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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은 자신이 옷을 모두 벗고 있다는 점은 ‘뭘 시작할지’ 짐작하고 있었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손이 묶여있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는 그러한 고찰을 관두었다. 그것보다는 묶인 손의 줄을 천장에 매달아서 강제로 일어서있게 하는, 자신의 여자친구 행각을 제지할 방안을 떠올리는 쪽이 훨씬 유용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진은 서랍을 뒤적거리며 뭔가를 또 찾고 있는 혜진을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저… 혜진아?”
“음~ 음, 으음 음음~♪”
들은 채 만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일에 빠져있는 혜진.
“저기요, 혜진 씨?”
역시나 대답 없는 그녀.
“저… 제발. 강혜진 님?”
그제서야 혜진은 몇 발치 너머에 있는 오빠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건 성진이 스스로 계급을 셀프 강등하며 혜진을 떠받든 데에서 본 효과는 아니었다. 혜진은 그저 목표한 것을 찾아서 더 이상 그의 부름을 무시할 이유가 없어진 논리적 귀결일 뿐이었다. 혜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조금 전 그 속옷 - 웬만한 란제리보다 더 야한 - 을 입은 상태 그대로 성진에게 사뿐사뿐 다가왔다.
성진은 머릿속으로 달래기, 다그치기, 무시하기, 덧붙여서 찌질하게 빌어보기까지 모두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들 중 하나라도 행동으로 옮겨 그녀의 행위를 제지할 시도는 결국 하지 못했다. 그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진은 시각적으로 보이는 그녀의 섹시한 자태에 머릿속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며 다른 것이 발동되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했다. 당연하게도 그 ‘다른’ 것은 주인의 의지보다는 본능에 더 충실했기에 혈기왕성한 20대의 성욕 표본이 어떤 건지를 한껏 과시했다. 성진은 그만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혜진은 벌써부터 벌떡거리며 치솟는 그의 좆을 바라보자 작게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좆대가리 끝을 검지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다. 그리고는 몸을 약간 숙여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오빠의 얼굴 아래로 자신의 얼굴을 쓱 들이밀었다. 성진은 예상치 못한 데에서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확 붉어지며 다른 데로 고개를 돌리려했다. 혜진은 키득키득 웃으며 오히려 성진에게 밀착해 들어갔다.
“왜 그래, 오빠. 내가 무서워? 왜 자꾸 도망가려 해~”
“…그럼 넌 왜 이렇게 죄수처럼 날 붙잡아놓는 건데?”
“오빤 내가 싫은가보다. 난 매일매일 오빠한테 어떻게 하면 더 잘 보일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뿐인데.”
성진은 사귄 지 몇 달이 지나도 여전히 설렐 수밖에 없는 엄청나게 예쁜 네 미모 때문이라고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이 녀석도 그걸 알고 지금 놀리고 있는 게 분명하니까. 기본적으로 뛰어난 외모에, 그녀 말마따나 밤낮으로 온통 오빠 생각에 다이어트와 메이크업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이젠 길을 함께 걷기만 해도 주변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였다. ‘저 남자는 무슨 연예인이랑 사귀나?’. 성진은 그런 숙덕거림을 헛것을 들은 것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번 듣고 말았다.
이건 약간 문제가 있을 정도야. 좋아하는 것도 정도껏이어야지. 오죽하면 지난 번 선영한테 ‘다른 여자를 연모한다 해도 혜진이라면 다 이해해줄 것이다’라고 내 쪽에서 말해버릴 정도가 되었을까. 질투란 것도 일말의 꺼림칙함이 상대에게 존재해야 일어나는 것인데 혜진은 그냥 100% 오빠의 모든 게 진리라 생각하고 믿고 있으니 문제다. 무슨 순수한 사랑의 화신이라도 붙었나?
……가만, 이게 병적이 되다 보니까 섹스에서 억눌렸던 게 표출되는 건가? 그러니까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더라도 속으로는 그 뭐더라. 얀데레? 그렇게 곪아가고 있던 게 분명하다. 쌓이는 건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고 그 증거로 이런 변태적 구속 플레이도 나오는 거잖아. 그러고 보니 참으로 그럴듯한 가설이다. 성진은 그런 결론을 도출해낸 자신을 자찬했다. 역시 난 대단해. 이것도 연애경험이 있어야 추리해낼 수 있는 것이지. 그렇고말고.
성진이 그렇게 때아닌 자아도취에 빠져 실실거리자 혜진도 덩달아 생글생글 웃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오빠도 이런 거 싫어하지 않는구나. 흐음, 역시 성장했어. 그리고 난 성장하는 오빠를 볼 때마다… 하아♡ 더 흥분돼버릴 것 같아.”
“아, 저… 잠깐만, 혜진아. 그게 아니라…….”
“으응, 괜찮아. 오빠.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난 채찍 같은 거 들고 휘두르는 전형적 세디스트 플레이는 하지 않으니까. 그냥 난… 이렇게 잡아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빠가 내 곁에 있다는…… 내 것이라는…….”
