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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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슈웅-! 콰쾅-! 퍼펑-!

- ‘실버레인’ 선수의 공세입니다. 엄청난 수입니다. 물량도 물량이지만 대체 그 유닛들을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적의 열세적 공간에 치고 들어가도록 하는지 불가사의할 정도입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카잔 전쟁’ 여신의 정갈한 플레이일까요. 상대자인 ‘드래곤 플라이’ 선수는 완전히 말렸다는 표정입니다 -

경기장 벽 중앙에 중개되는 대형 스크린과 울려 퍼지는 게임 사운드가 무색할 정도다. 경기의 결말을 달리는 듯한 절정의 함성소리, 환호소리, 박수소리가 뒤엉켜 일종의 축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어느새 조직화되어 응원 구호까지 외치는 팬들의 목소리는 아마추어 게임 대회라고는 짐작되지 않을 정도로 열띤 열기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중심이 되는 선영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여태까지 그래온 것처럼 뿌듯하다거나 기쁘다거나 혹은 팬들을 위한 일종의 표정 관리마저도 없다.

선영의 머릿속은, 정확히 말하자면 뇌에는 게임 하나에만 전념하기엔 기본적으로 활동성이 너무 높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쉴새없이 뇌에서 전달하는 명령에 따라 모니터속 유닛들을 운용하지만, 이미 그것과는 별개의 생각에 더 빠져있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나마 경기 내용과 관련된 일련의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물론 이것 또한 현 경기와는 별 상관이 없다). 이전에 창오빠와 채팅창으로 대화했던 내용 중 하나를 곱씹어보는.

- 기자들이 집 앞을 왔다 갔어? -

- 응, 아무래도 자꾸 우승을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 같아. 그런데 정말 집 앞까지 찾아왔더라고. 기자란 게 원래 그렇게 무서운 직업인가봐? -

- 이상하군. 선영 네가 아무리 특별한 케이스라곤 해도, 또 기자란 게 아무리 그런 직업이라곤 해도 상대는 한낱 객원기자에 지나지 않아. 더군다나 경기가 방송에 회자되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야. 그런데 벌써 거주지까지 알려질 정도면… 네 신상정보가 인터넷 같은 곳에서 흘러나가고 있다는 뜻이 돼 -

- 뭐…? 그게 그렇게 심각한 일이야, 창오빠? -

- 신상 정보가 뿌려지는 것 자체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지. 게다가 세세한 신상정보가 아닌, 그저 거주지 정도만 파악됐을 경우는 아마 지나가는 사람의 제보일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내가 꺼림칙한 건… 그게 의도적일 경우 당사자가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거지. 네 행로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군 -

웬만해선 남의 우려를 귀담아듣지 않는 성격인 선영도 태환의 말이 단순한 기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물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이미 짐작하던 바이지만 그녀의 인기몰이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급상승하고 있었다. 성진의 원룸 근처엔 점차 그녀의 행보를 취재하려고 배회하는 기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대로는 자신의 위치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카잔 전쟁’ National Champiomship의 우승자 은선영 씨의 소감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 게임에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으며….”

늘상 그래왔던 것처럼 반복되는, 하지만 약간씩 멘트를 바꾸어가며 무난하고 평범한 소감을 조합해 내뱉는 선영. 그리고 그런 그녀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연단 앞에 놓인 수많은 관중들 사이에서 심적 동요가 일만한 인물을 하나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그녀가 생각하던 신상 정보 노출에 관한 점과 그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스토커 기질이 있는 그라면…….

다행히도 여러 경기들을 거치며 같은 행동을 반복해온 그녀로서는 본능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소감을 마무리하는 연기를 완수했지만, 선영은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뜨기로 결심했다. 선영은 우승 상금을 입금받을 계좌번호를 기재하는 절차를 마치자마자 경기가 열린 거대한 체육관 로비로 뛰쳐나왔다. 그녀는 관중들 사이에서 자신을 의미심장한 미소로 응시하던 프로게이머 홍준석을 뇌리에서 빨리 떨쳐내고 싶었다. 마치 몸이 그 자리에서 떠나면 생각도 떠나갈 것처럼.

