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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 잘 지내고 있죠.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버지도 잘 계시죠? 안부전화 자주 못 드려서 죄송해요. 성적은 잘 나올 것 같아요. 웬일로 자신있게 말하냐구요? 하핫, 그냥 요번에 컨디션이 좋았나 봐요. 본가에는 조만간 내려갈게요. 얼마간 여기서 친구들도 만나고 할게 좀 있어서요. 용돈요? 으음…….”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가는 발걸음. 그 사이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의 일상적인 안부전화를 걸던 성진. 그리고 그는 통화내용 중 ‘용돈’부분이 나오자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댄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화창한 오전 햇살. 최근 들어 머리를 조금씩 기르기 시작한지라 앞머리칼이 살짝 그의 눈가에 닿는다. 생소하지만 싫지는 않은 느낌이다. 그리고 성진의 입가는 그것에 반응이라도 하듯 미소가 지어졌다.
“아뇨….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대학생이나 된 놈이 학비와 집세도 모자라 용돈까지 부모한테 의탁해야겠냐고 어른스럽게 말해볼까 했지만 왠지 주제넘는 것 같아 관두기로 했다. 하긴, 내 돈이 아니긴 하지 이건. 하지만 동시에 내 돈이 되어버린 것이기도 하고. 성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통화를 끊고 나서 핸드폰을 쥐지 않은 다른 쪽 손에 들린 하얀 봉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냥 순수하게 그녀가 말한 대로 사용해도 되는 걸까.
미묘한 감정이 엄습해오는 가운데, 그의 머릿속에 오늘 아침 혜진과 대화했던 내용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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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뭐 같아?”
성진은 탁자 위에 - 정확하게는 자신에게 가까운 쪽에 - 놓여있는 봉투를 내려다보고는 다시 맞은편에 앉은 혜진을 바라보았다. 혜진은 언제나처럼 편안한 미소로 성진을 마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전날 밤에도 그녀의 방에서 격정적인 정사를 벌였고, 금새 다시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청초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아침을 맞는 혜진은 모습은 성진에겐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조금 달랐는데, 그것은 식사를 마치고 깨끗이 치운 탁자 위에 놓여져 있는 하얀 봉투였다.
성진은 오른손을 뻗어 그것을 들어보았다. 무게를 통한 안의 내용물 추측이 끝나자 성진은 다음으로 그것을 슬쩍 열어보았고, 안에 겹쳐진 여러 장의 지폐들을 확인했다. 그냥 본것만으론 세기 어려운 장수다. 성진은 속으로 살짝 신음을 흘리면서 봉투 입구를 다시 접어 닫고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두 손가락에 봉투를 끼웠다. 그리고 마치 장난을 하는 것처럼 그것을 위아래로 흔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별로 돈이 급하게 필요하진 않은데.”
“놔뒀다가 써.”
“이자 붙어서 싫어.”
“빌려주는 거 아냐.”
성진은 이젠 아예 아무 생각 없이 혜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 이쁜 눈동자란 말야. 깊고 차분하면서도 섬세하고 아름다운. 눈 하나만 해도 저렇게 이쁜데 다른 곳까지 흠잡을 곳 없이 예쁘고, 그러면서도 매력적인 미모는 보면 볼수록 내 여친이란 점에 뿌듯함을 느끼기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성진이 밀려오는 미묘한 기분을 감당하지 못해 차라리 혜진의 미모를 감상하고 있을 즈음 그녀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은근 이 녀석 무서워.
“오빠한테 주는 거라고. 그냥.”
성진은 여전히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고, 혜진은 다시 덧붙이듯 말을 이어갔다.
“10만원짜리로 넣을까 하다가 그냥 오빠 쓰기 더 편하라고 1만원짜리로 여러장 겹쳐서 넣었어. 그러다 보니 몇십만원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아무튼 그건 이제 오빠 돈이니까 맘대로 써도 돼.”
“이봐, 강혜진.”
약간 압도적으로 그녀를 부르려했지만 성진은 실패했다. 오히려 조금 쉰 목소리를 내게 된 자신을 순간 탓할까 했지만, 그 전에 성진의 머릿속은 전제부터 분석해봐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 관두었다. 성진은 여전히 봉투를 손가락 사이에서 흔들거렸고, 안의 지폐들로 인해 묵직한 봉투는 얼마 안 가 그의 손가락에 부담을 주고 있었다.
“나는 가끔씩 네가 하는 짓에 거부감이 들어도 거부할 수가 없단 말야. 한없이 이타적이면서도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기적이라 해야 하나? 아이러니하기 그지없군.”
혜진은 정말 드물게 정곡을 찔린 자신을 느끼고는 헤헤 웃어버렸다. 하지만 곧 혜진은 즐거운 표정으로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고는 명랑하게 말했다.
“이 상황이 꼭 정사를 대가로 한 보상이라 여겨져서 거부감이 드는 거지, 그치? 오빠.”
“그래, 호스트가 된 기분이다! …라는 건 농담이고. 안 받는다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으니 물어나 보자. 대체 이걸, 그것도 한두푼도 아니고 적잖은 금액을 왜 준다는 거지?”
