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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의 두 눈이 알 수 없는 빛으로 물들며 커졌다. 그리고 기식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의 눈빛이 뭘 의미하는지를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엉덩이를 앞으로 쭉 밀었다. 이 정도는 껌이지 뭐. 기식의 의미심장한 미소 밑으로 천경희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알 수 없던 눈동자의 빛은 조금 확실해졌다. 하반신 안쪽을 지나 몸 속 깊은 곳으로 전해지는 독특하고 특별한 느낌. 그것에 쾌감을 느껴가는 것이다. 기식은 그렇게 생각하며 경희의 볼 한쪽으로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어이, 어이. 벌써부터 가버리면 어쩌겠다는 거야? 은선영. 고등학교 때의 그 도도하고 잘난 척하던 네 차가움은 어디로? 그걸 좀 유지해보라고. 하하핫!”
“흐읏……. 아 정말! 그 저질멘트 좀 안 할 수 없어? 나… 난 천경희라고, 이 망할 놈아!”
“알고 있어. 분위기 좀 맞춰보라고. 계획이 다할 때까지 넌 선영을 향한 내 욕구 분출의 대용이라니까?”
기식은 키득키득 웃으며 경희의 두 다리를 양 팔로 감싸 안은 채 연이어서 자지를 보지 속에 쑤셔넣었다. 침대가 들썩이면서 경희의 신음소리도 고조되어갔다. 어쨌거나 기식의 태크닉은 엄청난 경험 속에서 정교하게 굳어진 행위이니만큼 경희의 보지 속도 확실하게 쑤셔주고 있었다. 그의 자지 끝이 경희의 보지 속을 헤집으며 그녀가 원하는 성감대를 찾아 자극시켜나갔다. 경희는 결국 여자의 존심을 갈기갈기 짓밟는 그의 멘트질에도 불구하고 쾌감에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앙……! 그… 그만……! 아니, 아… 니. 그만하지 마. 하… 하앙……!”
계속하라는 거야, 그만하라는 거야? 물론 기식은 속으로 마치 그녀 들으라는 것처럼 내뱉어보았을 뿐이다. 이 경우에는 조금씩 더 강도를 높여가며 계속해달라는 뉘앙스임을 기식은 알고도 남았다. 더군다나 이 년과는 한두 번도 아니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잠자리를 같이 했는데 그것도 모르면 말이 안 되지.
그나저나 언제 넣어봐도 참으로 맛나단 말야, 이 녀석 보지는. 기식은 처음 그녀를 길거리에서 헌팅해서 아지트로 데려와 솜씨를 보여줬던 때가 떠올랐다. 누구 말처럼 이 녀석 그 때부터 완전히 나한테 꽂힌 거지. 좀 반반하다고 튕기고 까칠하게 구는 년들이 더 밝힌다니까 후후. 확실히 계획을 진행하는 동안 내 욕구 분출구로 활용하는 데에 더할 나위 없는 년이다.
그런데 그 계획…….
“…….”
기식의 얼굴이 굳었다. 물론 프로(?)적인 정신은 상념 속에서도 그의 허리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만들었기에 한창 달뜬 경희의 입장에선 눈치채지도 못할 것이었지만. 기식은 이 순간 의도치 않은 선영의 모습이 떠오르고 말았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맛보게 해줄 포석이 될 희망. 그러나 기식의 예상을 뛰어넘어버린 그 미치도록 순수하고 아름다운 희망이 담긴 미소.
뭐냐고 진짜. 내가 무슨 수십억을 지원해준 것도 아니고 겨우 프로게임단 스카우트 제의 정도에 그렇게 고마워하다니. 도대체 녀석의 현 상태는 어디까지 찢겨져 있기에 약간의 도움마저도 감격해서 어쩔 줄 모른단 말인가.
평범하게 고마워하고,
평범하게 희망을 가지라고.
왜… 복수하려는 자로 하여금… 죄책감을 가지도록 행동하냔 말야…….
이런 젠장할… 차라리 의심을 갖고 경계를 한다면 내가 이렇게 난감하지 않을 텐데……!
“아흑……!”
