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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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기식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하고 핸드폰 시간을 확인했다가 곧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것이다. 아마추어라지만 작지 않은 규모의 ‘카잔 전쟁’ 대회 결승전까지 관람하고 이벤트 경기까지 끝이 난 후, 선영과도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딘가에다 주차시켜둔 자신의 차로 혼자서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 걸음걸이는 빠르지 않았다.

형준과 같이 오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형준은 상부상조 같은 관계가 아니었다. 보수를 빌미로 동업자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었지만 거의 부하직원 부리듯 이용한다고 봐야 맞을 것이었다. 물론 형준 또한 그 점을 모르는 건 아닐 거라고 기식도 인지하고 있었다. 단지 적잖은 보수와 자신의 프로그래머 실력을 발휘하여 짜릿한 해킹 경험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그런 주종 관계 따윈 큰 신경도 쓰지 않을 타입이었다.

그럼 무엇이 그의 걸음을 이렇게 느리게 만드는가. 이런 쌀쌀한 겨울 날씨에서조차도.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던 기식은 어렵잖게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카페에서 보았던 선영의 미소를 기억하고 되새기고 있었다. 희망이 가득 담겼던.

사실상 그것은 그의 계획에 적절하게 들이맞고 있다고 봐야 했다. 기식이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프로게임단까지 설정하며 선영을 꾀어내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임시보호자인 김성진이나 다른 누군가가 선영의 말을 듣고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채는 걸 방지하기 위해 자연스런 접근을 이루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그녀가 잔뜩 기대하게 만든 후에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처절하게 강간함으로써 ‘부숴버리는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선영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복수하기 위해선 그녀의 감정을 갖고 노는 것만큼이나 적절한 건 없다고 그는 생각했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지금 이 순간에 와서 그는 계획을 진행하는 입장에서 절대 갖지 말아야 할 ‘대상을 향한 어이없는 사적 감정’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선영의 그 웃는 얼굴이었다.

- 고마워요… -

물론 그녀가 기뻐하는 것은 계획의 짜릿한 종점에 있어서 아주 맛깔나는 자양분이 된다. 그러나 현재의 선영은 그야말로 기식을 향해 단 1%의 의심도 품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려고 하고 있다. 그 의도는 너무나 순수해서 이용하는 입장에서 도리어 없던 죄책감까지 일게 만들고 있었다. 녀석이 그렇게까지 순수한 표정을 줄 아는 녀석이었던가? 기억상실증 때문에 머릿속이 백치화돼서 그런 건가?

대체 무슨 일이 녀석에게 일어났길래, 이정도 권유에도 벅찬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일까?

“칫….”

기식에게 있어 뭘 고찰하거나 연민의 감정 따위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분이 나빠졌다. 기식은 차 키를 한쪽 손가락에 끼워 빙글빙글 돌리면서 다른 쪽 손으로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노는 것을 포함한 각종 기분전환, 시간 때우기 등은 모두 여자를 통해 이루는 것이 그의 타입이었다. 때문에 여자로 인해 나빠진 기분 또한 여자로 푸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는 스마트폰의 액정 화면을 엄지손가락으로 쭉쭉 위로 밀어 올리다가 ‘천경희’라고 적혀진 연락처 목록을 클릭했다. 요즘 들어서 가장 쉽게 불러낼 수 있는 만만한 녀석이다. 하지만 통화음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자 기식은 기어코 투덜거렸다.

“뭐야, 이 자식. 하필 이럴 때…….”

학원 수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나 예측해본 기식은 걸음을 멈춰서서 문자 메시지를 입력해갔다. 그러다 그는 문득 타인의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여자가 몇 발치 떨어진 편의점 앞 파라솔테이블에 앉아서 기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캔커피를 홀짝거리는 모습이었다. 자신과 또래이거나 약간 연하인 듯한 그녀는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고 여전히 흥미로운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쪽 방면에 선수(?)인 기식이 그런 신호를 못 알아챌 리 없었다.