하지만 광적으로 집요한 기자들은 선영이 자리를 뜨는 데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고, 그녀는 뒷문으로 향하는 좁은 복도에서 그들과 얽히고설키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은선영 씨. 이번 대회도 손쉽게 우승을 차지하셨는데, 자신의 플레이는 완벽하다고 스스로도 인정하십니까?”

“젤리를 건네는 퍼포먼스는 이제 완전히 중단하신 건지요?”

“명색이 준프로게이머인데, 이정도 인기몰이라면 극성 팬들 중에서라도 서포트해주시는 분이 안 계시던가요?”

더웠다. 선영은 바깥 날씨와 이 좁은 복도에서의 기온 차이가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지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도를 꽉 메운 기자들과 자신을 추종한다는(정작 그녀 자신은 전혀 불필요했지만) 팬들이 선영의 모습을 오프라인으로 한번 뵙고 싶었다며 달려드는 통에 그녀는 한발한발 전진하기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가장 그녀의 심적 동요를 일게 하는 건 우승 소감을 발표할 때 눈이 마주쳤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남자의 웃음이었다. 홍준석…. 그가 왜 여기에서 그녀의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으며, 자신을 향해 보내던 미소의 의미는 무엇일까. 선영은 더운 입김을 뿜어대는 인파들 속에서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퍼억-! 타칵-!

그런 그녀가 복도 코너를 돌 때 한 남자와 부딪힌 것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현재의 그녀 입장에서는. 선영은 정신 없는 와중에도 자신이 부딪혔던 그 충격보다 알 수 없는 묵직한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더 기겁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비틀거리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는 선영의 시야에 들어온 건, 웅성거리는 주면 인파 사이에서 바닥에 떨어진 검은 네모 반듯한 물체를 주워드는 한 남자였다. 선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그 남자와 부딪쳐서, 그 남자의 손에 든 얇은 책 비슷한 검은 물체를 떨어뜨리게 했음을 자각했다.

그 물체는 선영이 보기에도 책 따위가 아닌 상당히 고가일 듯한 기계였다. 실제로 남자는 매우 곤혹스러워하며 그것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 이…… 이거…….”

“앗, 저…… 저어…… 죄… 죄송…….”

서로 각자의 입지에서 난감해진 상황. 선영은 뒤에 따라오는 기자들과 팬들 때문에 간단히 사과 인사만 남기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떨어뜨렸던 고가의 기계 같은 물체였다. 그것이 고장났다면 자신의 책임이 컸기에 나 몰라라 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선영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인파는 바로 뒤까지 따라와서 에워쌌고, 부딪혔던 남자는 그제서야 상황파악을 하는 듯 선영과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 그… 그거… 괜찮나요?”

“뭔가 복잡한 것 같네요.”

“네…?”

남자는 선영의 질문에 대답한 건지 아니면 다른 말을 한 건지 모르는 투로 중얼거리고는 선영의 팔목을 잡았다. 선영이 어리둥절해하는 것도 잠시, 남자는 살짝 웃으며 명랑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뛰죠.”

“예? 어… 엇……!”

남자는 한 손에 그 검은 물체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팔목을 잡은 채 복도의 출구 쪽으로 냅다 달려갔다. 덕분에 선영은 엉겁결에 끌려가다시피 같이 뛰게 되었다. ‘자… 잠깐만요’ 선영이 그렇게 소리지르지 못한 것은 어찌 됐든 모든 난감한 상황에서 가장 빠르고 명확하게 탈피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이미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인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복도를 달려댔고, 곧 둘은 차갑지만 상쾌하기까지 한 겨울바람이 부는 바깥으로 튕겨지듯 나오게 되었다.

휘잉-!

세찬 바람이 선영의 머리칼을 흩날리어 옆에 선 남자 쪽을 향하게 하고 있었다. 체육관 밖은 차가 몇 대 지나다니고는 있었지만 한산하기 그지없었고, 선영은 숨을 고르면서도 자신을 구해준(?) 남자를 돌아보았다.

“헉… 헉…. 저… 저기….”

“후우… 괜찮아요?”

“저요? 저… 저야, 괜찮…….”

