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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매우 불쾌해졌을 테지만 태환은 그런 상황에서 도리어 유쾌함까지 느껴지는 기이한 경험을 해야 했다. 태환은 피식피식거리다 그만 참지 못하고 고개를 약간 뒤로 꺾으며 폭소했다.
「이봐! 왜 대답이 없는 거야?」
‘이 녀석, 너무 어설퍼서 화도 안 나는군.’
태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그치는 상대방을 골려주기 위해 일부러 더 여유를 두고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행동을 하는 자신이 도리어 나쁜 놈처럼 비쳐지는 것 같아 오래 끌지도 않았다. 태환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려서 가볍게 풀어준 후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에 따라 접속돼있는 ‘카잔 전쟁’ net플레이 대기실 채팅창에는 ‘실버레인’이란 아이디를 ‘현재’ 쓰는 사람에게 디지털 문자가 전송되었다.
「글쎄… 내가 대답을 하기에 앞서 먼저 남의 계정을 도용한 것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고 싶은데」
「말해!」
일방적. 이 녀석 아주 안달이 났군. 태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그만큼 상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상대방을 골려먹는 데에서 느끼는 유쾌함과 동시에 씁쓸해지는 기분도 맛봐야 했다.
천성 상대방을 크게 골리는 데에 소질이 없는 태환으로선 그가 요구하는 점을 순순히 들어주는 편으로 진행되었다.
「난 아냐」
「아니라고?」
약간 누그러진 듯한 말투. 어감이나 어조가 있는 목소리와는 다른 문자이지만 태환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어서 차분하게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네가 말하는 ‘은선영이 요즘 만나는 멋진 남자’가 내가 아니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를 갖지 않아도 될 거야. 선영에게 직접 확인해봐도 상관없고. 녀석은 그런 거짓말에 능숙할 만큼 연애에 익숙한 존재가 아니니까. 하지만 네가 궁금해하는 그 남자가 누군지 나는 알 것 같군」
「그게 누구지?」
「어이, 풋내기 대학생 청년. 내가 아무리 관대하더라도 이런 경우는 거래 성립이 안 되도 한참 안 되잖아. 이제 그만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주면 안 될까?」
상대방은 당황했는지 한동안 메시지가 올라오지 않았다. 녀석이 당황한 이유는 보지 않아도 뻔하지 뭐. 녀석이 짐작하던 ‘그 남자’라는 게 내가 아니라는 점에서 잘못 짚었다는 당황스러움과, 추가로….
「…내가 대학생이란 건 어떻게 알았지?」
라는 것. 그리고 태환은 선영을 통해 그녀와 동거하는 남자의 정보쯤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점은 굳이 세세하게 설명하진 않기로 했다.
「음… 뭐 그건 차차 알게 될 것이고, 어쨌거나 넌 너무 어설퍼. 보통 사람이라면 그 계정 주인인 척 어느 정도 연기하며 상대방으로부터 원하는 정보를 빼내려 할 텐데. 아니면 네 입장에서는 상당히 중요하고 급한 일인지라 그런 연기 따위는 시도해볼 생각을 못해봤다거나」
「……」
「자, 이제 김성진. 네가 어떻게 선영의 계정으로 접속해서 내게 채팅귓속말을 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답변해주실 수 있을까?」
성함까지 확실히 알고 있다는 상대에 대한 충격 때문인지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태환은 보통 이런 경우 그냥 접속을 끊거나 도망갈 리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여유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윽고 메시지가 툭하고 떠올랐다. 마치 꾸중 듣는 아이가 추궁에 못 이겨 성의 없이 내뱉는 것처럼.
「그냥… 녀석의 생년월일이나 주민번호 등으로 때려맞춰 본거야. 녀석이 비밀번호를 입력할 때 옆에서 언뜻 보기에 많은 수의 타자를 치는 것 같진 않았으니까」
태환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긴, 현재의 선영이 계정관리에 주의를 기울일만한 성격은 아니지. 그러고 보면 매사에 조심성 없는 여자와 영악함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남자의 동거라. 이것 참 인정하기는 싫지만 둘이 나름대로 묘하게 어울리는 한쌍이랄까.