“말했잖아. 그냥 오빠 쓰라고.”
“단지 그것뿐?”
“굳이 말하자면 오빠랑 나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표식이랄까.”
“표식?”
혜진은 이젠 봉투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편한 자세로 오빠와 대화할 수 있을까 하는 몸짓마냥, 두 손을 뒤로 뻗고 다리를 살짝 벌려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다시 허공을 바라보면서 마치 달콤한 선율처럼 대답을 이어갔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아름다운 사랑 얘기가 많이 나오지. 그러나 그런 사랑 속에서도 돈에 관련해서는 철저히 선상을 긋는 걸 자주 볼 수 있어. 기껏해야 이자를 붙이지 않고 빌려주는 데에서 끝나. 왜냐하면 돈의 위력은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큰 힘이자 위험한 거니까. 사람을 망치게 하는 대부분이 돈 때문이기도 하고, 돈 때문에 사랑까지도 버릴만한 가치를 고민하게 만들어. 그건 어쩔 수 없어. 현실이니까.”
그리고 혜진은 미소 띤 표정 그대로 살포시 눈을 감았다. 물론 입으로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발산시켜 성진의 귀에 꿈결처럼 흘러 보내고 있었지만.
“하지만 난 내 사랑이 돈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고 싶어. 아니, 그렇게 믿고 있어. 그래서 오빠한테 적잖은 돈을 주는 것이기도 하고. 오빠 또한 그 돈을 사양 않고 잘 씀으로 인해 우리 관계에는 돈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겠지. 정말 멋지지 않아? 돈보다 강한 사랑을 실현해나간다는 것이.”
“혜진아.”
하지만 혜진은 이미 성진의 말을 다 들었다는 것처럼 생긋 웃어보였다.
“혹시 부족하면 언제든지 더 달라고 말해. 오빠의 기대에 충족할 만큼 지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언급했듯 우리 집은 부자니까.”
“난 무섭다.”
“뭐가? 내가?”
“내가.”
성진은 이번엔 봉투를 공중에 휘릭 돌리며 던졌다가 받으며 한숨처럼 말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지. 이 순간에 내가 이걸 받는다고 해도 후에 더 너에게 기대고, 많은 걸 바라고, 실망할 장치가 될 게 뻔한데.”
그리고 성진은 흠칫 하고 놀라야 했다. 혜진이 한쪽 무릎을 탁자에 걸치며 올라와 그의 앞으로 고개를 쓱 내밀었기 때문이다. 방 안은 전혀 춥지 않았고, 그래서 혜진은 간편한 반바지를 입고 있었기에 그녀의 탐스러운 허벅지가 묘하게 매력적으로 돋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성진은 의외의 순간에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다시금 가까이에서 마주치게 된 걸 소리없이 침을 삼켜야 했다.
잠깐이지만 긴 체감 시간이 흐르고 나자 혜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지막하지만 압도적인 타이밍.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오빠.”
“……왜지?”
“오빠는 자신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착하니까.”
왜였을까. 성진은 혜진이 자신을 착하다고 말할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반발심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이 녀석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단정짓는 것일까? 그러나 울컥한다고 해서 반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착하다는 단어는 어찌 됐든 욕설에 속할 단어는 아니었고, 혜진은 더욱이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었고, 그래서 성진은 자신도 모르는 내면 속을 이 여자가 꿰뚫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일 정도였다. 이걸 부정할 수 있다면, 이 돈도 뿌리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하니 혜진이 하자는 대로 해야만 했다.
정말 나 최저의 남자 케이스로 하락해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어느 새 탁자 위에서 내려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혜진을 보고 있자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성진은 혜진이 좋아서 하는 일을 그대로 따라갔기 때문에 비난 받을 거리도 되지 못한다. 결국 그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힌 채 봉투를 그대로 주머니에 넣어야 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지나치리만큼 섬세한 혜진은 그런 부분까지도 어루만져주기라도 하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괴감 따윈 가지지 마, 오빠. 차라리 그냥 막 써버려. 그리고 또 달라고 해.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 사랑의 가치는 더욱 더 커질 테니까. 하지만 내가 짐작하건대 오빠는 마음이 강하지 못해서 그렇게 하기 어려울 거야. 견디기 힘들면 좀 더 나와 같이 있고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여줘. 나는 그걸 대가로 받아들일 테니까.”
그러면 좀 편해지겠지? 라고 끝맺음이라도 하듯 다시금 생긋 웃어보이는 혜진의 모습에 성진은 그 어떤 할말도 더 이상 찾지 못했다.