성진은 눈빛이 변하며 말끝을 흐리는 혜진을 보곤 기겁했다. 이 녀석 또 스위치가 올라갔음이 분명하다. 성진은 정신을 못차리고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밀착해오는 혜진을 제지할 방법을 빠르게 강구했다. 하지만 어떻게? 두 손이 천장으로 묶여 있어 도망갈 수도 없다. 성진은 황급히 손에 묶인 줄을 풀려고 이리저리 용을 써봤지만 단단히 감겨있어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광경은 혜진에게 더 흥분되는 촉매제로 작용할 뿐이었다. 귀엽게 발버둥치네, 하지만 달아날 수 없어. 완벽히 내 꺼야♡
이대로 마성의 서큐버스에게 녹아버릴 것인가…. 성진이 그렇게 체념이 끄트머리로 다가갈 즈음 번뜩하고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녀석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방법. 그리고 그것은 혜진의 손에 들린 검은색 천조각에 있었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손에 무엇이 들려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성진은 고갯짓과 눈짓을 동원해가며, 혜진이 아까 서랍을 뒤져서 꺼내왔던 그 물건을 필사적으로 가리켰다.
“그… 그런데 그건 뭐야?”
벌거벗긴 채 두 손을 천장으로 묶인 상태로 꼼짝 못하고 서있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을 법하지만, 성진은 억지로 미소지었다. 태연하게, 태연하게. 그렇게 시간을 끌면서 이것을 빠져나갈 방법을….
그의 앞에 서있던 혜진은 오빠의 말에 정신이 돌아온 듯 오른손에 든 천조각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서야 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이것. 이건 이렇게 쓰려고.”
그리고 성진은 그녀의 주의를 그쪽으로 돌린 게 과연 바람직한 처신이었는지를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천조각이 자신에게 휙 다가오는 듯하더니 시야가 온통 깜깜해졌기 때문이다. 성진은 혜진이 자기 눈을 그것으로 가렸음을 깨닫고는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야, 야. 이게 무슨… 뭐 하는 짓이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성진은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대며 어딘가에 있을 혜진을 향해 소리질렀다. 당연하게도 성진의 발악(?)은 혜진으로 하여금 도로 천조각을 풀어주거나 밧줄을 풀어주는 등의 어떠한 자유로움을 되찾도록 허락해주지 않았다. 혜진은 불안해하는 오빠를 보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는 시늉을 했다.
“잠시 동안 사랑스러운 혜진을 볼 수 없어서 슬프겠지만 참아. 곧 오빠도 기분이 좋아질 거야.”
성진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무작정 항의하려다 문득 일종의 위화감을 느끼곤 멈칫했다. 마치 준비된 듯한 이 도구들에 그녀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는 말투, 기분이 좋아진다면 이 상태에서 뭔가를 한다는 건데…. 성진은 요새 들어서 잘 보지 않게 된 - 이라기보다는 볼 여력이 안 된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 일종의 매체를 떠올리곤 툭하고 말했다.
“야, 강혜진. 너 야동 봤지?”
“어…? 뭐… 뭐……?”
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성진은 속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느낌이 딱 오는데. 갑자기 이런 짓을 꾸미는 걸 보면.”
“시… 실례야, 오빠! 갑자기 그렇게 묻는 건. 그리고 여자한데….”
“네가 보통 여자냐? 정말이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면서도 어둠의 세계에서는 웬만한 남자 버금가는 온갖 불건전한 매체를 다 수렴하는 너잖아. 야동도 얼마나 봤을지 상상이 안 가는데. 게다가 어쩐지 저 대형 벽걸이 TV로 데스크탑 케이블을 연결해서, 방음 처리 잘 돼있는 이곳 특성을 이용해 볼륨을 업…… 웁!”
성진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혜진이 휙 다가가서 자신의 입술로 그의 입술을 덮쳐서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오빠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성진은 그만 혜진의 전과(?)를 청산유수처럼 쏟아내려는 기세를 타지 못하고 그녀의 공격에 봉쇄당해버렸다. 물론 그 안타까움도 얼마 가지 않아 그녀의 혀놀림을 느끼느라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걸로 바뀌었지만.
이미 셀 수도 없을 만큼 함께 했던 키스지만 여전히 혜진의 실력은 능숙했다. 그리고 그건 성진에게 식지 않는 설렘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혜진은 때로는 깊숙이, 때로는 약간 바깥에서 그의 혀를 핥아가는 방식으로 이리저리 변모하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성진의 혀를 입술로 꼬옥 물고는 자신의 혀로 위아래로 훑어가며 자극하기도 하였다. 성진은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혜진의 혀를 갈망하며 혀를 그녀에게 내어주었다.
“읍… 흡…… 하아…….”
“우웅…….”
그의 숨소리와 혜진의 가느다란 음성이 어우러지며 분위기는 순식간에 농염해졌다. 혜진은 키스를 지속하며 점차 성진을 끌어안고 가슴을 밀착시켰다. 물론 여전히 예의 그 속옷은 입은 상태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성진은 야릇한 천조각의 느낌과 더불어 상상력을 자극해 더욱 찌릿한 기분이 전해졌다. 두 팔이 천장에 매여있어 몸을 쭉 편 상태로 고정된 성진은, 그녀의 살결이 몸 구석구석에 밀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미칠 것만 같았다.
