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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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준은 기분이 매우 불편했다. 물론 기식은 그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그리고 자신 있는 일을 지속적으로 할당했다. 덕분에 형준은 자신의 해커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서 여러 흥미로운 정보를 끌어 모으는 희열감에 한껏 도취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점은 자신을 하인 부리듯 아무렇게나 대하는 기식의 태도마저도 감수할 정도였기에, 사실상 그 둘의 사이에서 심각할 정도로 기분이 불편해질 계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식이 데리고 있는 다른 패거리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과 형준의 사이는 아무런 상조의 관계가 없었고, 그저 기식과 연결된 공통점 외에는 그 어떤 동업자적 분위기도 형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거실에서 노트북에 얼굴을 박고 후줄근하게 작업하고 있는 형준의 꼬락서니를 마음껏 조롱할 수 있었다.

“신형준이라 했나? 공돌이들은 다 그 모양이냐? 어휴, 차라리 길거리에서 노점판매를 하는 80살 노인이 더 세련되어 보이겠다.”

“고… 공학도를 우습게 보지 마.”

차라리 아무 말 없이 있는 게 나았을 것이다. 형준의 이러한 대응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우게끔 했을 뿐이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한창 지루한 낮시간에 난데없는 오락거리를 발견한 듯, 불량배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흑인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내가 그를 발로 툭툭 건들면서 빈정댔다.

“야, 너 오타쿠라고 아냐? 요즘은 오덕후라 하던가? 아무튼 너같이 여드름 득실하고 범생이 같은 안경에 모니터 미소녀에다 시선을 집중한 채 실실거리는 모습이 딱 그 표상이란 거야. 뭐 뚱뚱하지는 않다는 점과 미소녀 대신 이상한 프로그램 소스를 만지고 있다는 것은 다르긴 하지만.”

곁에 있던 레게 머리의 남자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근데 너 여자는 사귀어봤냐?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여자랑 잠자리는 같이 해봤냐?”

“야, 야. 뭐 그런 잔인한 질문을 건네고 있냐? 크크큭.”

“아니, 이런 녀석들은 자신감이 제로라서 현실 여자한텐 말도 못 건넨다니까. 그래서 맨날 모니터 속 2D미소녀만 보면서 하악대고 자위하지.”

“우와, 기분 나빠. 불쌍하고 기분 나쁘다. 크하하하핫….”

형준은 그의 전용(?) 작업실 쪽방에 있지 않고 굳이 거실로 나와서 노트북을 켠 것에 대한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보일러의 단열재는 쪽방에까진 제대로 설치되어있지 않았고, 그래서 보다 따뜻한 거실로 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다. 하지만 처음엔 형준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불량배 패거리들도 무료함이란 나태가 쌓여가자, 그에게 반갑지 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형준은 현재 작업하는 것만 얼른 마치고 다시 쪽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충전 플러그를 뽑아들었다.

불량배들의 험담은 계속되었다.

“요즘 시대에 IT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드물 정도지. 그래서 나도 관련 뉴스를 종종 보는데 말야.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오더라고. IT업체는 결혼난도 심각하대. 여자가 갖는 직종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자연스럽게 접점도 별로 없고, 그래서 여자랑 어떻게 사귈지도 모르고 그냥저냥 나이만 먹는 패턴이 반복되는 거지. 고생은 또 얼마나 죽도록 하는데. 중소기업 같은 경우는 추가 수당도 못 받고 밥먹듯이 회사에서 야근만 하다가 수명까지 갉아먹는다나?”

“왠지 저 녀석의 인생과 오버랩돼서 내 가슴이 다 쓰라린다. 후우…….”

“끌끌끌끌…….”

형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노트북을 탁소리 나게 닫았다. 자기들끼리 한껏 담소(?)를 나누던 불량배들은 다시 시선을 그에게로 집중했고, 형준은 그 시선에 기가 꺾이기라도 하듯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엔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숨을 들이키곤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직업도 없이 방탕한 짓거리들을 일삼는 녀석들의 말을 듣고 싶진 않군.”