「다음부턴 계정을 관리할 때 좀 더 주의하라고 일러줘야겠군」
「네가 ‘그 남자’가 아니라고 해도… 창오빠라는 남자인가? 선영과 아주 가까운 사이 같더라?」
「이런, 이런. 말투에 날이 서있는 게 아주 공격적이네. 그리고 선영이 오빠라고 부를 정도면 너도 내게 ‘너’라는 호칭이나 반말은 좀 삼가하는 게 맞지 않을까?」
「둘이 정확히 무슨 사이야?」
태환은 얼굴을 맞대고 있다면 가볍게 꿀밤을 먹여주고 싶은 후배라는 충동을 느끼면서 다시금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적당한 대답을 떠올려서 채팅을 입력하면서 스스로도 너무 관대한 성격이 아닌가 하는 자각을 해보았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
「웃기지 좀 마. 둘이 아주 긴밀한 대화를 하던 것 같던데」
「예전 애인이라고 부를만한 사이긴 했어. 따라서 현재의 선영과도, 본래의 선영과도 지금으로썬 좋은 오빠와 동생 정도가 되겠지. 때문에 쉽게 말하자면, 고민 상담이나 문젯거리를 얘기하는 정도는 될 수 있는 거야」
「정말이야?」
태환은 결국 자신의 관대성에 약간의 제지를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진실성에 대해서는 네 재주껏 검증해보든가. 그런데 그 질문 그대로 돌려주고 싶군, 김성진. 넌 어떤데?」
「…뭐?」
「이런, 이런. 계속 네 이름을 부르면서 정작 넌 내 이름을 모른다는 것도 실례가 되겠네. 미안해. 약간 흥분했어. 내 이름은 송태환이라 한다. 너보다 3살 위인」
잠시 채팅창은 잠잠해져있었고 태환은 가만히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씩이긴 하지만 나도 모르게 감정적이 되어가는군. 이것은 선영과 성진, 그 둘의 관계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무례하게 물어보는 녀석의 태도 때문일까.
태환은 절대적으로 후자 때문이라 믿으려 애쓰며 차분히 보충설명을 타이핑했다.
「너와 선영은 어떤 사이냐는 거지. 듣기로는 네가 선영의 병원비 등을 부담하고 현재까지 집에서 보살펴주고 있다고 한다. 변변치 못한 학생의 입장에서 굉장히 어려운 일일 텐데 넌 그 모든 걸 감수하고 있어. 그 이유가 뭐지?」
「사람이 죽을 뻔한 걸 살리는 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
「네가 살리기만 했나?」
「그녀의 부모는 물론 가까운 친척 사이도 하나 없는데다 기억상실증이란 특이성까지 겹쳐서 보살펴줄 수밖에 없는 처지다」
「대단하군. 하나님을 믿나? 그야말로 자선사업가 못지 않은데」
「시끄러워. 나도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 현실에 대해 저주하고 싶어. 젠장할.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벌써부터 애아빠가 된 것도 아니고」
태환은 피식하고 웃었다. 그는 가만히 키보드 위에 손을 얹은 채로 모니터를 응시하다, 다시금 손가락들을 움직여 타이핑을 이어나갔다.
「그녀를 좋아하나?」
「……」
대답이 없다는 데에서 태환은 도리어 놀랐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까지 진전했었나?
「좋아하나 보군」
「좋아하고 싶었다」
「예전 선영을 얘기하나 본데, 그것 때문에 현재의 선영이 누구에게 마음이 간다거나 하는 걸 경계하는 건가? 이렇게까지 그녀 계정을 도용해가면서까지 하면서…」
「시끄러워. 왜 내가 그런 쓸데없는 것까지 너한테 대답해야 하지?」
태환은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 더불어 면도를 안 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손가락으로 느끼곤 귀찮은 세면을 해야 할 때가 다가왔음에 서글퍼졌다 - 오른손으로만 느긋하게 타이핑했다.
「여전히 어설프구나. 조금 전 네게 해준 말을 되새겨봐. 난 선영과 아주 가까운 사이야. 때문에 좋은 오빠란 의무감을 살려서 선영에게 ‘누군가가 네 계정을 도용해서 사적인 지인과 대화까지 나누었다’라고 일러준다면, 불쾌함이란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확실하게 느끼곤 그 주인공에 대한 불신이 안타까울 정도로 깊어질 텐데」
「…대단히 친절하군. 그렇게까지 대답을 해주다니」
「친절함이 내 특기지. 선영도 인정한. 하하핫」
태환은 갑자기 못견디게 상대의 표정을 살피고 싶어졌다. 물론 상대인 성진은 내색하지 않기 위해 다음 메시지는 생각보다 좀 빠르게 올릴 것이다…. 이런 그의 예측에 거의 완벽하게 부합하였다.