신음이라도 내뱉고 싶었지만 혜진이 계속 키스하고 있었기에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혜진의 침이 그의 입속으로 흘러가고 그의 침이 혜진에게로 다시 넘어갔다. 질척질척하지만 맑고 투명한, 그리고 약간의 거품마저 이는 액체가 유동적인 두 혀의 사이에서 정신 없이 헤엄치듯 맴돌았다. 성진은 혜진과 키스하다 보면 그녀의 침마저도 마치 꿀물과도 같은 달콤함이 서려있다는 착각을 받곤 했다. 상쾌한 맛은 아니지만 분명 싫어할 수 없이 끌리는 특유의 이성적 침 내음이다.
“하악…… 으윽……!”
모든 행동이 봉쇄된 상황에서 성욕이 발산될 수 있는 건 단 한군데뿐이었다. 유일하게 자유로운 그의 자지는 주인의 성욕을 모두 짊어진 것마냥 허공으로 벌떡거리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치솟는 자지가 밀착한 혜진의 허벅지를 자꾸만 건드려대자 그녀는 한 손을 내려 성진의 자지를 꼬옥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앞뒤로 문질러서 그의 성욕 발산을 촉진시켜주었다.
“하아… 하아… 하아…….”
“우움… 쪽, 쪼옥…….”
뜨거운 숨결을 내뱉는 성진의 입술 여기저기를 가볍게 물고 빨아대던 혜진은 서서히 그 키스를 턱 쪽으로 이동. 이어서 목 부분에 얼굴을 묻고는 핥아대었다. 아찔한 그녀의 혀 감각 속에서도 성진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떨며 아까의 그 말을 되풀이하듯 웅얼댔다. 이젠 의미 없는, 힘을 잃은 그의 존심이 묻어나오는 음성.
“이… 이런 것도 다 그 동영상이랑 똑같이 따라하는 것 아니… 읏…!”
물론 그것조차도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아래로 더욱 내려간 혜진이 이번엔 그의 젖꼭지를 살짝 깨물었기 때문이다. 온몸에 전류에 감전된 듯 찌릿하고 떨리는 성진. 이어서 혜진이 혀를 입 밖으로 빼어들고 젖꼭지를 살살 자극하자 그만 다시금 말 대신 신음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핥짝, 핥짝, 쭙… 쭈웁…….”
“으으으… 허억…… 아…….”
혜진은 한 팔론 그의 등을 휘감고 다른 쪽 손으로는 자지를 계속해서 문지르거나 쓰다듬거나 하며 두 젖꼭지를 번갈아 애무했다. 그녀의 침이 성진의 젖꼭지에 가득 묻어서 전등에 묽은 빛을 반사시켰다. 가득 묻어있는 침을 그녀는 다시 부드럽고 엷은 입술로 살살 키스하듯 이리저리 문질러대었다.
성진을 붉어진 얼굴로 달뜬 신음을 흘리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야, 야… 혜진아. 잠깐, 자… 잠깐만…….”
“츄릅, 츄릅… 왜에, 오빠?”
“나… 나, 지금…….”
“으응? 나올 것 같아?”
성진은 더 말을 이어서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혜진은 그의 한쪽 젖꼭지를 문 채로, 눈이 가려져 있는 오빠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킥하고 웃고는 놓아주었다. 성진의 자지가 부풀 대로 부풀어올라, 그것을 쥐고 있는 혜진의 손 위로 묽은 좆물을 묻혀나가고 있었다. 혜진은 그 손가락을 들어올려 쪽쪽 빨아먹고는 성진의 얼굴 가까이 키스하듯 쓱 밀착하였다.
성진은 자지 끝까지 차오른 사정감을 삭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벌개진 그의 얼굴 옆에서 혜진은 태연한 표정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다시 말해봐, 오빠. 아까 뭐라고 했어?”
“어… 어……?”
“야동이 어쩌고 어째? 응? 내가… 정말로 그런 걸 봤을 것 같아?”
“아……. 미… 미안해, 혜진아. 너 야동 안 봤어. 그러니 이것 좀 풀…….”
“중세 시대 지하 감옥 같은 곳에서 눈가리개를 한 알몸의 남자를 묶어둔 채, 가죽옷을 입은 여자가 다가와서 가학적인 플레이를 하는 컨셉을 보고 나도 저런 거 하고 싶다… 라고 생각하는 그런 불건전한 여친으로 보여?”
성진은 ‘중세 시대 지하 감옥 같은 곳에서 눈가리개를 한 알몸의 남자를 묶어둔 채, 가죽옷을 입은 여자가 다가와서 가학적인 플레이를 하는 에로 동영상’을 혜진이 보았음을 알아챘지만 매우 당연하게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는 없었기에 그저 성진은 무조건적으로 떠받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전혀 아니지. 우리 혜진 님은 야동 따윈 디지털 다운로드… 아니, 건들지도 않는 고명하신 나의 천사님입니다. 소인이 그만 망발된 실수를 한 점, 너그러이 살펴주시옵소서….”
