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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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

선영은 한 손으로 샤워기를 든 채 한참동안 꼼짝 않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샤워기의 물줄기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를 관찰하는 것처럼 고정되어 있었으나 생각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텔레포트를 한 상태였다. 사실 오늘 너무 한꺼번에 이런저런 감정 기복이 되었던 상태라 그녀의 머릿속은 일련의 주제들이 들어차있었으나 연결고리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현 상태, ‘카잔 전쟁’ 게임, 생각지도 못했던 기식과의 데이트…. 하지만 그 속속들이 엉키고 있는 기억 중에서도 한가지 가장 강하게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기식과 나누었던 대화였다.

내 상태를 기식 씨는 진심으로 이해하고… 아니, 최소한 이해하려고 노력해주는 정말 친절하고 자상한 분이시다. 선영은 그의 진실성에 한치도 의심을 품고 있지 않았다. 단지 그 후에 변했던 표정이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기에 선영은 여전히 그것이 꺼림칙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지인이라니… 그게 누굴까. 하긴 그런 사람이 또 있었기에 기식 씨는 나에 대한 상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다음부터는 감정에 휩쓸려서 내 개인적인 사정만 떠벌려, 기식 씨를 불편하게 하는 오늘과 같은 일은 삼가야겠다. 선영은 그렇게 결론짓고는 텔레포트되었던 생각을 겨우 현 입지로 되돌려놓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주인의 의식 부재를 보완해주지 못하는 한 손에는 끊임없이 물줄기를 뿜어내는 샤워기가 들려있었다.

선영은 그제서야 서둘러 물을 껐다. 하지만 그녀는 샤워기를 던지듯 욕실 벽걸이에다 걸어놓았다. 이건 성진 녀석이 쓰는 샤워기잖아. 왠지 기분 나빠졌어. 게다가 또 물 오래 쓴다고 뭐라 할지 모르니 흥. 그래, 치사해서라도 안 쓴다고. 이미 20분 동안 샤워를 했으면 보편적인 샤워 시간보다 결코 짧다고 할 순 없지만 선영은 고양이 세수라도 한 것마냥 투덜대며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그리고 곧바로 욕실 문을 열고 방으로 나왔다.

여전히 보온이 꽤 잘 되는 원룸 방이었지만 욕실 기온이 상대적으로 높았기에 수증기도 함께 확하고 피어나왔다. 선영의 몸에서도 살짝 김이 피어오를 정도였고 그래서 그녀는 급격하게 낮아진 기온에 몸을 조금 떨었다.

침대 사이드레일에 기대어앉아 TV를 보던 성진은 세워놓은 한쪽 무릎에 리모콘을 쥔 팔을 올린 자세 그대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선영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 상태 그대로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면서 툭하고 말했다.

“어… 물 그렇게 많이 안 썼어. 욕실 정리도 잘 했고. 의심스러우면 와서 확인해보든가.”

“…….”

물소리가 20분 가량 계속 들렸던 게 많이 안 쓴 건지는 별로 따질 생각 없는 것처럼 성진은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선영의 봉긋한 젖가슴과 보지가 적나라하게 시야에 들어왔지만 성진에겐 그런 것도 별다를 것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선영도 마찬가지. 알몸 혹은 속옷으로 방 안을 종횡무진 돌아다니는 건 남매라고 할지라도 민망할 터인데 둘은 이미 편한 대로만 행동하는 데 익숙했다.

빨래대 앞에서 성진이 빨아 널어놓은 속옷들 중 마른 걸 골라보던 선영. 그녀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고개를 다시 돌렸다. TV에선 꽤나 코믹한 프로그램이 펼쳐지는 것 같았지만 성진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영은 그 시선의 의미를 짐작하고 있었다. 또 뭔가 추궁할 게 생겼나?

“어디 갔다 왔어?”

지겹군. 같이 살면 저런 질문을 수도 없이 들어야 하나? 아, 혼자 살고 싶다. 선영은 그에게서 얼른 시선을 돌린 후 다시 속옷을 고르며 간단히 대답했다.