기식은 보내려던 문자 메시지를 취소하곤 스마트폰을 주머니 속에 도로 꽂아 넣었다. 그리고는 싱긋 웃고는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도 미소를 띤 채 어찌하나 관망하는 시선으로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기식은 그녀가 앉아있는 테이블 맞은 편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의자를 가져다 앉고는 두 손을 살짝 비비곤 말했다.

“날씨가 좀 춥죠?”

“…….”

여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거부의 동작도 없었기에 기식은 속으로 이미 반은 넘어온 거라 판단하고 있었다. 산뜻한 회사원 같은, 기가 좀 드세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예쁘장한 모습이다. 기식은 겨우 선영에 대한 꺼림칙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어서 그는 곧 익숙하게 멘트를 진행해나갔다.

“이 동네에 사세요?”

“아뇨. 그냥 이 근방에 볼일이 있어서….”

“그래요? 저랑 같네요. 저도 이 근방에 볼일이 있었거든요.”

“무슨 볼일로 오셨는데요?”

“뭐 같아요?”

여자는 호감어린 눈빛으로 그의 머리칼을 슥 훑어보더니 캔커피에서 입을 떼고는 말했다.

“음… 밴드 활동?”

“…을 가장한 작업 걸기랄까요?”

여자는 깔깔대며 재미있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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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기의 물줄기가 여자의 이마를 훑고 머리카락쪽으로 스며들어갔다. 물론 흡수되지는 않고 어깨 너머에 살짝 닿은 머리칼의 끝부분에서 미끄러져 등을 타고 흘러내려간다. 여자의 얼굴로도 상당히 쏟아졌기에, 숨쉬는 데 꽤나 불편함을 제공할 것 같지만 그녀는 싫지 않은 듯 한동안 그렇게 샤워기의 물을 맞고 있었다. 늘씬한 몸매만큼이나 꽤 커다란 젖가슴 끝에는 물줄기들이 여자의 배와 욕실 바닥 둘 중 어느 쪽으로 떨어져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흩어지며 흘러내린다.

찰박….

샤워기의 물을 끈 그녀는 욕실 벽 한 켠에 걸어둔 수건으로 몸을 닦고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욕실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보일러를 틀어 놓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낮은 기온이 선영의 몸을 훅하고 감쌌다. 하지만 선영은 이미 예상한 것마냥 별로 움츠러드는 기색도 없이 타박타박 원룸 한가운데로 걸어나왔다. 데워진 몸이 급격하게 식으며 김이 살짝 피어오른다.

툭.

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린 그녀는 빈 원룸을 한바퀴 죽 둘러보았다. 성진이 여행을 가고 없어진 지 벌써 수 일이 지났다. 사실 그렇게 생소할 것도 없었다. 요즘의 성진은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지 툭하면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고 외박도 늘 심심찮게 한다. 누군가가 보면 이 원룸에 세들어서 사는 사람이 성진이 아니라 선영으로 짐작할 것이었다.

-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

쌓여있던 무언가를 화산처럼 폭발시키듯 소리지르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선영은 옷을 입을 생각도 않은 채 눈을 감고 한 손을 들어 미간을 감싸쥐었다. 창오빠는 성진이 말은 그렇게 하지만 결국 날 버리진 못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결과적으론 순수한 ‘나’는 아닌 내 안의 ‘그녀’를 버리지 못해서 떠맡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역시 애당초 계획대로 자립할 만한 돈이 모이면… 바로 떠나야겠다. 빚청산은 확실하게 하고 나서. 물론 그렇다곤 해도 창오빠가 말했던 것처럼 내 안의 ‘본래의 나’를 그리워하며 녀석은 날 찾으려고 혈안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악순환이 반복되는 현재의 딜레마로 회귀하는 것일 뿐이다. 일방적이긴 해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는 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변화를 위해서는 내가 나쁜 년이 되어도 할 수 없어.

