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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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불빛들이 인위적으로 빛나는 별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다지 반가운 것들은 아니었다. 선영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가공할만한 천재적 뇌를 사용하여 단시간에 돈을 버는 것이었지, 이런 스포트라이트를 기대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영은 또 하나의 ‘카잔 전쟁’ 대회에서 우승이 확정된 지금, 이렇게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와 촬영기 불빛 등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네 안에 들어있는데 어떻게 너를 버리겠어? -

창오빠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선영은 여전히 우승자답지 않은 덤덤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그 말을 되새겨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래의 나를 향한 연모지, 현재의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란 소리잖아.’

선영은 결국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며 고개를 푹 숙였다. 만일 그녀가 어느 프로게임단에 속해있다면 좀 한번쯤 팬들을 위한 미소라도 지어보이는 게 어떻겠냐는 감독의 소리를 수없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어느 소속도 아닌 그녀는 그런 권유에서마저도 완전히 해방되어 있었고 흡사 조용히 책을 읽는 소녀와 같은 무표정을 일관하는 중이었다.

사실 선영은 평소대로 얼른 우승 소감을 말하고 상금을 이체시킬 계좌번호를 기재한 후 빠르게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이렇게 경기용 데스크탑 앞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기 진행자는 들뜬 마음으로 마이크를 꽉 움켜쥐고 연단에 서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외치듯 말했다.

- 이번 CTM Winter Tournament 경기의 우승자는 역시나 예상했던 바 그대로랄까요. ‘카잔 전쟁’ 여신이라 불리는 실버레인 ‘은선영’ 선수가 그 영광을 차지하였습니다! -

잠시 관객들의 박수 소리. 덧붙여서 극성 팬들의 조금 더 큰 박수 소리와 환호가 그 와중에 울려퍼졌고 그제서야 선영은 예의상의 미소를 조금 짓는 것으로 무난하게 넘겼다. 진행자는 좌중의 갈채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벅찬 가슴을 진정시키는 자세 그대로 ‘한참’을 기다린 후, 선영을 붙잡아두는 이유가 될 수 있는 멘트를 활기차게 읊었다.

- 사실 이번 대회에는 또 하나의 이벤트가 있습니다. 이것 또한 매우 흥미롭기 그지없는데요. 아마추어의 지존 ‘실버레인’과 불꽃 튀는 접전을 벌일 프로게임단이 섭외되었습니다. 물론 은선영 양의 우승에는 변화가 없지만, 아마추어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아마추어는 아무리 잘해도 아마추어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그런 궁금증을 가지신 분이 많을 거라 예상하여 그것을 풀어보기 위해 ‘메지즈’ 구단의 프로게이머들을 모셨습니다! -

“와아-!”

여느 프로게이머끼리 빅매치 못지 않은 관중의 함성소리가 경기장 안에 울려퍼졌다. 엄청난 열기였다. 아마추어이지만 그렇기에 실력이 더 빛이나 보이는, 그리고 더군다나 그 주인공이 여자란 점이 이런 임팩트를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메지즈 구단 박 코치는 감탄이 아닌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머릿속엔 며칠 전 갑작스레 떨어진 통보 내용과 합숙실에서의 상황이 떠오르고 있었다.

물론 박 코치 자신은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팀으로 데려오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시간은 흘러 선영의 명성이 메지즈 구단 스폰 기업의 자금주 귀에까지 들어가자, 그녀가 참가한 CTM Winter Tournament 대회의 이벤트를 직접 주최하기에 이른다. 메지즈 소속팀이 거기에 참가해야 했음은 당연하다. 박 코치는 아무리 자금주라지만 게임에 대해 잘 모르는 윗선의 안이한 지시에 익숙한 치를 떨어야 했다. 아마추어도 아마추어 나름이지, ‘실버레인’의 실력은 이미 웬만한 프로게이머의 경기력을 상회한다는 걸 알고나 벌인 것인가?

메지즈 구단의 프로게이머들 또한 이 이벤트에 나서기를 매우 꺼려했다. 어쩌면 그것 또한 당연한 것이다. 현대의 프로게이머란 직업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이룬 것이니만큼 괜한 프로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선영의 경기력에 빈틈 따윈 없음을 거의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와중에 입단한지 얼마 안 된 누군가가 실버레인과 맞붙겠다고 자진해서 나섰을 때, 아무도 차마 반대할 엄두가 안 났던 것은 자명하다.

