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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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진은 기뻤다. 사실 그녀 앞에 펼쳐진 가지각색의 수많은 선물들 앞에서 안 기쁠 여자가 있을까 싶겠지마는, 성진은 그녀가 한껏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반나절 가량을 여자친구 선물 사는 데 쏟았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혜진은 세련돼보이는 명품백을 두 손으로 들어올리면서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세상에… 이거 세일도 안 하는 브랜드인데. 어떻게 이런 걸 다 사올 생각을 했어, 오빠?”

“그렇게 좋냐?”

“당연하지! 이런 비싼 선물들 받고 안 좋아할 사람이 어딨어!”

“솔직히 말해 이 정도 가격들은 네 재력에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데.”

이번엔 장갑을 만지작거려보던 혜진은 무슨 소리냐며 눈을 흘겼다.

“뭐가 내 재력이야, 우리 부모님 재력이지. 그리고 내가 산 거랑 남친한테 받은 거랑 의미가 같을 수 있어?”

“그건… 그렇긴 하겠네.”

“아, 얼른 친구들 만나서 오빠한테 선물 받은 거라고 자랑하고 싶다, 헤헤. 나 지금 너무 기뻐, 흐잉.”

혜진은 이젠 아예 눈물을 글썽거리는 시늉을 하며 가디건을 얼굴에 부벼대었다. 성진은 언젠가 그녀에게 ‘애인한테 뭘 선물함으로써 뿌듯해지는 이타적인 감정을 너한테는 느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던 것을 다시 써먹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뜨뜻한 그녀의 방 안 온기에 더워진 성진이 겉옷 하나를 더 벗을 때쯤, 혜진이 문득 물어보았다.

“그런데 오빠. 갑자기 무슨 돈이 생긴 거야? 이건 몇십만원 선도 아냐. 그러다 보니 살짝 무서워지기도 하는데.”

“뭐… 불안해할 필요는 없어. 어디서 나쁜 짓으로 모은 것도 아니니까. 그저…….”

대답하던 도중 선영의 모습이 생각나며 표정이 굳어버리는 성진. 하지만 곧 그는 피곤하게 계속 떠올릴 필요는 없을 것이라 고쳐잡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저 말을 이어갔다.

“원래 받아야 할 걸 받았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본래 내 돈.”

“흐음….”

가디건의 촉감을 뺨으로 느끼며 성진을 바라보던 혜진은 더 물어볼 생각이 없는 듯 눈을 감고 그 감촉에 집중했다. 오히려 성진이 뭔가에 찔린 것처럼 약간 허둥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그리고 늘 네 집에서만 자고 먹고 하는 것도 좀 그러니까…. 요… 용돈 같은 걸 자꾸 받기만 하는 것도 염치없고.”

혜진은 다시 눈을 떴지만 볼을 약간 부풀린 상태였고, 성진은 또 자신이 뭔가 말을 실수했나 하는 기분을 받았다. 물론 섬세하기 그지없는 혜진은 지나가는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었지만.

“다 서로 좋아서 하는 건데 무슨 보상 따위를 생각해. 연인 좋다는 게 뭔데. 그런 것들도 내가 좋아서 하는 거고, 오빠가 선물해주는 것도 그냥 오빠가 좋아서 해주는 거야. 순수하게. 오케이?”

“어…? 어…….”

“오케이야, 아니야?”

“오, 오케이.”

성진은 그녀의 다그침에 허겁지겁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모아 OK사인을 만들어 보였다. 혜진은 사랑스럽게 생긋 웃고는 방바닥에 펼쳐진 수많은 선물들 중 또 자신이 안 본 게 있나 하는 시선으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 즈음 성진은 자신의 옆에 둔 또 다른 상자를 집어들었다.

“아, 그리고 이것.”

“응? 또 뭐야, 오빠?”

“뭐긴 뭐야, 보면 알잖아. 속옷이지 뭐.”

혜진은 포장을 뜯고는 안에 비치된 핑크색의 브래지어와 팬티, 그리고 밴드 스타킹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슬쩍 들어올려보았고, 젖꼭지만 간신히 가릴 듯한 컵 부분과 가늘고 하늘하늘한 끈들을 빤히 관찰했다. 그녀는 이어서 팬티도 들어올렸다. 역시나 엄청나게 얇고 조그만 티팬티의 자태(?)에 호기심 어린 표정이 된 그녀는 이윽고 성진을 돌아보았다.

“이런 건 어디서 구했어, 오빠?”

“너, 너…… 야한 거 좋아하잖아. 그냥 평범한 거 살까 하다가 조… 좀 바꿔봤는데, 마음에 안 들면 반품하고….”

