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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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추적추적 내렸다. 한겨울이지만 가끔씩 눈 대신 비가 내리기 마련이고 이상기온이 자주 발생하는 현대시대에 있어선 더 그렇다. 창 밖에 내리는 그러한 겨울비는 쌓인 눈을 차갑게 녹이고 빌라의 처마 밑으로 응어리를 뭉친 것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기식은 베개 위에 팔베개를 하여 누운 채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낮이지만 비가 오는 날씨 때문에 실내는 어두웠고, 그래서 햇빛 대신 형광등만이 조용히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기식은 문득 앞머리칼이 눈가에 거슬리게 들러붙어있다는 걸 느끼고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오른손을 들어 그것을 걷어내었다. 본래대로라면 세련된 그의 얼굴을 강조하듯이 다듬어져 있을 머리칼이지만 모종의 격정을 치른 터라 배어난 땀과 함께 조금 헝클어져있었다.

하지만 기식은 그러한 점에 불쾌감을 느끼진 않았다. 기분 좋고 흥분된 시간의 산물을 여운처럼 남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대가 되어준 또다른 누구, 즉 여자는 그의 바로 옆에 있었다. 둘 다 벌거벗고 있다는 점은 동일했으나 자세는 달랐다. 여자는 기식처럼 누워있진 않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 막 불을 붙인 담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유라는 담배를 입술에서 살짝 빼낸 후 연기를 아지랑이처럼 내뱉고는 고개를 조금 돌려 기식을 내려보았다. 기식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표정으로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유라는 그런 그를 잠시 응시하다 툭하고 물었다.

“뭐 생각해, 오빠?”

“그냥… 아무것도.”

유라는 창 밖으로 눈동자를 흘끗 돌리고는 추측성 대사를 던졌다.

“비 때문에 빙판길 될까봐 차 몰고 갈 거 걱정되는 거야?”

“그러면 하루 정도 더 네 집에서 묵었다 가야겠지.”

유라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입술을 오므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기식은 그런 그녀를 잠깐 바라보고는 역시 웃지도 않고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농담이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아냐.”

“그으래~?”

픽 웃으며 역시 고개를 돌려버리는 유라. 하지만 지나가는 말투를 연기하며 내는 그녀의 목소리는 기식과는 약간 달랐다.

“난 한가한데.”

기식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유라가 그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마주보지 않고 담배만 태워 올리고 있었다. 기식은 익숙한 장난스런 동작으로 한쪽 팔을 뻗어 그녀의 봉긋한 젖가슴을 주물러대었다. 만지기 좋게 탄력 넘치고 보드라운 가슴이다. 기식은 자기 몸을 더듬으면서도 가만히 있는 유라를 비웃듯이, 하지만 미소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여자애가 내가 찾아올 때마다 한가하기 그지없어. 친구랑 놀러 다니랴 연애하랴 한창 바쁜 청춘을 불태울 시기인데.”

유라는 그제서야 뚱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한심해보이면 오빠가 좀 상대해주든가. 말했잖아. 자취녀한테 남는 게 시간이라고.”

“나 좋아해봤자 좋을 것 없다.”

“또, 또 그렇게 도망간다. 하여튼 오빠도 은근 겁쟁이야.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싱글싱글 웃고 다니지만.”

하지만 기식은 여전히 무표정을 일관하며 다시 천장을 관찰하는 재미없는 작업에 들어갔다. 유라는 고개를 살짝 꺾으며 그런 그를 응시했다.

“오빠 오늘 좀 복잡하네. 정확히 말하면 그 날 갑작스레 내 집 앞에 차 몰고 왔을 때부터 약간 분위기가 달랐지만. 그러고 보니 요새 좀 자주 오는 것 같기도. 나야 좋지만… 무슨 일 있어?”

“아, 그 기집애. 말 참 많네. 담배나 하나 줘봐라.”

유라는 그의 차가운 말투에 더 뚱한 표정을 짓기에 앞서, 담배 달라는 말에 살폿 놀랐다. 그녀는 옆 책상 위에서 담뱃갑을 집어 빼어주면서도 의아한 목소리를 내었다.

“오빠 담배 잘 안 피잖아.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야?”

기식은 누운 채로 고개만 들어 그녀가 붙여주는 불을 받았다. 그리고는 길게 한모금 내빼었다. 크진 않지만 아담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유라의 방 안에서, 기식의 연기는 그녀가 내뱉는 연기와 함께 엉키면서 천장 쪽으로 명암을 만들 듯이 아우러진다.

