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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고사 기간 마지막 주의 대학 캠퍼스는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끌시끌했다. 낮게 깔린 구름들도 홀가분한 청춘의 들뜬 마음을 억누르지는 못하는 듯하다. 성진은 같은 과에서 적당히 친분 있는 세 명의 남자와 함께 학생회관 앞에서 음료수캔을 들이키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개운함 반 허전함 반이 섞인 표정들이었다.
“아하… 이로써 2학년도 다 지나갔군. 내년부턴 3학년인가.”
“대학생의 꽃피는 청춘은 1, 2학년 때 집중되어있다는 말이 있지. 3, 4학년 때는 슬슬 진로 문제를 고민하고 졸업 준비에 신경 써야 하기에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나이가 들어차는 점도 있고.”
“에이, 시끄러워. 난 3학년 때도 이 기분을 그대로 이어갈 거야. 젠장할… 뭐 하나 이룬 게 아직 하나도 없어. 대학생만 되면 뭔가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풋풋하고 활기찬 학창시절을 보낼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단 말야. 갭이 너무 커, 갭이….”
성진은 그런 그들의 말에 동조하듯 웃으며 한 손을 코트주머니에 넣은 채 음료수캔을 들이켰다. 성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그들을 둘러보며 근심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야, 그런데 너희들은… 시험 잘 봤냐?”
“말도 마라, 김성진. 백지 안 내려고 별 잡지식 다 끌어모아서 서술했다니깐. 교수가 보고 궤변이라고 생각만 안 하면 그야말로 신이 가호하신 거다.”
“야, 성진. 그래도 넌 과제 발표 때도 대표로 주관해서 한 데다, 교수 호감을 살 정도로 요점을 정확히 짚어냈잖아. 시험 좀 못봐도 학점에 문제는 없을 텐데?”
성진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음료수캔을 그들에게 흔들어보였다. 흡사 손바닥으로 말을 말라는 제스처처럼.
“모르는 소리 마, 임마. 그렇기 때문에 교수가 더 내 답안지는 주의깊게 볼 거라고. 그리고 그때와 필적할만한 답안이 아닐 경우 과제를 대행해서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사게 되었어. 어찌어찌 써서 내긴 했지만 제대로 됐는지 모르겠다.”
성진의 얘기를 듣던 나머지 세 사람도 그 심정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료수캔을 쥐고 있는 그 네 명의 남자는 갑자기 침침한 분위기에 휩싸여서 제각기 땅, 하늘, 혹은 먼 산을 바라보는 시늉으로 한숨만 폭폭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따라서 한숨을 내쉬는 외면과는 달리 성진의 내면에서는 꽤 상쾌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서술형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학 시험 특성상 정답이란 게 뭉뚱그려진 것처럼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아무리 열심히 적어 낸다 해도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진은 거의 완벽하게 답안을 적어서 내었다. 아마 큰 이변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고득점은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성진은 사실상 시험공부를 일찍이 다 마쳐놓은 상태였다. 얼마 전 선영의 문제로 검토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으나 용어 몇 개의 부재만 있을 뿐 전체적인 맥락은 거의 다 머릿속에 있었다. 성진은 혜진과의 시험공부 자체가 데이트라 생각하며 틈만 나면 도서관에 자리를 맡아놓고 그녀와 공부했다. 매우 당연하게도 ‘오빠의 시간을 쓸데없이 소비시키지 않는다’에 ‘자신도 시험공부에 몰두할 수 있다’는 조건이 충족된 혜진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둘은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책상에 엎드려 졸거나 이어폰으로 나누어서 음악 듣기, 휴게실에서 음료수 마시며 잡담, 노트북으로 웹서핑하며 정보 교환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야말로 대학생의 바람직한 연애 방식까지 모조리 수렴해버린 것이다. 성진은 그 기억을 떠올리며 스스로도 이 세 남자 앞에서 너무 정색한 연기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찝찝함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말야. 어쨌거나 시험도 끝났으니 다음주 종강파티 전에 오늘 간단히라도, 우리끼리 뭐 좀 한잔하러 가지 않을래?”
“좋지. 요 앞에 먹자골목에 새로 생긴 고기부페집, 맛있다고 하더라. 거기도 한번 가줘야지.”
“야, 김성진. 너도 갈거지?”
