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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날씨답지 않은 강렬한 햇빛이 도시를 가득히 물들였다. 벽인지 창문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유리창 앞에 서서 성진은 햇살 속에 파묻혀있는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들어간 슬림한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그 주머니에 한쪽 손을 꽂은 채 바깥 경치를 바라보던 성진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호텔방 체크아웃 전에 혜진이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은 아니었다. 과거에 사귀었던 여자들의 시간에 비추어서 그녀의 외출 준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이미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참으로 엉뚱하게도 그는 여행 막바지에 다시 선영의 생각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걱정이었다. 마치 본능과도 같은,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리게 되는 것.
‘녀석은 별 탈 없이 잘 있으려나? 게임대회에 돌아다니는 것 같던데 남자들 가득한 곳에 가서 사고치지나 말아야 할 텐데. 밥은 잘 먹고 있나? 반찬이야 늘상 떨어지지 않게 냉장고에 채워놓고 있긴 하지만…. 그리고 뭣하면 빌려준 카드로 사먹기야 하겠지. 그런데….’
새삼스레 왜 녀석의 안위가 걱정되는 거지? 녀석과 싸웠잖아. 아니, 일방적으로 나가라고 소리지른 쪽은 나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뜬금없게 녀석의 생각이 다시…. 멀리 떨어져있어서 그런가?
성진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피해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때는 벌써 점심때라서 햇빛은 길게 들어오지 않았고, 그래서 쉽게 햇살로부터 물러설 수 있었다. 성진은 주머니에 꽂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자기 앞머리칼을 매만졌다.
‘현재의 선영은 전혀 다른 인격체이기에 녀석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녀석 안엔 내가 좋아해보고 싶었던 본래의 선영이 들어있다. 그래서 밥은 잘 먹고 있는가 따위의 안위 걱정은 당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의 선영이 아무리 얄밉게 행동해도 녀석 안에는 그녀가 들어있으니까.’
성진은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시늉을 해보았다.
‘그래. 내가 나가라고 히스테리를 부렸던 것도 전혀 다른 인격체인 선영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빌어먹을 자식. 하필이면 같은 외모로 있어서 사람 갈등하게 만들고 있어. 현재의 선영과 나는 정말로 아무 관계가 아니다. 아무 관계가…….’
한동안 머리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곧 툭하고 팔을 내려뜨렸다. 아주 납득할만한 논리로 끼워 맞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스레 자꾸만 꺼림칙해지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예 선영의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다. 게다가 내게는 지금 혜진이 있잖아. 결혼을 전제로 사귀기엔 이른 시점이긴 하지만,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 생각을 하는 것은 어떤 면으로든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것이 설령 본래의 선영이라 해도…….
“오빠, 또 무슨 생각이 빠져있어?”
어느 새 다가온 혜진이 성진의 등 너머에서 기웃거리며 그의 얼굴을 살핀다. 준비가 다 끝났는지 그녀는 외투와 가방을 모두 한 켠에 정리해놓은 채 겉옷 차림으로 성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어깨가 모두 드러나는 노란색 블라우스에 검은 미니스커트, 그리고 무늬가 있는 스타킹을 신음으로써 귀여움과 섹시함을 동시에 살리고 있었다. 성진은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그녀의 큐트한 의상에 매번 감탄하면서도 또 감탄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무슨 여행 막바지까지 코디를 다 미리부터 구상하고 왔나?
그는 바깥 풍경에서 완전히 고개를 돌리고는 반색하며 혜진을 바라보았다.
“네 생각.”
“어, 진짜?”
“어떻게 하면 자기를 더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꺄핫….”
혜진은 성진의 팔을 가볍게 치고는 부끄러워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그녀를 바라보며 성진도 따라서 미소를 띠곤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이 여자를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마음 속을 끝없이 어지럽히는 선영이란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다. 이젠 좀 그만 그리워하고 편한 사랑을 하고 싶다. 성진은 몇 번이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쁘다.”
“이쁘지?”
혜진은 방 한가운데에서 두 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두 손을 엉덩이로 모아 쥐고는 상체를 약간 앞으로 굽혀서 성진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가끔씩은 이렇게 귀여운 복장도 해줘야 오빠가 질리지 않지.”
“야, 야. 너라면 1년 365일 같은 복장이라도 안 질리겠다.”
“우웅~. 아냐. 아무리 이쁘거나 서로 좋아서 못 견디는 사이라도 시간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대. 권태기가 온다는 거지. 그보다 오빠.”
“음?”
“오늘은 왜 이렇게 립서비스가 좋아?”
성진은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난감한 기분이 들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고, 그래서 혜진은 그냥 좋은 걸 그대로 받아들일 걸 그랬나 하는 일말의 후회가 일었다. 그 기분을 주체하지 못해서 역공격을 하다니 나도 참. 그래서 혜진은 어색한 침묵이 감돌기 전에 그녀가 아주 자신 있는 방면으로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흐음, 역시 아침의 섹스가 하루의 활력소에 도움을 주는 건가? 그렇게 기분 좋았어, 오빠?”
효과는 있었다. 약간 발끈하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무… 무슨 소리야? 네가 좋아서 시작한 거 아니었어?”
“당황하는 걸 보니 맞나 본데. 오빠, 이제부터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가볍게 한번씩 꼭 하자.”
“절대 노. 제발 좀 봐주라. 이 오빠도 한계가 있어.”
“히잉. 좋으면서 뭘. 오늘 아침도 엄청나게 많이 내었더만.”