아침 상황에 대한 생각이 끝나자마자 성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원룸 건물앞에 서성거리고 있는 두 명의 남자였다. 성진과 또래이거나 그보다 약간 나이가 많아보이는 그 사람들은 서로 뭔가의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성진이 다가가자 그들은 인기척을 느끼곤 옆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지만 성진은 지나가는 사람이겠거니 여기곤 별 생각 없이 원룸 건물 입구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성진은 그들이 자신을 계속 주시하고 있다는 걸 깨닫자 걸음을 멈추곤 고개를 슬쩍 돌아보았다. 무표정인듯 하지만 입가에는 가느다랗게 미소가 지어져있었고, 성진은 직감적으로 그들이 직업적인 표정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대낮이라 부르기에도 이른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여기에? 그리고 성진은 그들 중 한 명의 손에 카메라가 들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야, 기자들인가? 공중파기자들 같지는 않고… 기껏해야 객원기자들 같은데 내가 사는 원룸에 누군가가 유명세를 탔나?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성진은 그들이 뭔가를 물어보려고 하는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얼른 다시 발걸음을 놀렸다. 약간의 실마리라도 있으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게 이들의 직종이니 귀찮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저… 이 건물에 입주하시는 분이시죠?”
우려함이 현실로. 성진은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그들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자신들이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표출하려는 기색이 역력한 미소. 그리고 성진은 짜증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자신이 바쁘다는 것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요?”
“혹시 옆 호실에 살거나 지나치면서 보셨을진 모르겠습니다만… 젊은 여대생 한분 계시지 않던가요?”
성진은 봉투를 안주머니에 넣고는 두 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고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딱딱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뭡니까?”
“아, 저희 소개가 늦었군요. 저희는 브랜즈 하타오시아라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게임 기자입니다. 최근 들어 ‘카잔 전쟁’ 아마추어 경기에서 떠오르는 여신이라 각광받는 주인공 분의 거처를 입수하게 되어서요. 믿을만한 정보에 의하면 이 건물이 맞는 것 같은데… 정확한 호실을 알 수가 없으니 난감하네요. 조금이라도 짐작이 간다면 도와주시겠습니까?”
성진은 게임도 물론 좋아하지만 기분전환 겸 가끔씩 하기에 관련 커뮤니티 사이트까지 돌아보지는 않는 타입이었다. 방금 이 기자들이 말하는 사이트명도 물론 듣도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성진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아마추어 기자들 중 하나라 판단하고는 그들을 노려보면서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라 생각하시진 않습니까? 그게 누군진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만 넷상에 떠도는 정보로 이렇게 집앞까지 찾아오는 것은 지나친 것 같은데요?”
“무슨… 스토커 행각도 아니고 간단히 인터뷰좀 해보겠다는데 예민하게 반응하십니까? 이것 또한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바로 돌아갑니다. 그것보다 혹시 짐작이 가는 분이 없는지에 대한 대답이나 부탁드립니다. 성함은 은선영이라고 합니다.”
성진은 기자의 가장 좋은 구실인 ‘인터뷰’의 면책권에 대한 염증을 느낄 사이는 없었다. 그들과의 대화 내용 중 익숙하기 그지없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표정 변화를 감추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성진은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를 차라리 짜증으로 그들이 느끼게끔 뱉어내며 차갑게 돌아섰다.
“모릅니다. 그게 누군지.”
“이상하네…. 이 건물에 입주한다고 하던 게 확실한데. 보내온 사진도 일치하고.”
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성진은 계단을 올라섰다. 도대체 인터넷에 어떤 정보가 흘러있기에 저렇게까지 객원기자가 찾아온단 말인가? 분명 나와 동거한다는 점은 모르는 것 같은데 이 건물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건, 선영이 이 건물로 들어가는 것만 보았다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그런 정보를 흘린 건 누구일까. 누군가…….
…혹시 예전에 선영과 밤늦게 같이 있던 그 남자?
도대체 선영 이 자식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는 거야?
성진은 2층으로 올라오자 신경질적으로 열쇠를 원룸 문 손잡이에 넣고 돌렸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깨에 매고 있던 가방을 방 한구석에 던져놓은 성진은 침대에 죽은 듯 엎어져있는 선영을 발견하자 그쪽으로 걸어갔다. 아주 팔자 좋게 늦잠을 자고 있군. 지금이 몇 시지? 11신가, 12신가? 하지만 정확한 시간을 확인해보는, 그러니까 탁상시계를 돌아본다든지 핸드폰 시계를 열어본다든지 하는 행동을 하기에 앞서 성진의 귓가로 반갑지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똑, 똑….
소리의 추적을 따라 싱크대를 돌아본 성진은 표정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완전히 잠겨있지 않은 수도꼭지 밑으로 물방울은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밑에는 음식물 찌꺼기가 붙어있는 식기들이 어지럽게 쌓여서 그 물들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방 안을 한번 휘돌아본 성진의 눈엔 징글징글한 선영의 자취들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아무렇게나 구겨 던져진 옷들, 수건들, 빈 젤리통, 기타 과자 쓰레기, 티슈 조각 등등…. 평소 보아왔던 그녀의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먼 정돈의 버릇은 이 순간에 성진의 쌓아올려진 짜증에 불씨를 당기는 화근이 되고 있었다.
혜진과 함께하던 한창 업된 기분이 산산이 조각나버리는 것을 느끼며 성진은 침대 사이드레일을 발로 걷어찼다. 퍼억-!
“야, 은선영.”
대답 없이 완전히 늘어져있는 선영. 성진은 신경질적으로 침대를 한번 더 걷어찼다.