성진은 음료수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이라도 하듯 캔을 이리저리 흔들어보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들의 우정’이란 화학반응에 동조하기 좀 어렵겠다는 뉘앙스를 띠고 있었다. 세 사람은 의아한 눈으로 대답 없는 성진을 바라보았고, 그들 중 눈치 빠른 한 남자가 옆사람 옆구리를 툭 찌르며 말했다.
“야, 성진이는 걔가 있잖아. 우리랑 같이 가겠어?”
“누가 있다고? 누가… 앗!”
“이그, 이 멍청한 녀석아. 너도 줄곧 보았으면서 그렇게 눈치가 없냐?”
약간 맹해 보이는 남자가 대놓고 질문을 하자 옆의 다른 남자가 그의 머리를 한대 쥐어박으면서 면박을 준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정답을 발표하기라도 하듯 학생회관 계단을 타닥타닥 밟으며 올라오는 화사한 여대생. 성진은 빈 음료수캔을 옆 휴지통에 던지듯 버리고는 손바닥을 펴서 들어 보인다. 그의 미소와 함께 혜진도 따라서 웃었다.
검은색 티셔츠에 벨트로 조인 살색의 롱코트, 그 밑으로 검은 레깅스에 굽 높은 롱부츠를 신은 혜진의 모습은 그렇게 튀지 않아 보이면서도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늘 여러 종류의 코디로 신입생의 풋풋함과 성숙미를 간직한 상큼발랄한 면모를 발산하고 다녔다. 특히 성진과 사귀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더. 혜진은 언덕 위에 있는 학생회관 앞에 도착하자 성진 앞에 선 세 남자에게 살폿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그리고는 윤기나는 머리칼을 휘날리며 자신의 애인 팔을 꼭 껴안는다.
“오빠, 시험 잘 봤어?”
“뭐 그럭저럭. 야, 근데 앞에 다른 애들 다 보잖아.”
“뭐 어때, 팔짱 정도는. 그보다 오빠, 오늘 가기로 한 데 있잖아.”
“음, 어… 그렇지. 흠, 그런고로 난 이만 가볼게, 얘들아.”
성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미안하다는 뜻을 밝혔고, 세 사람은 학기 초에 비해 상당히 적극적이 된 혜진의 모습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다른 과였기에 그다지 많은 접점을 보인 건 아니지만 엠티나 연합 프로젝트, 동아리 활동 등에서 그다지 존재감 없던 - 혹은 내숭으로 치장된 - 그녀 아니었던가. 언제 이렇게 바뀌고, 예뻐졌지? 그리고 세 남자 중 한 명이 궁금증을 떠올리고는 그들이 떠나기 전 재빨리 물어보았다.
“어디 가는데?”
“어. 시험 끝나고 혜진이가 간만에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해서 말야. 코미? 코미… 그 뭐냐, 만화.”
“코믹월드, 오빠!”
“어, 맞다. 나도 왠지 흥미가 동해져서 말야. 그럼… 다음 주 종강파티 때 보자고.”
성진은 씩 웃으며 손을 들어 세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고했고, 혜진과 함께 학생회관 언덕 계단을 내려갔다. 왠지 총총거리는 발걸음을 내포한 듯하다. 혜진은 아주 좋아죽겠다는 표정으로 성진의 팔을 꼭 껴안고 있었고 성진은 난처함 반 뿌듯함 반으로 고개를 조금 돌려 캠퍼스의 전경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대학 정문 쪽을 향해 걸어나가는 한 쌍의 연인.
문득 성진의 눈에 커다란 먼지 같은 게 하늘거리며 떨어져내리는 게 보인다.
그것은 먼지가 아니었다. 성진은 기류로 인해 위태롭게 흔들리며 떨어지는 하얀 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발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혜진은 ‘와, 첫눈이다!’라고 소리치지는 않았다. 그녀는 성진과 함께 첫눈이 내리는 캠퍼스를 걷고 있다는 행복감을 조용히 음미하며 그의 팔을 더욱 꼬옥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사진이라도 찍어두면 어울릴 듯한 그 연인 곁으로 더욱 많은 눈송이가 하늘거리며 떨어지기 시작했고 캠퍼스는 다른 의미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로망스.
“역시 성진 선배야. 혜진이랑 너무 잘 어울린다니까.”