「어쨌거나… 어쩔 수 없잖아. 아무리 인격은 다르지만… 같은 몸이니까 그… 다른 남자와 그렇고 그런 관계를 가지거나 신체를 접촉한다던가 하는 게 꺼려지는 건 당연하잖아」
「그것뿐인가?」
「그… 게…… 사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지. 창오빠인가 하는 너도 알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선영은 매우 위태로운 상태야. 섹스… 등을 통해 본래의 그녀가 꺼내어지면 그녀는 다시 자살로 발을 내딛게 될지 모른다고」
「잘 알고 있지. 확실히 말하자면 ‘될지 모른다고’ 수준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라고’라는 표현에 가깝겠지만. 하지만 그것뿐인가?」
더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걸까. 태환은 상대와 입장을 바꿔서 그렇게 생각해보곤 손가락을 가볍게 오므렸다 폈다 하며 사이를 두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조금 긴 문장을 나열하면서 자신이 연애상담자라도 된듯한 어처구니없는 자의식도 함께 느껴갔다.
「물론 그런 이유들도 존재는 하겠지.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간과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 김성진. 너는 현재의 선영을 본래의 선영과 자꾸 분리시켜 얘기하려 하지만 사실상 그녀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무슨 뜻이냐고 되묻지는 마. 간단하잖아. 넌 예전 본래의 선영을 사랑하고 싶어서 현재의 선영 또한 ‘그녀’의 일부라 생각하고 놓지 못하는 거야. 전혀 다른 인격이라 할지라도 ‘그녀’에게 속해있던 것임은 사실이니까. 때문에… 나는 어쩐지 네가 과거의 그녀든 현재의 그녀든, 결국 ‘선영’이란 존재와의 사랑은 현재 진행되고 있다는 기분을 받게 되는군」
카페는 평범했다. 옅은 푸른색과 은색의 계통으로 장식된 인테리어는 어느 것 하나 주의를 끌만하지도, 그렇다고 촌스럽거나 낡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함의 그 자체였다. 만일 언어를 시각화하기 좋아하는 별난 인간이 있다면 평범함이란 단어가 가리키는 의미를 구체화시킬 욕구를 참지 못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카페 내부를 약 5장쯤 찰칵거릴 것이었다.
유리벽 한 켠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성진도 그런 카페의 평범함에 내심 새삼스러워했다. 어쩐지 가게가 평범하면 들어서있는 손님들도 평범해지는 것 같다. 자리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손님들도 남녀 비율이 적당히 섞인 채 낮은 소리로 잡담을 나누거나 노트북을 켜거나, 혹은 책장을 넘기거나 하고 있었다. 성진은 커피를 쪽쪽 빨면서 카페 내부를 여기저기 돌아보다가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이거 원 간판까지도 너무 평범해서 자주 지나다니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카페가 있는 줄도 몰랐네. 선영은 어떻게 이런 곳을 발견하고 약속장소를 잡았지? 녀석이 그려준 약도가 없으면 찾는 데 상당한 애로사항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성진은 주머니에서 예의 그 약도를 꺼내보았다.
잠시 동안 성진은 순수하게 그 약도의 그림체 자체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생이 보고 ‘내가 더 잘 그릴 수 있어!’라며 반가워할 수준이군. 머리가 좋은 것과 그림 실력은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실상을 확인한 그는 급격히 미소를 지웠다. 선영에 관한 생각이 짙어지면서 며칠 전 누군가와 디지털 문자로 대화했던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넌 예전 본래의 선영을 사랑하고 싶어서 현재의 선영 또한 ‘그녀’의 일부라 생각하고 놓지 못하는 거야. …결국 ‘선영’이란 존재와의 사랑은 현재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되는군 -
복잡해.
이런 젠장할. 그래도 말이 되는 소릴 하라고. 예전의 자신 모습 하나도 기억해내지 못하고 성격 또한 완전히 다른 현재의 선영이 어떻게 동일시될 수 있다는 거야. 그저 본래의 그녀가 녀석 안에 있으니까, 그리고 외모 또한 같으니까 놓지 못하는 기분이 드는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성진이 무의식적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에 손을 들어올릴 즈음이었다.
“뭘 그리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어? 내 그림 실력이 그렇게 안 좋냐?”
성진은 커피잔에 갖다 대던 손을 헛짚고는 얼떨결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느 새 선영이 바로 뒤에까지 와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느 새’란 표현은 생각에 잠겨있던 성진에 국한된 것이었다. 사실상 카페 내부의 적잖은 사람들이 이미 이쪽을 흘긋거리거나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는 이유를 성진도 얼마 안 가 깨달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성진은 집에서 아무렇게나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니던 그녀와 지금 자신의 뒤에 서있는 그녀가 같은 여자로 동일시될 수 있는지에 대해 재고찰의 필요성을 느꼈다. 성진은 한동안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하니 선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선영 또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마주 내려다보다가 곧 그런 그의 속내를 짐작하고는 쿡하고 웃었다.