“미팅.”

“뭐…?”

“남이사.”

성진은 그녀가 대답한 미팅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가늠하지 못해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곧바로 다시 그녀를 보면서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

“차 소리가 들리던데. 혹시 누군가 태워다준 거냐?”

그녀가 올라온 시간과 맞추어 짐작해본 것이지만, 우연이라 치부하고 싶어하는 성진의 바람과는 달리 선영은 눈 깜짝 하나 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성진은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비단 태평스럽게 말하는 수준이 아니라 뭔가 자랑스러워하는 뉘앙스까지 풍기고 있었기에 성진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하지만 그는 곧 어린애와 되도 않는 싸움을 시작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간신히 그런 자신을 제지했다. 게다가 남자만 운전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뭐 남자라고 해도 아무 사이도 아닐 수 있다. 과민반응이야, 과민반응….

“멋진 남자였지.”

브래지어를 한쪽 팔에 걸친 채로 볼에 손바닥을 갖다 대며 황홀해하는 선영. 성진이 두 번째로 벌떡 일어날 뻔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무서운 표정으로 선영을 응시하다가 진정하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TV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하지만 경고하는 음성으로 말했다.

“멋대로 쏘다니는 짓 좀 자제해라.”

선영은 이상스레 그 명령하는 말투가 재미있게 들렸다. 그녀는 팔을 뒤로 돌려 브래지어 끈을 고정시키면서 성진을 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왜?”

“뭐?”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성진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고 윽박지르려 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납득시킬만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간신히 선영에게 명령할만한 당위성을 생각해내곤 내뱉듯 말했다.

“네 상태가 지금 정상인하고 같냐? 그렇게 말해도 머릿속에 박히지 않는 모양인데.”

“그래서 언제까지고 이 집 구석에 꼭꼭 숨겨두려고?”

“본래의 네가 나오지 않겠다는 의지는 잘 알아. 하지만 현재의 네가 바깥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기엔 아직 너무 위험해. 내가 시간을 두고 차차…….”

달래고 설득시키던 성진은 문득 그녀가 묘한 표정을 하고 있음을 눈치채고는 입을 다물었다. 선영은 마치 선생을 선생으로 인정하지 않는 학생처럼 한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성진은 일어서서 그녀와 시선 높이를 맞추고 얘기할 걸 그랬나 하는 잠깐의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아닌 듯하다. 몇 발치 너머에서 선영은 속옷을 다 입고는 가슴 앞에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살짝 꺾어보였다.

“흐음. 그렇다면 그 정도로 요주의 대상인 나를 두고 바깥을 그리 쏘다녔던 것이군?”

“어……?”

“뭐 좋아. 이젠 혼자 있어도 별로 무섭지도 않다 보니 네가 없어도 잘 자긴 하는데… 여행 갔다왔던 건 그렇다 치자. 그 전과 후에도 늘 집에 있는 날보다 외박하던 날이 압도적으로 많았잖아? 그러고선 이제 와서 나보고 위험하다느니 시간을 두고 차차 어쩌구 말하는 게 그냥 웃겨서 말야. 시간을 두고 뭘 해줘? 아니, 그게 무엇인지는 둘째 치고 내가 여기 지낸 지 수 개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더 시간이 필요한 건가.”

“야! 너 지금… 누구 덕택에 이 집에서 밥 안 굶고 지내고 있는 줄…….”

선영은 이미 그 반박도 나올 걸 예상했다는 듯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성진은 다시금 말문이 막혀버렸고, 그녀는 벽에 걸린 시계라도 보는 것처럼 시선을 딴 데로 향하고는 한가로운 어투를 내었다.

“예에. 제공자의 은혜는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보답과 보상은 확실하게 할 준비가 되어있고요.”

어떻게 보상하겠다는 건지 성진은 짐작할 수 없었으나 묻지를 못했다. 선영이 거의 곧바로 말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사실 그 동안 당신한테 고맙긴 했어. 그리고 조만간 당신이 원하던 대로 이 집에서 나가줄 거야. 생각해 보니 불과 며칠 남지도 않은 것 같군. 미안했어.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내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돼.”