“크핫하하…….”

다시 한번 비웃는 웃음소리가 그들 사이를 이리저리 오갔다.

“우린 뭐 천년만년 돌아다닐 들개처럼 보이냐? 뭐하러 저런 재수없는 기식의 계획에 그대로 따르는데. 어이, 샌님 아저씨. 얼굴도 못생겼으니 샌님이라 하기도 뭣한가? 아무튼 요즘 세상은 말야. 주먹이 전부가 아냐. 돈과 정보가 권력을 잡는다고. 그래서 우리가 기식 녀석을 따를 수밖에 없는 거고. 너도 정보통으로 얽혀져 있으니 그런 건 잘 알 거 아냐?”

“십몇 년 전만 해도 형준이. 저런 타입은 참 아무 쓸모도 없이 낙오자가 됐을 텐데, 그래도 요즘 세상이니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렇다곤 해도 별로 녀석과 같은 삶을 살고 싶진 않군. 어이, 오덕후. 이쪽이 좀 더 네녀석한텐 맞는 호칭이겠군. 잘 들어둬. 낮에는 푼돈이나 벌고 밤에는 클럽에서 죽치는 우리 같은 인간들도 말야. 다 비전을 바라보고 하는 거라고. 너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넝마주이 같은 인생이 아니란 말야.”

“무엇보다 재미가 있잖아. 크큭…. 기식이 좀 재수없긴 해도 흥미로운 일을 잘 벌이거든. 강간에 조리돌림 계획이라니, 이래서 나도 이 일을 쉽게 끊지 못한다니까.”

입술을 떨며 그들을 노려보던 형준은 혐오스럽다는 어투로 말했다.

“결국 너희들은 더 많은 보수와 더 흥미로운 일거리가 생기면 기식을 배신할 수도 있다는 거군?”

“당연한 거 아닌가? 우리가 녀석과 무슨 동고동락하는 친구 사이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철저한 계약일 뿐이지.”

“쓰레기 같은 넝마주이 인생 맞네.”

‘뭐야?’하고 인상을 쓰거나 험악스러운 분위기는 조성되지 않았다. 그럴 틈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던 약간 간사하게 생긴 사내가 표정변화 하나 없이 재떨이를 집어 들어 형준에게 던졌다. 번개 같은 솜씨였다. 스텐레스로 된 재떨이는 형준의 귀를 스치며 뒤편으로 날아가 벽에 부딪치고 튕겨져올랐다.

어찌나 거세게 날아갔는지 벽에 움푹한 자국이 생길 정도였다. 슬쩍 뒤를 돌아본 형준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불량배들 중 한 명이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하지만 약간 잔인함이 담겨있는 눈빛으로 그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입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계획을 진행하는 중에는 동료랑 피를 보아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건들진 않지만, 끝나고도 그럴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거든. 기식도 너무 믿지 마. 일이 끝나면 네깟 녀석이야 어떻게 되든 그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형준은 공포감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동시에 슬쩍 웃었다. 재떨이를 던졌던 사내는 물론이고 다른 불량배들까지도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형준을 바라보았다. 너무 겁을 줘서 저 자식이 돌았나? 그런 반증으로 여기고 있을 즈음, 거실 한쪽의 문이 열렸다.

마치 분위기가 환기되기라도 하듯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뭐야?”

방에서 나온 기식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재떨이와 형준, 그리고 불량배 패거리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형준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외면했고, 불량배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우리가 먼저 시비건 게 아니야’라는 투의 제스처를 능숙하게 표현했다. 기식은 물끄러미 형준을 쏘아보다가 방문 앞으로 다시 돌아가 경희가 있을 안쪽을 향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마디 건넨 후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 그의 옆구리를 발로 툭하고 건드렸다.

“일어나. 멍청한 녀석.”

“어… 어, 기… 기식아. 내가 소란을 피운 게 아니야. 여기서 작업하는데, 이… 이 녀석들이 먼저….”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어? 어…… 어, 그래.”