선영은 그의 옆으로 사뿐사뿐 걸어가 뒷짐을 졌다. 그리고는 방심하고 있는 그의 앞으로 상체를 쑥 숙이면서 시선 높이를 맞추었다. 청색 코트 자락 안쪽으로 보이는 검은색 미니스커트와 스타킹. 성진은 그녀와 바로 앞에서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고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흐트러뜨렸다. 선영은 목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곱게 빗어진 머리칼을 살랑거리며 매력적인 미소를 생긋 지었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 아니, 너, 그… 오늘 뭔가 딴사람 같다?”
“그래? 흐음, 일단 성공이란 거네.”
받은 느낌 그대로 솔직하게 말해본 성진과는 달리 선영은 뭔가 검증해낸 뉘앙스로 간단히 대답했다. 성진은 잠시 의아해졌지만 자신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다 앉는 그녀를 보고는 곧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뭐 마실래?”
성진과는 달리 어느 새 무표정으로 돌아온 선영은 듣는 둥 마는 둥 그를 보지도 않고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성진은 말문이 막힌 것처럼 입을 다물고 그녀를 보다가 다시 물어보았다.
“커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가벼운 티나 주스라도…?”
“아니, 됐어. 난 약속이 있어서 금방 가봐야 해. 용건이나 얘기하지.”
의아한 표정으로 돌변한 성진. 그리고 역시 그런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는 사람처럼 지갑 속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든 선영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그것을 끼웠다. 잠깐 동안 선영은 성진을 살폿 마주보았다. 뭘 하는지 알 수 없어 심적 상태가 약간 불안정해진 성진이 그녀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겨우 느꼈을 즈음, 선영은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그의 앞에 쑥 들이밀었다. 회색과 남색으로 어우러진 평범한 카드였지만 성진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을 느낄 것만 같았다.
선영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래 금액의 10배이긴 하지만 당신이 말한 대로 생활비에 정신적인 위로금까지 합하면 수개월간 얹혀산 것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될지 모르겠군. 부족하다 생각돼도 인맥도 뭣도 없는 녀석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재력이라 생각하고 감안해주기 바라. 그리고 미안하지만 며칠 더 묵게 될 거야. 거주할 곳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든. 일종의 계약이 필요… 아, 이건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니 넘어가고. 여튼 그래. 이제 질문이 나오겠지? 하지만 되도록 간단히, 짧게. 앞서 말했듯 난 지금 바쁘니까.”
“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두 번 말하기 귀찮아. 네 이해력 문제로 생각하고 이만.”
덜컥. 선영이 의자를 빼고 일어서려는 찰나 성진은 시선을 카드에 고정한 채로 단호히 말했다.
“질문이 있다!”
선영은 성진을 쓱 바라보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내려 붙였다. 어째서일까. 성진은 그녀가 이대로 일어서 걸어나가는 것이 사적 관계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기분이 들어 어떻게든 제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제지하는 구실은 결국… 그녀가 말한 ‘질문’밖에 없었다. 뭐가 이렇지? 뭐가 이래. 뭐가 이리 순식간에 소모되고 조금밖에 남지 않은 거지? 그녀와 나 사이의 연결고리 같은 무언가가…….
“말해.”
짧고 간단명료하지만 완전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듯한 그녀의 어조. 성진은 떨리는 입술로 입을 열었다.
“뭐… 뭐가 10배라는 거지? 정확한 액… 액수를 잘…….”
“당신이 날 치료하는 데 대신 헌납했던 그 시르 병원에서의 치료비. 난 정확한 비용은 모르겠지만서도 네 말에 따르면 사백 정도였잖아? 플러스 알파 정도가 있다면 추후 추가 송금을 요청하든지. 지금 말해주면 더 고맙고.”
“…지금 이 현금카드에…… 4천만원이 들어있다는 소릴 하는 거냐?”
“내가 시간 쪼개가면서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니니 쓸데없는 소리 말지 그래. 질문이나 하라니깐?”
평소 같으면 성진이 버럭 화를 낼법도 한 말투지만 지금의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제안한 문답만이 계속 이어졌다.
“도대… 체 어떻게 이런 큰 돈을 모은 거지?”
“조금만 기억을 되새겨보면 알 수 있을 텐데?”
“‘카잔 전쟁’ 게임 대회… 였나? 그걸로 이렇게 큰 돈이 모여?”
“말했잖아. 김성진.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게임은 대중들 사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다고. 보기보다 세상 물정에 어둡군? 이 기회에 네 앞에 놓인 카드의 현금을 확인하며 그러한 현실을 직시해보든가.”
그리고 선영은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성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다음 질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왠지 눈앞의 선영이 질문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순간 곧바로 나가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그……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거야?”
“무슨 생각?”
“떠나겠다고 한 생각…….”
선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차라리 그 현금카드의 비밀번호가 무엇이냐고 묻는 게 더 유용한 질문이 될 것 같은데, 시시한 것들만 묻는군.”