“일어나보라고, 이 자식아!”
그제서야 졸린 눈을 비비며 서서히 상체를 일으키는 선영. 얼마나 곤히 자고 있었는지 그녀는 한동안 자신이 꿈 속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못하고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침대 시트와 성진을 번갈아 바라보면 선영은 피곤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 왔어, 성진아?”
하지만 성진은 그녀의 부스스한 모습에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새삼스레 자신의 침대를 선영이 독차지하고 있는 현실에 밀려오는 짜증을 감당하지 못했다. 성진이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정적 속에서 몇 초를 노려보고 있자 선영도 그제서야 성진의 기분을 짐작하곤 미소를 지웠다.
“왜… 왜 그래, 무섭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너 뭐하고 다니는 녀석이냐?”
나지막하게 억누른 목소리.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무언가의 전조를 나타내고 있었다. 선영은 그의 물음 속에 담긴 의미를 얼른 짐작하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으로 침대에 주저앉은 채 올려다볼 뿐이었다.
“뭐… 라니?”
“바깥에 기자들이 서성거릴 정도로 뭔 짓을 벌이고 다니고 있냐고?”
“뭐? 기자들이? 여… 여긴 어떻게 알고…….”
성진은 차라리 그녀가 ‘기자들이 왜 왔지?’라고 대답하길 바랐다. 하지만 ‘어떻게 알고’라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행각을 이미 인정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 증언이나 다름없었기에 머릿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성진은 한 손을 허리에 얹고 경멸스런 눈동자로 선영을 내려다보았다.
“그 잘나게 화장을 하고 어딜 쏘다니나 했더니, ‘카잔 전쟁’ 대회에 가서 연예인 기분이라도 즐겨봤나 보군? 남자들 가득한 동네에 가서 공주님 대접이라도 받아보고 싶었나? 남정네들 시선을 한몸에 받으니 어때? 내가 누누이 말했던 튀어보이지 말라는 네 입지를 완전히 무시한 채…… 아,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군.”
결국 그동안 쌓였던 현재의 선영에 대한 성진의 반감이 한순간에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너 혼자 밖에서 뭘 하며 즐기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지만 말야. 여긴 네 집이 아니라 내 집이라는 걸 좀 자각해줬으면 좋겠는데. 내 집에 민폐 끼치는 누구 때문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 기웃거리고 주시를 하고 있다면,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주인이라도 조금 정신이 돌아버리지 않을까?”
“아… 저…… 그…… 성진아…….”
부정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선영을 보자 성진은 더욱 더 감정의 불길을 주체하지 못했다. 눈앞의 이 녀석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감당해야 했던 것들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불합리하군.
“다리 어때? 다 나았지? 기억은 어때?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까지 돌아왔지? 자, 이제 네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혼자 생활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죽이고 남한테 빌붙어 산다는 것을 입증한다 볼 수 있지 않나?”
이렇게 말하는 쪽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렇군.
“청소, 설거지, 빨래, 쓰레기 정돈 등등. 이것들에 대해 너는 아무런 감사조차도 표현하지 않았지. 나는 아주 당연하게 그래왔고 너도 당연하게 생각했어. 하지만 왜 그래야 하지?”
생각할수록 억울하다. 내가 왜?
“내가 니 부모라도 한숨이 나올 텐데, 내가 왜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냐고?”
이제 결정적인 말로 이 녀석의 정신을 좀 차리게 해야겠다.
“해묵은 병원비 얘기는 집어치워주지. 이제 그만 내 집에서 나가라.”
……잠깐.
“넌 지금 예전에 내 마음을 흔들던 본래의 선영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와는 아무 상관 없어. 꺼져줘.”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이왕 부술 거면 산산이. 그런 심경이었을까. 성진은 그렇게 외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지독한 골치덩이를 맡고 있는 이 가슴을 털어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왜 그렇게 잔인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있는지 또한 머릿속 한 구석에서 맴돌고 있었다. 김성진. 너 지금 대체 무슨 말을… 뱉어내고 있는 거야?
노이로제라도 걸린 사람처럼 한바탕 토해낸 성진의 얼굴은 벌개져 있었다. 감정의 기복. 그리고 그것을 수습하는 숨고르기. 침묵. 정적. 갖가지 생각들이 성진의 머릿속을 휘몰아쳤고, 하지만 번복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한참이나 숨을 고르는 성진.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 초? 수십 초? 끊임없이 도는 초시계.
얼마 후, 선영은 웃었다. 성진은 그녀가 웃는 것에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에 성진은 심적 동요가 일었다. 성진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말을…… 그러나 번복할 수는 없다. 그럴 자신도 없었거니와, 이것이 본심이었다는 듯 감정적으로 표출해버렸으니 되돌릴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그리고…….
선영은 이젠 아예 킥킥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눈물은 점차적으로 숙여지는 그녀의 고개에 따라 한 방울, 두 방울씩 주저앉은 자신의 다리 밑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성진이 뭔가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 위로만 시선을 주고 있을 무렵, 선영은 입을 꽉 다물고 그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엄청난 충격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비쳐졌으나 입만은 끝끝내 미소를 지으려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를 쥐어짜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후회.