뭔가 물어봐야 할 입장이 바뀐 기분이 들면서도 선영은 남자의 말에 대답했다. 물론 그 더듬거리는 대답은 다 이어지지도 못했다. 남자는 이미 자신들이 나왔던 출구를 돌아보며 다음 대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곧 그는 선영 앞을 빠르게 지나쳐서 앞서 걸어가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까 그 인파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겁니다. 일단 사람들 눈을 피하고 나서 천천히 다른 문제를 생각해 보죠.”

“어… 어디로? 저도 같이 가요?”

“조금만 더 걸어가면 번화가가 있고 커피숍도 있을 겁니다. 그곳이 좋을 것 같네요.”

선영은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고, 남자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걸음을 멈춰서 선영을 돌아보고 있었다.

“쫓기고 있던 것 아니었나요? 혹시 제가 잘못 판단해서 실례를 범한…?”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선영은 이젠 그가 가진 고급스러운 검은 물체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더 관심을 갖는 그의 친절에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문득 뭔가 화끈거리는 게 그녀의 내면에서 올라와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게 뭐지? 얼굴이 화끈거려? 얼굴이 빨개지는 건가? 나 왜 이러지? 죄송스러워서 이러나? 선영은 얼른 남자에게서 고개를 돌린 후 숙였다. 늘어뜨린 머리칼로 얼굴을 감추기라도 하듯.

그런 선영을 몇 발치 너머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피식 웃고는 다시 그녀에게 되돌아 걸어왔다. 그리고는 자신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선영 앞에서 그 검은 물체를 양 손으로 들고 이리저리 매만지는 시늉을 해보인다.

“흐음, 이거… 켜지지 않네요.”

“네…? 켜지지 않는다고요? 그… 그럼 고장?”

“아마도요.”

선영은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왠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남자를 응시하던 선영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저… 죄송… 해요. 어떻게 변상을 해야 할지…….”

“그러니까 가까운 커피숍이라도 가서 앉아서 차분히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선영은 입을 다물고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여유 있는 친절한 미소를 싱긋 하고 짓고는 몸을 돌려 다시 앞서 걸어갔다. 선영은 그의 뒷모습과 혹시 쫓아오는 기자라도 있는지 자신의 뒤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느지막한 오후를 알리는 화창한 햇살은 둘의 그림자를 약간 길게, 조용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이었지만 나비라도 몇 마리 너울거리며 날아다닐 듯한 따스한 겨울 낮의 풍경.

요새 이상한 사람이 여길 자꾸 드나든다니까요.”

“단골이면 좋잖아?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지?”

“으휴… 점장님도 참. 돈이면 다 좋아서. 어쨌거나 저랑 나이가 비슷하거나 좀 삭아보였던 것 같기도 한데, 넷북을 들고 와서 뭔 사이트들 다 띄워놓고 혼자 중얼거린다니까요.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서 저랑 눈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는데, 어휴….”

“하하. 그냥 네가 이뻐서 그런다고 생각해.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 아르바이트 일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징그러워서 기분 나빠요. 아, 어서오세요!”

칭얼대는 여자 아르바이트생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계산대에서 매출 등 중간점검을 하던 남자 점장은, 그녀가 갑자기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자 고개를 들었다. 물론 활기찬 미소로 손님을 반기는 건 아르바이트생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상 태도 중 하나이다. 하지만 약간 날카로운 통찰력이 가미된 점장의 입장에선 그녀의 태도가 반드시 업무에만 치중됐다고 보긴 어렵다고 느껴졌다. 그 느낌은 호기심으로 전환돼 그녀의 시선을 따라 입구를 보았고, 곧 아주 단순한 원인에 납득하였다. 꽤 키가 크고 세련된 복장을 한 멋진 남자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미묘한 실망감으로 남자 뒤를 응시하였다. 뒤따라 들어온 또래인 듯한(동시에 자신과도 또래인 듯한) 여자 한 명이 같은 일행이었던 것이다. 남자는 계산대로 걸어오더니 싱긋 웃으며 그 여자를 돌아보면서 친절하게 물어보았다.

“뭐 마실래요?”

“아, 저…….”

“커피 좋아하세요?”