형준은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하며 허둥지둥 노트북을 챙겨들고는 기식의 뒤를 따라 현관으로 걸어갔다. 둘은 피식거리는 불량배들의 비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낡은 아파트를 빠져 나왔다. 단지의 입구를 지날 때 형준은 질린 표정으로 아파트를 흘끗흘끗 돌아보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야, 기식아…. 계획에 만반의 준비를 위해서라곤 해도 꼭 저딴 녀석들과 손을 잡아야 하는 거야? 나는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기식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로 문자를 보내며 그런 그를 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마치 그런 질문 따윈 너무나도 당연하게 예상했던 것처럼.

“오히려 저런 녀석들이니까 믿고 맡길 수 있는 거지. 돈 되고 흥미가 돋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철저하게 수행하는 타입이니까. 또 녀석들의 범죄적인 전적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도 만에 하나 경찰에 신고하는 일 또한 없어. 세상의 어느 누구를 강간의 계획에 쉽게 동참하게 할 수 있겠어?”

“하… 하지만…….”

기식은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해서 핸드폰 문자 버튼을 누르면서 형준의 불안에 못박아버리듯 내뱉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종종 그렇잖아? 거사를 위해서는 조직폭력배와도 손을 잡는다고. 뭐 거사라 하기에도 좀 거창한 면이 없진 않지만 우리에겐 물리적인 압력에 대해서도 대비를 해야 해. 뒤끝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마. 너는 물론이고 녀석들한테도 아무 불만이 없을 만한 거액의 보수를 보장할 테니까. 우리 아버지가 UKS사의 이사인 것,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누구나 한번쯤은 선망의 대상이 될 대기업의 명칭에, 그저 일시적인 동업자적 관계에 있는 형준마저도 위축돼있는 어깨를 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을 이젠 일일이 비웃어주기도 귀찮은 듯 기식은 핸드폰을 바지주머니에 도로 꽂아 넣음과 동시에 분식집의 문을 열어젖혔다. 기식은 자리에 앉자마자 늘 먹는 치즈 순두부를 시키라고 요구했고, 보다 금전적 여유가 없는 형준은 이 기회에 조금이라도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메뉴판을 면밀히 훑어보았다.

기식은 그가 주문하길 기다리다가 다시 핸드폰을 꺼내서 받은 문자함을 확인했다. 아직 답장이 도착하지 않았다. 기식이 문자를 보낸 상대는 다름 아닌 선영이었고, 그녀가 약간 고민하고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기식은 별로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 고민이란 것도 대답 자체라기보다는 어떻게 자연스럽게 승낙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별 중요하지 않은 것이겠지. 선영은 현재 기식의 의도대로 너무나도 손쉽게 행동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식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누구도, 수완 좋은 기식 자신까지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와도 같았다.

“…….”

기식은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그 선영의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고마워요… -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것 또한 아주 바라고 있던 것 아닌가?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강간이란 행위로 철저하게 짓밟을 즐거움 또한 염두에 두었던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왜 자꾸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 거지?

기식은 슬쩍 어금니를 사려물었다. 그렇다. 이것 또한 긴장감 때문일 것이다. 그 수년 전 내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줄 대로 주고 나를 차버렸던 녀석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예상 밖의 기회가 찾아온 것에 대한 짜릿한 긴장감. 절대로 선영이란 년의 그 희망 가득한 웃음에서 싸구려 연민 같은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다. 녀석이 무슨 사연이 있든 난 내 복수극만 완결지으면 돼.

그런데… 가만 있자, 내가 그 년을 강간해야 할 정도로 지독한 꼴을 당했었나? 그것 또한 내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게 아니었을까.

“에이, 씨. 야, 신형준. 그냥 좀 적당히 주문해서 먹음 안 되냐? 뭘 그리 오래 고민하고 있어?”

