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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코치의 안타까움과는 완전한 별개로 선영은 지금 멍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싫은 느낌이냐고 물으면 절대로 아니라고 그녀는 대답할 것이다. 단지 예상 외의 재회가 그녀를 얼떨떨함으로 몰고 갔을 뿐이다. 장소는 여전히 사람이 북적거리는 - 하지만 방금의 경기에서 패배로 인해 조금은 줄어든 - 좁디좁은 복도였지만, 선영은 설령 현 장소가 지하감옥이라 할지라도 가슴 속에서 애틋하게 피어오르는 따스함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었다.
“잘 지냈어요?”
“예? 아… 저…….”
“기억하시죠? 하지만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죠?”
그의 장난스러운 말에 선영은 완전히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아뇨. 기억해요. 이기식… 이라고….”
“어라, 기억해주시는 거에요? 기쁘네요.”
그녀 앞에 선 남자, 즉 기식은 그 특유의 평온한 미소를 싱긋 지어보이고는 선영의 옆으로 와서 섰다. 손끝 하나 닿지 않았지만 선영은 기억 속의 그 멋지고 친절한 남자와 마법처럼 재회한 현실에 가슴 속이 마구 두근거릴 뿐이었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선영의 동행인인 척하며 걸었다. 얼마 후 주변의 기자들과 팬들을 흘끗거리며 둘러본 그는 손바닥으로 그녀 귀 옆쪽을 가리는 척하며 얼굴을 조금 갖다 대 속삭였다.
“여전히 복잡하군요. 근처 조용한 카페라도 가서 얘기 좀 나누었으면 하는데요.”
“예? 예에… 저…… 혹시 그 트카우탭에 문제가…?”
흡사 뭔가에 데이기라도 한 듯 화들짝거리던 선영은 또 그런 자신이 방정맞다고 여겨졌는지 손을 입가에 대고 어색한 기침을 했다. 그런 선영을 가만히 바라보던 기식은 편안한 미소를 유지하며 부드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약간 개인적인 얘기입니다.”
“고… 곤란…….”
“함께 가요. 근처 조용한 카페를 알고 있어요.”
선영은 절대로 ‘개인적인 얘기’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때문에 가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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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잘 봤습니다.”
선영은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마터면 빨아마시던 주스를 테이블 위에 떨어뜨릴 뻔했다. 선영은 최대한 조숙한 여자처럼 보이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지만 떨리는 손으로) 주스를 내려놓곤 머리칼을 살짝 옆으로 쓸어넘겼다.
“예… 예? 오… 오늘 대회요?”
“네. 이벤트 경기까지 모두 관람석에서 보고 있었죠. 관중들 열기가 참으로 뜨겁더군요.”
기식은 카푸치노를 한모금 빨아들인 후 두 손을 깍지 껴 테이블 위에 모아 쥐었다. 그리고는 싱긋 미소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선영 씨가 아니었으면 그만한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추어 대회에서 이 정도 이목이 집중되기는 ‘카잔 전쟁’ 대회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지 시작한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아, 저… 오늘 이벤트 경기까지 다 보셨다면…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홍준석이란 프로게이머에게 진 것을 말하나보군요.”
선영은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하필이면 이 남자가 경기를 관람하고 있을 때 패배해버릴 게 뭐람. 타이밍도 기막히지. 좋은 모습만 보여도 모자랄 판에….
하지만 기식은 별 상관 안 한다는 듯 갖고 온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선영은 그것이 예전에 봤던 트카우탭이란 태블릿PC임을 눈치챘고, 기식은 그것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 부팅시켰다. 잠시 후 그의 손가락이 모니터 위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더니 하나의 홈페이지에 접속하였다. 기식은 선영이 보기 좋게 태블릿 방향을 반대로 돌리고는 말했다.
“메지즈 구단은 그다지 오랜 전통을 자랑하진 않지만 현재 급상승하고 있는 명문 게임단이자 유망한 구단입니다. 입단하는 프로게이머 수도 날이 갈수록 늘고 있고요. 홈페이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프로게이머들 경력이 하나같이 화려합니다. 선영 씨를 꺾은 그 홍준석이란 남자도 오랜 기간 동안 정형화된 연습에 단련된 프로게이머일 것이기에, 아마추어인 분이 진다고 해서 전혀 폄하되거나 할 것은 없다고 봅니다.”
선영은 귀로는 그의 말을 듣고 눈으로는 홈페이지를 살펴보는 척하면서도 홍준석에 관한 얘기는 먼저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했다. 그가 메지즈 구단에 입단하게 된 건 선영 자신의 추천이 크게 작용했다는 걸 굳이 말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영은 주스를 쪽쪽 빨면서 흘끗흘끗 태블릿과 기식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그런데 개인적으로 할 얘기란 게…?”
“아, 먼저 말해야 했는데 깜빡했군요. 별 건 아닙니다만….”