“아뇨, 별로…….”

“그럼 밀크티라도?”

“네, 뭐… 그걸로요.”

남자는 슬림한 청바지 주머니 한쪽에서 지갑을 꺼내 카푸치노와 밀크티를 주문하였고, 어느 새 점장을 밀쳐낸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환하게 웃어보이며 카드 결제를 완료하였다. 동시에 그녀는 남자 옆에 서있는 선영을 보고는 샐쭉하게 눈을 흘겼다. 뭐야, 자신감 없이 우물쭈물 뭘 주문할지도 모르는 주제에, 저렇게 멋진 남자 곁에 붙어있고. 얼굴만 좀 반반하면 단가?

남자는 검지와 중지로 능숙하게 카드를 도로 건네 받고는 선영과 함께 2층으로 걸어 올라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잠시 후 다시 내려가서 주문한 커피를 갖고 올라와 선영에게 밀크티를 건넸다. 선영이 쭈뼛거리며 자신의 앞에 놓인 밀크티 맛을 음미하는 동안, 남자는 그제서야 테이블 위에 놓은 직사각형의 검은 책 모양 물체를 살펴보는 동작을 취했다. 카푸치노 빨대를 간간히 입에 물면서 찬찬히 기계를 만져보는 그의 모습에 선영은 호기심이 몰려왔다.

“근데… 그거 뭐에요?”

“이거요? 아, 처음 보시는 물건인가 보네요. 트카우탭이라고 하는 일종의 태블릿PC죠. 노트북보다는 성능이 좀 떨어지지만 비슷한 크기의 화면에, 휴대용으로도 좋고 간편하게 터치스크린 방식으로 웹 검색 등의 작업을 하기 좋아요.”

“헤에…….”

컴퓨터라곤 늘 성진의 데스크탑이나 PC방의 컴퓨터만 보아온 그녀로서는 노트북도 아닌 신제품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척 보기에도 비싼 것일 텐데 자신이 고장 내었다는 자각이 들자 다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되었다. 선영은 두려운 표정으로 흘끗흘끗 남자의 눈치를 살폈고, 남자는 몇 번 태블릿을 가동해보다가 여전히 켜지지 않자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보았다. 선영이 흠칫 하고 놀라는 것도 잠시, 남자는 전혀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서로 이름도 모르네요. 전 이기식이라고 켄러대 문화컨텐츠 학과 3학년 재학중입니다. 이제 곧 4학년이 되죠.”

“아, 저도… 포림대 디지털 출판 학과 3학년 재학… 아니, 이제 3학년이 돼요.”

선영은 자신도 다음 학기면 4학년이라는 점을 말하려다 ‘같은 학번이네요? 혹시 나이가…’로 이어져서 조기 입학 같은 점을 설명하다보면 복잡해질 듯해 그렇게 얼버무렸다. 하지만 자신을 이기식이라 소개한 남자는 선영의 예상과는 또 다른 얘기를 꺼냈다.

“나이차는 좀 날 겁니다. 제가 재수를 했거든요.”

“아, 그럼 두 살쯤…?”

기식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커피를 마시다가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다가를 반복했다. 연상의 멋진 남자의 매력은 이런 데서 나올까. 선영은 왠지 편안해지는 기분으로 밀크티를 쪽쪽 빨면서 기식의 손동작을 바라보았다. 어디 음악 동아리 같은 데서 기타리스트라도 하나? 눈가를 살짝 가린 연한 베이지색의 긴 머리칼과 캐주얼하면서도 멋진 재킷, 슬림한 외모는 연애 경험 없는 - 물론 잠식한 ‘자신’이 아닌 현재의 - 선영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아직 내게 이런 감정이 남아있었구나…. 본래의 선영이 연애와 섹스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린 것은 사실이고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현재의 그녀 또한 하나의 인격체로 분리되어 나온 것이니 그녀만의 고유한 감정으로 새롭게 싹틀 수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보다 강력한 경험, 즉 섹스가 동반되면 본래의 그녀가 튀어나오기에 여전히 할 수 없겠지만.

