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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때의 긴장감은 좀 익숙해졌니?」
「응」
「아픈 덴 없고?」
「응」
「어려운 점은?」
「없어」
태환은 잠시 담뱃재를 재떨이에 떨어뜨리고는 픽하고 웃었다. 연락처를 공유하고 나서도 여전히 컴퓨터 채팅으로 하는 대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니. 그것도 ‘카잔 전쟁’ net플레이 대기실에서. 태환은 어찌 됐건 그녀와의 재회(?)를 이룬 곳이니, 편안해서 이곳을 주로 사용하게 되는 심리가 작용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녀도, 나도.
태환은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다시 입에 물면서 키보드 자판 위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무슨 일 있니? 기운이 없어 보이네」
잠시 후, 선영의 실소가 담긴 듯한 메시지가 띄워져 올라왔다.
「창오빠는… 초능력자라도 돼?」
「…응? 그게 무슨 말?」
「이런 디지털 문자만으로도 상대방의 기분을 가늠할 수 있어서, 그렇게 물어보는 거냐고」
「맞췄냐?」
한동안 대답이 올라오지 않았다. 태환은 한숨 속에 웃음을 띄워 보내며 자판 위 손가락을 움직였다.
「늘 모니터 앞에 앉은 히키코모리 생활이 해를 거듭하면 신경이 이상한 방향으로 예민해지지. 상대방이 어떤 기분으로 타이핑했는지를, 타이핑 된 글의 구조에서 직감적으로 느낀달까」
「기분 나빠」
물론 진심을 담아서 한 말은 아니었고, 태환도 그쯤은 알고 있었기에 또한번 가볍게 웃어넘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본론은 아직 시작도 안됐기에 여전한 긴장감이 그의 내부를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본론에 못지 않은 중압감이 선영에게도 있는 것을, 그녀가 보내는 오늘의 메시지에서 느낄 수 있다. 태환은 어느 타이밍에 말하면 좋을까 하고 나름대로의 계산을 해보기 시작했고, 늘 종잡을 수 없게 찌르는 선영답게 이번엔 그녀가 먼저 메시지를 띄웠다.
「나는 왜 존재하는 걸까?」
「음?」
「난 도대체 뭐길래, 본래의 나를 속에 담은 채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거냐고」
「선영아」
「본래의 나도 죽고 싶어하고, 나도 살아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괜히 이 세계를 잘 살아가고 있는 그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있을 이유가 없잖아?」
원론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태환은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답을 내기 어려운 질문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누구라도 답 비슷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태환. 그리고 그는 일단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진지한 답을 조합해서 그녀의 마음을 한번 어루만져보기로 했다.
「모든 인간은 사는 이유에 대한 답이나 사명감을 갖고 있지 않은 채, 그저 그렇게 살다가 죽어.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것은 내가 현재 살고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다… 라고 답할 만큼 당위성이 없으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이 자연이라든지 우주의 섭리가 왜 존재하는가? 그냥 존재한다. 라는 것뿐이야. 인간이 지성을 지닌 존재라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신 같은 영역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가끔씩 그 영역을 뿌리치기라도 하듯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지. 본래의 네가 그랬을까. 태환은 그렇게 입 밖으로 내뱉어보고 싶은 걸 겨우 제어하곤 마저 타이핑을 완료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다 자신이 더 이해하기 쉬운 가까운 것들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곤 하지. 살아있다는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즐거움을 누린다든가, 빛나는 목표를 향해 정진한다든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거나 혹은 지켜지는 데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든가…. 그저… 너는 그것을 중간에 끼어들 듯 태어나서 잠시 더 혼란스러운 것뿐이야. 하지만 초조해할 필요는 없어. 너도 세상을 살다 보면 살아가야 할 가치를, 해답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반드시…」
「나는 그에게 무엇일까?」
태환의 타이핑이 마무리되자마자 곧바로 다시 올라오는 질문. 마치 곁에 있다면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있었는지부터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리고 질문 자체도 굳이 태환에게 하는 어투 같지도 않았다. 태환은 잠시 미간을 두 손가락으로 잡아 그녀가 적었던 내용을 집중해서 되돌아본 후, ‘그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있을 이유’ 부분을 파고들어보기로 했다.