선영은 그쯤에서 생각을 닫았다. 하루 종일 ‘카잔 전쟁’ 대회에서 마우스를 놀리고 기식과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와서인지 피곤함이 급격하게 밀려왔다. 목욕을 한 후라서 그런 피곤은 더욱 체감적이었지만 그녀는 침대에 쓰러지는 대신 컴퓨터를 켰다. 태환은 분명 경기 결과를 감상하고, 그녀가 집에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전화로 할 수도 있는 얘기였지만 선영은 왠지 그와의 대화는 디지털 문자가 더 편해보였다. 습관 때문일까. 태환도 그 점에 관해선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었다.

「늦었군」

「미안해. 일이 좀 생겼어」

잠시 메시지가 올라오지 않았다. 선영은 고개를 갸웃하곤 재차 메시지를 입력해갔다.

「화났어?」

「아니」

「그럼…?」

「대화해도 괜찮을까 해서…. 피곤하면 다음에 할까?」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고도 자신은 괜찮다는 식으로 말하는 태환의 매너에 선영은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짐을 느꼈다. 예전 본래의 내 애인이라 그런가? 정작 창오빠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녀는 괜찮다고 대답했고, 약간의 사이를 둔 후 왠지 머뭇거리는 듯한 태환의 메시지가 띄워올려졌다.

「사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네」

선영은 의아해하다 문득 몸을 움츠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목욕 후 속옷 바람으로 의자에 앉아있는지라 한기가 그녀의 몸을 감싸왔고, 그래서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 옷장에서 두터운 겉옷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어깨에 걸치고 다시 돌아와보니 메시지가 올라와있었다.

「방송을 봤어. 경기에서 졌더라」

「이겼는데?」

「물론 우승은 했지. 하지만 우려하던 일이 이벤트 경기에서 발생했어. 게다가… 내가 잘못 봤는진 모르겠지만 널 이긴 그 메지즈 구단의 홍준석이란 프로게이머가… 너에게 뭐라고 말하던 것 같더군. 당연하게도 무슨 내용인지까진 들리지 않았지만 네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며 몸을 돌렸던 것도 스크린에서 얼핏 보였어」

선영은 촉촉하게 젖어있는 머리칼을 한번 쓸어넘겼다. 그리고는 가벼운 한숨을 쉬며 메시지를 입력해나갔다.

「창오빠는 정말 초능력자인가봐.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눈치채고 그래? 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난 본래의 너와 적잖은 시간을 보냈었어. 현재 대행하고 있는 너라곤 해도 감정이 표정에 비쳐지는 건 파악할 수 있지」

「오빠의 애인이 되려면 밑바닥까지 긁어서 보여줘야겠군」

무슨 뜻이야? 라고 물어보는 메시지는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선영은 보지 않아도 ‘그 정도로 날 꿰뚫어보면서도 정작 창오빠 본인은 본래의 나와 애인 관계라고 하기엔 애매하다고 표현했잖느냐’의 뜻을 모르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증거로 한동안 되새겨보는 듯 메시지가 올라오지 않다가 본래의 화제로 돌아간 얘기가 띄워졌다.

「어쨌거나… 선영아. 이젠 네 행로에 변화를 주어야 할 시점인 것 같아. 네 약점이 예상보다 너무 빨리 드러나서… 일단 이것도 좀 이상스러울 만큼 빠르군. 그 홍준석이란 남자는 마치 너 하나만 꺾기 위해 밤낮으로 연구한 기분이 들지만 차치하고. 현재 나는 각종 게임 커뮤니티들과 선영 네 추종자들이라 불리는 팬카페 등등을 둘러보았어. 화끈한 경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일종의 초반 꼼수로 승리한 홍준석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긴 해.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이지…. 결과적으론 네가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며 완패했다고 소문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어. 이젠 아마추어 경기에서조차 네가 우승하긴 쉽지 않을 거야」

하지만 선영은 놀라우리만큼 도리어 침착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상스레 알 수 없는 힘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사지는 쿡쿡 쑤시고 피곤함의 일색이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선영은 태환의 염려까지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게 뭐 어쨌다고」