신세 한탄이라도 하듯 떨어져내리는 눈송이와 멀어져가는 성진, 혜진의 뒷모습을 별 말 없이 지켜보던 세 남자. 그들은 문득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자신들 뒤에서 어깨 너머로 그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같이 응시하던 한 여자를 볼 수 있었다.
후드티에 점퍼를 걸친 캐주얼한 스타일의 그녀는 평균적으로 조금 작은 키였고, 그렇기에 더 귀여움을 과시할 수 있는 장점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이름을 세 남자는 얼른 떠올릴 수 없었다. 같은 학년이 아닌, 후배여서 그런 점도 있었으나 사실상 다른 면모도 많은 이유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남자 중 한 명이 겨우 기억 속에서 이름을 끄집어올린 듯 말을 건넸다.
“어, 어… 채미선? 너 언제부터 우리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어?”
“저요? 조금 전부터요.”
여전히 성진과 혜진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으며 건성으로 대답하는 그녀. 남자 중 한 명이 미선의 머리칼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 머리스타일 바꿨냐? 몰라볼 뻔했다야. 항상 뒤로 묶어다니는 포니테일 스타일이었던 것 같은데.”
“히힛, 어때요. 길지 않지만 이것도 나름 괜찮지 않나요?”
“그래. 자연스럽게 풀어내린 머리도 꽤 어울린다.”
머리칼에 두 손을 갖다대는 시늉을 하며 생글생글 웃는 미선의 모습에 남자들도 마음속의 어둠을 지워버리며 따라서 웃었다. 하지만 그들의 천진스럽기까지 한 미소는 얼마 가지 못했다. 미선은 눈 위에 손바닥을 올리고는 저 멀리 작아져가는 성진과 혜진을 다시 바라보다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웅~. 근데 성진 선배가 저렇게 가버렸으니, 오빠들 심심해서 어떡할까나…. 어때요? 같이 놀만한 누구 없으면 저라도?”
“뭐…? 어? 미선이 네가…?”
성진을 선배라고 지칭하면서 자신들한테는 스스럼없이 오빠라고 말하는 미선이의 붙임성에 대한 위화감을 채 깨닫기도 전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간신이 어물거리는 대답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것도 잠시. 이제는 흩날리는 많은 눈송이들 사이에서, 미선은 그녀 특유의 귀여운 동작으로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리곤 생긋 웃으며 말했다.
“오빠들 저랑 4P할래요? 한 명이 좆을 제 입에 물리고, 두 명이 각각 제 보지랑 항문에 좆을 쑤셔 넣어주면 되는 거에요. 다들 호흡을 맞춰서 거의 동시에 사정하면 저는 아마 꽤 짜릿한 감각에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될 걸요?”
아직 조금 남아있는 누군가의 음료수캔이 바닥에 툭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게 누구 것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첫눈이라고 외치는 누군가의 환호성이 귓가에 아련하게 들려올 정도로 휩싸이는 침묵 속에서, 그것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잠시 후 뒷짐을 지곤 몸을 빙글 돌려 걸어갔다.
“농담이에요, 농담♪ 오빠들, 내년에도 잘 부탁해요. 다들 좋은 분들이라 다행이야.”
세상에는 농담이라도 어느 정도 암묵적인 제한선이 정해져있기 마련이고, 그래서 세 남자는 ‘완벽하게 깨진 농담 제한선’에 할말을 잊어버렸다. 그런 그들의 황당한 시선을 등 뒤로 받으며 미선은 발랄한 걸음걸이로 학생회관 계단을 내려갔다. 바람이 조금 불었고 그에 따라 옆으로 휘날리는 눈송이들을 감상하며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채미선. 그녀의 미소와 함께 조금 가늘게 뜬 눈 속의 눈동자는 정체 모를 은밀함이 빛나고 있었다.
샤워실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성진의 귓가를 즐겁게 간지럽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성진은 커다란 침대 위에 두 손을 깍지 껴 뒷머리를 받쳐 누워서 물소리를 감상했다. 혜진이 구석구석 씻고 있을 것을 예상하며 성진은 시선을 샤워실이 있는 쪽으로 돌리었다. 그리고 곧 그의 시선은 방 한구석에 놓여진 커다란 종이가방 몇 개로 옮겨졌다.