그렇게 연기가 뒤섞이는 장면이 쏠쏠한 재미를 안겨주는지 한동안 담배만 피워대던 기식은, 마침내 흉중의 말을 꺼내었다. 물론 한번 필터링된 내용이었지만.

“유라야. 만일 말야. 네가 정말 미워하거나 복수하고 싶은 상대가 있어. 그래서 지독한 거짓말을 꾸며냈어. 희망을 안겨주고 부숴버리려고. 그런데 그게 어느 순간 하면 안 될 실수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너는 어떻게 할래?”

유라는 천장만 바라보며 말하는 그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자신의 담배가 다 타들어갔음을 깨닫고는 얼른 옆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간단히 대답했다.

“사과해야겠지.”

“사과하기엔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면?”

이미 예상한 대답이라는 듯 기식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의 곧바로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유라는 잠시 턱에 검지와 중지를 갖다 대어 생각해보다가 그런 상황은 별로 곱씹어보고 싶지 않은지 침울한 음성을 내었다.

“그래도 사과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냥 있는 것보단 낫잖아.”

기식은 ‘그럼 그렇지, 너한테 뭘 기대하겠냐’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역시 별다른 해결책이 없겠다는 의미로 살짝 한숨을 쉬고는 눈동자를 약간 돌려 천장과 붙어있는 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담배도 다 타들어갈 즈음 툭하고 말했다.

“아니…. 나 같은 경우는 그냥 있는 게 낫겠지. 어줍잖은 사과로 무마시키려 할 바에야.”

유라는 답지 않게 심각해져 있는 기식을 생소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기식은 신체의 일부분에 익숙한 마찰과 온기를 느끼고는 눈동자를 아래로 향하였다. 담배를 쥐지 않은 다른 쪽 손을 유라가 꼭 쥐어왔기 때문이다.

“무슨 거짓말인데 그래, 오빠?”

“그냥… 그런 게 있어. 스케일이 좀 크면서도 수습하기 어려운…….”

“흐음…….”

잠시 오빠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그것을 들어올려 자신의 볼에 갖다 댔다. 그리고는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살며시 쓰다듬었다. 기식은 살짝 긴장했지만 사실 유라는 더 캐물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렇게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감돈 채로, 바깥의 겨울비만 적막하게 그들 귓가에 울려퍼졌다.

눈을 감고 그의 손을 뺨으로 느껴가던 유라는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난 오빠정도면, 웬만한 스케일은 커버가 될 것 같은데?”

기식은 무슨 소리냐는 뜻으로 눈을 조금 크게 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반면에 유라는 천천히 눈을 떠서 마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흥미롭기까지 한 그녀의 미소.

“가령, 그 거짓말을 진짜로 만들어버린다든가.”

기식은 여전히 누운 자세 그대로였지만 사실 그는 방금 유라의 말을 곱씹어보는 중이었다. 안타깝게도 한 손에 들린 담배는 정신집중을 하는 코어의 의식 부재를 보완해주지 못했고, 그래서 재로 화하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다. 그 부스러기가 쌓이고 쌓여 침대 위로 떨어지기 직전 유라가 재빨리 그것을 낚아챘다. 그리곤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아… 음…….”

기식은 그제서야 얼떨결에 사과하려 하다가 그것 또한 자신의 타입이 아닌 듯 얼버무리며 입을 다물었다. 유라 또한 그런 그에게 익숙해져 있는지라 별 말이 없었다. 기식은 잠시 후 길게 한숨을 쉬며 시선을 침대 옆 벽쪽으로 돌렸다.

“난 그럴만한 재간이 없어.”

“재간의 문제가 아니라 오빠의 마음이 문제겠지.”

“내 마음이 뭐가 문제가 된다는 거지?”

한 손을 뒤로 뻗어 몸을 약간 기울여 앉은 채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유라. 그녀는 문득 책상 위 담뱃갑 옆에 있던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꽤나 세련돼보이는 은색의 지포라이터였고, 그녀는 그것이 장난감이라도 되는 양 만지작거리며 가지고 놀았다. 그녀의 입이 그러는 와중 무의식처럼 슬쩍 열린다.

“글쎄… 자세한 정황은 모르겠지만서도, 내가 보기엔 오빠는 문제가 되는 상대가 두려워서 일부러 거짓말을 지속시키려는 것 같은데.”

기식은 결국 그녀를 돌아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코웃음을 치는 표정이었지만.