성진은 그녀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추리해봤고 ‘혹시 예전에 내가 감정적으로 꺼지라고 한 말 때문인가?’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 결론이 맞는지는 역시 확인해보지 못했다. 선영이 잠시 말을 끊는 듯하다가 살포시 미소지으며(역시 성진은 보지도 않은 채로) 들뜬 목소리로 연이어 말했던 것이다.

“내게도 나만의 인생을 열어줄 멋진 인연이 다가왔거든.”

“그게 누군데? 혹시 널 여기까지 태워다준 그 남자냐?”

한번도 본 적 없었지만 성진은 반드시 확인해야겠다는 어조로 물어보았다. 그리고 선영은 대답 대신 돌아서서 입었던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성진은 그 누군가를 설명할 사진이나 명함이라도 꺼내는 건가 하고 그녀의 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윽고 다시 성진을 향해 몸을 돌린 선영은 생긋 웃으며 검지와 중지 사이에 쪽지를 하나 들어올려 보였다. 성진은 그저 멍하니 속옷차림의 그녀가 자신을 유혹하는 듯한 동작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인내심 있게 기다려준 것에 대한 포상이라도 하듯 선영의 입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나왔다.

“글피쯤이면 돈이 다 입금될 거야. 그럼 여기 내가 그려놓은 약도의 카페로 찾아와. 약속시간은 오후 2시. 혹시 그 시간도 어렵다면 네가 약속시간을 정해. 하지만 되도록 빨랐으면 좋겠군. 뭐 여기서 처리할 수도 있긴 한데, 이 진절머리나는 원룸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새출발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말야.”

성진이 물어보는 타이밍은 좀 늦었다. 그녀가 말하는 내용은 자신의 기대하던 답변이 아닌 완전히 딴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선영은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서 쪽지를 그에게 날려보냈고,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앉아있는 성진 앞에 정확히 착지했다. 성진은 쪽지를 보는 둥 마는 둥 약간 당황한 음성으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뭘 어떻게 처리해?”

선영은 설명하기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묘하게도 성진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본래의 선영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네가 날 보살펴주었던 것에 대한 보상을 하고 떠나겠다고. 일일이 이렇게 다 말해줘야 알아듣니?”

“누구 맘대로?”

성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하지만 선영은 전혀 위압감 따윈 느껴지지 않는 듯 그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돌발적인 행동이 꽤나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에 성진은 주춤하며 도리어 자신이 물러날 것만 같았고 선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미소 띤 표정 그대로 말했다.

“내 맘대로지.”

“네 맘대로…?”

“진짜 웃긴다, 너. 내가 무슨 네 노예라도 돼? 누구 맘대로 가라, 가지 말라 말할 권리가 있어? 게다가 이봐, 이봐. 먼저 꺼지라고 한 건 네 쪽이었잖아. 그래서 알아서 가주겠다는데 뭘 그리 화내고 있어?”

“이 기회에 한가지 가르쳐주지. 너 그딴 심경으로 행동하다간 사회에서 공존하지 못해. 그래, 꺼지라고 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이고 마음에 담아둘 필요도 없는 말이야. 무엇보다 너는 혼자 살아갈 수가 없는 상태잖아?”

“수개월간 얹혀 산 것에 대한 보상까지 해준다는데 혼자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성진은 TV를 끄고 리모콘을 침대 위에 던져버리곤 팔짱을 끼며 되물었다. 딴에는 위압적으로 말하려는 행동이었지만 사실 그의 머릿속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정말로 현실화되지 않나 하고 몰려오는 중이었다.

“하, 그래. 보상! 그 보상을 네가 다 하겠다고? 말해두지만 병원비에 정신적인 위로금까지 모두 합쳐서 꽤 돈이 많이 나갈걸?”