「그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니?」
「김성진」
「지금 널 돌봐준다던 그 애?」
대답은 없었지만 태환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기에 두 번 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다 타버린 담배를 비벼 끄고, 곧바로 다시 하나 더 꺼내 물고 싶은 이상스런 충동을 느끼며 연이어서 타이핑했다.
「……걔가 신경 쓰이니?」
역시 이번에도 대답 없는 선영. 그리고 태환은 새 담배를 꺼내려고 손을 뻗었다가 허공을 더듬게 되고, 간신히 찾아서 입에 물고도 몇 번이고 불을 붙이는 데 실패하는 자신을 깨닫고는 당황했다. 그는 곧 그런 자신에게 조소라도 보내듯 한숨을 쉬면서 미소를 지었다.
‘뭐야, 헤어진 지 한참이 지나고도, 그것도 본래의 그녀가 아닌 새롭게 태어난 그녀인데… 다른 남자한테 신경 쓰인다는 느낌이 드니 심적 동요가 이는 건가? 이런 같잖은… 꼴에 남자라고 나도 이런 어이없는 질투심이 들 줄이야.’
역시 성진이란 녀석과 그녀는 한집에 같이 살다 보니 정이라도 든 건가? 그런 생각을 하던 태환은 그 따위 생각들은 집어치우기로 마음먹고는 담배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자판을 두들겨서 (정작 그는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위로의 말로 넘어갔다. 문득 그는 선영의 표정을 살피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은 당시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더 나은 해결책을 내기 어렵지. 네가 움직일 수도 없고 기댈 곳도 없었던 건 사실 아니었니? 그래서 지금까지 어쩔 수 없이 얹혀 지내온 것이고.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나는 그에게 피해만 주는 존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거야」
태환은 그녀의 채팅 속에 담긴 ‘피해’라는 단어가 자꾸 언급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선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의 곧바로 타이핑을 했다.
「그를 좋아하고 있니?」
「……뭐?」
효과가 있군, 이렇게 되묻는다는 건.
「연애에 대해 모르는 상태라 했으니 보충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 좋아하는 사람끼리는 피해라는 개념이 희한하리만큼 완화되지. 자신이 희생하는 것은 그만큼 상대를 위한 것이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야. 그러나 너는 자신이 그 김성진이란 녀석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발현되지 않는 존재였고, 그것을 자각함으로 인해서 자신의 존재성에 의심을 품게 된 것 아니니?」
그리고 대화는 끊긴 것처럼 아무 메시지도 올라오지 않았다. 시계의 초침은 한량없이 돌아갔다. 하지만 태환은 그녀가 대화를 거부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연애에 대해, 더 나아가서 사랑이란 것에 대해. 하지만 알기 어렵겠지. 이제 막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참 후, 어렵게 키보드 자판을 두들긴 듯한 메시지가 띄워져 올라왔다. 태환이 두 번째 담배를 다 태우고 비벼 껐을 무렵이었다.
「…알 듯 모를 듯해.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모르는 쪽에 가까워.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감정의 유무를 떠나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부터 의구심이 들거든. 그래서 난 그를 좋아했는지 말았는지도 모르겠어」
「이해해」
「김성진은 내 병원비를 모두 부담하고, 내가 치료를 원활히 할 수 있도록 거처를 제공하고, 숙식과 용돈, 옷과 컴퓨터 사용비 등등 잡다한 것들을 모모 부담했지. 물론 학생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부담감이었겠지만 나는 그에게 늘상 만족하지 못할 정도로 빈곤하게 산다고 불평만 해댔어. 사실 이건 넘기 힘든 현실이란 벽 앞에서 그나 나나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라고 은연중에 나 또한 인정하고 있었어. 그래서 이면으로는 감사하단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몰라. 하지만 그게 좋아하는 감정이었을까?」
「네가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또한 이해해」
「여전히 잘 모르겠어. 하지만 단순히 감사하다는 마음이었다면, 그가 그렇게까지 화를 낸 것에 대해 이렇게 상처받진 않았을 거야. 나는… 창오빠의 말대로 그에게 다른 면으로도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태환은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음을 말해야 하나 짧게 고민했다. 그 한가지란 것은 그녀가 성진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본래의 선영이 가진 감정과도 영향이 있어서 생기게 된 건지 어떤건지에 대한 구분이었다. 하지만 태환은 결국 더 이상은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정확히 성진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의 선영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웠으니.