“내가 꺼지라고 한 것 때문이야, 선영아?”
선영은 잠시 동안 성진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시’에 지나지 않는 몇 초였고, 선영은 여전히 동일한 어조로 딱딱하게 말했다.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 같으니 약간 디테일하게 설명해주지. 물론 그런 이유도 있긴 해. 하지만 근본적인 건 아냐. 뭐랄까. 일종의 계기에 불과한 거지. 사실 난 당신이 히스테리를 부리던 그 날 이전부터 계속 ‘카잔 전쟁’ 대회에 다녔던 것이니까. 그저… 난 내 힘으로 자립하고 싶었을 뿐이야. 영문도 모르고 이 세계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자의를 가지고 살아가게 됐지만, 상관도 없는 누군… 가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존재하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리고 선영은 스르르 시선을 한 쪽으로 비켜갔다. 말은 여전히 계속 이어졌지만.
“당신이 예전의 나를 놓치기 싫어하는 것은 잘 알겠으나… 그녀는 더 이상 나올 기미도 보이지 않고, 나나 당신이나 서로 힘들 뿐이니까….”
“자… 잠깐, 선영아. ‘예전의 나’라든지 ‘본래의 나’라는 표현은 더 이상 쓰지 말자. 그냥… 나는 현재의 네… 네 모습 자체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이며 날 계속 붙잡아두려는 시도 따윈 관두지 그래’ 같은 대꾸는 없었다. 그저 선영은 이젠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재차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성진이 뭐라고 더 다급하게 말하려던 찰나 울리는 그녀의 핸드폰. 통화 너머 상대의 표정을 살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는 데 익숙한 인간의 본능이 발현되는 것처럼, 선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성진은 갑자기 화사하게 웃는 선영의 모습을 똑똑히 관찰할 수 있었다. 더불어 완전히 달라지는 그녀의 어조까지. 성진은 그렇게 사근사근해진 선영을 처음 보는 것만 같았다.
“아! 기식 씨. 이럴 줄 알았으면 약속시간을 좀 더 늦게 잡는 건데… 정말 죄송해요. 미안해요! 하지만 금방 갈게요. 급한 일이 생겼지만 지금 막 마무리된 참이었거든요. 예? 아하하…. 상냥하기도 하셔라. 제가 좀 이래요. 이잉…. 옙. 거기로 갈게요.”
통화 버튼을 콕 눌러 전화를 끈 선영은 생글생글 미소 지은 그대로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일어선 자세 그대로 몸을 한바퀴 빙글 돌면서 명랑하게 물어보았다.
“어때, 스타일 괜찮지?”
성진은 그제서야 앞서 그녀가 ‘일단 성공이란 거네’라고 검증하듯 말했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기식인가 뭔가 하는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치장한 자신의 모습을 성진에게 한번 평가 받아보았던 것이었다. 뇌가 뒤틀리는 기분을 느껴야 정상이겠지만 사실상 성진에겐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성진은 빠르고 직설적으로 그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가지 마.”
선영은 의아한 시선으로 성진을 내려다보았다.
“어딜?”
“방금 통화한… 그 남자한테…….”
선영은 입술을 오므리고 눈동자를 한번 굴려보더니 툭하고 말했다.
“그럼 당신 집에서 떠나는 건?”
“그것도 가지 마.”
잠시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그를 마주보는 선영. 그녀는 구두를 바닥에 톡톡 두드리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무표정을 일관하다가 가방 속에서 지갑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는 만원짜리 한 장을 골라내어 성진이 앉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여기서 보자고 했으니 커피값은 내가 내야겠지.”
파악-!
성진은 손을 옆으로 휘둘러 지폐를 쳐내었다. 덕분에 만원짜리 지폐는 어느 운 좋은 사람이 주울 바닥 어딘가로 팔랑거리며 날아가버렸고, 선영은 그런 그를 보지도 않고 등을 돌린 채 또각또각 걸어나갔다. 성진은 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테이블에 손을 짚고 다급하게 외쳤다.
“아직 질문이 끝나지 않았어!”
“미안하군. 내가 시간이 없어. 카드 비밀번호는 나중에 집에서 알려주든지 할게.”
성진은 이를 아득 물고는 벌써 카페 입구까지 걸어간 선영에게 단숨에 달려갔다. 그리고는 뒤에서 팔을 둘러 그녀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빌어먹을…! 가지 말라고!”
선영은 거친 제지에 몸을 휘청거리다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옆으로 쓸어 넘긴 후 고개를 반쯤 돌려 그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성진은 눈을 꽉 감고 절대 놔주지 않겠다는 듯 그녀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선영은 조용한 카페에 시끄럽게 이게 무슨 민폐냐는 질책을 던지려다 갑자기 뭔가가 욱하고 치밀어올랐다. 선영은 자신도 모르게 따라 언성을 높여 그에게 외치듯 말했다.