성진은 급속도로 후회가 밀려옴을 자각했다. 차라리 평소처럼 그녀가 왜 이러냐고 짜증을 냈다면. 이런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선영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버린 성진은 자신에게 덮쳐오는 후회와 죄책감에 사로잡혀야 했다.
선영은 눈물을 참으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물론 참고 있다는 건 그녀의 노력에 지나지 않았고, 눈물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서 그녀의 표정은 매우 언벨런스한 조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미안해. 성진아. 내가… 좀 지나쳤어. 아니, 많이 지나쳤어…. 내가 너무 너한테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급기야 횡설수설하며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는 선영. 지나친 건 내 쪽이라고 이 타이밍에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가슴 속으로만 맴도는 성진. 다시 침묵. 왜 이렇게 대화가 끊기는 걸까. 그러나 아주 끊기지는 않는 질긴 대립.
얼마 후, 선영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다시 올려다보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자립할 거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야. 나도…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신세를 질게. 정말 미안해, 성진아. 앞으로 네게 최대한 피해가 안 가도록 노력해볼게. 청소고 빨래고, 뭐든 어떻게든 해볼게. 그러니…….”
성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 말도 않는 게 이 상황에 그나마 최선이라 생각한 걸까.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몸을 돌리곤 허리를 숙여 방 안 곳곳에 널브러진 선영의 옷들을 하나 둘 주워들었다. 사실상 그것은 침대 위에 주저앉아있는 선영의 입장에선 전혀 위안이 되지 않을 행동이긴 했다. 그저 늘상 자신에게 불친절하던 선영에게 불친절한 행동으로 답하는 몸짓과도 같았다.
머리를 늘어뜨리고 표정을 감추어 있는 침대 위의 선영을 뒤로한 채 성진은 그녀의 흰 셔츠를 하나 들어서 이리저리 관찰하는 동작을 취했다. 물론 정말로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입 밖으로 꺼낼 말을 조합해보는 머릿속의 사고 작업에 따른 무의식적인 행위.
이윽고 성진은 건조하게 지나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다음 주에는 며칠 동안 너 혼자 여기서 지내야 할 거야. 밥이랑 반찬은 다 해놓고 갈 테니 넌 차려먹기만 하면 돼. 무슨 일 있으면 핸드폰으로 연락하는 건 상관없는데, 급한 일 아니면 그냥 좀 스스로 해결해라.”
“…….”
‘어디 가?’ 등의 물음은 등 뒤로 들려오지 않았다. 성진은 감정적으로 내뱉었던 말들에 대한 후회감이 다시금 몰려왔지만 곧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여행을 가기로 했어. 혜진이랑 말야. 나도 좀 숨통 트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 그러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집에 있기나 해. 방학 동안 게임만 할 생각 말고 자기개발이나 좀 해보던가.”
혜진이 누구냐고 물어볼 법도 하지만 여전히 선영은 아무 말도 없었다. 성진은 반 의도적인 말에도 묵묵부답인 등 뒤의 그녀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런 자신에게 매우 언짢아졌다. 그는 속이 다시 틀어지는 것을 느끼며 남은 빨래들을 주워모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빨래통에다 던져 넣었다.
방 안의 쓰레기들까지 모두 주워서 버린 그는 청소기를 한번 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성진은 그제서야 선영을 다시 슬쩍 돌아보았다. 선영은 여전히 침대 위에 머리를 늘어뜨린 채 주저앉아있었다. 성진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울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넋 나간 듯한 모습에 가까웠고, 그것은 성진에게 있어 퍽 생소하게 다가왔다. 처음 보는 듯하다. 그녀가 깨어있으면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 말도 행동도 않는 것은.
“…….”
한동안 그녀를 돌아보던 성진은 결국 자신도 침묵을 지킨 채 방 구석에 있는 청소기를 집으러 걸어갔다.
대학로는 언제나 붐빈다. 평일은 등하교나 식사약속으로 붐비고 주말은 주말대로 데이트나 술약속 등으로 사람이 끊일 날이 없다. 즐길 문화거리가 집중돼있기 때문인데, 그나마 한산할 때는 평일의 오전 정도가 된다. 아침도 점심도 아닌 애매한 오전 시간. 그 시간 한 우동집에는 미선이 혼자 앉아 한 손을 턱에 괴고 다른 쪽 손으로 무언가를 들어올려 바라보고 있었다.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그녀의 콧노래.
“음, 으음~ 음♪”
겨울방학에 들어선 시기라 주변은 더욱 한산하기 그지없었고, 가게 내부는 물론 바깥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뜸하다. 그러나 미선은 사람이 많든 적든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평온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약간의 미소마저 띠어져 있는. 그녀 앞에는 새우튀김우동이 놓여져있지만 미선은 우동의 맛보다는 자신의 손에 들린 그 무언가에 더 관심이 쏠려있는 듯하다.
