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보통 새 제품을 사게 되면 처음 얼마간은 약간의 흠집이라도 날까봐 조심스럽게 사용하기 마련이다. 물론 시간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티끌 하나 없는 완벽한 모습을 오래 유지하고 싶어서인데, 그런 공감대에 속해있지 않는 행동을 보여주는 남자가 있었다. 카페에 퍼지는 감미로운 음악의 선율 또한 완벽히 무시하기라도 하듯 그 남자는 탁자 앞에 놓인 새 제품인 넷북 자판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려대고 있었다.
넷북 모니터에 띄워진 웹페이지 정보는 말 그대로 넷북의 탓이 아닐 테지만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젠장할. 멍청한 기자 녀석들, 그렇게까지 정보를 흘려줬는데도 그 정도 취재밖에 못하나? 하여간 인터넷에는 쓰레기 기자들밖에 없다니깐.”
홍준석은 웹페이지 곳곳에 띄워진 선영의 기사를 보며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를 토해내었다. 그리곤 곧 누가 들을까봐 흠칫하곤 곁에 놓인 커피를 빨대로 쭉쭉 빨아대었다. 커피의 맛이나 향 따위는 그의 현 행동에 비추어볼 때 전혀 상관이 없는 모습이었다.
준석은 다시 넷북의 터치패드를 신경질적으로 돌려대며 중얼거렸다.
“현재까지 이루어진 총 6개의 ‘카잔 전쟁’ 아마추어 경기 모두 우승. 쏟아지는 프로게이머 제의를 모두 거절하는 것으로 봐서 단순한 상금헌터로 보이나 용도를 알 수는 없음. 가방에 늘 젤리를 넣고 다니며 대전자에게 건네는 퍼포먼스는 최근 보이지 않음. 추정되는 이유는…? 뭐 이딴 시시한 것들이라니 제기랄!”
그는 다시 분을 참지 못하고 탁자를 쾅 내리쳤다. 때는 화창하면서도 느지막한 오후 시각이라 가게 문을 활짝 열어놓고 대걸레로 바닥을 닦던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준석은 곧 그녀와 눈이 마주치곤 머쓱하게 고개를 돌리려다 그녀의 미모에 혹해서 다시 자세히 바라보았다. 카페 유니폼 밑으로 보기 좋게 뻗어 나온 다리 각선미.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고 여자는 재수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휙하고 돌렸다. 왠지 그의 자리 근처는 닦으러 올 것 같지도 않았지만 준석은 한동안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다시 넷북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나마 보람되는 건 ‘카잔 전쟁 급부상 여신 은선영의 평상 모습 밀착취재’ 정도로군. 원룸에서 독신생활 하는 것으로 보인다든지, 늘 혼자 PC방이나 메이크업 장소를 돌아다닌다든지 하는 별 거 아닌 것들이긴 해도. 서서히 연예인급으로 유명해지고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에겐 이런 몰카나 기습 인터뷰 등이 간절해지는 법이지.”
그리곤 잠시 기삿거리를 눈여겨보던 준석은 엄지손톱을 이빨로 씹으며 의아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런데 항상 혼자라고? 저번에 내가 그녀 집앞에서 만났던 성진인가 하는 놈은 역시 걔와 아무 관계가 아니었나? 제기랄, 또 뺨이…. 어쨌거나 날 후려쳤던 그 녀석 손엔 상당한 감정이 실려있던 것 같은데, 이 기자놈들 제대로 살펴보긴 하는 거야?”
욕을 섞어가며 계속해서 중얼거리던 준석은 문득 핸드폰을 열어보고는 이미 연습시간에 늦었음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벌써…. 그는 빨리 메지즈 구단의 ‘카잔 전쟁’ 연습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넷북을 서둘러 파우치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가게 입구로 얼른 뛰어갔다. 활짝 열려있는 문을 나서기 직전, 준석은 아까 그 이쁜 아르바이트생을 한번 더 살펴볼 양으로 카페 내부를 쓱 돌아보았다.
퍼억-.
그가 앞을 보지 않고 걸어가는 사이, 가게 내부로 들어오는 누군가와 맞부딪혔다. 꽤나 퉁퉁한 몸하고 부딪혔다 생각한 순간, 준석은 반사적으로 황급히 그 누군가를 살피지도 않고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그의 입으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중얼거림을 끊임없이 내면서. 부딪힌 그 누군가는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그런 준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물론 아는 사람도 아니고 말 그대로 단순히 부딪힌 것이었기에 외상은 전혀 없었으나, 그의 기분을 한순간 상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뭐야, 저 녀석은.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부딪쳐놓곤 사과도 없이 그냥 가? 뭐하는 자식이지?”
“쫓아가서 깽판 좀 부려볼까요, 선배?”