「……응?」

「결론적으론 초반 컨트롤이 문제라는 거군. 그럼 그것을 집중적으로 연습해야겠지. 창오빠가 조언해줬던 것처럼 빠르게, 정밀하게」

태환은 약간 의외였는지 한동안 메시지를 띄우지 않다가 느지막하게 올라왔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단기간에 되는 게 아냐. 게다가 약점이 너무 일찍 발견됐기에, 앞으로 몇 경기는 지금까지처럼 수월하게 우승하지 못할 거란 건… 네가 더 잘 알텐데」

「그럼 그냥 손가락만 빨고 있을까?」

태환은 이번엔 당황했는지 오랫동안 메시지를 띄우지 못했다. 그리고 선영은 그게 무슨 이유에서인지도 알고 있었다. 선영은 자신만만하게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려갔다.

「뭐라도 하는 게 낫잖아. 안 그래?」

「정말 의외군. 나는 네가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쉰다든가 혹은 다른 방면으로 돈을 벌 생각을 해본다든가, 그만둔다든가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거든. 반복적인 컨트롤 연습은 네가 많이 귀찮아했잖아」

「아니, 나는 이 방면으로 끝까지 가볼 거야」

「왜지?」

선영은 그 물음이 나올 줄 예상했다며 미소를 띠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에 힘을 실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원룸의 불빛마저 그녀는 축복이라도 받는 것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목표가 생겼거든. 그 사람을 위해서」

태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선영의 말이 끝나자 곧바로 물어보았다.

「그 사람이라니?」

「왜, 저번에 말했던 멋진 남자 있잖아」

태환은 잠시 머리를 쥐고 생각에 잠기고는 아련히 떠오르는 이름을 타이핑했다.

「이기식… 이라는 남자였던가?」

「기억력도 좋아, 오빠. 칭찬해주지. 오늘 그 남자를 다시 만났어. 신생 프로게임단을 창설하고 초기 멤버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중이었대. 어쩐지 자꾸 마주친다 했다니까. 아무튼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기식 씨는 나에게 스카웃 제의를 했어. 정말 멋지지 않아? 그렇게 잘생긴 남자가 내 실력을 필요로 한다니까. 거기다가 정식 창설 직전이라 그런지 계약 조건도 아주 좋아」

태환은 칭찬한다는 그녀의 앞 말에 잠깐 픽하고 웃었다가 이어지는 내용에 조금 생각에 잠겼다. 흐음, 그 이기식이란 남자가 그런 사람이었단 말이지. 가입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완고하게 밝힌 사람을 입단시키긴 쉽지 않은데. 혹시 선영이 그의 외모와 자상함에만 이끌렸던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던 태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경우에는 여러 부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봐야 맞다. 게다가 그녀한테 직접 물어본다 해도 별로 긍정하는 대답은 나오지 않겠지.

이렇든저렇든 그 이기식이란 남자는 그야말로 엄청난 지원군을 업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선영이 입단하게 된 이상 팀의 명성은 따놓은 당상이다. 실력은 물론이고 여자인데다 연예인을 연상케 할 정도로 상당한 미모이니. 그 꽃미남이란 이기식과 함께 어울리며 팀을 꾸려나가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흐뭇한 광경이 연상된다. 물론 감독과 선수의 경계는 조금 있을 것이고, 선영의 약점을 극복하기까지 또한 시간이 약간 걸리겠지만.

그쯤까지 생각이 미친 태환의 눈에 다시금 ‘카잔 전쟁’ net플레이 대기실에 올라오는 채팅 메시지가 들어온다.