선영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런 식의 반박은 그녀의 입장에서는 꽤나 자신있는 부분이었고 성진은 아차 싶었다. 하지만 머리 한 구석으로는 이 녀석이 설마 어디서 그런 많은 돈을 구할 수 있겠냐는 현실적인 기대감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선영은 세상의 현 주소를 도리어 그에게 가르쳐주는 것처럼 느릿하게 말했다.

“김성진. 너 ‘카잔 전쟁’이 그저 한순간의 유희로밖에 안 느껴지지?”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게임이란 세계를 그저 기분전환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한테는 대회같은 것도 라면을 끓여먹으며 심심풀이로 보는 정도의 유희로밖에 치부하지 않거든. 당연히 대회의 규모나 그 보상에 대해서도 관심 밖이니 잘 몰라. 하지만 조금만 더 신경 써서 살펴보면 현대의 ‘컴퓨터 게임’이란 게 왜 e스포츠로 불리어지는지, 그리고 왜 그만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사람들이 열광하게 되는지를 알 수 있을 거야.”

성진은 그제서야 혜진과 놀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종종 선영이 보이지 않았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중간에 ‘카잔 전쟁’ 대회의 기자라며 집 앞을 배회하던 사람들까지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가 바람이라도 쐬는 것처럼 놀러다니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늘 집에 없는 성진에 대한 복수심 비슷한 걸로 자신도 보란 듯이 바깥을 쏘다니는, 그런 유치한 연애사 비슷한 것도 아니었다. 매우 당연하게도 현재의 선영은 - 물론 본래의 선영이라 할지라도 그런 스토리와는 거리가 멀겠지만 - 나름대로의 자립할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뭐 사실인지 아닌지는 글피에 보면 확실히 알겠지. 어쨌거나 난 데이트하고 오느라 피곤해. 며칠 안 남았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침대 좀 쓸게. 그런데 너 오늘은 안 나가니? 맨날 외박하다가 집에 있으니까 도리어 이상해보인다, 후후.”

그렇게 말하며 홀가분한 것마냥 침대 위로 몸을 던지는 선영. 그리고 성진은 우두커니 선 채 쪽지도 아닌 그냥 바닥만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갖 상념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다녔다.

뭐야, 이 녀석… 갑자기 나간다고? 허풍은 아닌 것 같은데… 안 돼, 안 되지…. 누구 멋대로 나가? 녀석 몸도 원래 녀석 것이 아니잖아. 가만… 그것도 본래의 그녀 의지에서 나온 것이니까 녀석의 권한 하에 있는 건가? 하지만 그걸 다 떠나서 상식적으로 이렇게까지 보살펴준 나한테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잖아. 배은망덕하다고! 그런데… 그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위로금까지 합쳐서 보상해준다고 하니까 뭘 어쩔 수 없는 건가?

하……. 뭔가… 이건 아닌데…….

성진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쥔 채 고민했다. 침대 위에 엎어져서 고개만 돌려 그런 그를 힐끗 바라본 선영은 왠지 유쾌해지는 느낌에 미소지었다. 알 수 없는 복수를 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잔소리해대고 위압적으로 대하더만, 알고 보니 별 거 아니었잖아. 집주인이면 다야? 엄밀히 말하면 집주인도 아니지. 고작 월세 내며 유지하는 원룸 갖고 생색내긴.

‘이딴 녀석이 내 첫사랑? 하! 뭐든 다 알아보는 창오빠도 이번은 틀렸어. 내가 가졌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얹혀사는 것에 대한 찝찝함이었지. 이젠 다 끝났지 뭐.’

뭐니뭐니해도 난 이기식이란 그 멋진 남자와 찬란한 인생을 열 텐데. 내 ‘카잔 전쟁’ 실력과 기식 씨의 서포터가 있으면 참으로 다이나믹하고 멋진 나날이 이어질 것 같다. 게임이란 컨텐츠가 급주목을 받기 시작한 현대는 우리에게 축복의 날개를 펼치고 있다. 아아, 이 얼마나 황홀한 현실이야.

그렇게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오른 여자와 알 수 없는 상실감에 사로잡힌 남자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동거의 밤을 지새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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