“이것 봐, 김성진! 도대체 네가 아쉬울 게 뭐냐? 넌 그 혜진인가 하는 여자랑 사귀고 있다며?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꺼내려 했는데… 난 연애란 걸 잘 모르지만서도 내게 이렇게 매달릴 거면 다른 여자랑 사귀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 아냐?”
“몰라, 가지 마, 가지 마!”
막무가내인 성진 앞에서 몸부림쳐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 정도는 선영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붙잡힌 자세 그대로 가만히 서있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야, 김성진. 애매한 상태에 놓여 있는 나와는 그렇다 쳐. 넌 도대체 그녀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아니, 이렇게 말하면 또 헷갈릴지 모르니 확실히. 그 혜진인가 하는 여자한테 미안하지도 않냐고. 듣기로는 그녀와 공식적인 CC라며. 뜨거운 열애중이라며. 넌 서로 사귀는 여자한테 잘해줘야 하는 것 아냐?”
“그런 건 괜찮아. 그녀면… 혜진이라면 다 이해해줄 테니까.”
그의 이러한 발언에 선영은 그만 기가 차서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하지만 그녀가 매몰차게 성진을 뿌리치려 애쓰거나 경찰을 부르거나 할 마음 따위가 들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녀는 내심 흔들리고 있었다. 성진이 아쉬워할 것은 계산 속에 있었으나 4천만원이라는, 더군다나 아직 학생 신분인 성진의 입장에서는 결코 놓치기 힘든 거액이었기에 이렇게 완강하게 붙잡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뭐였을까…. 선영도 돈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그 무언가가 그와 자신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게 무엇이지? 이렇든저렇든… 성진이 있어서 그나마 내가 이 정도까지라도 올 수 있었다는, 그런 것 때문인가?
생각을 곱씹어보던 선영은 잠시 후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거 놔.”
“못 놔.”
기어들어가지만 간절한 목소리. 선영은 한숨을 폭하고 내쉬고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채, 하지만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날 놔줘야 테이블로 돌아가 얘기를 계속하든지 할 것 아냐. 이렇게 만인의 시선을 받으며 추태를 계속 부릴 거야? 별로 바람직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성진은 그제서야 선영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자세 그대로 눈을 번쩍 떴다.
“얘기를 계속한다고? 아… 안 갈 거야?”
선영은 그가 주춤하는 틈에 힘껏 몸을 뒤틀어 그의 팔을 떼어버리고는 신경질적으로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성진은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 옆에서 대답을 기다렸지만 선영은 구겨진 옷이 대충 바로 서자 그의 앞을 또각또각 지나쳐 테이블로 돌아갔다. 성진은 멍하니 그런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문득 테이블 위에 놓고 온 카드가 도난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자신도 테이블로 돌아갔다.
자리로 돌아와보니 선영은 아까 그 현금카드를 다시 지갑에 담아 가방 속에 넣고 있었다. 성진은 기대 반 우려 반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쭈뼛쭈뼛 의자에 앉았다. 선영은 성진이 이제 자기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하지만 예전 같으면 무척이나 바랐을 주도권을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와서는 알 수 없는 씁쓸함으로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감. 자신 또한 성진을 떠나기 어려울 듯한 그 무엇. 그래서 선영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시간은 성진에겐 애가 타 죽을 것만 같은 고역의 기다림이었다. 성진은 그녀가 아무 대답이라도 시원스럽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커피컵을 쥐고 빨대만 질겅질겅 씹어대었다. 하지만 선영이 그 기식인가 하는 남자와의 약속시간도 제쳐두고 있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뭐라 다그치지도 못한 채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 결국 빨대가 커피와 같은 액체를 쉽게 통과시킬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너덜너덜해져서야 선영은 입을 열었다.
“떠나는 건 잠시 보류다. 생각이 좀 필요할 듯해.”
“그럼……!”
성진이 반가움에 자신도 모르게 희색이 돌며 눈을 크게 뜰 즈음, 선영은 빠르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기식 씨와의 만남은 갈 거야. 오늘뿐만이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그분은 내게 꼭 필요한 분이니까. 물론 그분도 나를 소중히 여겨. 우린 아주 중요한 일을 해야 해. 자세한 건 얘기가 길어지니 다음 기회로 넘어가고.”