“야, 야. 됐다. 에휴…. 안 그래도 요즘 심기가 불편한데, 다 귀찮다.”
규한은 무슨 할아버지 같은 소리를 하냐며 킥킥 웃고는 카페 내부의 적당한 테이블에 동혁과 마주 앉았다. 규한은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질 뻔했는데 아쉽다는 시선으로 준석이 사라진 카페 바깥을 자꾸만 흘끗거렸다. 그리고는 메고 있던 가방을 옆 의자에 걸치면서 말했다.
“저런 것들은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 매사에 처신을 잘하고 다니죠. 안 그럼 정신 못차리고 또 똑같은 피해를 사람들한테 주고 다닌다니까요.”
“그건 반대로 말하면 굳이 우리가 아니라도 언젠가 호되게 당할 녀석이 뻔하다는 거지. 난 시끄러워지는 거 질색이니 커피나 시켜.”
“뭐 마실래요?”
“에스프레소.”
규한은 카운터에 가서 에스프레소와 카페라떼를 주문한 후 호출기를 갖고 돌아와 다시 마주 앉았다. 규한은 손가락으로 슬쩍 카운터의 여자 아르바이트생을 가리키며 피식 하고 웃어보였다.
“쟤 이쁘지 않아요, 선배?”
동혁은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잠깐 주더니 태블릿PC를 꺼내서 인터넷 사이트를 몇 개 띄워놓고는 의자에 등을 편하게 기댔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쉬며 규한을 바라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요즘 들어 나한테 붙어있다시피 따라다녀봤자 여자 안 생긴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한번만 소개시켜줘요, 선배! 존경하는 선배님!”
“이럴 때만 ‘존경하는’ 선배냐?”
“제발…. 저도 긴긴 대학의 겨울방학 동안 훈훈한 청춘을 만들어보고 싶단 말이에요.”
“윤지 가질래?”
우웅-.
그냥 해본 말이겠거니 생각하던 규한은 그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음을 깨닫고는 호출기 알람과 동시에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문한 커피를 갖고 돌아와서 에스프레소를 동혁에게 건네었다. 규한은 잠시 후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봤다.
“나윤지요? 걔 선배랑 지금 사귀는 거 아니에요?”
에스프레소의 맛을 한 모금 음미한 동혁은 여전히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헤어질 거야.”
“에에? 걔 선배를 죽자살자 좋아하며 따라다녔잖아요. 걔가 헤어지자고 했어요? 왜 갑자기…….”
“내가 그냥 조만간 끝내려고.”
단조로운 목소리. 규한은 갑자기 궁금한 게 산더미같이 몰려오며 더 물어보려 했지만 곧 본능적으로 제어했다. 털어놓는 술자리도 아닌데 괜히 호들갑 떨 필요는 없지. 그렇게 생각한 규한은 침묵을 일관하기로 했다. 서로 커피를 홀짝거리며 각자 생각과 태블릿을 만지던 그들. 그리고 얼마간의 정적 후에 규한은 선배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며 입을 열었다.
“혹시… 성진 선배가 했던 말 때문인가요?”
태블릿을 이리저리 터치하며 웹사이트를 둘러보던 동혁의 손가락이 멎었다. 물론 잠깐이었지만 규한은 대답 없는 동혁을 보며 자신의 직감이 맞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여자를 겁탈한 후의 상황을 두눈으로 보고도 계속 사귀겠다고 했던 윤지의 태도를 비꼰 것 때문 아닌가요.’
규한은 그렇게 머릿속으로만 질문하고는 카페라떼 컵에 꽂힌 빨대만 쪽쪽 빨아대었다. 죄책감인지 무엇인진 알 수 없다. 그저 그때 공터에서의 대치 후로 쭉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이겠지. 규한은 그쯤에서 생각을 닫고는 짐짓 아까 그 여자 아르바이트생을 돌아보았다. 무심한 듯하지만 상큼한 외모가 자꾸만 그를 설레게 한다. 한동안 그녀가 계산대를 두드리는 것만 보고 있던 규한의 귀로 동혁의 지나가는 말투가 흘러들어왔다.
“김성진이랑 요즘 같이 다닌 적 있냐?”
규한은 고개를 바로 해서 동혁을 바라보았다. 동혁은 여전히 태블릿을 내려다보며 웹사이트 검색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규한은 그가 ‘집중하는 척’하고 있으며 지나가는 말투로 질문한 것 또한 여러 의미가 담겨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는 어떤 어조로 대답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는 일단 질문 그대로 가볍게 되돌려주기로 했다.
“에이, 동혁 선배랑도 만나지 않던 것 같은데, 저라고 같이 다니겠어요?”
“역시 그렇지? 그런데 그 녀석 요즘 가만 보면… 이해할 수가 없단 말야.”