기식은 생각을 날려버리기라도 하듯 아직도 뭘 먹을지 결정하지 못한 형준을 괜히 다그쳤다. 그리고 탁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형준은 형준 나름대로 그때까지 빠져있던 뭔가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어… 어, 미안. 기식아. 그러니까… 넌 늘상 먹던 치즈순두부면 되지?”

“이미 말했잖아, 멍청한 자식.”

그리고 기식은 그의 표정에서 약간의 황홀감 비슷한 것을 감지하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태 주문도 안 하고 뭘 보고 있던 거냐?”

보통 이런 경우는 더 미안해하면서 서둘러 주문하는 게 옳을 것이다. 하지만 형준은 반대로 왠지 반가운 빛을 띠면서 상체를 약간 그에게 숙이고는 뒤를 가리키며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 모습은 어쩐지 ‘네 전문적인 작업 걸기 실력이 발휘될 좋은 기회’라고 암묵적으로 말하는 듯하다.

“저기, 저 두 여자 이쁘지 않아?”

기식은 이 녀석도 어쩔 수 없이 여자에 목마른 20대 청춘이라고 속으로 긴 한숨을 쉬고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보긴 했다. 그래 봤자 대낮에 이런 싸구려 분식집 한 구석에서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여자가 예뻐봤자 얼마나 예쁠…….

그리고 기식은 놀람의 증거로 눈이 커졌다. 물론 형준은 기식의 반응이 당연히 의외의 행운에 따른 반응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지만 그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기식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뒤에 있던 두 여자의 시선과 기식의 시선이 마주치면서 점차 다급하게 변하였다.

“……?”

뒤를 다시 돌아본 형준은 더욱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 두 여자 중 한 명은 기식을 보고는 - 당연히 형준 자신을 보고 저런 미소를 짓지는 않을 것이기에 - 호감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녀 맞은편에 앉은 또 다른 여자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어쩐지 경멸까지 담아서 쏘아보는 그녀의 시선에 형준이 당황할 틈도 없이, 기식 쪽이 먼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야, 아직 주문 안 했지?”

“어? 어… 그… 렇긴 한데?”

“빨리 나가자. 아주머니, 죄송요. 다음에 올게요.”

가게에 있던 몇 안 되는 손님들이 이상한 분위기의 기류를 눈치채고 그들에게 시선이 쏠렸지만, 기식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듯 가게문을 열고 나갔다. 형준은 멍하니 그런 그의 뒤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허둥지둥 자신도 노트북을 챙겨 들고는 분식집을 빠져나갔다. 흔하다면 흔하다고 할 수 있는 약간의 해프닝. 하지만 당사자들에겐 꽤 심각한 개인적인 문제.

그래서 겨울이란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거리로 내딛어졌을 때 형준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한 것 또한 어찌 보면 당연하다.

“왜 그래? 아는 여자야?”

“신경 꺼. 제기랄. 다른 곳 가지.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초밥집이 있어.”

형준은 분식집의 싸구려 음식보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점심을 먹게 되었기에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꾸만 그 여자들이 마음에 걸렸다. 기식이 그런 대단한 미녀들을 놓칠 리가 없는데…. 하긴 그런 여자들이라면 자신 따윈 거들떠도 보지 않고 모두 기식의 차지가 되겠지만. 형준은 그런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알 수 없는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나저나 좀 안 좋은 사연이 있는 사인가? 기식답지 않게 왜 이렇게 서둘러 나온 거지?

‘이런 젠장할…. 왜 이 주변에 저 녀석이… 설마 아지트까지 들킨 건가? 그럴 리가 없다. 그저 우연이겠지.’

그런 기식의 생각과 비슷하게 분식집에 있던 두 명의 여자 중 한 명 또한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세상 참 넓고도 좁군. 이런 데서 녀석을 마주할 줄이야…. 지금이라도 쫓아가볼까? 뭐… 그렇다곤 해도 녀석은 악을 쓰며 거부하겠지만…….’

“야, 야. 방금 있잖아. 왠지 모르게 금방 나가버린 금발머리 그 남자. 멋있지 않니?”