- 홍준석? 자네가…? -

- 확실하게 꺾어드리겠습니다 -

- 만일 자네가 졌을 경우 메지즈 팀의 명성에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네의 현 입지도 온건하진 못할 걸세. 이번 경기는 말만 이벤트지 그만한 위험 부담을 갖고 있어. 왜냐하면 상대는 그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한, 그야말로 아마추어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그 실력은… -

- 실버레인의 명성이 좀 더 높아진 후였다면 좋았을 텐데요. 전 오히려 약간 이르다고 봅니다만… 뭐 그녀를 공략할 다른 이가 나타나기 전에 이런 기회가 온 것에 감사해야 할 지도요. 그런데 이기면 분명 제 연봉 상향에도 도움이 되는 거겠죠? -

합숙실에 모여있던 감독과 박 코치, 여러 스탭들, 그리고 타 프로게이머 동기들은 그의 자신만만함에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그리고 결전은 오늘 이 순간으로 다가왔다. 박 코치는 매사 침착하고 노련한 프로게이머의 매니저였고, 바로 그렇기에 현재 자신보다도 긴장한 기색이 없는 홍준석의 모습에 다시금 당황하기보단 다방면의 추리를 해보고 있었다. 설마… 홍준석 자신을 메지즈 구단으로 추천해준 선영을 위한 일종의 감사 표시로, 그냥 져줄 각오로 도전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 녀석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는, 아직 신입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기회를 잡은 것마냥 녀석이 나서는 것일까? 어쩌면… 지난 여러 날 밤 늦도록 연습실에서 혼자 무언가를 연구하고 있던 것이 이 순간을 위한…?

“저것 봐, 저것… 저 남자 정말 멋있지 않니?”

“오늘 무슨 밴드 이벤트도 포함되어 있나? 스타일 완전 내 취향인데.”

박 코치는 생각을 접으며 또다른 이목이 집중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수석에서 좀 떨어진 관중들 뒤쪽에 한 남자가 난간에 기댄 자세로 서있었다. 몇 여자들의 시선을 받은 그 남자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어 기다란 앞머리칼을 조금 쓸어낸 후 싱긋 하고 미소로 화답했다. 마치 연예인을 본 것처럼 여자들은 자그맣게, 하지만 요란하게 감탄 어린 비명을 내지른다.

무슨 외국인도 아니고 머리칼 색깔 물든 꼴하곤. 하여간 요즘 젊은이들의 취향은 알 수가 없단 말야. 박 코치는 그렇게 생각하며 꺄악꺄악 거리는 호들갑을 무시한 채 다시금 경기장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준석은 연단 앞에 마련된 경기용 데스크탑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

선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은 기억 속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남자와 생각지도 못하게 재회한 데에서 나온 반응은 아니었다. 지났던 대회들 중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선영은 그와 적잖게 만나곤 했다. 물론 만났다고 해봐야 준석은 관중석에서, 선영은 선수석에서 멀찍이 눈을 마주친 것뿐이지만, 늘상 그럴 때마다 준석은 선영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곤 했다. 그것은 머잖아 자신과 다시 한번 ‘카잔 전쟁’으로 붙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메시지였고, 선영도 그것을 깨닫게 된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선영은 그의 등장 자체에는 크게 의문삼지 않았다.

선영은 그의 표정이 굳어있는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그것도 곧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준석은 치졸하고 비열하지만 한편으론 영악한 남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지금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을 것이었다. 덧붙여 선영은 자신의 신상정보를 넷상에 뿌린 것 또한 그였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고, 준석은 이 순간에 선영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는 것처럼 평범한 프로게이머를 가장하고 있을 것이었다.

준석은 선영을 몇 발치 너머에서 흘끗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굳은 표정 그대로 고개만 간단히 까딱하였다. 선영 또한 별 표정 없이 고개를 숙임으로써 서로간의 심리를 차단시킨 인사치레를 마무리하였다.

- CTM Winter Tournament 스페셜 이벤트! 비프로게이머 실버레인 은선영과 메지즈 프로게임단 홍준석의 경기! 3전 2선승제로 치러집니다. 과연 아마추어의 한계는 어디까지일지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경기, 시작합니다! 행운의 여신이 두 선수에게 함께하길! -

“같은 편이 아니면 결국 적이 될 수밖에 없지. 은선영. 자네가 추천해준 선수가 성장하여 결국 그 은인을 무는 행태가 되더라도 원망하진 말게. 세상이란 건 원래 그렇게 차가운 것이야.”