성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반대로 선영은 상황 정리가 끝나가는지 한결 여유가 생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카드는 오늘이나 내일쯤 다시 줄게. 내가 완전히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겠군. 난 이 카드에 담겨 있는 4천만원의 반을 뺀 2천만원을 네게 건넬 거야. 그리고 후에 방향이 확정되면 나머지 2천을 건네든지 할게. 지금 이 자리에서 완전히 결정할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군. 이 점은 내가 예측하지 못했어. 쏘리.”
그리고 말을 마친 선영은 약속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는 등의 말을 중얼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성진이 따라 일어서려 했지만 선영은 이번에야말로 제지를 하면 가만 안 두겠단 의미로 손가락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성진이 그녀의 손끝에 기계처럼 몸을 굳혔을 즈음, 선영은 그대로 몸을 돌려 카페 밖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어쩐지 우아해 보이기까지 한 동작으로.
그런 그녀의 모습에 2차전(?)을 기대하던 카페 내부의 손님들 또한 선영이 나간 문과 성진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서서히 시선을 원위치로 돌렸다. 정작 성진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 빈 커피컵만 쭉 응시하고 있었지만.
형준은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인 채 노트북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보일러를 풀가동하다시피 하는 기식의 아지트는 한겨울에도 따뜻하기 그지없었고, 더불어 모두 외출 상태였고, 그래서 형준은 빈 거실 바닥에 노트북을 펼쳐놓은 채 마음껏 집중하는 중이었다.
대다수의 공대생은 컴퓨터와 친하기 마련이다. 형준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더군다나 현재는 ‘기식의 정보통’ 노릇으로서 그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더욱더 컴퓨터를 활용해야 했다. 따라서 형준이 어떻게 시간이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노트북 모니터를 정신없이 바라본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하지만 현재의 형준은 그런 평범한 정보통으로서의 역할 밖의 어떠한 사적 감정에 사로잡혀있는 듯하다. 그는 이채마저 발하는 눈동자로 모니터의 선영 사진을 몇 개 훑어보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대단한 여자야. 기식 혼자 먹게 놔두기 아까울 정도로… 그래서 합류하는 패거리한테도 돌려질 테지만…….”
긴장했기 때문일까. 형준은 춥지도 않은데 콧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고는 숨을 한번 들이켜서 빨아들였다. 두꺼운 안경 아래로 깔린 여드름들이 자신감 없는 그의 면상을 돋보이게라도 하려는 듯 번들거리는 기름기를 잔뜩 끼고 있었다. 그는 재차 흘러나오는 콧물을 막으려는 심산인 듯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티슈를 찾았다.
그 즈음 쿵쾅거리며 들려오는 현관 밖 소리. 형준의 기억에 미루어보면 이는 필시 기식이 고용한 패거리들이 아파트 계단을 밟아대며 아지트로 올라오는 것일 터였다. 형준은 급한 대로 옷소매를 이용해 코 밑을 쓱 닦아버리고는 다시 모니터를 응시하며 작업에 전념하는 척했다. 충전 플러그 등을 뽑아가며 노트북을 정리해 쪽방으로 도망갈(?) 시간은 이미 늦었다. 꽁무니 빼는 걸 보고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었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며 인상 험악한 무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그러니까 씨발. 내가 그년한테 퍼다 준 게 얼만데, 곱게 보내 줄 것 같아?”
“야, 야. 네가 뭘 퍼다 줘? 그년을 위해서 돈 한푼 쓴 것도 없잖아?”
“요기 물은 내 것 아니냐? 큭큭…. 씨발, 아주 좋아 죽더만.”
“그렇다고 그년 머리칼을 불로 지져버리다니, 너도 참 대단하다. 크하핫….”
“화끈한 연애는 끝도 화끈해야지. …엇? 오덕후다, 오덕후. 여~. 형님 없는 동안 잘 있었냐?”
무도한 말을 지껄이며 들어오던 레게 머리의 남자는 거실에 쭈그려 앉아있는 형준을 보자 걸쭉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뒤따라오던 다른 패거리들 또한 유희거리로 사온 술과 안주 등을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채 뒤에서 시시덕거리며 구경했다. 그들의 눈에는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그…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왜, 맘에 안 드냐, 그 호칭이? 그럼 뭐라고 불러줄까, 음…. 십덕후? 크하하핫….”
“십덕후는 또 뭐냐, 크크큭…. 오덕보다 높은 거냐?”
“아니, 실제로 있다니까. 뭔진 잘 몰라도 어디선가 분명히 들었어.”
“그럼 백덕후도 있냐? 크하하하…….”
그다지 품위 있다고 볼 수 없는 그들만의 담소(?)에 형준은 부르르 떨며 패거리들을 노려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덤비거나 할 재간도, 깡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즈음 웅웅거리며 울리는 누군가의 핸드폰 소리. 잠시 패거리들 사이에서 누구 전화지? 하는 시선이 교차하듯 이리저리 맞부딪쳤다.
