번 끌어올려져서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되찾았을 때, 기억도 습득하게 되는 거잖아 -

- 물론 그렇지. 하지만 이것 역시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내가 현실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즐거운, 혹은 강렬했던 경험이 주입된다면 그것은 특별히 ‘완전한 내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내게 전해진다는 것. 이미 강제적인 섹스로 인해 몇 번 내가 위로 끌어올려졌었지? -

현재의 선영은 그제서야 짐작이 갈 것 같았다. 요즘 부쩍 늘어난, 현재의 선영이라면 잘 일지 않았을 설렘이란 감정, 연애적 감정. 그리고 그것을 제공한…….

본래의 선영은 이해하기 시작한 그녀의 눈빛을 읽고는 미소를 더욱 짙게 띠었다. 그녀는 투명한 의자(?)에 앉은 상태 그대로 다리를 꼬아, 그 위에 팔꿈치를 받쳐 턱을 괴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현재의 선영에게 말했다.

- 뭐, 내가 다시 현실로 확실하게 끌어올려지려면 섹스까지 가야 하는 게 맞아. 하지만 현재 너한테 일고 있는 감정 정도라면 누구에게 그렇게 설레고 있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지. 자, 그럼 네 입장에서는 기식 씨라고 부르며 무작정 따르는 그 멋진 남자에 대한 얘기를 좀 해주려 하는데 -

무슨 말이 나올지는 몰랐지만 현재의 선영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 기… 기식 씨를 만나본 적이 있어? -

현재의 선영은 눈에 띄게 조심스러워진 음성으로 물어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나체의 그녀, 즉 본래의 선영은 꼬아 앉은 다리를 까딱거리며 고개를 살포시 끄덕였다. 그리곤 거의 동시에 느긋하게 입을 열어 거기에 보충 설명을 더했다.

- 그냥 만나본 게 아니지. 그와 나는 실제로 사귀기도 했던 사이니. 그 시간이 길지는 않긴 한데… 사실 기식이란 이름부터가 웃기는 것이지만 이건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고. 고등학교 시절…… -

- 잠깐, 잠깐! -

현재의 선영은 입막음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손을 내저어서 그녀의 말을 중지시켰다. 일종의 상황이 기억 속에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자뷰처럼 아련한,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을 만한 기억이긴 하지만 어째선지 이 순간 똑똑히 기억이 나고 있었다. 현재의 선영 자신이 기식을 처음 만난 날 그가 카페에서 “우리 초면이죠?”라고 슬쩍 물어보았던 것.

그것의 의미는…….

선영은 입술을 슬그머니 깨물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미소 띤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본래의 자신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 그거… 안 좋은 얘기 맞지? -

- 내가 지금 하려는 기식에 대한 얘기? -

- 응 -

- 응 -

- 그럼 됐어. 하지 마 -

본래의 선영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다리를 꼬고 턱을 괴어 앉은 자세 그대로 의외라는 듯이 툭하고 물어보았다.

- 어째서지? 알아두는 편에 네게 좋지 않나? -

-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야 -

그리곤 짐짓 시선을 회피하는 현재의 선영. 본래의 선영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다. 나와 기식 간의 썸씽이 어땠던 간에 현재의 자신은 완전히 다른 인격이니, 새롭게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란 얘기군. 그럼 나와의 나쁜 과거는 의미가 없다 이건가?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치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더군다나 현재의 그녀가 이렇게 설렐 정도로 접근해오는 그의 의도라면, 어쩌면 더 나쁜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얘긴데. 물론 본래의 선영이 직접 기식을 최근 들어 만나본 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보자면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발생하진 않을 것이라 예감하고 있었다.

-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가 애초부터 불순한 목적을 갖고 네게 접근해서, 파멸로 이끌어갈 수도 있다는 얘기야. 오죽했으면 내가 경고를 하려고 널 여기까지 불러냈겠나? -

-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지? 그 말은 곧 당신의 추측에 지나지 않는 거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그리고 기식 씨를 직접 만나보는 내 입장에선, 절대로 그분은 내게 위해를 가할 분이 아니야 -

- 사탕이 몸에 좋아서 달콤한가? -

- 달콤하면서 몸에 좋은 것도 있기 마련이지 -

- 이것 봐, 난 너랑 말싸움이나 하려고 여기 부른 게… -

살짝 짜증이 나려던 본래의 선영은 문득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과 그녀에게 굳이 공들여가면서까지 납득시켜야 할 필요성에 관해 재조명하게 되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않는 대로 내게 더 좋은 것 아닌가? 어차피 그녀는 불완전한 대행자에 지나지 않으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귀를 막고 싶어하는 현재의 선영을 향해 다시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 생각해보니 말 안 하는 편이 좋겠군. 모처럼 목표를 잡고 제대로 현실을 살아보려는 것 같아서 도움이 될까 했는데, 애초에 내가 널 도와줄 이유가 없잖아 -

- 그래, 그래. 잘 생각했어 -

설령 죽게 되더라도, 나는 그만큼 더 빨리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본래의 선영의 이런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현재의 선영은 기식에 관한 안 좋은 면을 듣지 않게 되어서 다행인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현재의 선영은 불안한 기분이 한결 가신 것처럼 약간 평온해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 그 얘기 하려고 날 부른 거였어? -

- 그렇다 -

- 이제 필요 없다는 걸 알았으니 날 보내줘 -

본래의 선영은 다리를 바꿔 꼬아 앉고는 무덤덤한 투로 말했다.