“사랑스러운 성진 오빠….”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미선의 시선 높이에서 흔들거리는, 미선의 손에 들려진 그 무언가는 머리끈이었다. 늘상 포니테일 스타일로 다니던 그녀는 요즘 들어 자연스럽게 풀어헤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한 그녀의 머리칼은 묶여있든 풀려있든 나름대로의 귀여운 스타일로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미선은 어째서인지 현재의 자신 모습에 조금 쓸쓸함을 담고 있는 듯하다.
“아니, 사랑하고픈 성진 선배. 그렇지만…….”
미선은 손에 들렸던 조그만 검은색 머리끈을 응시하다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검지손가락에 걸고는 빙글빙글 돌렸다. 그녀의 조그만 검지손가락에 돌아가던, 예전이라면 늘상 머리를 묶고 있던 그것은 잠시 후, 조금 크게 선회한 그녀의 팔에 의해 탁자 옆 휴지통으로 던져졌다.
“내게는…….”
어쩐지 조금 크게 오버액션을 취하면 비극적 드라마에 어울릴듯한 표정과 목소리가 나올 듯하다. 그렇게 은근하고 절절함을 표현하던 미선은 우동그릇을 거의 다 비우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4500원입니다.”
카운터 앞에서 카드를 건네던 미선은 계산대를 두드리고 있는 주인 아주머니를 보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아주머니. 제가 지금 기쁜 것 같게요, 슬픈 것 같게요?”
꽤나 생뚱맞은 질문이었지만 대학가 문화예술 거리의 가게답게 아주머니는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글쎄. 표정만으로 보기에 학생은… 어쩐지 두 쪽 다 아닌 것 같은데?”
“과연! 비슷해요. 하지만 조금 달라요. 굳이 말하자면….”
“으음?”
미선은 시선을 살짝 허공으로 던져보이며 의미심장한 대답을 내놓았다.
“두 쪽이 다 섞여있다고나 할까요.”
“사랑과 실연이니? 어쩐지 좋아하는 사람을 보냄으로써 아름다운 자신의 이타적인 사랑 실현을 내포한 듯하구나.”
미선은 입을 오므리며 놀랐다는 표정으로 아주머니에게서 카드를 다시 건네받았다.
“현학적이시네요! 그런데 어쩌죠? 이번 것도 조금… 아니, 보기에 따라선 꽤 많이 빗나갔어요. 저는, 음…… 아뇨. 여기까지 할게요.”
주인 아주머니가 의아하다는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 미선은 생긋 하고 웃어보이고는 카드를 핸드백 안에 넣고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는 총총걸음으로 우동집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핸드백을 쥔 한 손을 허리 뒤편에 갖다 댄 채로. 그녀의 코트와 반청바지 밑으로 뻗어나온 커피색 스타킹의 다리가 따스한 겨울 햇살을 맞으며 은은한 음영을 만든다.
잿빛 유리문을 통해 그러한 미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가게 내부의 몇 없는 손님들 중 한 명이 있었다. 두꺼운 사각 안경을 쓰고 뺨의 여드름이 누가 지적하지 않더라도 콤플렉스로 여기고 있는 듯한 자신감없는 표정의 남자였다. 그는 우동그릇 옆의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던 자세 그대로 한참을 미선이 나간 방향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무스를 잔뜩 발라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낸 스타일은 그의 딴에는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대다수의 평은 ‘우스꽝스럽다’ 였다.(물론 본인은 고집스럽게 바꾸지 않는다.)
“뭘 그리 뚫어져라 보고 있어, 신형준?”
“어? 어… 아무것도 아냐.”
“방금 나간 저 여자 보고 있던 거냐?”
형준은 자신을 부른 탁자 맞은편 남자의 물음엔 대답을 않은 채 노트북만 바라보는 척했다. 물론 그것은 너무도 부자연스러워서 붉어져있는 그의 얼굴이 답변을 대신하는 듯하다. 그런 그를 재미있다는 듯 쓱 훑어본 탁자 맞은편의 남자는 우동을 입 안에 넣은 채 우물거리면서 픽하고 웃었다.
“주제를 알지 그래? 니 면상을 보고 어느 여자가 사귀어달라고 하겠어? 그러니 의미 없는 탐색은 그만둬.”
“뭐… 뭐야, 이기식 너… 말이 너무…….”
“심하다고? 큭큭. 다 널 위해 말하는 거야, 임마. 괜히 입에 발린 소리 해봤자 같잖은 자존감이 생겨 들이대고, 그래서 여자한테 더 큰 상처를 받게 되는 너 같은 타입을 모를 줄 알아? 그러니 미리 예방차원으로 말해주는 거지.”
말을 끝맺고 나서 이기식이라 불린 남자는 고맙지? 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진 않았다. 그럴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한 듯 오만한 동작으로 한 팔을 의자 팔걸이에 걸친 채, 방금 형준이 응시하던 문 쪽을 돌아볼 뿐이었다. 형준은 그런 그를 보며 부들부들 떨었지만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반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밝은 베이지색 머리칼을 길게 기른 이기식은 형준과는 대조적으로 군더더기 하나 없는 멋들어진 이목구비에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눈가를 살짝 가린 머리칼은 그의 카리스마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다. 체구는 비슷하지만 겨울옷에 가려져 있을지언정 한눈에 봐도 기식 쪽이 튼튼해 뵈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옷의 코디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절대 어울릴 수 없는 극과 극이다시피 한 이 두 남대생은 어째선지 동업자(?)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형준의 앞에 놓인 노트북에는 일련의 정보들이 보여지는 웹페이지가 여러 개 띄워져 있었다. 이윽고, 기식은 입구 쪽에서 고개를 돌린 채 젓가락으로 우동을 휘휘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귀여운 애였지?”