선영은 이 순간 홍준석에 관한 문제나 메지즈 구단의 규모 따윈 관심 밖으로 날려버린 상태였다. 선영은 지쳤다. 반복된 세상의 무관심과 성진과의 불화, 준석의 말마따나 타고난 재능만 믿고 타인의 노력과 꿈을 짓밟게 된 행태에서 오는 허무함, 지겹도록 따라다니는 추종자들과 기자들… 그 가운데에 선영은 늘 혼자였고 삶의 활력소 따윈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태환이 있긴 했으나 그 역시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긴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녀 입장에선 애틋하리만큼 가슴 속 응어리를 녹여줄 것만 같은 남자를 만나고 있었기에 설레는 건 당연했다. 내 안에 있는 본래의 선영이 말했던 경고 따윈 뭐가 어떻단 말인가. 일단 나도 연애란 걸 해보고 싶다고. 그게 어떤 건지, 시작 전부터 이렇게 설레게 하는 감정의 결정화가 어떤 건지 알고 싶다고!
그런 가슴 속의 엄청난 회오리를 간신히 제지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마냥 주스만 빨고 있는 선영. 나… 왜 이러지? 이런 마음을 강력하게 느끼고 있다면 내가 먼저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그 마음을 숨기려고만 하는 거야? 이상하다. 아, 아니야. 일단 저 남자가 먼저 얘기하겠다고 했으니 들어보고. 고백 같은 가능성이 없지는 않잖아? 저번은 우연이다 쳐도 이번엔 일부러 내 경기까지 보려고 왔단 말이야. 그렇다면… 나는 역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승낙하는 편이 좋으려나? 저 남자가 너무 날 딱딱하게 보지는 않겠지?
“괜찮아요?”
약간 고개를 앞으로 해서 선영의 안색을 살피는 기식. 그리고 선영은 그만 주스가 목에 걸리고 말았다.
“코… 콜록! 아니, 안 괜찮아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아요. 흠, 흠….”
기식은 허둥대는 선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바로 하고는 카푸치노를 들어 빨대에 입을 갖다댔다. 한 모금 마신 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선영을 응시하며 말했다.
“안색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요. 뭐 불편하거나 신경 쓰이는 것이라도?”
“아뇨, 아뇨, 아뇨. 그러니까 하… 하실 말씀이란 게…?”
선영이 너무 개인적인 얘기에 신경쓰고 있는 게 티 난다고 후회할 때쯤, 기식은 천천히 본론이라 여겨질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저는 ‘카잔 전쟁’이 가져다 줄 반향성에 대해 더 큰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생 프로게임단을 창설하고 초기 프로게이머 멤버를 결성하기 위해 이런저런 아마추어 대회를 물색해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구단 명칭은 ‘스피어’로써 정식 스폰서 기업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자체적 자금과 자금줄은 몇 군데에 확보해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후에 구단의 명성이 높아지면 대기업 스폰서를 제대로 확보할 계획도 갖고 있죠.”
선영은 기대했던 고백 따위가 아닌 사무적인 내용에 가슴 속의 설렘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선영은 멍한 표정을 짓고 기식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마주 응시라던 기식은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유지한 채 ‘진짜’ 본론은 이것이라는 듯, 하지만 덧붙이듯 가볍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저랑 함께 ‘스피어’를 키워보실 의향은 없으신가요?”
“제… 제가요?”
“물론 은선영 씨가 초대 프로게이머 멤버로 활약을 한다면 저희 구단이 성장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단순한 스카웃 제안이 아닌 동행인으로서 나아갈 것을 약속합니다. 특별한 진로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면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게 제 솔직한 심경입니다만.”
선영은 잠시 머뭇거렸다. 정식으로 프로게이머의 길에 들어설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으나, 지금 이 순간 선영은 자신에게 기대를 거는 이 남자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기식은 천천히 생각해보라는 듯 시선을 창 밖으로 향한 채 카푸치노를 빨아들였다. 선영은 계속해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제가… 자격이 될 수 있을지 걱정되네요. 오늘 경기만 해도 비록 우승하긴 했지만 진짜 프로게이머에게 치명적인 단점을 노출시켜버렸죠.”
“서포트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선영 씨도 ‘카잔 전쟁’을 적잖게 플레이해봐서 아시겠지만 이 전략시뮬레이션이란 건 단순한 퍼즐 맞추기 게임이 아닙니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치밀한 계산 하에 순발력까지 요구하는 일종의 스포츠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선영 씨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지도자 겸 매니저로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예? 기… 기식 씨가 직접요?”
“아직 창설되었다고도 볼 수 없는 신생 프로게임단입니다. 당연히 현재로선 제가 모든 것을 담당하고 있죠.”