뭐 그런 부분도 앞으로 살아나가다보면 천천히 해결책을 찾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선영은 창 밖의 화창한 오후 날씨와 더불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기로 했다. 그 때 선영을 가만히 바라보던 기식은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대고 두 손을 올려모아 턱을 괴는 시늉을 하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런데 우리 초면 맞죠?”

“예? 네… 저는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잘생긴 남자가 빤히 응시하자 선영은 또다시 얼굴이 붉어짐을 주체하지 못하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모습이 귀여운 듯 기식은 살포시 웃었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편히 기대면서 카푸치노를 한 모금 빨아들이곤 입을 열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 것 같다 생각되서요. 혹시 TV에서 봤었나? 연예인 활동 같은 것 한 적 있으세요?”

“아… 아뇨. 그런 적도, 여유도 없었어요. 무슨…. 아, ‘카잔 전쟁’ 게임 대회 결승전이라면 방영됐으니 거기서 보셨을 수도요.”

“아, 그러고 보니 소문의 그 ‘카잔 전쟁’ 여신을 여기서 뵙는군요. 어쩐지… 만나서 영광입니다.”

기식은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악수의 제스처를 취해보였고, 선영은 ‘저야말로’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더불어 약간 우쭐해지는 자신을 느끼고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든저렇든 이 멋진 남자에게 자신의 잘난 점을 어필한 셈이 된 것이다. 물론 기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희미한 미소로 커피를 마시다가 트카우탭이라는 태블릿PC를 만지작거리다가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던 선영은 다시금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어…….”

“음?”

“아… 아깐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리고 그 PC도 죄송…….”

“아, 제가 도움이 된 것 맞나요? 어쩐지 선영 씨를 뒤따라온 무리들이 별로 호의적일 것 같진 않아서요. 뭐 이 태블릿 문제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다행입니다.”

“어… 어떻게 변상을 해야 하죠? 아… AS를 받아보아야 견적이 나오려나요? 얼마인진 모르겠지만 저도 비용은 충분히 부담할 수 있을 듯하니…….”

기식은 ‘음…’하고 짐짓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따금씩 커피를 빨아들이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선영은 조마조마함이 점차적으로 그의 매력에 빨려들어갈 것 같은 기분으로 전환되는 것을 느끼고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쩌지… 이게 운명적 만남이란 건가?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나 관련 내용을 담은 드라마에 빠져드는 건가. 선영은 그런 자신의 기분에 생소해하면서도 설렘을 느꼈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바로 해서 선영을 바라보는 기식. 그는 싱긋 웃으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선영이 또다시 예상치 못한 발언이기도 했다.

“그냥 가셔도 됩니다.”

“예?”

기식은 태블릿의 한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더니 별 거 아니라는 투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어디가 완전히 부서진 것도 아니고 충격에 의해 내부적으로 약간의 접촉 불량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건 AS를 받아도 그다지 많은 비용이 나오진 않을 거에요. 무상 AS기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어쩌면 아예 비용이 없을 지도요. 설령 비용이 좀 나온들 어떻습니까?”

기식은 선영을 다시 웃는 얼굴로 마주보았다.

“선영 씨 같은 유명하고 아름다운 분을 돕게 된 것만으로도 전 충분히 기쁩니다.”

때때로 멍청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그 자신도 충분히 느끼고 있음에도 그런 표정을 거두어들이지 못하곤 한다. 그리고 선영은 그런 자신을 탓하지는 않기로 했다. 뒤이어 기식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을 때도 허둥지둥 말하는 자신 또한 그녀는 탓하지 않았다.

“그… 그럼 혹시 모르니, 연락처라도…….”

“아뇨. 다 필요 없습니다. 인연이 있다면 또 만나겠죠, 뭐.”

그리고 그는 정말로 상관없다는 것처럼 스마트폰의 액정 화면을 손으로 이리저리 매만졌다. 뭘 하는 건가 가만히 바라보던 선영은 그가 이미 태블릿PC에는 관심을 끄고 자신의 다른 일에 빠져들었음을 직감했다. 선영은 빈 밀크티의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채 정말로 그냥 일어서도 되는지를 한참을 고민했다. 동시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눈앞의 이 잘생긴 남자를 바라보길 원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그런 자신에게 당혹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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