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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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기식은 어디 갔어?”

쪽방에서 책상도 없이 바닥에 노트북을 내려놓고 선영에 관련된 정보수집과 이런저런 작업을 진행하던 형준. 그는 닫혀있던 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렇게 물어보는 여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노트북을 들여다보느라 뻐근해진 목의 통증이 덮쳐왔지만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걸로 넘겨버렸다. 형준은 재차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보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계획에 관련한 탐색’을 진행하러 나갔다.”

“그래?”

형준이 말하는 ‘계획’과 ‘탐색’이 무엇인지는 경희도 알고 있었기에 별말 없이 그녀도 몸을 돌렸다. 문득 그녀는 쪽방 한 구석의 벽에 기다란 벽거울이 걸려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경희는 잠시 그 앞에 서서 자신을 비춰보며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문득 경희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형준은 재빨리 노트북으로 고개를 다시 숙였다. 두꺼운 사각 안경 때문에 그의 눈동자를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경희는 그가 잠깐동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뒤쪽으로 그의 시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뭐야?”

“…뭐가.”

고개를 들지 않고 반문하는 형준. 경희는 그런 형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터벅터벅 걸어가서 노트북 앞에 섰다. 기식의 예산으로 사정없이 틀어놓는 보일러 때문에 경희는 그의 아지트에 머물 때마다 늘 옷을 반쯤 벗은 채로 활개치며 다니곤 했다. 지금도 단추가 풀어져서 브래지어가 안쪽으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와이셔츠에 팬티 한장만 달린 걸친 상태였다. 형준은 경희의 맨발을 보고는 자기 앞에 그녀가 서있다는 것을 자각하곤 더욱더 고개를 푹 숙였다.

경희는 한 손을 허리에 걸친 채로 고개를 삐딱하게 옆으로 꺾어 그런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툭하고 입을 열었다.

“방금 나 봤잖아.”

“사람을 보는 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

경희는 무릎을 굽혀 그의 앞에 쪼그려앉아 시선 높이를 맞추었다. 형준은 의아한 얼굴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 새 경희는 왠지 재미있다는 미소를 띤 채로 그를 가만히 마주보고 있었다.

기식이 계획을 진행하는 동안 심심풀이용(?)으로 갖고 놀거나 성욕을 푸는 도구(적어도 아지트 패거리들이 보기에는)와도 같은 경희였지만 사실 그녀는 상당히 빼어난 미모였다. 그런 그녀가 바로 앞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본다면 여타 어떤 남성들이라도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을 몰라할 것이었다. 더욱이 여자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할 것 같은 못생기고 자신감 없는 주근깨 가득한 형준과도 같은 남자라면.

하지만 형준은 의외로 담담하게, 아니 오히려 뻐근한 목의 통증이 다시 느껴지기라도 하듯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경희 또한 그런 그의 표정에 별 신경도 쓰지 않고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오옷, 오. 사랑은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물질의 작용일 뿐’으로 정의할만한 공대생님께서 할말은 아닌 것 같은데?”

“용건이 뭐야?”

“할래?”

형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경희는 미소 띤 표정 그대로 와이셔츠 밑자락을 잡아 위로 슬쩍 들어올렸다. 무릎을 굽혀 앉은 그녀의 다리 사이로 끈팬티가 아닌가 싶을 만큼 조그맣고 얇은 팬티가 시야에 들어왔다. 새하얀 다리 사이에 위치한 여자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간신히 가리고 있는 예쁜 무늬의 팬티를 보는 순간, 형준은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경희는 의미심장하게 키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옷자락을 잡지 않은 다른 쪽 팔을 무릎 위에 올려놓아 입을 반쯤 가린 상태로.

“어차피 기식은 탐색이 끝나면 저녁 시간쯤에야 올 텐데. 다른 패거리들도 아무도 없고 오늘 올 것 같지도 않아. 온다고 해도 아주 늦은 시간이겠지. 어때? 여기서 할까, 아니면 거실에 소파가 있는데 거기서 할까?”

키보드에 얹혀놓은 형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경희는 재미있다는 듯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형준은 어렵사리 입술을 떼었다.

“갑자기 왜 그런 제안을 하는 거지?”

“여자가 하자고 하는데 이유가 중요해? 그냥 하면 되는 거지.”

형준은 입을 꾹 다문 채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딴에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이겠지만 사실 그런 건 아니었다. 그리고 경희도 그 시선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입술을 조금 옆으로 비죽이 내밀면서 툭하고 말했다.

“아아, 그냥 좀 너무한다 싶어서 그렇지 뭐. 네 입장에서는 내가 맨날 기식하고만 뒹구니까 ‘기분이 매우 그럴 것’ 아냐.”

‘참 친절도 하십니다’라고 비꼬지는 않았다. 형준은 다시 원래 자세 - 노트북을 내려다보는 고개 숙인 - 로 돌아가면서 짧게 대답했다.

“계획이 먼저다. 다른 건 그 후에.”

경희는 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대단하시군.”

뭐가 대단하단 건지는 둘 다 묻지도, 더 이어가지도 않았다. 경희는 굽혔던 무릎을 펴며 다시 일어선 후 가볍게 몸을 돌렸다. 흰 와이셔츠가 상체를 대부분 가리고 있었지만 그런 그녀의 뒷모습도 아찔한 각선미가 연출될 것 같다. 형준은 그만 참지 못하고 다시금 몰래 고개를 들어 경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길게 뻗어진 그녀의 맨다리는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감으로써 곧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다시 혼자 남겨진 형준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그 계획은 중요해. 그러니 어쩔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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