무의식적으로 기식의 피스톤질에 힘이 들어갔는지 경희가 고조된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기식은 간신히 상념 속에서 빠져 나와 허리 움직임을 멈췄다. 울꺽. 자지와 맞물린 경희의 보지에서 보짓물이 한 모금 분출되어 침대 시트 위에 흩뿌려졌다. 경희는 자신의 가슴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조금 들어 내리깐 눈으로 보지 쪽을 내려다보았다. 하반신이 미미하게 떨렸고 기식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더듬더듬 사과했다.
“아, 미… 미안. 아팠나? 뺄까?”
경희는 대답 대신 이상하다는 눈으로 빤히 기식을 올려다보았다. 기식은 고개를 숙여 앞머리칼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고, 경희는 한 손을 들어 그의 팔을 감싸쥐었다.
“아… 아냐, 계속 해도 돼. 그냥 갑자기 격렬해져서 놀란 것뿐이야.”
하지만 기식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자 경희 쪽이 도리어 피식 하고 웃으며 팔을 잡았던 손을 들어올려 그의 뺨으로 다가갔다.
“근데 왜 갑자기 안 어울리게 사과야? 나, 너한테서 미안하단 말 처음 들은 거 같다? 늘 니 하고 싶은 대로만 했잖아.”
“빈말이야.”
“빈말이라도. …무슨 일 있어?”
기식은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뺨으로 느껴지자 그제서야 고개를 조금 들어올렸다. 살짝 땀에 젖은, 하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는 경희는 어째선지 평소보다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기식은 그런 그녀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식은 다시, 이번엔 눈동자를 옆으로 돌려버리며 입술을 깨무는 시늉을 하곤 내뱉었다.
“……이년이나 저년이나.”
경희는 그의 말투에 욱하곤 따라서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남은 걱정해주는데. 도대체가… 여자를 대용품처럼 다루는 네깟 녀석한테 이렇게 말해주는 것 자체가 내 자신도 이해가 안 간다!”
“그래, 그거야.”
기식은 만족스러운 듯, 하지만 흥은 다 깨진 듯 경희의 보지 속에서 자지를 빼어들고는 티슈를 아무렇게나 뽑아들어 대충 닦아댔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경희는 멍청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운 채 그런 기식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자신의 팬티를 주섬주섬 챙겨입었다. 경희의 눈이 의아함으로 짙게 물들어갈 때쯤 툭하고 열리는 기식의 입.
“그게 정상 아냐? 자신을 한낱 노리개처럼 여기는 남자들한테는 분노를 표출해야 하는 법. 그렇지 않으면 휴지조각처럼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존심을 어떻게 감당하겠어?”
“…그렇지 않아.”
기식은 팬티만 입은 채로 근처 책상에 손을 얹은 채 쿡쿡거렸다.
“물론 그렇지 않겠지. 경희 네 년 같은 케이스도 드물지는 않으니까. 자신을 쾌락으로 이끌어준 남자의 테크닉을 잊지 못해서 겉으로는 분노를 표출하는 척하지만 일정 선상에서 살살 구슬릴 수밖에 없지. 하여간, 이래서 좆맛을 아는 여자들이 더 무섭다니까. 하지만 네 녀석 속은 너무나도 뻔히 들여다보여서 재미가 없어. 그러니까 그 같잖은 여심으로 날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 따윈 버려.”
“그런 게 아니라니까!”
갑작스런 외침에도 기식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경희도 그런 그의 반응에 새삼스레 실망하진 않았다. 이 녀석은 차갑고 냉정하기 그지 없는데다 나 외에도 여자 경험이 너무 많아 웬만한 자극에는 끄떡도 하지 않을 남자다…. 그래서 경희는 한쪽 팔을 침대에 받치고 상체를 조금 일으킨 채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기식, 너… 그 선영인가 뭔가 하는 여자와 자려는 거지? 지금 진행하는 계획이란 것도 그것이고.”
“…그래서?”
“아, 잔다는 표현 또한 어울리지 않겠군. 그 계획이란 것이 강간이라며?”
기식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경희를 마주보았다. 경희는 히죽 웃으며 머리칼에 살짝 가려진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형준에게서 다 들었어. 과거의 어떤 썸씽에 대한 복수라고.”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고 다니는군. 그 자식도 참…….”