듣기에 따라선 빈정거리는 말로도 여겨질 수 있는 소지가 충분하지만 혜진도 혜진 나름대로 부정하는 대답을 얻는 것에 꽤 지나친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혜진은 생긋 웃으며 성진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볼을 쓰다듬는 것처럼.
“그래야지. 그래야 우리 착한 오빠지…. 나 이제 기분 좀 풀렸어. 하아… 상쾌해.”
“다… 다행이네. 하하…. 자, 이제 이 착한 오빠 눈 가린 걸 좀 풀어주고, 손도 풀어주는 게….”
약간 어설픈 웃음을 동반한 불안감에 젖은 그의 말은, 도리어 혜진에게 상황인식을 보다 명확하게 시켜주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혜진은 미소 띤 표정 그대로 눈을 빛내며 새삼스레 성진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오빠,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아아, 어쩌면 좋아…. 내가 좋아하는 성진 오빠가…… 내 의지에 따라 풀려날지 말지를 결정하게 되다니. 이러면 안 돼. 이러면…….
또 내가…… 흥분해버리는…….
“……하읏….”
어느 새 촉촉하게 젖어가는 자신의 보지로 손을 가져가던 혜진.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가벼운 신음을 또다시 흘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성진에게 있어서 그것은 마치 사신의 강림처럼 들렸다.
“히익…! 너… 너 또 무슨 생각을 해버린…….”
“으응, 아무것도 아냐. 무서워할 필요 없어. 이제 곧 더 기분 좋은 걸 해줄 테니까.”
성진은 그녀가 무엇을 하든 간에 일단 이 눈을 가린 천조각이나 천장으로 올려 묶여진 손부터 풀어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스위치가 올라갈 대로 올라가버린 혜진이 과연 그 애원을 들어줄지가 의문이었다. 그렇게 성진이 어물거리는 사이 혜진은 이미 뒤로 돌아가서 그를 등 뒤에서 꼬옥 껴안았다.
성진이 움찔하며 놀라자 혜진은 킥하고 웃고는 그의 엉덩이를 한대 찰싹 후려쳤다.
“긴장하지 좀 마, 오빠. 첫경험처럼 왜 그래?”
“맨날 바이킹만 타던 사람이 롤러코스터 타면 어떤 기분이겠냐?”
“흐음, 난 바이킹이 더 무섭던데.”
그게 요점이 아니라고 성진이 따질 틈은 없었다. 혜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성진을 안은 자세 그대로 서서히 무릎을 굽혀 앉아갔다. 그녀의 젖가슴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간다고 느껴질 무렵, 성진은 그만 한번 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야, 야…! 거긴……!”
“우웅…….”
성진은 전립선을 타고 흐르는 듯한 자극에 당황스런 목소리를 내었다. 물론 혜진이 항문 깊숙이 손가락 등을 깊게 삽입시킨 것은 아니지만 혀로 주변을 살살 핥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게다가 여친이 직접 항문을 애무해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성진은 아찔한 기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혜진은 그의 다리를 끌어안고 처음에는 맛보듯 살짝살짝 건드려보다가 점차 대담하게 입술로 키스하고 강하게 핥기 시작했다.
“쭙… 쭙…… 핥쭙, 핥쭙… 쭙쭙쭙…….”
“아아…… 아… 하으윽……!”
“핥짝, 핥짝. 쭈릅, 쭈릅…….”
그곳에서 울려퍼지는 음란한 소리와 함께 혜진의 침이 성진의 허벅지를 타고 질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혜진은 고개를 약간 젖힌 채 예쁜 얼굴을 그의 엉덩이 사이에 파묻고는 구석구석 정성껏 핥아내었다.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간신히 서서 - 어쩐지 위로 묶인 손이 점차 그를 강제적으로 당겨서 일어서있게 만드는 듯했다 - 눈이 가려진 상태로 그녀의 혀놀림만 느낄 수밖에 없는 성진. 약간 진정되었던 자지가 파들파들 떠는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다시금 단단하게 솟아올랐다.
혜진은 그의 항문을 쭙쭙거리며 핥으면서 한 손을 그의 가랑이 사이로 내뻗어 불알을 만져대었다. 성진의 자지가 더욱 치솟자 그녀는 그 손도 조금씩 앞으로 내밀어 자지의 밑둥 부분부터 주무르듯 자극시켜갔다. 혜진의 혀가 성진의 항문 속으로 조금씩 비집고 들어갈 때마다 그의 골반은 경련하듯 떨려왔고 자지는 핏대를 세우며 벌떡거렸다.
“하악……! 아…… 혜진아, 그만, 그만…….”
“쭈웁, 쭈웁… 우음…… 음, 음… 훑쭙, 쭙….”