소희는 날치알로 돌돌 말린 김밥을 입에 넣으며 맞은편에 앉아있는 하영을 찌릿 쏘아보았다. 하영은 황홀한 표정으로 기식을 생각하다가 소희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는 입을 비죽 내밀었다.

“치, 이 가스나도 남자 끌어들이는 페로몬 폴폴 풍기면서 아닌 척 차갑긴. 너 그렇게 너무 튕기면 남자들이 정말로 싫어하는 줄 알고 안 다가와. 요즘 남자들이 얼마나….”

“혼자 김칫국 다 마시는 가스나는 바로 너야. 으휴.”

“내가 뭘?”

소희는 롤을 우물거리면서 천장으로 시선을 주곤 한숨을 폭 쉬더니 고개를 젓고는 다리를 바꿔 꼬아앉았다. 그녀의 미끈한 다리 라인과 풍만한 허벅지는 두꺼운 겨울 스타킹으로도 감추지 못할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고, 주변 남자 손님들의 흘끗거리는 시선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하영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당사자는 그런 시선들에 너무나도 익숙하여 신경도 안 쓰고, 짜증나는 자신의 기분에만 충실하고 있었지만.

“날 보고 나갔다고, 날 보고.”

“어머, 어쩐지 그런 것 같더라니. 혹시 아는 사이야? 아는 사이면 소개 좀 어떻게… 안 될까?”

소희는 그만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곤 소리치듯 말했다.

“넌 저게 멋있니?”

“그으럼~. 당연하지. 키도 크지, 옷빨 잘 받게 생겼지. 차가운 듯하면서 어딘가 따뜻함이 서려 있는 깔끔한 인상. 진짜 밴드부에 메인 보컬하면 딱이겠다. 하아, 내 인생에 저런 남자 한번 사귀어볼 기회 안 오려나.”

뻔뻔스럽게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는 하영의 모습에 소희는 결국 제풀에 지쳐 화를 불발시켜버렸다. 그녀는 다음 롤을 그냥 한입에 확 집어넣고는 툭하고 내뱉듯 말했다.

“보컬 좋아하네. 날라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구만. 차라리 김성진 같은 남자가 백배 낫지….”

“어머머, 걔 이름 나왔다. 너 진짜 걔 좋아하는 거 아니니?”

젓가락질을 하던 소희의 손이 멈칫했다. 하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꽤나 기세를 탄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몰아붙였다.

“성진이랑 그 클럽에서 다섯 번이나 했다며, 응? 응? 어때, 걔 잘해? 날카로우면서도 일견 이쁘게 생긴 구석도 있던데, 흐음…. 나도 한번 먹고 싶다.”

“시끄러워. 그 얘긴 그만하라 했지.”

“무슨 얘기? 야한 얘기? 아니면 성진에 대한 얘기?”

소희는 그녀의 몰아붙임을 그냥 한숨으로 흘러 넘기기로 했다. 일견 짜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하이텐션 타입의 하영이었지만 소희의 차분하기까지 한 성격과 중화되었기에 둘은 묘한 친구 관계를 지속시키고 있었다. 하영은 주변 남자 손님들이 들으면 얼굴이 붉어질법한 추궁을 몇 번 더해보다가 반응이 없자 자신도 마저 남은 롤을 우물거렸다. 그리고는 왠지 자신의 일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근데 솔직히 그때 성진이 옆에 있던 여자애보다는 니가 낫다야. 미선이라 했던가? 뭐 귀엽긴 했지만서도.”

“시끄럽다니깐.”

“그래도 니가 한번 적극적으로 대시해봐. 남자는 귀여운 여자보다 섹시한 여자한테 끌리는 법이야.”

“그리고 섹시한 여자보다 사랑하고픈 여자한테 끌리는 법이지.”

“섹시한 여자가 사랑하고픈 여자 아니야?”

소희는 한숨 대신 물컵을 기울이며 식사의 끝을 알리듯 짧게 대답했다.

“넌 아직 사랑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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