혜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 딴에는 순수한 질문으로 던진 거지만 성진은 마치 추궁하는 것처럼 들리는지 시선을 딴 데로 두고 더듬더듬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혜진은 그만 킥하고 웃고 말았다. 아이 참, 아직도 이렇게 내 타입을 모르다니. 그래도 그건 그거대로 귀여우니 나쁘지 않달까. 혜진은 갑자기 오빠를 놀리고 싶은 장난기가 발동했고 그것을 참지 못해서 바로 실행에 옮기고 말았다.

혜진은 그냥 그자리에서 훌렁훌렁 옷을 벗어제꼈다. 성진의 눈이 확 커지며 얼굴을 붉혔음은 물론이다.

“야, 야…. 너 뭐하는 거야?”

“뭐하긴. 오빠가 사온 이것 특이해서 한번 입어보려는 건데. 옷 입은 채로 입을 순 없잖아.”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 부끄러움이 없어? 뒀다가 입어도 되잖아. 야, 그 팬티까지 다 벗으면 보… 보이잖…….”

“흐음? 난 오빠가 더 이해 안 되는데. 볼 거 다 보고 할 거 다 해본 사이에 뭘 그리 안절부절 못해? 아니면… 히잉, 난 아직도 오빠한테 어려운 여잔가?”

“그건 아니지만…….”

그런가? 이렇게 새삼스레 유난 떨 이유가 없나? 화… 확실히 혜진의 적극적인 면에 크게 작용하는 것 같지만서도…. 예전에 사귀던 여자들은 아무리 애인 앞이라도 막 벗거나 그러진 않았는데… 내가 좀 보수적인 여자들하고만 사귀었던 건가?

그렇게 성진이 정신적 공황(?)에 빠져있는 사이 혜진은 예의 그 속옷들을 하나하나 입어보고 있었다. 브래지어와 팬티, 그리고 스타킹까지 모두 착용한 그녀는 허벅지 윗부분까지 올라오는 검은 스타킹 끝에 손가락을 넣어보며 조임 상태를 가늠해보았다. 핑크색 레이스로 장식된 밴드 부분이 혜진의 두 허벅지를 귀엽고 섹시하게 장식해주었다.

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입은 속옷들을 내려다보며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성진을 쓱 바라보았다. 잠시 그녀의 몸매를 넋을 잃고 응시하던 성진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헉’하는 심정으로 다시금 얼굴을 붉혔다. 혜진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 오빠가 너무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고는 이번엔 성진 앞으로 사뿐사뿐 걸어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커다란 가슴을 잡아 안쪽으로 모으며 슬쩍 물어보았다.

“어때, 오빠? 나 섹시해 보여?”

“너야… 언제나 섹시하지. 그… 그걸 말이라고 하냐. 흠….”

혜진은 자신을 똑바로 보고 평가해달라는 지적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브래지어 한 쪽을 약간 들춰보면서 - 컵 부분이 너무 작아서 바로 유두가 보일 정도였다 - 태연하게 말했다.

“착용한 느낌이 좀 색다르긴 한데 나쁘진 않네. 그런데 오빠, 이거 굉장해! 이거 좀 봐봐.”

뭘 보라는 건지 궁금해할 여유도 없는 성진. 혜진은 삐질거리는 오빠 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조그만 팬티 가운데를 가리키며 흥미로운 목소리를 내었다.

“이 부분이 되게 얇아, 반투명이야! 내 보지가 다 보일 것 같아♡”

“추… 충분히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조… 좀 떨어져봐. 쿨럭, 쿨럭….”

헛기침까지 하며 그만 놀리라는 호소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성진. 혜진은 그런 오빠를 약간 아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다 몸을 돌렸다. 티팬티 특성상 엉덩이 살이 훤히 드러났고 혜진은 아찔한 뒤태를 자랑이라도 하듯 몇 발자국 걸어가다 기습적으로 휙 돌아섰다. 그녀의 엉덩이를 흘끗거리려던 성진이 다시금 당황하려던 찰나.

“나 이 채로 밖에 한번 나가볼까? 위엔 코트만 껴입고 밑에 짧은 치마를 입어서. 사람 많은 번화가를 돌아다니면 왠지 스릴 있을 것 같지 않아?”

“…적당히 해라.”

“그러니까 왜, 그런 거 있잖아. 요 팬티 사이에다 바이브를 끼우고 떨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걷는 거야. 리모콘은 오빠가 가지고. 이따금씩 스위치를 올려줘. 너무 강하겐 말고 한 중간 정도로만?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클리토리스가 자극되며 나는 찌릿찌릿…♪”

“적당히 하라고 했지! 나 그냥 가버린다?”

“아앗, 안 돼! 가지 마. 나 오늘 오빠랑 해볼 게 있단 말야.”

반 협박조로 그녀의 현재 행동을 제지하려던 (혜진에 비해 비교적 건전한)성진은, 또 무슨 쇼킹한 짓을 하려나 하고 아파오는 머리를 감싸 쥘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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