혜진은 그만두지 않겠다는 듯 그의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처박은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고, 그래서 성진은 더욱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이대로면… 다시 사정감이……. 하지만 성진이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뭘 어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성진의 몸은 이제 완벽히 혜진의 의지에 의해 조종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혜진은 이제 가랑이 사이로 내어진 손을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여 그의 자지를 위아래로 마사지해대었다. 성진의 항문은 혜진의 침에 의해 촉촉이 젖어서 밀집돼있던 균열들을 흐늘거리게 만들고 있었고, 그에 따라 혜진은 점차 깊숙이 혀를 찔러 넣어보았다. 성진은 이젠 그만두라고 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천장으로 묶인 손에 지탱한 채 두 다리를 경련하듯 떨면서 그녀의 혀를 느껴갈 수밖에 없었다. 감추고 싶은 남성의 구멍이 그녀의 혀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당하는 상황은 수치심을 느껴야 정상이겠지만, 성진은 이상하게 그것을 덮을 정도로 야릇한 쾌감이 전신을 감싸오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터질 듯이 부풀어오른 자지가 묽은 좆물 대신 더 깊숙한 곳에 쌓인 무언가를 방출할 선에 다다랐을 때, 혜진은 그제서야 살짝 입을 떼었다. 그리고는 그의 회음을 검지손가락으로 살살 간지럽히며 물어보았다.
“오빠, 쌀 것 같아?”
너무 강렬한 느낌에 밀려서 성진이 대답을 못하고 있자 혜진은 다시 그의 항문에 입술을 처박으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싸고 싶으면 싸. 너무 참아도 건강에 안 좋대.”
“야, 자… 잠깐! 이… 이 채로 싸라고?”
땀으로 범벅이 된 성진은 그제서야 화들짝 당황하며 목소리를 토해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침대 위이거나, 뭐가 깔린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일어선 상태로 싼다면 그녀의 방 어딘가로 쏘아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혜진은 상관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오빠 건데 좀 묻으면 어때? 뭐하면 내가 핥아먹어버리지 뭐…♡”
성진은 그녀가 단순히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럴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만 할말을 잃었다. 그리고 사실 혜진의 말에 뭐라 대꾸할 여력조차 되지 않았다. 지속적인 항문 애무와 그녀의 손놀림에 의해 더 견딜 수 없게 된 그의 자지가 어느 새 분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질질 흐르는 것처럼, 그러다가 문지르는 혜진의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듯 있는 힘껏 사정을 했다. 그의 신음소리가 혜진의 방 안을 가득 맴돌았다.
“아으으으……!”
쭈욱-. 쭈욱-.
길게 선을 긋듯 쏘아져 나간 허연 정액들이 방바닥과 책상에 철퍽거리며 착지했다. 성진은 이미 사정을 시작한 것, 멈출 수가 없었기에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혜진은 그의 엉덩이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지를 문지르는 손에 힘을 더했다. ‘나온다, 나온다!’ 그녀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고, 여전히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성진은 그저 혜진의 손놀림에 따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듯 내어볼 뿐이었다.
“아윽… 끅…… 헉헉… 헉…….”
성진은 거의 탈진 상태로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을 즈음, 혜진은 그의 자지를 놓아주었다. 이어서 그녀는 손에 묻은 정액을 자신의 가슴에 문질러 닦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성진의 뒷머리로 두 손을 가져가서 그제서야 눈을 가진 천조각을 풀어주었다. 힘이 풀린 듯 지친 눈을 뜬 성진은 잠시 동안 시야를 확보하려고 깜빡거리더니 곧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하지만 혜진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성진의 어깨를 톡톡 치면서 다른 쪽 손으로는 몇 발자국 앞쪽 바닥을 가리켰다.
“저것 봐, 오빠. 오빠 정액이 저기까지 튀었어. 진짜 멀리까지 가더라.”
“…보지 마. 얼른 닦아.”
“책상을 지나 벽까지도 갔어. 역시 항문 애무가 자극적이긴 한가 봐. 오빠 진짜 첫경험하는 남자처럼 삐질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 것도… 후후훗.”
“제발… 그만…….”
“사정하는 모습 진짜 명장면이었는데. 카메라로 찍어두고 싶을 만큼. 아웅… 아까워.”
잠시 후, 결국 묶인 손까지도 풀린 성진은 힘에 부쳐서 침대에 털썩 걸터앉자마자 옆으로 몸을 뉘었다. 팔은 저릿저릿했고 다리는 뻐근했다. 항문과 전립선 사이가 얼얼한지 야릇한지 알 수 없는 감각에 휩싸여서 하반신이 자신의 것 같지가 않았다. 성진은 그렇게 삐딱하게 누운 채로 피곤한 눈을 들어, 싱크대 앞에서 간단한 양치로 입을 씻는 혜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뭐냐…. 에로게에 에로 만화, 에로 소설 등… 내가 집에 와도 숨길 생각도 않고 다 퍼질러놓거나 컴퓨터 모니터에 띄워놓은 상태 그대로인 너잖아. 그러면서 왜 그렇게 새삼스레 야동이란 말에 민감히 반응하곤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드냐, 이 망할 요부 녀석아.”
혜진은 헹군 물을 뱉어내고는 몸을 반바퀴 돌려 손가락으로 허공 두 군데를 착착 가리켰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별 어려울 것도 없다는 식의 간단한 대답. 반면에 성진은 도대체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쌓인 눈과 얼어붙은 빙판길이 간만에 따스해진 기온에 의해 녹아내리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면서 길거리의 군데군데 쌓인 눈들을 하얗게 반사시켰고 이미 녹은 물들도 반사시켰다. 간간히 지나다니는 차들은 아직 완전히 물로 화하지 못한 눈들을 질책하듯 흙덩이들과 함께 섞어버리며 이리저리 튕겨내었다.