“…….”
“하지만 외모에 너무 혹하지 마라. 여자는 알 수 없는 존재다. 아무리 이쁘고 귀여워 보여도 이면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 경험을 갖고 있는 게 또 여자이기도 하니까. 하긴, 여자와 키스조차도 한번 못 가져본 네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긴 하다만.”
형준은 또다시 울컥하여 기식을 노려보았지만 기식은 밝은 머리칼 사이로 여유롭게 시선을 마주칠 뿐이었다. 어디 밴드부라도 활동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멋들어지면서도 슬림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기식은 형준으로 하여금 반박할 거리를 또다시 없애버리고 있었다. 형준은 입을 다문 채 한숨을 쉬고는 노트북을 돌려 자신이 찾은 정보를 기식에게 보여주었다. 기식은 의자에 등을 편하게 기댄 자세 그대로 눈을 가늘게 뜨며 형준이 찾은 정보에 집중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중얼거리는 그에게 보충설명이라도 하듯 형준은 우동조각을 우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상스럴 정도로 친척이나 가족관계는 물론 주변 인맥도 없는 여자야. 정보를 찾기 굉장히 힘들지만… 난 열심히 찾았어. 그… 런데 이 신상 정보가 왜 필요하지? 요… 요즘 ‘카잔 전쟁’이란 게임의 각종 대회에서 떠오르는 유명 인사긴 해도….”
말까지 이따금 더듬거리는 형준의 옆에 놓인 노트북은 화면이 기식을 향한 채, 각종 신상정보와 사진 밑에 ‘은선영’이란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일개 검색 따위로 찾을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그리고 기식은 겉모습은 꼴불견이지만 해커 실력 하나는 인정할만한 녀석이라고 미소를 지으며 형준을 슬쩍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다시 시선을 모니터로 향한 채로 나지막하게 그를 불렀다.
“신형준.”
“…왜?”
“너와 난 친구라 할 수도 없는 사이긴 하지만 말야. 전혀 다른 과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특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공통점으로 작용하지. 그러고 보니 세간에 알려지기 꺼리는 암적 특색이라는 점도 동일하군. 그 증거로 너는 컴퓨터 공학부의 오타쿠답게 전산망의 감시를 피해가며 이런 정보까지 빼돌릴 정도로 뛰어난 해커이기도 하고, 나는…….”
기식은 히죽 웃으며 턱으로 그보고 말해보라고 했다. 형준은 덜덜 떠는 듯한 입으로 어눌한 음성을 내었다.
“필이 꽂힌 여자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다.”
“빙고.”
기식은 칭찬이라도 하듯 휘파람을 한번 가볍게 불고는 노트북을 자신 쪽으로 쓱 끌어당겼다. 꽤나 비싼 노트북이었기에 형준은 그의 거친 손놀림에 움찔했지만 기식은 상관 않고 모니터의 선영 사진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사진 부분을 살살 어루만져본다.
“그냥 한낱 여자 프로게이머… 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거라면 난 게임에 별 관심도 없으니까 신경이 안 갔겠지만, 이 녀석은 좀 특별하지. 내가 한번쯤 자보려고 꿈꾸던 녀석이기도 했으니까.”
“뭐? 그게 무슨… 아는 사이야?”
“같은 고등학교 후배니까. 뭐, 이런저런 썸씽이 있기도 했고.”
형준은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기식은 혀를 살짝 핥기만 했을 뿐 별다른 말 없이 없었다. 그리고는 우동을 마저 삼키는 형준을 다시 지그시 응시하다 한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쓸데없는 데까지 알 필요는 없고, 내가 이 여자에게 관심이 동한다는 것 정도만 인지하고 있어라. 어차피 너도 네 목적이 있어서 나와 손을 잡은 것 아니었나?”
“그… 그렇지. 참 나도… 너랑 어울릴 생각이 없지만… 당장 현금이 급하니….”
“그 노트북, 할부금 다 갚으려면 몇 번 더 손을 잡아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물론 다음에 또 내가 손을 잡아주리란 보장은 없지만.”
‘그러게 뭐하러 쥐뿔도 없는 녀석이 비싼 노트북은 지르고 난리냐’라는 시선으로 다시금 기식은 쿡쿡 웃었고, 형준은 울컥하여 ‘부잣집 자제면 다야? 네가 컴퓨터 공학부의 혼을 아냐’라는 시선으로 맞받아쳤다. 물론 그것들은 모두 입 밖으로 직접적으로 내뱉지는 않은 채 신경전에서 끝났을 뿐이다. 이렇든저렇든 일을 진행하기도 전에 쓸데없는 소모전은 말 그대로 쓸데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 법.