- 그거야 어렵지 않지.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보는 게 좋지 않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텐데 -

현재의 선영은 언제부터 그렇게 친절해졌냐고 되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런 것까지 되새겨보기엔 너무도 여유가 없거니와, 사실 본래의 그녀 성격상 이런 파격적인(?) 제안까지 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까부터 느껴지던 주변 풍경에 관한 위화감을 물어보았다.

- 이 검은 공간에 떨어지는 붉은 비… 왜 이렇게 뜸해졌지? -

본래의 선영도 그 질문에 따라 주변으로 슬쩍 시선을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 먼저 이 붉은 비에 관한 설명을 해야겠군. 이곳에 내리는 비는 죽어가는 사람의 의식을 지워. 신체의 어느 부분이 비를 맞게 되면 그 부분은 ‘삭제’된다. 그렇게 모두 삭제되면 실같이 남아있는 의식마저도 꺼뜨려지며 완전히 죽게 되는 건가 봐. 현실의 사고가 크면 클수록 내리는 비도 많아지겠지. 그럼 순식간에 의식이 꺼지겠고. 하지만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어도 애매하게 살아있다면 내리는 비도 뜸해진다. 그럼 신체의 일부가 이 비를 맞아서 삭제돼도 조금 있으면 재생돼. 봐 -

선영은 한 팔을 들어 비가 내리는 곳을 일부러 맞으려 했다. 하지만 눈에 띄게 뜸해진 가랑비는 쉽사리 맞히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현재의 선영은 그녀의 팔 중간 부분이 비를 맞고 투명한 선처럼 지워졌다가 재생되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의 무덤덤한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 비가 뜸해진 원인은 모르겠어. 하지만 짐작해볼 수 있는 건, 내가 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의식의 심연 속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 생기는 현상 같아. 강제적인 섹스로 인해 자꾸 현실로 끌어올려지던 일도 한몫 하는 것 같고. 언젠가 염려했던 바가 그대로 드러나는 듯하군. 죽지도 살지도 못한 상태로 이 공간에 갇히게 되는 것 -

그러나 그녀의 음성은 어째서인지 두려움 따윈 묻어나 있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무덤덤함 속에 일종의 평온함마저 슬쩍 가미돼있었다.

- 하지만 지금으로선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이 공간도 충분히 편안한데다가 네가 죽게 된다면 붉은 비도 다시금 세차게 퍼부어지겠지. 그럼 나도 완전히 죽게 되겠고. 가설이라곤 해도 가능성이 높은 데다가 어차피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으니. 그러니 이 곳은 걱정하지 말고 네 멋대로 현실을 살아봐 -

현재의 선영은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어쩐지 본래의 자신으로부터 격려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또 하나의 자신을 보는 본래의 선영은 정작 다른 의미가 담긴 미소를 보내고 있었지만. 내가 정말로 잘해보라는 의미로 말한 줄 아나? 애초에 내가 널 도와줄 이유가 없다고 한 걸 벌써 잊었나 보군. 역시 단순해.

본래의 선영은 꼬아 앉은 다리를 까딱거리며 그녀에게 다시금 넌지시 물어보았다.

- 또 다른 질문은 없나? -

- 음… 맞아. 넌 어쨌건 간에 여기 깨어있는 상태로 있는 거잖아? 그럼 언제고 원할 때마다 무의식의 심연 위로 올라와서 나와… 자리를 바꿀 수도 있지 않아? 마음대로 현실과 이곳을 왔다갔다 할 수…… -

- 일리가 있는 질문이군. 뭐 나야 이곳이 더 편하긴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그게 안 돼. 이것도 꿈 얘기를 빌려야 이해가 쉽겠군. 꿈을 마음대로 끝내버릴 수 있나? 뭐 때에 따라선 어느 정도 의지가 먹히는 것 같지만서도… 사실상 꿈도 완전히 깨려면 현실에서의 강한 자극이 필요하지. 나의 경우엔 섹스라는 자극이 필요해. 내가 지긋지긋한 일상을 탈피하고픈 용도로 주로 사용했던 섹스라는 수단. 그것이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방법이야. 지금까지는 주로 강간이란 상황에 의해 매우 기분나쁘게 끌어올려지긴 했지만 말야 -

그리고 다음에 끌어올려지면 난 스스로 확실하게 죽겠지. 그 말을 굳이 둘 다 하지 않은 것은 역시 꺼림칙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약간씩 다르게 작용하고 있었다. 현재의 선영 입장에선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꺼림칙함이었고, 본래의 선영 입장에선 대신 죽여줘야 할 태환이란 존재 때문이다.