어중간하게 녹은 눈은 그냥 쌓여있을 때와는 달리 불쾌한 오물처럼 보행자들을 방해한다. 하지만 사람이 붐비는 대학가 주변은 그것마저도 일종의 활력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간만에 따스한 겨울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에는 틈새날씨를 이용한 듯 한껏 꾸며 입은 연인들, 기세 좋게 몰려다니는 친구들, 재치 있는 잡담을 나누는 선후배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방학기간이 끝난 건 아니었으나 계절학기 및 동아리 활동, 만만하게 잡을 수 있는 약속장소가 존재하는 곳이니만큼 여전히 붐볐다.
그리고 청춘이 붐비는 곳엔 어김없이 헌팅남 헌팅녀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꽤나 말끔하게 -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 차려 입은 이십 대 중반 청년 둘은 각자 피던 담배를 옆으로 휙 던져버렸다. 축축하게 녹은 눈이 깔끔하게 꽁초를 꺼뜨려주는 고마움 따윈 당연하게도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평범한 이 두 청년은 희미한 미소를 띠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은 마치 ‘목표포착’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거봐. 역시 온다고 내가 말했잖아.”
“늘 혼자, 똑같은 시각에 다닌다고 했나? 그렇다면 남친이 없는 게 거의 확실한데… 그런데 보충수업 마치고 곧바로 집으로 가는 전형적인 모범생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치? 스타일도 죽이고… 내가 보기엔 외로운 여우야, 여우. 겉으로는 드센 듯, 시선 받기를 좋아하지만 정작 남자한테 대시하는 것은 어려워하는 내성적인 성격이란 거지.”
“오케이. 정보수집은 이 정도면 됐고… 내가 말했던 플랜 기억하지? 개시하자구. 고고.”
작업에 들어갈 본인처럼 보이는, 좀 더 깔끔하게 차려 입은 청년이 그렇게 말하며 친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정보수집을 담당(?)했던 그 친구는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미심쩍은 표정으로 마주보았다. 아무래도 그 작업남이 말한 ‘플랜’에 문제가 있거나 도통 마음에 안 드는 듯하다.
“야, 근데 꼭 이런 식으로 헌팅해야겠어? 이건 무슨 90년대 드라마에나 나올 식상한 스토리도 아니고….”
“겉으로만 센 척 하는 여자일수록 고전적인 수법이 의외로 잘 통한다니까. 잔말 말고 얼른 시작해. 내가 말했지. 실패해도 밥 한 번 산다고. 잘 되면 술까지 추가할 뿐만 아니라 2차, 3차도 내가 쏜다니까.”
작업남의 친구는 그 시점에서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서서히 미끄러지듯 그들이 숨어있던(?) 건물 내부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기 시작한 건 작업남의 파격적인 보상 제시보다, 우물쭈물하다가는 걸음이 빠른 그녀가 그대로 휙 지나가서 아무것도 안 될 게 뻔함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렇든저렇든 애인 없는 지 백만년이라고 입에 달 듯 한탄하는 친구의 징징댐을 귀에서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도와주긴 해야 했다.
작업남 친구는 평범하게 길거리를 거니는 행인 연기를 하며 저 앞쪽에서 걸어오는 여자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겨울바람에 나폴거리는 긴 생머리를 자랑하는 그녀는 매우 늘씬하고 화사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짧은 코트 안에 색이 있는 듯 없는 듯 흰 원피스를 입고 타이즈에 갈색 부츠를 신은 채 우아하게 걷는 여자. 잠시 동안 청년은 그녀가 무슨 화보라도 찍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받았다. 여자는 무지개빛 테가 살짝 비치는 선글라스를 끼고 한 팔에는 명품백일 게 분명한 가방을 걸치고 있었다.
녀석에겐 좀 아까울… 아니, 부담될 정도로 이뻐보이는데…. 하지만 청년은 곧 정신을 예민하게 집중해 그녀의 가방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는 사실 꽤 날렵한 반사신경을 지니고 있었고 근력 또한 탄탄했다. 따라서 그런 점을 이용한 작업남의 ‘플랜’은 사실 그 친구가 불만스러워할 만큼 단순한 수법이었다. 먼저 작업남 친구가 그렇게 다가가서 비싸보이는 소지품 하나를 낚아챈다. 그리고 미리 계획했던 장소로 단숨에 도망간다. 여자는 분명 소리를 지르며 쫓아올 테고 그 시점에 모르는 사람인 척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작업남 본인이 슬쩍 그의 다리를 걸어 자빠뜨린다. 오버하는 연기를 하며 엎어진 친구는 훔친 소지품을 놓친 척 길바닥에 놓고 줄행랑을 친다. 작업남은 결국 소매치기로부터 그녀의 물품을 찾아준 구세주가 될 것이고 이후는 뭐… 자연스럽게 학번 성명 소개하며 얼굴을 익혀두면 일사천리다.