“웃기는 소리 좀 마. 네 눈엔 내가 누굴 두려워해서 끝까지 진실을 숨길 것 같아?”

“일반적인 두려움이라면 그렇겠지.”

기식은 급속도로 미소를 지웠다. 유라는 라이터의 은빛 표면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는 것처럼 빤히 살펴보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좀 전에 오빠보고 은근 겁쟁이라고 했던 것 기억나? 오빠는 누구의 힘 같은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기대를 받게 되는 것이 두려운 거지. 솔직히 말해서 오빠는 최악의 남자 이미지를 갖고 있어. 이여자 저여자 집적대며 아무 여자하고나 자대지. 또 그것을 자랑거리인 양 ‘내가 목표로 한 여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좆을 쑤셔넣는다’라고 떠벌리고 다니지. 눈살 찌푸려질 만한 얘기긴 해도, 오빠는 결국 그런 자신의 나쁜 점을 은연중에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남과 가까이 하거나 선행을 베푸는 짓을 차마 하지 못하는 거야. ‘나는 네가 기댈 수 있을 만큼 좋은 남자는 아니다’… 라… 고…….”

어느 새 기식은 말이 없어졌고, 유라의 말만 계속해서 그의 귀로 흘러들어갔다.

“그래서 많은 악당들이 악당인 채로 남기를 선택하는 걸까.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보단 나으니까. 어줍잖은 선행을 통해 자신의 나쁜 점을 속죄하는 척 하고 싶지 않으니까.”

“유라. 너도 내가 본심은 착하다고 생각하냐?”

유라는 라이터에서 눈을 떼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기식은 그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올려다보고 있었고, 유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너도’라고 말하는 걸 보면 누군가 이미 오빠한테 그런 평을 한 번 한 것 같네. 여자야?”

기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대답을 빠르게 듣고 싶어서 무심결에 한 행동이었으나, 유라의 다음 질문에 곧 너무 쉽게 고갯짓을 했다는 꺼림칙함을 느꼈다.

“오빠가 거짓말한다는 그 상대도 여자야? 물론 다른 사람이겠지만.”

기식은 할 수 없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는 픽하고 실없이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슨 오빠 주변에 문제가 되는 사람은 전부 여자야. 잘생긴 남자는 좋으시겠네, 이렇게 주변에 이성들만 꼬여오니.”

“대답이나 해 봐.”

기식은 자못 딱딱하게 말했으나 사실상 그녀의 질투를 다른 데로 돌리려는 의도가 역력함이 베어있었다. 유라는 속으로 웃고는 모른 척 대답을 정리하는 시늉, 즉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글쎄… 착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네. 하지만 사실 그런 질문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

“의미가 없다고…?”

“오빠한텐 착하다고 누군가가 말해줘도, 오빠 자신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거잖아.”

기식은 그제서야 희미하지만 순수하게 웃어버렸다.

“그건 그렇군. 미안해. 하지만… 나름대로 맘에 드는 대답이군.”

최소한 천경희보다는. 그렇게 생각하는 기식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유라는 곧 자신의 손에 들린 라이터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그것을 공중에 살포시 던졌다 받았다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는 그다지 마음이 강하지 않다는 것…. 쉽게 말해 독하지 못하다고 해야 할까…….”

“계속 알몸으로 그렇게 침대에 앉아있으면 춥지 않나?”

그 정도면 됐다는 의미. 뜬금없이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기식의 말에 유라는 새삼스레 몸을 떨어 보이면서 맞장구쳤다.

“그러게. 보일러 온도를 좀 더 높여야겠어. 내 방은 작아서 가스요금도 얼마 안 나와!”

“그럴 필요도 없지.”

그녀가 일어서려 하자 기식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유라의 목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유라는 얼떨결에 상체를 굽히며 바로 코앞에서 기식의 눈동자를 마주보고 말았다. 멍해진 유라가 얼굴을 붉히자 기식은 한번 씩 웃어주고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마주하였다. 담배 여운이 담겨있는, 그다지 맛있다고는 할 수 없는 키스였으나 둘은 오히려 이게 익숙했다.

유라가 그의 기습 공격에 급속도로 적응하며 눈을 감고 분위기를 적셔놓을 즈음 기식은 생각했다. 어떻게 할지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는 확실히 알겠다. 그렇다면… 자신을 속이지 않고 끝내버리는 게 최선의 방안이겠지. 뭐 하나 없어 보이는, 결코 화려하지 않더라도.

창밖의 겨울비는 멎어갔고, 대신 차가운 바람이 유리창을 흐느끼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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