이어서 기식은 한 손을 허리에 얹고 그녀를 바라보며 느긋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경찰에 신고라도 할 텐가?”
“신고? 웃기지 좀 마. 내가 뭐하러 아무 상관도 없는 년을 위해 번거롭게 신고까지 해야 해?”
하긴 이 녀석은 도덕성과는 거리가 먼 그저 골때리는 년 중 하나일 뿐이지. 귀찮을 일은 없겠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던 기식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그냥 네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야.”
“무슨 뜻이야?”
“그… 그냥이라고! 네가 무슨 비극의 주인공처럼 복수라고 하는 것에 얽매여 다녀봤자 너 자신에게 도움될 게 하나도 없다고.”
기식은 뜬금없이 당황스런 음성을 내는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는 목을 긁적이면서 한쪽 눈살을 찌푸린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느낌 역시… 짐작이 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참 별 곳에서 다 같잖은 방해로 얽혀지는군. 선영이란 년은 무슨 수호천사라도 따라다니는 건가?
기식은 터벅터벅 침대로 다시 걸어가서 경희를 내려다보았다. 경희는 두려움 반 의문감 반으로 물든 눈동자를 들어올렸고, 기식의 시선이 어쩐지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훑어보는 기분이 들자 슬쩍 한쪽 팔로 젖가슴을 가렸다. 반쯤 일으킨 몸을 지탱하는 다른 쪽 팔이 저려왔지만 경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기식은 픽하고 웃으며 말했다.
“천경희. 너 정말로 날 좋아하냐?”
“…….”
어설픈 부정을 해봤자 기식은 눈치챌 게 뻔했기에 경희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그를 계속해서 올려다보다가 곧 스르르 시선을 늘어뜨리는 그녀. 이렇든 저렇든 기식에겐 대답이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게 내뱉으며 터벅터벅 걸어가던 기식. 그는 아까 그 책상까지 도달하자 멈춰선 후 팔짱을 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쿡쿡… 크크크…….”
얼마간 키득거리던 기식은 이젠 아예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한쪽 손으로 얼굴을 짚은 채 고개를 젖혔다.
“하하하… 하하하핫!”
경희는 갑자기 웃기 시작하는 그의 등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인 걸까, 저 녀석. 기식은 그렇게 한참 동안 정신 없이 웃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처럼 팬티 양쪽에 손을 쑥하고 찌르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경희는 흠칫했고 기식은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방바닥을 내려다보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그는 한쪽 발로 바닥에 떨어져있는 경희의 브래지어를 슥 들어올린 후 마치 축구라도 하듯 그녀에게 휙하고 건넸다.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날아온 브래지어를 잡을 생각도 못하는 경희.
기식은 왠지 경멸감이 담긴 미소로 그녀를 응시하면서 툭하고 물었다.
“내 어디가 좋냐, 천경희?”
“어… 어?”
“내 좆이 좋냐?”
찔러 넣은 팬티 양옆의 손을 밑으로 내리면서 덜렁거리는 자지를 보이는 기식. 이미 볼 것 다 본 사이지만 경희는 미간을 좁히면서 시선을 두길 부담스러워했다. 기식은 그 상태로 검지손가락을 들어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연이어 물었다.
“아니면 내 얼굴에 반한 거냐?”
“…….”
“그것도 아니면 내 키나, 뭐 이런 잔근육 같은 것?”
경희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기식은 미소 띤 얼굴 그대로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네가 좋아하는 것은 타인의 외모에 깃든 일종의 네 환상일 뿐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설렘으로 다가와 좋아하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지만, 설령 그것에 이끌려 사귄다고 해도 오래 가지 못해. 게다가 나는 네 녀석도 알다시피 여자를 그저 한낱 심심풀이용 수단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가벼운 남자야. 상처받기 싫으면 이쯤에서 그냥 엔조이 관계로 지속하는 게 네 녀석한테나 나나 가장 좋은 방향이다.”
동갑이라는 반박은 더 이상 그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온 경희의 대답은 반갑지 않은 납득의 과거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기식은 고개를 갸웃했다. 경희는 더 이상 한쪽 팔로 받치고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게 버티기 힘들었는지 아예 똑바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그녀 역시 한숨처럼 말했다.