이런 계획에 문제가 되는 점이 있다면 제3자의 개입이 있거나 여자가 너무 놀란 나머지 쫓아오지 않는다는 정도가 된다. 하지만 그것도 다 계산에 넣어서, 그런 변수가 생겼을 경우 계획을 앞당긴다는 제스처까지 서로 약속에 넣어둔 상태였다. 작업남은 물론이고 행동을 개시하는 그의 친구조차도 걱정거리는 그 정도 선에서 머물렀을 뿐이었다.
따라서 작업남 친구가 여자의 옆을 지나쳐가며 무덤덤하리만큼 그녀 가방을 슬쩍한 후, 여자의 반응을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여자는 선글라스를 끼긴 했지만 멍한 표정으로 입을 살짝 벌린 채 자신의 팔과 청년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됐어!’. 그는 그렇게 속으로 쾌재를 부른 후, 자신의 얼굴을 어느 정도 가려주는 후드티 모자가 바람에 벗겨지지 않기를 바라며 빠르게 달려나갔다.
그런데… 소리가 들리지 않아?
‘소매치기야!’라든지 ‘내 가방, 내 가방!’, 혹은 ‘꺄악!’이라는 별 의미 없는 비명소리라도 들려와야 할 텐데 아무 소리도 없다.
‘뭐지…? 가방을 낚아챘을 때는 분명 당황한 게 맞는데?’
청년은 뒤를 한번 돌아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었다. 하지만 곧 작업남 본인이 저 앞쪽에서 다가오면서 그대로 오면 될 것 같다는 짧은 손짓을 보내왔기에 그는 냅다 계속 달리기만 했다. 어설프게 돌아봤다가 얼굴이라도 보이면 곤란하니…. 하지만 작업남과 그 친구가 약속했던 액션(!)을 취할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청년은 작업남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은 그 작업남이 자기가 아닌, 뒤편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챘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슬쩍 돌아봤다. 아니, 돌아보려 했다.
퍼억-!
누군가가 내지른 발차기에 등을 강타당하곤 앞쪽으로 넘어지는 청년. 그는 무릎을 꺾으며 엎어질 뻔하다가 특유의 날렵한 반사신경으로 손을 바닥에 짚고 버텼다. 볼썽사납게 구를 뻔한 상황을 겨우 모면한 그는 작업남과의 계획에서 갑자기 끼어들어 무산시켜버리는 그 제3자가 누군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한 번 더, 이번엔 옆머리를 호되게 강타당하곤 결국 완전히 쓰러져버렸다. 후드 모자가 벗겨지며 그의 머리는 녹아가는 눈더미에 쓸리면서 엉망진창이 되었다.
차가운 눈의 감각을 느껴볼 사이도 없이, 넘어진 채로 고개만 힘겹게 들어본 청년. 그리고 그는 방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완전히 덮어 버릴만한 정신적 충격이 재차 찾아옴을 경험했다. 뭐야, 아까 그 여자…? 혼자야? 어느새 선글라스를 벗고 있었지만 분명 그녀가 맞다. 그럼 저 여자가 방금 내 등을 발로 밀고 머리를 연이어서 돌려 찬 그 장본인…? 어안이 벙벙한 청년 앞에서 여자는 짜증스럽다는 동작으로 긴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내동댕이쳐진 자신의 가방을 주워 들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그 장면을 구경하던 사람들의 탄성소리가 청년의 의문을 사실로 증명해주고 있었다.
“방금 봤어? 발차기 끝내주던데.”
“어디서 태권도라도 제대로 배운 솜씬데. 걸리면 진짜 뼈도 못 추리겠다.”
도대체 이 여자 정체가 뭐야? 청년은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나려 했으나 워낙 호되게 맞아서 몸이 놀란 탓인지 비틀거리기만 할 뿐,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문득 급한 발소리가 들려오자 청년은 고개를 앞쪽으로 돌려봤다. 그의 친구인 작업남이 잽싸게 달려서 자리를 뜨는 중이었다. 청년은 그만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야… 야! 혼자 가면 어떡해…….”
하지만 자리에 계속 있어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친구의 도움을 못들은 척 멈추지 않고 달려나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청년은 작업남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응시하다 결국 고개를 툭하고 떨구었다. 자신과 친구 사이의 우정이란 가치에 회한을 느낄 무렵, 그의 머리 뒤쪽으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자신이 가방을 뺏었던, 아까 그 여자임이 틀림없었다.
“뭐야, 저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자. 너희 둘이 친구였냐?”
이미 체념하고 있었기에 청년은 일어설 생각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상태로 침묵의 긍정을 했다. 여자는 한동안 그의 앞에 서서 청년을 내려다보다가 미간을 짚으며 “아….”하고 탄식했다. 그녀도 어렴풋이 그들의 3류극과도 같은 헌팅 작업을 서서히 눈치채가는 중이었다. 여자는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보고는, 사람들 시선이 어느 정도 거두어졌다고 생각되자 팔짱을 낀 채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도대체가… 관심 있으면 그냥 있다고 다가와서 말하든가. 뭐하는 거야, 이 되도 않는 상황극으로 난리를 치는 건.”
