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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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평일인데도 사람 정말 많네요!”

“요 근래에 흥미로운 대작들이 많이 출시되었거든요. 뭐 그리고 요즘이야 연인끼리 있으면 제일 만만한 게 뭐겠습니까. 이런 데서 영화라도 한편 보는 게 할 일이죠.”

“헤에…….”

늘 학교와 집만 고정적으로 돌아다니던 선영에게 있어선 활기가 넘치는 풍경과 사람들을 둘러보며 매료되기에 충분했다. 물론 예전 첫 ‘카잔 전쟁’ 대회 우승 때에도 다른 영화관에 가보긴 했었으나 규모가 작았고, 혼자서 억지로 이탈의 기분을 즐기려 했던 것이었기에 순수하게 와닿는 게 없었다. 더군다나 주변에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풍기는 수많은 연인들을 보면서 자신도 옆에 멋진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묘한 소속감을 가져다주었다. 선영은 왠지 편안해지는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기식의 팔을 슬쩍 붙잡았다. 그러다가 문득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었다.

“앗, 저… 죄… 죄송…!”

“뭐 볼래요?”

기식은 선영의 손이 닿았다는 사실도 모른 것처럼 태연하게 영화 포스터 용지를 몇 개 골라서 뽑아 건네었다. 선영은 멍청하게 그 용지들을 받아쥐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물론 평소에 영화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녀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보는 게 좋을지 감을 잡지 못하기 마련이다. 선영이 우물쭈물거리자 기식은 속으로 미소지으며(물론 겉으로도 다른 의미긴 하지만 역시 미소지으며) 그녀가 쥐고 있는 용지들 중 하나를 자신의 손으로 슬쩍 뽑아올렸다.

“이거 어때요?”

“열쇠 없는 집…?”

선영의 눈이 거무침침한 집이 그려져 있는 포스터 그림에 고정되었다. 기식은 집중해서 바라보는 선영에게 물어보았다.

“공포물 싫어하세요? 뭐 이 작품 같은 경우엔 스릴러쪽에 가깝겠지만….”

“아… 뇨. 흥미로울 것 같네요. 왠지 색다른 매력이 있을 것 같아요.”

“예, 그럼 이걸로 예매하도록 하죠. 아, 저쪽에 스넥코너도 있는데 팝콘이라도 먹으면서…?”

살쪄서 싫어하려나? 라고 짐작해보던 기식은 중요하지는 않지만 몇몇 곳에서 자신의 예상이 조금씩 빗나가고 있음을 경험했다. 선영은 전혀 그런 것 신경 쓰지 않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예! 역시 영화는 팝콘이 제맛이죠! 콜라도 곁들여서!”

“…에이드도 있습니다만.”

뭐 아무리 먹어도 살 안 찌는 체질도 있기 마련이지. 그런 여자들은 정말 축복받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던 기식은 고개를 살짝 젓고는 한가지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선영이 ‘열쇠 없는 집’이란 영화를 보기로 결정한 것은 탐색의 입장에선 매우 원하던 방향이다.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선 최대한 자극적인 걸로 실험하는 편이 좋으니까.

일반적으로 옷장 속에는 옷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간혹 이불도 옷장 속에 넣기는 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용도에서 약간 벗어난, 즉 각종 잡다한 물건을 보관하는 곳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옷장 속에 사람의 시체가 거꾸로 걸려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따라서 열어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명을 지르더라도 그 사람을 탓할 수는 없다. 더욱이 채 눈을 감지도 못해서 부릅뜬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모습이라면.

“꺄악-!”

따라서 그런 무시무시한 영상을 보게 된 순간 선영이 째지는 비명을 지른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였다. 물론 영화관에는 선영뿐만이 아니기에 그녀의 비명은 다른 사람들의 비명 속에 묻혀서 이상할 것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그건 선영의 상태를 모르는 일반인들에 한정한 것. 바로 옆에 앉아있는 기식은 곁눈으로 그런 선영의 상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요조숙녀하곤 거리가 먼 차갑기 그지없는 녀석이 이렇게 감정이입을 하며 영화를 본다? 이건 단순한 기억상실증이 아니라 인격 자체가 뒤바뀐정도의 수준이군. 그렇다고 일부러 오버하며 연기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 때 기식의 시선을 느낀 선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기식이 아차 싶은 순간, 선영 쪽이 도리어 곧바로 허둥대며 침을 삼키곤 진정하는 시늉을 했다.