「어쨌건 나는 조만간 이 집을 떠날 거야. 그리고 창오빠한테도 기대지 않을 거야. 개인 숙소까지 마련해준다고 했으니까. 나는 그분의 지원 하에 온 노력을 들여서 ‘카잔 전쟁’ 플레이를 연마할거야. ‘스피어’가 제대로 스폰 기업을 잡아서 유명한 프로게임단으로 도약하는 그날까지」

「스피어?」

「그 게임단 명칭이 스피어야」

「그런 프로게임단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군」

「그럴 수밖에 없지. 앞서 언급했듯 아직 제대로 창설되지도 않은 신생 프로게임단이니까」

태환은 팔짱을 끼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영이 부담없이 입단하여 선배로서 입지를 먼저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아마 그녀의 실력과 여자란 신분을 감안해서 개인 숙소까지도 제공한다 했을 거겠지.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현재 그녀가 천재적인 두뇌로 그나마 할 줄 아는 ‘일’임을 감안하면 이만한 기회도 없을 것이다. 꾸준한 연봉으로 돈을 모아서 차후의 네 삶을 개척해나가라. 은선영. 그러다보면 현재의 ‘너’라 할지라도 분명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야.

그러나 태환은 지속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모든 것을 안심할 수는 없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비록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당한 지 2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짧은 시간이었다 할지라도 분명 사회경험이 있는 그였다. 그리고 세상의 메커니즘에 비추어 뜬금없는 행운에 꽤나 경계심을 갖고 있기도 했다. 신생 프로게임단이기에 그것에 관한 정보를 알아볼 수 없다는 건 납득은 할 수 있을지언정 의심을 안 할 수는 없다는 뜻이 된다. 물론 태환은 선영의 말에 거짓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발 더 나가서 선영이 철저히 믿도록 구슬려놓고 흑심을 품고 있을 그 누군가에 대한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녀가 ‘카잔 전쟁’으로 유명해진 현재, 기억상실증이란 뒷정보를 캐고 그것을 이용해먹을 작자가 이 험난한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곤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증거도 없는 불확실한 추측으로, 한창 기분이 업되어서 뭔가를 해보려는 선영의 의욕에 제지를 가할 수도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 태환은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지만 불을 붙일 생각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보고 있었다.

히키코모리란 내 입지에서, 그녀를 지킬 방법이…….

한참 동안 메시지가 올라오지 않자 선영은 기다리기 지루해졌는지 작별의 뉘앙스가 담긴 말을 띄웠다.

「난 이만 자러 갈래. 아직 좀 이르긴 하지만… 오늘 너무 오랫동안 바깥에 있었어. 피곤해」

「어? 어… 그래. 선영아. 수고했어」

한동안 뜸이 이어지다가 다시금 선영은 메시지를 띄워 올렸다.

「오빠가 걱정하는 건 알아. 그리고 그게 뭔지도 짐작이 가고. 하지만 기식 씨는 달라. 그분은 분위기부터가 뭔가 다르다니까. 난 그 남자와 함께 일이든 연애든 뭐든 열심히 해볼 생각이야」

태환은 네가 세상을 살아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사람 보는 눈이 생겼냐고 비웃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선영이 일을 하는 데 방해되지 않으면서도 최후에 믿을만한 하나의 방법을 간신히 떠올렸다. 예나에게 또 꽤나 귀찮은 일을 시켜야 하겠군. 물론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차후에 우려하던 상황이 발생한다면 도리어 그녀는 정의감에 불타겠지만.

태환은 나지막하게 말을 거는 느낌으로 메시지를 타이핑했다.

「선영아」

「음? 왜?」

「네가 찾은 길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해. 그리고… 그 이기식이란 남자에게도 후에 기회가 되면, 네 상태를 전하도록 하고. 만일 그게 어렵다면 또 내게 연락을 해」

「피, 겨우 그거 말하려고 뜬금없이 내 이름 친 거야? 고마워, 창오빠」

「그리고……」

태환은 흘끗 벽에 걸린 달력을 돌아보았다. 주말까지 감안을 한다고 해도….

「며칠 내로 네가 사는 거주지, 즉 성진의 원룸 앞에 소포가 하나 도착할 거야. 네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까 웬만하면 성진에겐 보여주지 말고 너만 열어봐. 뭐 들킨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겠지만, 설명이 길어질 테니…」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그리고 그걸 증거하는 메시지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띄워졌다.

「뭘 보내는데?」

「네 수호천사」

더더욱 의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태환은 슬쩍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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