그리곤 성진이 ‘네가 그렇게 만들었잖아!’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혜진은 슬쩍 한걸음 다가왔다. 성진이 얼굴이 약간 붉어지는 것도 잠시, 혜진은 킥하고 웃고는 노란 블라우스 밑자락을 붙잡고 위로 걷어올리며 자신의 배를 만지는 시늉을 해본다.
“이것 봐. 내 자궁 안에 오빠의 정액이 가득 출렁출렁♪”
하지만 이번의 성진은 당황하지 않았다(물론 붉어진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회피하곤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어느 에로게(Ero Game)에 나오는 대사냐?”
“어, 눈치챘어? 이야~. 많이 발전했네, 오빠?”
하지만 성진은 되려 민망해진 표정으로 헛기침만 하며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정작 혜진은 신이 나서 태연하게 음란한 말을 이어갔지만.
“꽤나 인상적인 문구라 언젠가 한번 써먹어보고 싶었는데. 근데 오빠가 내 안에 싼 여운이 남은 상태로 이 말을 하니까, 또 되게 야하게 느껴진다. 헤헤헷.”
성진은 아예 그녀로부터 등을 돌리고는 바깥 경치를 다시 바라보는 척했다. 혜진의 말에 또다시 자지가 다시 서버리는 것을 제지하기 위한 본능과도 같은 행동이었지만, 이미 오빠의 행동반경을 손바닥 안에 꿰고 있는 혜진은 키득거리며 그에게 밀착해왔다. 혜진은 뒤에서 그를 살포시 안듯 젖가슴을 갖다 대고는 손을 앞쪽으로 뻗어 바지 위로 자지를 살살 매만져본다. 온갖 딴 생각에 안간힘을 집중하던 성진에겐 꽤나 애처로울 법하지만 이미 자지는 주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꼿꼿이 치솟아있었다.
혜진은 살짝 붉어진 얼굴을 성진 어깨에 기대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숙박 연장시키고 실컷 하면 안될까, 오빠?”
“안 돼. 나중에 너희 집에서 하든지 해.”
“거기랑 이런 데서 하는 거랑 분위기가 또 다르잖아.”
“넌 무슨 여행을 섹스 목적으로 오냐?”
“히이이잉. 오빤 참 이상해. 다른 남자 같으면 자기가 숙박비 지불해서라도 여자친구를 더 붙잡아둘 텐데. 이건 뭐 여자가 다 대준다 해도 거절하니.”
“네가 보통 여자냐?”
혜진은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으로 혀를 내밀고는 결국 물러섰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아쉬움을 담은 채 시선을 성진의 아랫도리로 계속해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생각을 전환시켜버리기라도 하듯 성진은 다리를 꼬아 창가에 걸터앉고는 한숨처럼 말했다.
“얌마, 강혜진. 나 어디 안 간다. 앞으로 할 날은 많아. 또 여행 와서 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그만 좀 아쉬워해.”
“그렇겠지?”
혜진은 마지막으로 침대의 탄력성을 느껴보려는 듯 폴짝 뛰어서 시트에 걸터앉았다. 성진은 여전히 창가에 반쯤 걸터앉은 자세로 혜진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당연하지. 너같이 이쁘고 내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최고의 애인을 놓쳐버리면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자살하고 싶어질 정도로 허무해질 걸? 뭐 종종 과도한 섹스를 요구해오기도 하지만 그것도 네 매력이고, 늘 딱딱하게 내가 반응해도 그것이 진심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너도 잘 알잖아.”
혜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진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성진은 좀 부끄러운 듯 그녀의 시선을 약간 피하며 볼을 긁적이곤 말했다.
“뭐 사귄지 아직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았고, 나이로 봐서도 상당히 이르지만… 난 너와의 결혼까지도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어.”
“오빠…….”
혜진은 여차하면 눈물이라도 흘릴 듯 성진을 바라보며 기뻐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성진의 예상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성진은 그녀의 진심 어린 기쁨에 조금 묘한 감정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곤 혜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 봤나? 그렇게 성진이 추측해보고 있을 즈음, 툭하고 열리는 혜진의 입.
“난 정말 이 순간만큼은 오빠의 여자인 게 축복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너무 행복해…. 그런데 오빠, 오빠는 나 때문에 자살하고 싶다거나 그런 허무감을 느낄 필요 없어.”
“물론 헤어지지 않으면 그만이란 네 맘, 잘 알아.”
“아니, 설령 헤어진다 해도.”
성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곧바로 물어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야. 만약에 오빠랑 내가 헤어진다 해도 오빠는 그 사실에 그 어떠한 마음의 상처도 받지 않을 거란 거야.”
성진은 약간 어이없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너 좀 이상한 얘길 한다? 네가 내 마음을 조종이라도 한다는 거야?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너는 견딜 수 있겠어?”
“체크아웃 시간 다 됐다. 오빠, 얼른 나가자.”
성진의 귀엔 그 말이 답을 얻을 수 있는 잔여 시간의 커트라인을 넘었다는 말처럼 들렸다. 혜진은 마치 아무 얘기도 없었다는 것처럼 활기차게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고는 짐과 외투를 챙겼다. 도대체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지는 데 어떻게 아무 마음의 상처도 생기지 않을 수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성진은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이렇든저렇든 성진은 혜진이 여전히 자신을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혜진과 헤어지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면 그녀의 말도 안 되는 방금의 얘기는 아무 의미가 없지. 성진은 그렇게 단정짓고는 자신도 창가에서 일어서서 외투를 챙기고는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