“아, 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크게 소릴 질렀죠?”

“아뇨.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기식은 살며시 한 손을 들어 의자 팔걸이에 얹혀있는 선영의 손등을 감싸쥐었다.

“무서우면 이렇게 누군가의 손이라도 잡으세요. 한결 나아진답니다.”

“아…….”

선영은 얼굴을 확 붉혔다. 하지만 곧 그녀는 어두운 영화관이 자신의 붉어진 볼을 감춰줄 거라 안심하며 작게 헛기침만 했다. 문득 선영은 뭔가가 생각난 듯 다시 기식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기식… 씨는 이런 거 보면 안 무섭나요? 나… 남자들은 원래 멘탈이 좀 강한가?”

“예에…?”

기식은 이 순진무구한 질문에 하마터면 폭소할 뻔하다가 간신히 능숙하게(?) 추스르고는 빙긋 웃어보였다.

“그렇진 않죠. 무서운 것에 남녀 구분이 어딨나요? 단지 똑같이 무섭더라도 저까지 허둥대면 선영 씨가 더욱 불안해질 것 같아서 참고 있는 것뿐이죠.”

“저… 전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단지 좀 신선한 자극이라 놀란 것뿐….”

하지만 진정하려 하는 그녀의 말투 속엔 자신을 생각하는 기식의 배려에 대한 고마움을 담고 있었다. 기식은 별말 없이 자신도 다시 영화에 집중하는 척 고개를 앞으로 돌렸지만 속으론 느글거림을 느꼈다. 참 이런 닭살 돋는 멘트도 다해 보는군.

무섭기는 무슨. 이 나이 되면 저런 영상을 봐도 ‘꽤나 기술적으로 잘 연출했군’이란 감정이 들기 마련이지. 네 녀석은 어디 머리에 꽃 꽂고 다니는 열여섯 살 고딩녀인가? 하긴 아직 이십 대 초반이긴 하지만. 그쯤 생각하던 기식은 옆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소리에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영이 가슴에 안아 쥔 팝콘 - 그것도 라지 사이즈 - 을 손으로 한껏 퍼다가 와작와작 씹어먹고 있었다. 물론 옆에 콜라도 꼴깍꼴깍 들이키면서. 그다지 여성의 몸매 관리에 참견하지 않는 기식의 입장에서도 ‘저렇게 먹어도 괜찮나?’라는 어이없는 우려가 들기 시작했다.

영화는 계속되었다. 절정 부분에서는 주인공을 집 안에 가두고 죽이려고 했던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주인공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음이 드러났다. 선영은 그 장면을 보며 의자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탁하고 내리쳤다.

“저… 저런 나쁜 자식…!”

이미 그 전의 복선으로 하여금 어느 정도 예상했던 기식은, 꽤나 전형적인 전개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선영이 그를 돌아보며 “저… 저럴 수가 있어요?”라고 따지듯 말하자 그도 어쩔 수 없이 한 손을 턱에 갖다대곤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일 수밖에 없었다.

- 네… 네가 그래서 나를…… -

- 미안해. 이제 나는 속죄의 대가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야 -

- 괜찮아! 너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잖아! 죽지 마! 내가 모두 용서하겠어! 제발… 제발 죽지 말라고! -

결말이 다가오는 부분에서 배우들의 처절한 목소리가 극장을 가득 메웠다. 그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에 관람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물을 글썽이거나 훌쩍거렸다. 그리고 그건 매우 당연하게도 선영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계속해서 훔쳐내고 있었다. 기식은 할 수 없이 윗호주머니에서 티슈 몇 장을 꺼내 선영에게 건네었다. 선영은 무의식적으로 그걸 낚아채듯 잡아서 자신의 눈물을 닦다가 문득 기식이 건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기식은 모른 척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집중하는 시늉만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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