잠시 감도는 침묵 속에서 본래의 선영은 꼰 다리를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서서 현재의 선영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현재의 선영은 살짝 긴장했지만 사실 그런 아무 의미 없는 듯한 행동 속에서도 본래의 선영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둘이 반 발자국 정도까지 가까워졌을 때 본래의 선영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 이제 널 현실로 올려 보내주겠어. 본체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되는군. 넌 어차피 내 분신이나 마찬가지니, 팔다리처럼 내 의지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존재와도 같아. 하지만 자주 불러내지는 않을 거야. 내겐 바깥 세상도 그다지 궁금하지 않고 굳이 널 불러내서 얘기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니까. 단지 앞서 말했듯 기식에 대한 네 설렘이 심상찮은 사태로 이끌게 될 것 같아서 한번 불러봤는데, 그것도 네가 거절하는군. 뭐 어차피 다 네 인생이지. 네가 알아서 할 -

둘 다 자신이었기에 타인의 인생처럼 말하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매우 기묘하지만 동시에 어색하지도 않았다. 문득 본래의 선영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현재의 선영은 흠칫했지만 본래의 선영은 다시금 매력적인 미소를 짙게 지으며 그녀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나체의 그녀 입에서 유혹하는 듯한 속삭임이 새어 나온다.

- 누굴 만나든 상관없지만, 네 몸을 보호할 무언가 하나 정돈 지니고 다녀. 조그만 나이프 같은 것 말이야. 내 말 새겨듣도록 해 -

‘물론 그 칼이 어떻게 쓰여질지는 내가 결정할 가능성이 높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곤 올렸던 오른손을 내렸다. 그 순간 현재의 선영은 어딘가로 끌어올려지는 기분을 받았다. 그녀가 뭘 더 확인하거나 질문할 틈은 없었다. 붉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검은 공간이 말 그대로 암흑으로 바뀐다고 느껴졌을 때, 그녀는 아득한 심연 속에서 점차 현실 감각이 살아있는 몸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영혼이 몸으로 다시 스며들어온다면 이런 기분일까.

이윽고, 움직이는 방법을 찾아낸 것처럼 그녀의 몸은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깨어났다.

“…….”

선영은 눈을 뜨곤 눈동자만 돌리며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직 캄캄한 밤이지만 익숙한 천장과 벽. 늘 자던 침대 위란 걸 자각한 선영은 그제서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뭔가 이상한 꿈에 깊게 빠졌다가 헤어나온 기분이다. 안도감인지 뭔진 몰라도 최소한 선영은 겨우 평온한 기분으로 돌아왔음에 다행으로 여기곤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합…!”

선영은 하마터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나의 인영이 침대 옆에서 무릎을 세운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인영은 그녀가 놀라자 자신도 얼떨결에 놀라며 무릎걸음으로 비척비척 반보가량 물러섰다. 익숙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온다.

“뭐… 뭐야?”

“김성진…?”

“왜 그래?”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사람 놀래게 왜 그리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어?”

미간을 찌푸리며 뒷머리를 긁어대는 성진. ‘자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따위의 대답이라면 베개를 집어 던져버리려 상체를 일으켜 세운 선영은 그의 말에 알 수 없는 찔림을 느꼈다.

“그냥… 뭔가 침대가 약간씩 들썩거리기도 하고, 신음소린지 중얼거림인지 네 목소리가 자꾸 들려서… 깨어버렸어. 그래서 이상하다 생각하곤 네 상태를 살펴보려던 찰나, 너도 깨었던 거지.”

선영은 베개를 꾹 잡다가 이윽고 맥없이 놓았다. 그리곤 성진의 시선을 피했다. 성진은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되짚어보다가 걱정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뭔가… 악몽이라도 심하게 꿨나? 괜찮은 거야?”

선영은 대답대신 시계를 보려고 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곧 어둠 때문에 시간을 확인할 수 없음을 깨닫자 핸드폰을 찾으러 책상 쪽으로 기어가려 했다. 성진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곤 얼른 말했다.

“아직 새벽 4시 반이야. 좀 더 자는 게 좋지 않나? 급한 일이라도 있어?”

“아니… 아냐.”

선영은 오늘 기식과의 중요한 약속이 있었기에 몸을 쉬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누우려다가 문득 생각난 듯 성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는 그녀의 말에 성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폴딩나이프 어디서 살 수 있는지 알아?”

“폴딩나이프?”

“호신용 칼 같은 것…… 아니다.”

설명을 이어가려던 선영은 곧 관두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영문을 모르고 빤히 응시하는 성진을 못 본 채 자리에 누워 몸을 돌렸다. 기식 씨가 위험할 분일 리가 없잖아. 별 쓸데 없는 걱정을…. 그리고 기식 씨라면 설령 내가 위험에 처하더라도 분명 구해주실 거야. 그렇게 멋진 분이 날 배신할 리가 없어. 선영은 그렇게 되뇌면서 한시라도 빨리 다시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미심쩍음을 간직한 성진이 뒤늦게 잠자리에 든 이후에도, 선영은 쉽사리 잠 속으로 빠져들 수 없었다. 결국 날이 어슴푸레 밝아올 때쯤에야 선영은 간신히 남은 잠을 보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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