기식은 이어서 초대 프로게이머로 활약하면 신설된 건물에서의 개인 숙소를 포함한 의식주 제공, 높지는 않더라도 안정된 연봉, 그리고 장기간 경력을 쌓게 됐을 때 차기 코치나 매니저로서의 활동 보장 등 각종 혜택을 차분하게 늘어놓았다. 겉으로는 별 사심 없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현재의 선영에게 있어서 모두 필요한 조건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형준을 통해 이미 그녀의 뒷조사를 마친 후였기에 기식은 그녀가 간절히 필요한 게 무엇인지 거의 완벽하리만큼 꿰뚫고 있었다.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선영의 대답이 나왔을 때도, 그에게는 수락 자체를 받아내는 것보다 그녀가 수락을 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것이 계약서입니다.”
기식은 트카우탭을 꺼냈던 가방에서 몇 장의 문서를 꺼낸 후 선영에게 건넸다. 선영은 생각보다 복잡한 절차처럼 보이는 문서의 깨알 같은 글씨들을 눈으로 죽 읽어보았다. 당연하게도 입단 경험이 없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 문장들이 뭘 뜻하는 건지 얼른 와 닿지 않았고, 그래서 기식의 성의를 봐서라도 열심히 읽어보는 척했을 뿐이다.
물론 기식은 그런 그녀의 속내를 뻔히 짐작하고 있었기에 여유 있는 미소로 카푸치노만 간간이 빨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설령 그녀가 어느 정도 계약서의 형태를 알고 있다 할지라도 큰 문제는 될 게 없었다. 그 문서들은 형준이 수많은 사무적 계약서를 참조하여 똑같이 꾸며놓은 것이기에, 유명한 기업의 것과 대조해본다 해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 것이었다. 기식은 참으로 쓸만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형준을 고용한 자신을 자찬했다.
“그래서… 여기다가 사인을 하면 되나요?”
“음…?”
선영이 가방을 뒤져 펜을 찾기 시작하자 기식은 도리어 약간 정색하며 계약서들을 도로 가져갔다. 선영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잠시, 기식은 계약서들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여기서 결정하실 것은 아니죠. 신생 프로게임단이라곤 하지만 저희는 입단자분의 충분한 심사숙고를 권유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 적격이라 여겨지실지라도 후에 본인분이 미처 생각지 못한 각종 하자가 떠오를 수 있거든요. 저희도 더 입단자를 물색해야 하니 얼마간 날짜가 지나고 다시 연락 주십시오. 명함을 드리겠습니다.”
“아… 저… 저는 지금 당장 해도 상관이 없는데….”
“제 말대로 하도록 해요. 일주일이든 한달이든 선영 씨 편한 날짜에 아무 때나 연락을 주시면 바로 합숙소가 있는 사무실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저희 직원들과 함께 차로 방문을 도와줄 것입니다.”
그리곤 너무 딱딱해진 분위기에 부담이 갈 것을 염려했는지 기식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싱긋 지어보였다.
“애인 있어요?”
“예? 어… 어… 예?”
선영은 훈훈한 감사의 마음이 다시금 다른 면으로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기식은 카푸치노에서 입을 떼고는 한 손을 턱에 받친 채 테이블 맞은편의 선영을 가만히 마주보았다.
“선영 씨같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분이 늘 혼자 다니시는 것 같아서요. 그냥 궁금해서 말이죠.”
“아, 그… 그… 없… 있어요.”
“있어요?”
“아니, 없… 없어요. 맞아요. 없어요… 잘해주는 분은 이… 있지만. 그러니까….”
선영은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의자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쓰러질 것 같았다. 나 왜… 왜 이러지? 뭐야, 역시 나한테 호감이 없진 않았잖아? 아니, 나 혼자만 오버하는 건가? 진짜로 별 뜻 없이 물어보는 걸 수도… 그런 것일지도… 그런데…….
한편, 얼굴이 빨개진 채 횡설수설하는 선영을 바라보던 기식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거야 원, 너무 숙맥이니 괜히 이렇게 거창한 계획까지 짤 필요도 없었던 것 같잖아. 아니지, 애초의 목적을 따르자면 필요는 하다. 기식은 그녀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신을 흘끗 바라볼 때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녀 곁으로 타박타박 다가갔다.
“좋은 인연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선영은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 손을 내밀자, 마주 붙잡을 생각도 못한 채 화끈화끈 달아오른 얼굴만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1분이란 가공할 만한 시간이 흘러서야 선영은 그의 손을 맞잡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재까지의 마음 고생이 모두 그를 통해서 보상받는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카잔 전쟁’을 천재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자신의 두뇌에 감사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어쩌면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존재였는지도 몰라. 선영은 친절하고 자상한, 그리고 연애 감정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멋진 이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실력을 발휘하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와 함께 펼쳐질 앞으로의 시간을 기대하며 부푼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선영은 행복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생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긴 앞머리에 가려진 기식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