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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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기식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원룸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흘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형준에게 받았던 데이터, 즉 인터넷 포탈사이트의 거리뷰로 보았던 건물이 거기 있었다. 비록 현재는 밤이었지만 기식은 선영이 거주하는 건물이 틀림없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저 안에서 아마 김성진이란 녀석도 함께 동거하고 있겠지. 녀석이 계획에 걸림돌이 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선 그게 문제가 아니다….

“…….”

“…….”

선영의 (현재)집에 도착했지만 기식이나 선영이나 ‘다 왔다’는 말을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중형 승용차의 낮은 시동소리만이 조용하게 둘 사이를 감돌았고 그래서 기식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여자한테 말 걸기 힘든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는 핸들만 만지작거리며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 지나가는 목소리를 겨우 연출하며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곳이 여기가 맞지 않나요? 다 왔습니다만….”

하지만 선영의 시선은 원룸 건물도 아니고 기식도 아니고 그저 창 밖 한구석의 어딘가로 고정되어 있었다. 물론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기식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고는 좀 더 따뜻한 목소리를 내어보았다.

“얼른 들어가 쉬어요.”

그제서야 풀로 붙인 종이가 떼어지는 것처럼 느릿하고 무겁게 고개를 돌리는 선영. 그녀는 기식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툭하고 입을 열었다.

“기식 씨는요?”

“저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야죠. 내일 아침도 사무실로 출근해야 하니까요. 왜, 차라도 한잔 주시게요?”

성진이 있기에 그렇게 하지 못할 걸 뻔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기식은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완화시켜보려고 일부러 미소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꽤 효과가 있었다. 선영 또한 굳었던 표정을 풀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보였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렇겐 안될 것 같네요. 그것보단…….”

“……?”

기식은 여전히 평온하게 미소지은 상태로 말해보라는 눈짓을 했다. 우물쭈물하던 선영은 겨우 한마디를 토했다.

“화난 것 아니죠?”

이 경우에는 화난 걸 알면서도 묻는 질문이란 걸 기식은 알고 있었기에 마음에도 없는 답변보다는 약간 디테일하게 납득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기식은 핸들에 손을 얹은 채로 전방 먼 곳을 바라보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화가 났었긴 합니다. 식당에서 그렇게 언성을 높였는데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게 선영 씨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타이밍이 안 좋았을 뿐입니다. 선영 씨의 과거 얘기를 듣고 비슷한 경험이 있는 지인이 겪었던 고충이 떠올라서… 순간적인 감정이 욱했던 것뿐입니다.”

“예에… 어쨌거나 그런 얘기를 해버렸으니 제가 죄송… 죄송해요…….”

“아뇨. 이젠 괜찮습니다. 전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리고는 정말로 안심하라는 듯 평소의 페이스로 돌아와서 싱긋 하고 웃어보였다.

“조만간 ‘스피어’ 입단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한 연락을 한번 드리겠습니다. 뭐 선영 씨는 거의 가입하기로 마음을 먹으신 것 같지만, 중간에 변동 사정이 생기면 드렸던 명함의 번호로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선영도 그제서야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조수석의 문 손잡이를 붙잡았다. 문득 그녀는 ‘그 저랑 비슷한 상황이었다던 지인분은 지금 잘 지내나요?’라는 질문을 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느꼈기에 말을 삼키고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는 한번 살포시 고개를 숙여보이곤 원룸 건물로 걸어들어갔다.

“…….”

기식은 선영이 들어간 후 몇 층쯤까지 계단 등불이 켜지는지 참고 삼아 확인한 후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부르릉-. 하얀 승용차는 학생 원룸들이 즐비한 좁은 길을 조용하게 달렸다.

큰길로 빠져나가려면 차를 돌려서 골목을 벗어나야 했으나 기식은 목적 없는 운전수처럼 계속해서 이리저리 좁은 길을 헤집으며 달렸다. 후진해서 차를 돌리기 귀찮은 듯했지만 길은 운전수의 심경에 부합해주지 않았다. 결국 기식은 막다른 골목까지 오자 차를 급정거시키고 숨을 몰아쉬었다. 갑자기 그는 참지 못하고 핸들 가장자리를 주먹으로 팍하고 내리쳤다.

“젠장할……!”

가로등 하나 없는 캄캄한 골목길에서 자꾸만 선영의 웃는 얼굴이 아른거렸다. 너무도 순수하게, 진심을 담은 모습으로. 기식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잔인한 짓을 벌이려고 하는지를 자각하게 되는 것 같아 입술을 씹으며 안절부절 못했다. 이제 와서… 그 험악한 패거리들의 힘까지 동원해가며 짜릿한 강간의 향연을 펼칠 계획이 차곡차곡 진행되는 도중에 이 어이없는 감정이 피어나버릴 줄은…….

그러고 보니 강간이란 것을 녀석에게 처음 시도해보게 되는군.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그래, 그래서일 거야. 그렇게 자신을 다스리며 한참 동안 어둠 속을 노려보던 기식은 한 손을 들어 입고 있던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위치 어플로 지역을 검색했다. 스마트폰은 주인의 목적에 유동적으로 부합하며 원하는 것을 찾아주었고 기식은 주저 없이 가장 가까운 상대를 향해 차를 몰았다.

평범한 다세대 주택. 기식은 주변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는 그 주택의 몇 층인가에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전화를 걸었다. 경쾌한 수신음이 들리자 그는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역시 내 활력소는 여자지. 기식은 새삼스레 그런 자신의 타입에 만족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어, 오빠. 이 밤에 웬일이야? -

“그냥 걸어봤지 뭐. 시간 좀 있냐?”

- 자취녀한테 남는 게 시간이지. 근데 왜? -

작은 웃음소리를 동반한 그녀의 긍정적 반응에 기식은 이미 머릿속으로 OK란 사인에 불이 들어옴을 느꼈다.

“지금 집 앞인데 들어가도 돼?”

- 뭐? 내 집 앞에 와있다고? -

“볼일이 좀 있어서 이 근방에 왔었는데, 오니까 또 갑자기 유라, 니 생각 나더라.”

잠깐 동안 핸드폰 너머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들렸다. 기식은 당황하고 있을 유라를 떠올리며 키득거렸고 잠시 후 다급한 목소리가 건네져왔다.

- 자… 잠깐, 오빠. 나 지금 꼴이 말이 아니라서. 10분… 아니, 5분만 기다려줘 -

그냥 10분으로 하는 게 어때? 그렇게 그녀가 반가워할 제안을 건네볼까 생각하던 기식은 소리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잊자. 그래, 현재의 선영 따위 어차피 제대로 된 인격체도 아닌 걸. 원망하려면 이런 복수의 계획을 짜게 만든 본래의 자신을 원망하라지 뭐. 기식은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곤 백미러를 통해 머리카락만 대충 정리하면서 다가올 설렘의 시간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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