쇼핑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코믹월드에서 혜진이 구입한 각종 물품들이었다. 여러 가지 만화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종이가방 안에는 동인지, 엔솔로지, 브로마이드, 피규어, 게임CD를 포함해서 책갈피, 핸드폰줄, 열쇠고리, 스티커 등등 각종 팬시가 빼곡하게 들어차있었다. 코믹월드를 돌아보는 것은 꽤 지치는 일이었다. 수년 전의 캐릭터가 아직도 회지로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 혜진은 감동하여 그야말로 눈에 띄는 대로 마구 구입해대었다.
차라리 일반 쇼핑이면 이해라도 갈 것이다. 성진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캐릭터 상품들에 머리 한 구석으로 정신적 공황을 일으키면서도 혜진이 즐거워하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TV나 인터넷 등에서 보던 코스프레를 실제로 보는 것도 나름 신선하긴 했다. 개중에는 꽤나 고퀄리티의 코스프레도 있어 성진은 본 캐릭터를 전혀 모르면서도 기념 삼아 폰카로 촬영해두기도 했다. 서브컬쳐 세계가 이렇게 활성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게임을 하거나 애니를 가끔씩 보는 성진에게 있어서도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성진은 또하나의 사실에 약간의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성진은 연애경험을 쌓아가던 과거에 여자의 방을 여러 번 드나든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혜진의 방의 경우에는 몇 부분에서 조금 달랐다. 일단 성진은 처음 혜진과 이곳을 들어올 때 높다란 건물의 9층이라는 점에서 미처 얘기를 듣지 못했던 오피스텔이라는 점을 추측했다. 그리고 원룸형이긴 하지만 상당히 넓은 공간에 고급 인테리어로 둘러싸인 내부 구조를 보게 되었을 땐 혜진의 얼굴을 한번 더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너 이런 데에 살았나? 물론 학교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이긴 했지만 일반 대학생이 이런 고급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데스크탑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음악의 선율을 느끼며 성진은 ‘일반적인 여자의 방과 다른 부분’을 하나 더 관찰하고 있었다. 벽에 포스터처럼 걸려있는 대형 브로마이드들은 보통 대학생이 동경하는 연예인이나 외국 배우 들이 아니었다. 현재는 많이 옅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주는 듯 그것들은 모두 캐릭터들의 이미지였다. 책장과 책상, 컴퓨터 모니터 옆, TV 모니터 옆, 심지어 침대 옆 조명등이 놓인 선반 위까지 예전에 구입했었던 팬시나 피규어들로 즐비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것은 혜진이 아니라 다른 사람 방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그녀는 밖에서는 일반인의 연기(?)를 하고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 좀 놀랐어?”
언제 나왔는지 모르게 혜진이 샤워실에서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었다. 성진은 자신도 모르게 정신 없이 둘러보고 있었다는 점을 깨닫고는 짐짓 태연한 척 침대에 바로 누웠다.
“놀라긴 누가 놀랐다고 그래?”
“아니면 내 방에 있는 피규어들이 그렇게 이뻐 보인 거야?”
혜진은 쿡쿡 웃으면서 머리를 닦던 수건을 옆 의자에 걸고는 한쪽에 있는 화장대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성진은 팬티가 다 보이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는 여고생쯤으로 짐작될 피규어를 흘끗 응시하고는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그냥… 너희 집은 시험 끝나고 오기로 결정했던 게 잘한 것이라고 생각돼서.”
“무슨 의미야, 그건?”
“아무것도 아닌 의미….”
혜진은 화장대앞에 앉은 채로 드라이기를 한 손에 들고 살포시 웃으며 돌아보았다.
“오빠, 갑자기 나 너무 잘사는 집의 여자처럼 보여서 그런 거지?”
성진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배게 위에 두 손을 깍지 껴 누운 상태로 시선을 딴 데로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혜진은 그런 오빠를 가만히 응시하다 거울을 보며 드라이기를 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우웅 하는 바람소리 사이로 비어져나오는 그녀의 목소리.