“그래서 더 널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야.”
가볍게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기분을 받으면서, 기식은 미소를 지우고 다시금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뜻이지?”
그렇게 묻는 기식의 기분은 언짢았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녀석의 속을 갑자기 짐작할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날카로워진 기식의 눈초리와는 달리 경희는 털어놓고 싶은 말을 다 꺼내게 돼서인지 도리어 편안해졌다. 여전히 기식의 자지는 몇 발자국 너머에서 덜렁거리고 있었지만 경희는 보는 듯 마는 듯 덤덤하기까지 한 음성으로 말했다.
“말 그대로야. 네가 스스로 나쁜 남자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는 세간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거냐?”
빈정거리는 그의 말투에 경희는 기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기식은 약간의 비웃음 섞인 표정을 지으며 ‘그런 드라마틱한 사랑을 원한다면 혼자 마음대로 만들어보든지. 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똑같이 행동할 테니까.’ 같은 답변을 머릿속으로 구상한 후 입 밖으로 내뱉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경희의 톡쏘는 듯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말의 의미를 몰라? 네 스스로 그렇게 말하면서 다가오지 말라고 하니까 하는 소리라구!”
“뭐…?”
“너… 넌 말야. 정말 최악이야.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날 대하고, 테크닉을 빼면 무드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고, 나한테 뭔가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도 않고… 기분전환 겸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기본인데다, 나랑 하고 있을 때도 그런 다른 여자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대잖아.”
이봐, 이봐…. 너, 날 좋아한다며? 그런데 지금 늘어놓는 말들은 전혀 매치가 안 되는데? 설마 좋아한다는 말과 싫어한다는 말을 혼동하는 건가? 기식은 그녀가 감정적으로 쏟아내는 말들에서 의문감이 증폭됨을 느끼며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에 천경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러한 의문감을 한번에 해소시킬만한 결정적인 실마리였다.
“그러나… 나쁜 것은 그게 다야.”
잠깐 동안 멍한 표정을 짓던 기식은 얼른 고개를 돌려 앞머리칼로 시선을 숨겼다. 그리고 경희 또한 그런 그를 보지도 않으며 중얼거리듯, 하지만 똑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넌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리고… 자신을 속이지도 않지. 보통 남자들은 어떤지 알아? 여자와 한번 자보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 그리고 별의별 허세를 다 담아서 거짓말로 자신을 치장하기 바빠. 더 최악은 어떤지 알아? 여자를 자신에게 묶어두려고 마음에도 없는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인다는 거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의 감정을 갖고 노는 녀석들… 난 그런 남자들에게 지쳤어.”
헛소리다. 허튼 합리화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기식은 고개를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서 경희의 목소리는 그의 귀에 계속해서 찔러들어왔다.
“하지만 넌 달라…. 넌 자신을 나쁜 놈이라고 지칭하면서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려 하지만 일정 이상의 선을 넘지 못해. 사람을 실망시키고 상처주는 짓을 차마 할 수 없는… 착한 본성을 담고 있어. 그래서 나한테도 다가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고.”
“그건 착한 게 아니라 도망치는 비겁자의 행동이라고 하는 거야.”
“하지만 난 괜찮아. 너와 함께 있던 날들이 긴 건 아니지만… 난 너의 그런 면을 알고 있기에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어. 설령 더 큰 문제로 상처준다 해도 난 극복해볼 거야.”
남의 얘기는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만 판단하고 있군. 게다가 한낱 성욕 노리개 주제에 날 다 아는 듯이 말하는 저 말투… 정말 짜증이 난다. 도저히 못 봐주겠어.
도저히 못 봐주겠는데…….
그런데…….
이런 젠장할. 몸이 왜 또 굳어있는 거야? 저 년의 말이 어떤 의미로 다가온다고… 내가 가만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거지? 문득 그는 가슴 한 켠이 두근거려오고 있음을 느끼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그런 기분들이 생소하고 어색하고 싫었다. 내가 뭐 때문에 이딴 년의 말에 휘둘리고 흔들려야 해? 그래서 그는 다음에 나온 경희의 말까지는 참고 있을 재간이 없었다.