의도치 않은 정적 속에 전화기를 꺼내든 건 다름 아닌 형준. 패거리들의 입이 한데 모아지며 감탄의 소리가 오- 하고 나온다.
“야, 야. 쉿. 조용. 우리 고귀하신 공학도님께서 통화 중이시다.”
“여-. 오덕후. 네게 연락 주는 사람도 다 있냐? 대단한데.”
“보나마나 기식 아니면 그 뭐냐…. 인터넷 가입 권유 광고? 크하핫.”
형준은 다시금 입술을 떨며 그들을 노려보다가 통화 내용에 집중했다. 몇 마디가 오갔고 형준은 짧게 간단히 대답하는 식으로 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그래. 지금 와도 될 것 같은데…. 마침 다 모여있어.”
형준은 그렇게 말을 맺고는 핸드폰을 끊어서 다시 바지주머니 속에 넣었다. 통화가 끝나자 패거리들은 웃음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약간 의아한 시선이 되었다. 누구 전화인지는 별로 관심거리가 아니었으나 자신들을 지칭하는 듯한 형준의 말에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깡마르고 간사한 인상의 사내가 툭하고 말을 건넸다.
“다 모여있다는 게, 우리를 말하는 거냐?”
“그렇다. …계획에 약간의 변동이 있을 예정이다.”
앞장서 나왔던 레게 머리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투덜댔다.
“쳇, 기식 녀석. 우리는 별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 같지 않다면서 자꾸 수정하기는. 그래서, 우린 여기서 대기하고 있으면 되는 건가?”
“그래. 하지만 기식은 오늘 여기 오지 않아. 그저… 새로운 녀석이 계획에 참여했고, 그 녀석이 소개 겸 지금 온다고 했어.”
“뭐? 강간의 계획에 또 누군가를 들여놔?”
“이런 건 인원이 늘어나봤자 좋을 게 없는데. 요란해질 소지도 있고.”
그들의 이러한 웅성거림에 아무런 말도 않고 현관문쪽을 바라보는 형준. 패거리들은 방금 통화했던 누군가가 아지트 근처에 있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렇게 금방 오는 걸 기다릴 정도면….
잠시 후, 삑삑거리며 도어락 넘버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고개가 현관쪽으로 돌아갔고, 그들은 모두 익숙하면서도 묘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까무잡잡한 흑인 피부의 덩치 큰 사내가 모두를 대신해 그 위화감을 말로 표현했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 우리 아지트에 방문했던 녀석 중 하나인가?”
형준은 역시 그 의문에도 대답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현관앞으로 걸어갔다. 삐걱 하고 낡은 아파트를 표상하는 듯한 녹슨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그리고 그 바깥으로 보이는 아지트 방문자는 형준을 제외한 모두를 멍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부로 들어오는 공기가 차가운지 형준은 팔짱을 껴 겨드랑이 사이에 두 손을 각각 집어넣고 고갯짓으로만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다.
“춥군.”
낮게 깔려있지만 분명한 여자의 목소리. 패거리들 중 하나가 벙찐 음성으로 얼떨결에 그녀 이름을 불렀다.
“천경희…? 네가 그 계획에 참여할 새로운 녀석…?”
평소와는 다르게 단정한 옷차림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는 그녀는 어딘가 회사원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으나 분명 천경희가 맞았다. 현관문이 탕하고 닫힘과 동시에 신을 벗고 거실로 올라온 경희는 거기에 모여있는 패거리들을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태연하게 말했다.
“왜, 나는 참여하면 안 되나? 남자들만 모여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여자 하나라도 있는 게 그 선영인가 하는 년한테 경계감을 덜어줄 수 있을 텐데.”
“그… 그렇긴 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이런 강간의 계획에 진지하게 참여하겠다고 나서다니, 저 골때리는 년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패거리들은 하나같이 갑작스런 동료(?)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설마… 기식한테 차인 걸 회복할 방도로 내보는 건가? 아무리 여자의 속은 알 수 없다지만 이런 미친 짓에…….
패거리들 사이에 그런 생각이 떠돌고 있을 무렵, 까무잡잡한 피부의 덩치 큰 사내는 어쩐지 자꾸만 경희가 든 가방이 시야에 거슬렸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하드케이스로 된 그것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가방은 뭐지? 여자가 들고 다니기에는 좀 지나치게 큰 것 같은데.”
경희는 약간 뒤에 물러서있는 형준을 돌아보았고, 형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보여줘도 상관 없겠다는 고갯짓. 경희는 그 의미를 알고는 그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앉으면서 가방을 수평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익숙한 손짓으로 잠금장치를 풀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가방이 열리자, 거실에 모여있던 패거리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