무슨 소리냐는 시선으로 규한이 바라보는 것도 잠시, 동혁은 태블릿을 손으로 잡아 수직으로 세운 후 모니터를 규한이 볼 수 있는 방향으로 빙글 돌렸다. 규한은 태블릿에 띄워진 웹페이지 정보들을 보고는 의아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건…?”
“그래. ‘카잔 전쟁’의 각종 대회에서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유명 인사지. 그것도 우리 학교에서 한때 잠시나마 소동을 벌였던 은선영. 벌써 넷상에서는 게임계의 여신이 강림했다며 추종하는 팬카페와 사이트, 그녀와 관련된 각종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고 스폰서 제의 또한 상당하다고 들었어.”
“저도 얼핏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몰랐네요. 불과 몇 경기 치르지도 않았는데 그런 파급효과를 가져올 정도면….”
“한 선수가 거의 완벽하게 상대들을 제압하며 상금을 휩쓰는 것도 모자라, 미모가 뛰어난 여자이기까지 하니 임팩트가 번지는 건 새삼 놀라울 것도 아니지.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이게 아냐. 앞서 말했듯 김성진 말야.”
“이게 성진 선배와 무슨 상관이란 거죠?”
“걔 아직도 선영이랑 동거하는 것 같아.”
가만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던 동혁은 문득 규한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조금 떼면서 에스프레소를 한모금 빨고는 입을 열었다.
“아아, 너는 애초에 걔가 선영과 동거한다는 사실부터 잘 모르나 보군.”
“아뇨. 동혁 선배가 그 때 한번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런 것보다는… 저도 어쩐지 선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부분을 알 것도 같은데요.”
“응? 그럼 한번 말해보겠나?”
규한도 자신의 카페라떼를 쭈욱 빨아들여 목을 축인 후 긴 한숨과도 같이 말했다.
“사실 성진 선배한테는 만인의 부러움을 사는 캠퍼스 커플이 따로 정해져 있잖아요. 강혜진. 그런데 웃기게도 한편으론 요새 한창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선영과 동거까지 하고 있단 말이에요. 여기까지 보면 흔한 양다리라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제길! 부러워 죽겠다는 얘기 한번 하고 넘어갈게요. 어쨌거나 더 이상한 건 혜진과 함께 다니는 건 심심찮게 보이는 반면 선영과는 동거 외에는 그 어떤 접점도 없다는 거에요. 심지어 기자들도 선영이 솔로인 줄로만 안다니까요. 도대체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지 저도 짐작이 안 가는데요.”
“그것뿐만이 아냐.”
동혁의 이해할 수 없다는 심경을 거의 맞추었다고 생각하던 규한은 묻는 시선으로 선배를 바라보며 커피 빨대를 다시 빨아들였다. 커피컵에 담긴 카페라떼는 이제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규한이 천천히 커피를 목으로 넘기면서 그 향을 음미하는 사이, 동혁은 시선을 짐짓 딴 데로 두면서 입을 열었다.
“김성진 그 녀석, 최근엔 자기네 삼촌 가게 납품 일도 그만둔 것 같더라고.”
규한은 당연하게도 그 말과 현 화제의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동혁 또한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생각했는지 재차 말을 이어갔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성진이 혜진이랑 데이트하고 다니는 거 알고 있지?”
“물론이죠. 방학기간이라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성과 데이트하려면 뭐가 가장 필요하지?”
“일단 여자부터 필요하죠. 남자인 저의 입장에서는. 핫핫.”
“에라이.”
동혁은 농담할 기분 아니라며 테이블 한 켠에 놓인 티슈 쪼가리를 뭉쳐 규한에게 던졌다. 그리고는 엄지와 검지로 동그랗게 모아쥐어 보이고는 강조하듯 말했다.
“이거 아냐, 이거. 커피숍이나 영화관은 물론이고 패밀리 레스토랑, 비싼 쇼핑점 등등 수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데이트하다 보면 하루 몇만원에서 십몇만원 쓰는 건 순식간이다. 그런데 혜진과 사귀기 전에도 집세라든지 용돈벌이를 충당하려 주말 납품일을 하던 녀석이, 사귀고 나서 더 돈들어갈 일이 많아지는데 일을 그만둔 게 이상하지 않냐?”
“듣고 보니 그렇네요. 어디 복권에라도 당첨됐나?”
“더치페이도 한계가 있지, 보통 남자들은 여자들과 데이트하려면 상당한 비용을 감수해야 해. 그런데 납품 일도 그만둔 녀석이 예전보다 더 자금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건 두 가지로 압축해서 생각해볼 수밖에 없어. 네 말처럼 복권에 당첨됐거나, 아니면 든든한 자금줄이 하나 생겼거나.”