“너도 사실… 자신의 그러한 점을 알고 있잖아? 그렇기에… 그 은선영인가 뭔가 하는 여자에게 강간이란 복수를 차마 진행할 수 없어서, 이렇게 불안한 것…….”
“집어치워!”
뿌리치듯 악에 받친 목소리를 낸 기식은 주먹으로 책상을 쾅하고 내리쳤다. 경희는 움찔했지만 시선은 도리어 기식의 얼굴을 향했고, 기식은 그런 그녀를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옷을 주워 입었다. 핸드폰을 열어본 그는 문자를 확인하면서 간신히 건조하고 냉혹한 평정을 유지해나갔다. 계획의 종착지로 작용할 맨션 지하주차장을 확보했다는 형준의 메시지와 함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고, 기식은 일부러 그것을 면밀하게 살펴보는 척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어떤 말을 하든 날 막을 순 없어. 계획은 끝까지 진행될 것이다.”
“기식아….”
“날 좋아한다고? 하! 그렇다고 내가 사귀기라도 해줄까 봐? 난 네깟 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입지의 남자란 걸 이 기회에 똑똑히 보여주지.”
콰당!
그리곤 더 듣지 않겠다는 듯 방문을 거칠게 열고 뛰쳐나가는 기식. 혼자 남겨진 경희는 한 팔로 젖가슴을 가린 채 그가 나간 문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푹하고 꺾었다.
방문이 어찌나 세게 여닫혔던지 거실에서 졸던 불량배들까지 부스스한 눈을 치켜뜰 정도였다. 그리고 곧 그들의 눈초리는 흥미로움으로 감돌았다. 기식이 그렇게 화가 난 모습은 처음 보았기에 패거리들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곤 히죽히죽 웃었다.
“어이, 이기식. 왜 그래? 오늘은 경희가 별로 만족시켜주지 않디?”
“하기야 그 정도로 따먹었으면 질릴 만도 됐지, 큭큭.”
“귀찮아졌으면 그냥 내쳐버려. 내가 클럽에서 만난 년 하나 소개시켜줄게. 니한테 어울릴 것 같이 되게 쎄끈하거든.”
기식은 키득거리는 패거리들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지적당한 듯한 레게 머리의 남자는 양손을 들어 ‘내가 뭘?’이라는 제스처로 어깨를 으쓱했다. 기식은 천장을 향해 짧게 한숨을 내뱉곤 핸드폰을 열어 사진을 로딩했다. 그리고 그것을 쭉 훑어 보여주면서 말했다.
“하츠로 맨션 지하주차장이다. 난 지금 그곳을 둘러보고 올 테니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각자 역할을 분담해줄 테니 그걸 듣고 오늘은 해산이다.”
“드디어 시작이군.”
짧은 탄성과 함께 작은 환호성이 울려퍼진다. 패거리들의 눈에 생기가 돌았고, 까무잡잡한 흑인 피부의 덩치 큰 사내는 껌을 질겅거리며 하얀 이를 드러내보였다.
“방해자는 전에 말했던 대로 김성진인가 하는 녀석, 한 명뿐인가?”
“아직까진. 올만한 다른 녀석은 조사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만일에 대비해서 경찰의 개입까지 견제하는 게 너희들 몫이다.”
“흥미롭군. 하지만 더 흥미가 돋는 건 네가 말했던 그 년에 대한 강간이야. 사진 보니까 상당한 미모던데.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겠어. 우리도 맛을 좀 봐야겠어.”
기식은 그들의 광채 어린 눈들을 둘러보며 경희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일정 선을 넘지 못하는 미적지근한 나쁜 놈으로 보이나? 웃기고 있군. 네 년 따위가 감히 날 넘보지 못하게, 확실하게. 모든 상황은 내 의지대로 돌아가야 한다.
기식은 약속하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 더 큰 환호성이 거실을 메웠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얏호!”
“역시 리더 하나는 잘 잡았단 말야.”
“잘 다녀오십시오 대장! 계획의 뒷일은 우리가 확실하게 책임질 테니까.”
왁자지껄한 그들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기식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현관을 걸어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