“목적이 잘 완수되면 처음 약속했던 금액 나머지 반을 바로 입금해주도록 하지. 자, 그럼 이 은선영이라는 녀석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볼까. 으음? 포림대? 예상대로 대학에 입학하긴 했었군. 디지털 출판 학과? 녀석다운 학과구만. 벌써 3학년이라면 조기입학이라 봐도 되겠군. 하긴, 원래부터 이 녀석 머리가 비상하긴 했지.”
형준은 우동 국물을 후루룩 들이키고는 기식이 집중하는 데 방해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그릇을 내려놓았다. 이어서 형준은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고등학교 때 관심 가는 여후배였다면 졸업 후의 행로도 이미 알고 있을 법하지 않나? 왜 이제 와서 생소하게 접하는 것마냥 말하지? 그리고 형준은 곧 자신과는 상관 없는 부분이라 생각하며, 늘상 보편적으로 있는 ‘안좋은 관계로 헤어지고 신경 끊은 사이’ 정도로 넘겨짚었다. 그리고 사실 그 부분을 길게 고찰해볼 틈도 없었다.
기식은 방금 전보다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불의의 사고로 병원에 1개월간 입원, 통원치료 2개월, 기억상실 증세를 보임, 일상 생활에는 지장이 없음, 양친의 부재로 인해 신원 확실한 임시 보호자가 현재 맡고 있는 실정…?”
그리고 기식은 입맛을 다셨다. 그것은 연민의 감정에서 나온 버릇이 아니었다. 형준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매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 기식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식은 ‘기억상실’ 부분에다 손가락을 갖다 댄 채 선을 긋는 시늉을 해보이며 또다시 중얼거렸다.
“기억상실이 어디서 어디까지, 혹은 어떤 형식으로 되어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았으면 좋겠는데….”
“말해두지만 벼… 병원 자료까지 빼돌리는 건 불가능해. 그런 건 전문가도 힘들 뿐더러 쇠고랑 차기에 직결되는 길일 테니까.”
곁눈으로 흘끗 형준을 바라본 기식은 기대도 안한다는 한숨을 픽하고 쉬고는 손가락으로 키보드 밑 터치패드를 만지작거렸다. 모니터의 마우스 커서는 그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충실히 반응하며 다른 정보들을 뒤적거리게 해주었다. 그리고는 만족할만한 정보를 찾게 되자 다시금 히죽 하고 미소를 띠었다.
“녀석이 지내는 거주지까지 나오는군. 신뢰성에 의심이 가긴 하지만… 도대체 어떤 녀석이 이런 정보를 각종 사이트에다 교묘하게 기재해놓은 거야? 아무리 봐도 의도적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그… 그건 나도 좀 흥미로웠어. IP주소로 역추적을 한 후 신원을 조회해보니 ‘메지즈’ 구단의 프로게이머들 중 하나인 것 같더라고. 가능성이 높진 않지만 아… 아마 ‘홍준석’이라는 이름의 남자일 거야.”
내용과는 달리 형준의 목소리에는 거의 확실하다는 자신감이 내포되어 있었고, 기식은 그런 점에 꽤 만족감을 느꼈다. 형준은 기회는 이때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해킹 실력을 과시하는 ‘역추적’ 과정을 디테일하게 나열해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기식은 그 모든 내용을 한 귀로 흘려버렸다. 이미 그런 기식의 태도에 익숙해진 형준은 얼른 말을 끊고는 자랑하고픈 감정을 억누르는 표정으로, 짐짓 기식이 관심갈 만한 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어쩔 거야? 이 홍준석이란 녀석이 무슨 목적으로 선영의 신상 정보를 뿌려대는진 몰라도… 우… 우리의 목적에 위해가 되진 않을까?”
기식은 잠시 생각에 빠졌지만 곧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한 채 의자에서 등을 조금 떼었다.
“별 문제는 없을 것 같군. 한동안 찌질하게 놀도록 내버려둬. 그보다 선영 이 녀석의 기억상실 부분을 알아내는 게 더 중요하겠군.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만나보는 거지만 흐음…. 상황의 여하에 따라 방어기제를 확고히 다지고 있을지도 모르니, 일련의 테스트 정도만 실행해볼까.”
그리고 기식은 한 손으로 노트북을 형준에게 휘릭 돌려놓았다. 형준이 다시 노트북의 안위를 걱정하는 흠칫 놀라는 표정이 되었지만 기식은 거들떠도 안 보고 남은 우동 가닥을 마저 빨아들이며 명령하듯 말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펼쳐질 ‘카잔 전쟁’ 대회를 몇 개 검색해봐. 그리고 참가자의 명단을 뽑아내서 거기서 은선영이란 이름이 올라가있는지도 찾아보고.”
형준은 잠시 반항적인 눈빛으로 기식을 쏘아보았으나 그건 정말로 잠시였을 뿐이다. 그는 늘상 그랬듯 곧 기식의 카리스마적인 외모와 더불어 현금이 아쉬운 자신의 처지에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다. 그리곤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