혜진의 집이 엄청난 재력가라 데이트 비용 대부분도 그녀가 충당하고 있으며(그것도 모자라 용돈(?)까지 주고 있으며), 그 대신 성진은 그녀와 함께할 시간을 더 늘리기 위해 납품 일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이렇든저렇든 혜진이 학교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는 그냥 아주 예쁜 평범한 학생의 연기일 뿐이었으니. 물론 인맥 넓고 여자 경험 풍부한 동혁조차도 혜진은 ‘섹스에 능숙하지만 평상시엔 안 그런 척 내숭 떠는 스타일’ 정도밖에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동혁은 성진의 이해할 수 없는 넉넉한 자금력을 제 3자인 은선영에게서 추리해내기 시작했다.
“든든한 자금줄이라면…?”
“게임 대회 우승 상금이 꽤 짭짤하지?”
규한은 거의 다 마신 커피컵의 빨대에서 입을 뗀 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에? 설마… 선영이 그 비용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하는 거에요?”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냐? 난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는데?”
동혁은 에스프레소를 쭉쭉 빨아들이면서 시선을 다시 테이블 위에 눕혀진 태블릿으로 내려놓았다. 그의 입에서 이전부터 쭉 생각해온 부분인 듯 건조한 음성이 막힘 없이 내뱉어진다.
“애초에 선영의 자살소동이 있던 후, 나를 포함한 몇몇만 알고 있는 그녀의 기억상실증. 그 중에서도 나는 좀 더 자세히 알고 있지. 지금은 상당부분 나아졌지만 초기엔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기억을 잃었었다. 그리고 성진이 그 기억을 되찾는데 도와준다곤 했지만, 여기서 그가 선영을 은근슬쩍 이용해먹었을 수도 있다는 거지. 병원비와 자신의 집에서 지내는 대가 등등으로 훨씬 많은 비용을, 기본적으로 뛰어난 그녀의 두뇌를 이용해 게임 대회 등에서 벌어오도록 하는 거지. 그리고 자신은 그 수입으로 혜진과 즐기고 있는 거고.”
그들의 이상한 관계를 한순간에 그럴 듯한 조합으로 짜맞춘 동혁의 말에 규한의 놀란 표정은 심각함으로 변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 감도는 정적. 카페 한켠에 들려오는 커피 주문 목소리와 주문을 받는 목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규한은 할 말을 잊은 채 동혁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동혁은 규한을 쓱 하고 바라보며 소리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냥 끼워 맞춰 본거야.”
“네…?”
“하나의 가설로만 생각해두라고. 김성진 그 녀석이 그렇게까지 나쁜 녀석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아니까.”
규한은 빈 카페라떼 컵의 빨대를 쪽쪽 빠는 척하면서 은근히 물어보았다.
“그럼 왜 그런…?”
“말 그대로 충분히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입학 때부터 녀석과 두 학년을 같이 보내긴 했지만, 본디 사람이란 건 어디까지고 믿을 수 없는 존재니까.”
규한은 계속 빈 빨대를 빨며 속으로 성진이 동혁의 이미지에 대해 한마디로 표현했던 어구를 상기했다. 유명 기업의 지사에 어울릴 듯한 퉁퉁하면서도 믿음직한 사장. 하지만 실속성만큼이나 사람을 뼛속까지 믿을 수는 없는.
그렇긴 해도 그 편이 세상을 안전하게 살아가기 좋을 것이다…. 규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이런 인간관계가 대학생 이상의 성인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경계선이란 건가. 하지만 규한은 더 이상 깊이 생각에 빠져들지 못하고 동혁의 다음 말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이렇든저렇든 조금이라도 더 세상을 살아본 선배가 하는 말은 가치가 높다.
“나는 그보다는 더 가능성 높은 안 좋은 예감이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군.”
“더 가능성 높은 안 좋은 예감이라뇨…?”
동혁도 이제는 비어버린 에스프레소 컵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관찰하는 눈길을 주고 있었다. 물론 생각은 완전히 상관 없는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은선영 말이야. 난 그들의 자세한 상황을 모르고 또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해도, 어찌됐든 성진은 요새 혜진하고만 어울려다니고 있어. 선영은 거의 그의 손에서 떠난 상태라고 보면 돼. 그런데 앞서 말했듯 기억상실증과 함께 잃어버린 방어 기제는 이 험한 현실로부터 노출되어있단 말야. 20년 넘게 살아온 우리들은 물론 세상 다 살아보았다고 자부하는 듯한 할아버지들도 종종 사기와 감언이설에 넘어가는 현실인데, 이제 막 사회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녀석은 어떠겠어? 그렇게 혼자 유명세를 타며 다니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가 파 놓은 함정에 빠져들고, 이용당할 소지가 높다는 거지. 구체적인 형태가 어떨지는 몰라도.”
“설마… 아무리 주변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녀라곤 해도, 지켜줄 사람이 성진 선배 하나뿐 일라고요.”
“그랬으면 좋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