청년은 그게 바로 자기가 말하고 싶었던거라고 울상을 지었다. 얻어맞은 곳의 얼얼함은 이제 거의 가셨지만 쪽팔림 때문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고 그냥 주저앉아있었다. 그런 청년의 윗머리를 내려다보던 여자는 문득 들려오는 핸드폰소리에 한쪽 팔에 걸친 가방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발신자 표시를 확인한 그녀는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어, 오빠. 왜? …아니, 이제 막 수업이 끝난 참이야.”
청년은 고개를 들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뜨끔했다. 누구지? 분명 애인은 없는 걸로 아는데 저렇게 자연스럽게 대화할 정도면…. 혹시라도 남친이라면 추가적인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그는, 이어지는 여자의 말에 그럴 리는 없겠다고 직감했다. 아는 오빠 정도… 되나?
“목소리가 왜 또 그렇냐니, 뭘…. 엄친딸마냥 너무 잘난 나라서 또 애인 만들기 실패한 거지 뭐…. 으응, 아니. 소개팅은 아니고.”
여자는 그 시점에서 주저앉아있는 청년을 한심한 듯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 때 청년은 문득 옆에 학생증이 떨어져있는 걸 발견하곤 손을 뻗어 집었다. 방금 가방이 내팽개쳐졌을 때 튕겨 나온 건가. 청년은 주워든 학생증을 바라보며 무심코 거기 쓰여진 전공과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각디자인과 송예나…?”
타악-.
그녀는 전화를 받는 자세 그대로 상체만 조금 숙여서 그것을 번개같이 낚아챘다. 이 여자 것이 맞군. 이름이 송예나라니, 예쁜 이름과 외모치고는 너무 드센데…. 여자는 가방에 학생증을 집어넣으면서 아까보다는 조금 은근해진 목소리로 통화하고 있었다.
“응, 으응. 내일이라고…? 알았어, 시간 비워놓을게. …그래, 알고 있어. 아무 일도 없이 끝나면야 좋은 거지 뭐. 난 오빠가 더 걱정되는데.”
청년은 - 아직까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있었기에 - 고개만 흘끗 들어 눈이 부신 겨울 햇살 너머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무 일도 없이 끝나면 더 좋다니, 그리고 오빠가 더 걱정된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뭔가 큰일이라도 하려는 건가? 하지만 곧 청년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고는 젖은 엉덩이를 털며 비척비척 일어나려 했다. 그리고 그 즈음 예나는 통화를 종료시키고 있었다.
“그럼 나중에 봐, 오빠. 난 볼일 좀 생겨서 저녁때쯤 들어갈게. 응, 응.”
통화가 끝나고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은 후 청년을 지긋이 내려다보는 그녀. 청년은 우물쭈물 일어서려다 엉덩방아를 찧듯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왜 그렇게 무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냐고 감히 항의조차 못하는 청년 앞에서 예나는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는 툭하고 말했다.
“야, 너.”
“예… 예?”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반말과 존댓말로 진행되는 대화. 예나는 여차하면 걷어찰 강압적인 자세로 서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우리 학교 학생 맞지?”
“그… 그렇습니다만….”
“애인 있어?”
“예? 저… 저요?”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냐고 반문할 법도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 눌린 청년은 별다른 생각도 못하고 허겁지겁 대답했다.
“이… 일단은 없긴 한데…….”
“그럼 됐어.”
뭐가 됐다는 건지 알 수 없는 청년. 그런 그의 앞에 예나의 손바닥이 쓱하고 내려왔다. 청년은 일단 그녀 손을 잡고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섰다. 예나는 꽤 키가 컸기에 비슷한 시선 높이에서 그를 바라보며 명령조와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밥 사라.”
“예… 에? 갑자기 왜…….”
“왜긴 왜야. 정황이 어찌됐든 네가 조금 전 나한테 실례를 저질렀잖아! 숙녀의 가방을 뺏어가고도 그냥 넘어가려 했냐? 사과의 뜻으로 식사 한번 사라고.”
청년은 그제서야 모든 상황을 직접 완벽하게 처리해버려서 전혀 인지되지 않았던 눈앞의 그녀가, 사실은 피해자였다는 점을 겨우 자각했다. 청년은 일관된 논리에 납득은 했으나 의문점이 남아있었다. 어쩐지 여태껏 구경하던 사람들의 키득거림이 귓가에 맴돈다고 느끼면서, 그는 눈치 없이 물어보았다.
“그런데… 애인 있냐는 질문은 왜 하신…….”
“식당으로 갈래, 경찰서로 갈래? 소매치기도 엄연히 범죄라고. 여기 주변 분들이 증인이 돼주실 거고. 선택은 네가 해라.”
“…식당으로 모시겠습니다.”
청년은 입에 지퍼가 있다면 꾹 잠그고 싶다는 기분이 어떤 건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앞장서 걷는 청년 뒤에서 예나는 가방 속 소지품을 다시 한번 점검하며 따라가고 있었다. 슬쩍 돌아본 그의 눈에 승용차 리모콘 키가 얼핏 보였지만 어쨌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