박 코치는 같은 구단 내 프로게이머들과 선수석에 앉은 채 팔짱을 끼곤 그렇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 ‘카잔 전쟁’ 플레이에 약점 따윈 없어 -

- 물론 전략과 전술에 있어서는 거의 완벽해. 문제는 순발력이야 -

- 순발력? -

- 보통 전략 시뮬레이션에서 초반엔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하냐 혹은 방어를 하냐를 선택하는 폭이 상당히 좁지. 후반보다 적은 유닛들로는 선택의 기로가 많지 않거든. 따라서 초반 전세는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보다 순간적인 컨트롤이 더 주요하게 작용한다 -

-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

- 그런데 너는 후반에 많은 유닛들을 어떻게 운용할지에 대한 계산적 능력은 뛰어난 반면, 초반에 프로게이머를 따라갈 만한 물리적인 순발력, 즉 손놀림이 부족해. 실제로 네 플레이들을 돌이켜보면 초반이 상당히 위태로워. 지금까지 네가 초반 러쉬 등등의 플레이에 당하지 않은 건, 상대가 너를 기껏해야 여자 게이머 수준이라며 얕보았거나 ‘도대체 어떤 플레이를 하길래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거지?’라며 과격한 초반 러쉬를 하지 않고 신중하게 탐색한 결과야. 그래서 게임은 후반으로 넘어가고 네 천재적인 계산 능력이 마음껏 발휘돼서 상대는 그대로 당하게 되는 거지 -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대응책은 있어? -

- 있기야 하지. 하지만 지름길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끊임없는 연습뿐이야. 너는 유닛을 컨트롤하는 세부적인 손놀림을 반복해야 할 거야. 빠르게, 정밀하게 -

- 귀찮아 -

-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하긴 단기간에 되기도 어려운 부분이니, 네 ‘목적’이 달성될때까지 눈치채는 프로게이머가 없기를 바라야겠군. 네 해커 경력 덕분인지 현재도 사실상 그렇게까지 손놀림이 둔한 편은 아니니까. 하지만 급상승하는 네 인기에 맞추어서 너를 떨어뜨리려는 시도와 연구는 벌써부터 확장되고 있을 거야. 어쩌면… 네 연승이 끊어질 날은 생각보다 일찍 다가올지도 모르겠군 -

그리고 태환은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도 채팅창에 띄우지 않았었다. 하지만 선영은 현재에 와서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연승을 끊은 당사자가 어찌하다 보니 악연으로 엮어진 홍준석이었단 점은 둘 다 예상하지 못했지만.

2선승제였기 때문에 세 번째 판은 진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앞서 두 승리는 채 반 시간도 안 되어 끝이 나고 말았다. 경기가 종료된 시점, 좌중은 고요했다. 그러나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토록 무적의 연승을 뛰어넘어 ‘카잔 전쟁’의 여신이라 불리어질 만큼 천재적인 실버레인의 약점은 참으로 허무한 곳에서 돌출되었다는.

물론 그녀의 완벽한 플레이를 제압할 ‘진짜’ 프로게이머가 이 이벤트에 등장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기는 참으로 싱거우리만큼 초반 기본 보병 몇 유닛에 의해 끝이 나버리니 진행자도 잠시 이 반전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곤혹스러운 모습이었다. 각종 UCC담당자나 스페셜 이벤트를 중심으로 한 게임 방송 해설자, 아나운서, 게임 기자들 모두 비슷한 심경이었다. 결승전 이상의 화려한 접전을 예상하고 경기장을 빼곡히 메운 엄청난 수의 관중과 선영 팬들도 침묵을 일관했다.

준석은 자신의 연구 결과가 확실한 효과를 발휘했다는 기쁨도 잠시, 그 고요한 주변 분위기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선영을 제압할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기회’라고 여기고 조금 아쉬워하기까지 했지만 실제로는 상상 이상의 인기몰이를 그녀가 휩쓸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준석은 방금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브레이크를 걸어버렸는지를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다.

사실 그것을 자각할 여유도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 준석은 타박거리는 발소리에 관객 쪽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선영이 가까이 와있었다. 그는 데스크탑 앞 의자에 앉아있었고 선영은 일어서있었기에 준석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잠시 동안 준석은 시간의 흐름을 망각했다.

악연의 재회는 보편적으로 반갑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준석은 시각적인 면으로 본능적인 반가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포트라이트 때문에 선영은 그다지 튀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고 화장도 간단한 수준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별처럼 빛나는 조명등 사이에서 그녀 특유의 세련된 미모는 사람들이 왜 ‘카잔 전쟁’ 여신이라 추종하며 다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보습이었다.

선영은 생긋 웃으며 준석에게 말했다.

“정말 엄청난 발전을 하셨네요. 저를 꺾게 된 것… 축하드려요.”