“그래, 우리 집은 웬만한 부잣집 못지 않은 재력가야. 덕분에 난 등록금비는 물론이고 이런 고급 오피스텔에 거주하며 매월 적잖은 생활비를 송금 받지. 우리 부모님은 돈 달라고 하면 이유도 묻지 않고 요구 금액의 딱 두 배를 보내주셔. 그리고 난 여타 동기들이 한번쯤은 해봤을 서빙일이나 아르바이트 등을 한번도 안 해도 돈 걱정 없이 지내고 있는 거고. 거기 오빠가 팬티 본 세일러복 피규어만 해도 오빠가 상상하는 금액에서 훨씬 상회할걸?”
피규어의 팬티를 봤다는 것을 들키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던 성진의 노력에는 애처로울 만한 지적이다. 하지만 성진은 뜨끔하면서도 누운 채 고개를 갸웃하듯 혜진에게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스스로 잘 산다고 자랑하는 것 같지는 않군.”
혜진은 드라이기를 끄고는 거울 속의 자신의 나체를 바라보듯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녀의 입에서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역시 성진 오빠야. 본심을 잘 이해하고 있어. 난 그런 우리 집에서도 외동딸이고, 그래서 어려서부터 남부럽지 않게 온갖 부를 누리며 살아왔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돈을 흥청망청 쓰며 내 맘대로 살아왔어. 얼마나 있어보이는 집안 티가 났는지 건너편 고등학교 오빠들까지 나한테 연애편지 비슷한 것을 보내오더라니까? 혹은 괜히 방과 후에 같이 놀자고 집적거리기도 하고. 뭐 난 집적거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멋진 오빠들한테 관심받는 게 좋아서 자주 같이 어울리곤 했지만.”
성진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천장을 바라본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더 스스럼없이 얘기하게 하기 위한 동작이었고, 귀로는 여전히 혜진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이런 서브컬쳐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는 계기로 애니메이션을 하나 감상하게 되지. 거기선 참 웃기게도 나와 거의 다를 바 없는 부잣집 딸로 캐릭터가 하나 등장한다니까. 그런데 뭐랄까. 그 캐릭터는 실제로도 악역이긴 했어. 하지만 돈과 권세에 의지해 그것이 마치 자신이 이룩한 것마냥 잘난 척을 하고 다니는 모습이 내 모습과 오버랩되며 엄청난 혐오감을 준 거지. 그 이후로 나는 일부러 남에게 내 본질이 아닌 부(富)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지내온 거야. 대학교 와서도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혜진은 살며시 눈을 감으며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미소 띤 입가가 잠시란 사이를 두고 조용히 열린다.
“그래,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즐기기 위한 도구만은 아니야. 나처럼 인간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자아성찰을 하게 하지. 그래서 내가 아직도 이런 서브컬쳐를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고.”
누운 채로 볼을 긁적거리며 혜진의 말을 되새겨보던 성진. 모든 사회적 구조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돌아간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사회에서 오타쿠 문화라 멸시당하며 인정받지 못하는 서브컬쳐 또한 계속해서 그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도 이유가 있다. 겉으로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그 서브컬쳐란 작품들 속에는 역시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닌, 인간을 변화시키게 하는, 인간에게 신념을 부여하는 혼과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성진은 문득 벌떡 일어나 침대에 앉아서 혜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면 너… 이 집은?”
혜진은 화장대 앞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금방 샤워를 마치고 나온지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그대로 성진에게 빙글 돌아서서 터벅터벅 걸어왔다. 조용하게, 적막하게.
“그래, 이것도 그 결과물 중 하나야.”
톡톡 튀듯 흔들거리는 혜진의 커다란 젖가슴과 미려하게 파여 들어간 허리, 통통한 엉덩이와 허벅지 등은 그냥 여대생이라 지칭하기엔 부족할정도로 모델급의 몸매를 발산하고 있었다. 성진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다문 채 자신의 앞에 선 혜진을 올려다보았다. 혜진은 살짝 쓴웃음으로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곤 입을 열었다.
“부모님은 여전히 날 애지중지 아끼셔. 손에 물 하나 뭍이게 하고 싶지 않을 만큼. 그리고 나는 혼자 사는 것도 경험해봐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고, 그래서 당신들과 나의 사이에 합의를 보고 이루어진 게 이 현실이야. 나는 부모님들로부터 간섭 받지 않을 권리를 얻은 대신, 몇 가지를 약속 받았지. 서빙이나 아르바이트 같은 궂은 일들을 하지 말고 학업에 전념할 것, 불편할 것 없어보이는 고급 오피스텔에서 거주할 것, 돈이 필요하면 벌 생각 하지 말로 집에 연락해서 부쳐달라고 할 것…. 그리고 나는 당신들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평범한 대학생 연기를 하며 지내고 있는 거지.”
