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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식은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 다른 한 손으로 핸드폰을 쥔 채 만지작거리며 길가에 서있었다. 그의 귀에는 스마트폰에서 뻗어져나온 이어폰이 꽂혀있었고 입고 있는 갈색 코트자락이 바람에 가볍게 살랑였다. 겨울날씨답지 않게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 한복판에서 그의 모습은 매우 슬림하고 잘생긴 남성모델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그가 고개짓을 하며 앞머리칼을 옆으로 쓸어넘길 때마다 지나가는 여성들은 괜스레 그런 그의 모습을 흘끗거리곤 하였다.
대체 누굴 기다리는 걸까?
여느 여성들이 그런 궁금증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식은 그 ‘상대’가 나타나는 시간이 지연되자 근처에 놓여있는 벤치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몸을 돌려 거리 한쪽을 바라보았다. 낯익은 인영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흠….’
예상대로 선영은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약 10분 정도 늦긴 했지만 기식은 눈앞의 그녀가 너무도 예상했던 그대로 나와서 미소까지 지어질 정도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색하게 우물쭈물하는 태도에, ‘카잔 전쟁’ 대회 때와는 달리 중요한 미팅을 염두에 둔 깔끔한 옷차림. 특히 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은 먼 기억 속에 있던 차가운 본래의 선영이 아니라 기억상실증에 걸린 현재의 선영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가 가까이 왔을 땐 기식의 예상을 벗어나는 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식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겨울이긴 하지만 그다지 세지 않은 바람에 살랑이는 머리칼과 따라 흔들리는 재킷 속에 입은 기다란 원피스. 옆으로 맨 어깨의 가방과 작지만 예쁜 보석 귀걸이까지 차고 있는 그녀는 수많은 여자를 만나본 기식의 입장에서도 단연 설레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사무적인 만남 자리를 생각해서 화려한 차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녀의 뛰어난 외모는 약간의 수수함과 더불어서 더욱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를 발산하고 있었다.
기식이 잠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쳐다보자 선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아, 죄… 죄송해요. 좀 많이 늦었죠?”
“아뇨, 그게….”
“차… 차림새도 칠칠치 못하게… 역시 단정하게 입고 와야 하는데… 너무 고민만 하다 보니… 죄송, 죄송합니다!”
어떤 고민인지 기식은 묻지 않았다. 너무도 뻔한 스토리인데다가 정작 상대는 너무 당황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를 테니까. 그리고 기식은 이렇게 숙맥의 일색인 여자를 상대하는 것에도 익숙했다. 그는 곧 자신 먼저 침착성을 되찾고는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며 빙긋 웃었다.
“아뇨. 잘 어울려요. 너무 튀지도 않고…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예… 엣? 아, 가… 감사합니다!”
선영은 단숨에 얼굴을 붉히고는 연신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리고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해 몸을 살짝 돌리고는 어쩔 줄 몰라했다. 기식은 그런 선영이 진정하길 기다리며 이어폰 줄을 정리해서 주머니 속에 꽂아 넣는 시늉을 했다. 이윽고 선영은 두 손을 뒤로 돌린 채로 기식 주변을 흘끗흘끗 둘러보았다. 그녀가 위화감을 느끼고 질문하길 기다리는 기식. 속으로 몇 번을 세면 질문이 튀어나올까 가늠해보던 그는 약 다섯 번을 가정했고, 정확히 속으로 느릿하게 다섯 번이 다다른 순간 그녀의 입이 열렸다.
“저어… 그런데 오기로 한 다른 분들은…?”
기식은 손을 약간 양 옆으로 벌린 채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어찌된 일인지 다들 바쁜 일이 있다면서 못 온다네요.”
“예에?”
“이왕 이렇게 된 것, 영화라도 한 편 보러 갈래요?”
기식은 저 멀리 높다랗게 솟아있는 영화 상영관을 가리켰고 선영은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기식의 얼굴과 건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기식은 여전히 한결 같은 미소로 선영을 마주보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원체부터 이런 속셈이었다는 것을 들키든 말든 별 관계는 없다. 어차피 선영은 그가 만들어낸 자상하고 친절한 멋진 남자란 이미지 속에 푹 빠져 있었고, 접점의 구실은 작위적인 거라도 거부하진 못할 것이었다.
오히려 선영의 입장에서는 이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었으니 더욱 설렐 것이다. 선영이 얼굴을 붉히곤 안절부절 못해하자 기식은 슬쩍 그녀를 돕기라도 하듯 넌지시 물어보았다.
“왜, 싫어요?”
“아… 아뇨. 좋아… 아, 아니. 싫지 않아요.”
“그럼 얼른 가도록 하죠. 예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선영은 그가 영화 예매 시간에 맞추어 약속 시간을 잡았음을 짐작했지만 사실 그건 이제와선 아무 의미 없었다. 선영은 그와의 꿈 같은 데이트의 길로 접어든다는 기분에 마음 가눌 곳을 찾지 못하고 온통 설레고 있었다. 두 볼을 화끈 붉히면서 자신의 옆에 걷는 선영을 바라보며 기식은 다른 의미로 미소지었다.
기식의 입장에서야 매우 당연하게도 어떤 기억상실증인지 탐색하는 입장이었기에 선영과 단둘이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손이라도 한번 잡아줄까 생각하던 그는 천천히 해도 별 무리없을 거란 판단에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로 걸어갔다. 상영관을 향해 놓여진 고급스런 대리석 길이 겨울 햇살에 촘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