그녀의 미모 때문인지 정말로 승리했다는 실감이 들지 않아서인지, 준석은 잠시 동안 할 말을 잊고는 선영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고개를 돌려 딱딱하게 내뱉었다. 물론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더러운 년.”

뭐가 더러운 년이라는 건지 선영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굳은 표정으로 준석을 바라보았고 그는 그것을 일깨워주기라도 하듯 이번엔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준석의 입에서 마치 꽤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듯한 비난이 어눌한 음성과 함께 튀어나왔다.

“네 녀석 뒷조사를 해보니 아주 가관도 아니더군. 그 잘난 천재적 두뇌로 수많은 프로게이머 지망생들의 꿈을 꺾고, 오만한 승리를 쟁취했겠지? 하지만 어쩌나? 천재도 결국은 노력하는 자 앞에서는 꺾어지기 마련이다. 다시는 알량한 재능만 믿고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지 말지 그래. 너 같은 녀석을 보면 역겨워서 젖먹던 시절의 젖까지 목구멍밖으로 토해질 것 같으니까.”

“…….”

선영은 슬픔이 가슴속을 가득 휘몰아치는 느낌을 받았다. 준석의 폭언은 그가 의도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녀의 마음을 후벼파는 것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상정보를 넷상에 뿌려 수많은 추종자들과 기자들을 성진의 집 주변에 들끓게 만든 건 네가 아니냐는 반박 따윈 까맣게 망각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존재의 가치.

남들과는 다른 특출한 머리는 타고난 재능이라 세평에서 말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은 아니다. 운 좋게 성능 좋은 기기를 손에 넣은 행운아에 지나지 않는 것. 의도치 않게 갑자기 튀어나온 자신은 더 그런 면이 두드러져 있었고, 언제나 진정한 인정을 받는다고 느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선영은 이 순간 ‘평범하게’ 태어나서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어렴풋이, 하지만 뼈저리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관중의 시선이 있었기에 선영은 힘겹게 미소를 다시 지으려 하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예… 저는 어쩌면 그 때 본래의 저와 함께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해야 했을 지도요. 아니, 그래야 했겠죠….”

“꺼져.”

이젠 누구의 눈에도 심리적인 타격을 받은 것마냥 흔들리는 선영에게 준석은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자신의 독설이 제대로 먹혔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선영이 돌아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문을 열고 바깥으로…’의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의 시너지 효과라 자찬했다. 준석은 이윽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관객들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그제서야 정체모를 공기가 들어찬 것처럼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한 순간에 터져나온다. 진행자도 또 한번 벅찬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는 음성을 마이크에 쏟아 부었다.

- 아…! 역시 아마추어는 그 한계가 있었던 것일까요? 괜히 프로게이머가 아니라는 듯 진면목을 보여준 홍준석 선수! ‘카잔 전쟁’ 여신 실버레인을 거꾸러뜨린 메지즈 구단의 승리를 축하합니다! -

“와아아-!”

“홍준석! 홍준석!”

준석은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기라도 하듯 두 팔을 벌리고는 고개를 조금 뒤로 꺾어 눈을 감았다. 엄청난 찬사와 카메라 불빛들이 그를 향해 비추어졌다. 이런 것들을 은선영 그 자식이 독차지했었단 말이지? 가소로운 것. 나를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제 똑똑히 알았을 것이다. 성진이란 녀석도 날 어찌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녀석에게 얻어맞았던 뺨의 통증이 사라지는 것 같군. 준석은 그간의 연구 결과에 대한 달콤한 보상을 마음껏 맛보았다.

선수석에 착석해있던 메지즈 프로게임단의 동기들 역시 제각기 환호를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준석에게 달려갔다. 박 코치도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친다.

“은선영 녀석. 조금 어이없긴 하지만 네가 준석을 추천해줌으로써 이 구단의 명성에 도움이 되긴 했군. 그 점에 있어서 우리는 확실히 고무적이야. 하지만 나는 여전에 네가…….”

먼 발치에 등을 돌리고 경기장 한 구석으로 사라져가는 선영의 모습을 응시하던 박 코치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녀석의 미련은 접어두자. 무패의 연승이 허무하게 깨진 지금, 그녀에 대한 가치는 당초보다 매우 하락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차라리 그 때 그녀가 자신의 스카웃 제안을 받아들였음 좋았을 것을. 여전히 그녀의 재능이 탐나긴 하지만 차라리 지금으로썬 홍준석의 노력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 좋다.

그렇게 생각한 박 코치는 박수를 치는 손에 힘을 더하며 자신도 선수석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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