따지고 보니 현재의 선영은 어이없을 정도로 어렵고 무거운 과제에 떠밀려 있군. 평범한 인간들도 사랑을 알기 어려워서 혼란스러워하는 게 보통이다. 하물며 급작스럽게 이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현재의 선영은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기에 앞서 그 감정이 순수한 자신의 감정인지조차 명확지 않다. 왜냐하면 그녀 속에 잠식해있는 본래의 선영 감정이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본래의 선영은 역시 너무 잔인하고 무책임한 녀석이야. 김성진도 그런 그녀에게 호되게 당하진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태환은 꼬이고 꼬여버린 상황에 머리를 싸쥐는 일을 잠시 미루고 자판 위 손가락들을 움직였다.
「초조해할 필요는 없어, 선영아」
「……」
「네가 이 세계를 오래 살아보지 못해서 더 이해하기 힘들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앞으로 살아감으로 인해서 네 존재성을 부여 받을 소지도 충분하다는 걸 의미해. 과거의 네 본래 모습이 어땠는지, 자신이 왜 이 세계에 살아야 하는지는 이제 막 세계에 익숙해져가는 네가 벌써부터 고민해봤자 득이 없어. …김성진의 기분이 어떤가에 대해서 또한 네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 정도만 처리해. 그가 널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그가 알아서 할 문제야. 너는 네 나름대로의 목적에 정진하며, 네가 신경 쓰고 있는 것만큼 그가 널 신경 쓰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 대화를 시도해」
「…고마워, 창오빠」
태환은 그제서야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 제대로 이해하긴 한 걸까. 그리고 태환은 너무 오랫동안의 대화와 무거운 주제로 인해, 본래 자신이 얘기하려고 했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미루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먼저 말을 걸었음에도 아무런 용건을 밝히지 못했지만 태환은 이미 그런 상황들에 익숙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환이 간단한 인사말을 남기고 접속을 끊으려던 찰나, 떨어지려는 그 무언가를 잡아올리듯 선영은 맞인사 대신 다른 메시지를 띄웠다.
「그런데 오빠…. 무슨 할 말 있던 거 아니었어?」
그토록 어두운 대화를 진행하고서도 그러한 사실을 떠올리는 선영의 모습에, 태환은 감탄이라기보다는 신음 비슷한 한숨을 흘렸다.
「아니, 다음에 얘기할게」
「지금 해」
태환은 괜찮다고 말하거나 그냥 인사말만 남기고 접속을 끊지는 않았다. 이 녀석이 그렇게 말할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 이미 선영의 그러한 화법에 익숙해져 있는 태환은 또다시 짧은 한숨을 쉬고는 키보드를 재차 두드렸다. 손가락 움직임은 비슷하지만 글의 주제는 완전히 다른.
「네가 지금까지 ‘카잔 전쟁’ 대회를 참가한 횟수… 총 6번으로 아는데, 맞니?」
「응」
「최근 몇 경기는 결승전이 게임 채널에 방영될 정도로 규모가 조금 컸지. 너는 현재까지의 경기들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고 나는 방영된 경기들을 돌려보면서 문제점… 을 찾게 된 것 같아서 말야」
선영은 혹시 기자들의 집적거림에 관한 것일까 하고 긴장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띄워진 태환의 메시지는 그런 그녀의 예상을 빗나가게 함과 동시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네 ‘카잔 전쟁’ 플레이에 약점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