“혜진아, 나는… 나…….”
성진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일부러 검소하게 보이려고 명품 하나 차고 다니지 않는 혜진이란 생각은 익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여유 있는 재력가 딸인 줄은 미처 몰랐기에 성진은 자신이 그녀의 애인이란 입지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성진은 문득 자신이 보았던 피규어들의 구체적인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늘 생활비에 쪼들리며 - 선영의 몫까지 부담해야 하기 때문인 점도 있지만 - 주말엔 납품 일에 전념하고 카드값 때문에 본가로부터 구박을 받는 자신과는 너무 큰 갭이 놓여져 있다. 성진은 자신도 혜진을 좋아하지만 그녀에게 어떠한 힘이 되어줄 재력이나 여력은 없는 평범한 대학생이란 점을 상기시키려 했다. 하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어물거리는 말은 쉽사리 튀어나오지 않는다. 결국 서서히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하는 성진.
아주 당연하게도 혜진은 성진이 고뇌하도록 놔두지 않는, 약간 지나칠 정도의 섬세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침대에 앉아있는 성진의 턱 밑에 갖다 대고는 약간씩 힘을 주어 고개를 들도록 했다. 미미하게 떨리는 턱으로 혜진을 다시 올려다보게 된 성진은, 자신의 뺨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타고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꿈결 같은 기분으로 그녀와 마주하는 것도 잠시. 혜진의 몸이 앞으로 숙여지며 얼굴이 스르르 그에게로 밀착해왔다. 그리고는 살짝 옆으로 비켜가는 듯하더니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대고 속삭인다.
“오빠, 오빠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달콤한 속삭임. 그리고 성진의 마음을 더 꺼림칙하게 만들기도 하는 속삭임. 그리고 그것을 지워버리기라도 하듯 성진의 귀를 살짝 깨묾으로써 짜릿함을 선사하는 그녀의 입술.
“난 오빠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오빠도 이런 내 모습을 알기 전부터 좋아하고 있었으니 죄책감 따위 가질 필요 없어.”
혜진의 혀가 성진의 귀를 살살 간지럽히듯 핥아낸다. 성진은 똑바로 앉아있으면서도 머릿속이 새하얘지듯 아찔한 경험을 받아가고 있었다. 혜진은 계속해서 속삭이며 그 틈마다 간간히 그의 귀와 귓불과, 귀 밑을 애무해갔다.
“설령 이제부터 그런 감정을 가졌다고 해도 다 쓸데없는 것이야. 난… 이미 오빠한테 제대로 꽂혀버렸으니까.”
지속적인 속삭임과 애무에 제어하던 무언가 끊어져버리듯 미칠 것만 같다. 하지만 성진을 더 미치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속삭임에 담긴 내용과 그녀의 마음이었다. 혜진은 그야말로 순수하게, 마음 가는 대로, 내키는 대로 좋아할 상대를 성진으로 짚은 것이었다. 혜진은 살짝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면서 가벼운 신음소리와 함께 그의 귓속으로 속삭임을 전달했다.
“오빠가 내게 해줄 것은 나를 한번 더 돌아봐주고, 가끔 사랑한다는 말, 사랑한다는 문자를 보내주면 돼. 진심을 담아서. 그러면 나는 오빠 것이 되는 거야. 내 모든 것, 몸과 마음과 돈을 오빠 마음껏 활용해. 나는 오빠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믿으니까.”
대답은 없었다. 딱히 대답이 필요한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성진은 눈앞의 혜진을 안고 싶었다. 미치도록 안고 싶었다. 미치도록 껴안고 싶었다. 꽉 껴안아서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을 가슴 속 깊이 느껴보고 싶었기에 성진은 그렇게 했다. 성진은 혜진을 꽉 끌어안고는 침대 위에 뒹굴듯 몸을 내던졌다.
비단 난방이 잘 되어있는 시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알몸의 두 남녀는 그야말로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몸을 주체하지 못해 서로를 끌어안고 정신 없이 키스했다. 이어서 가장 은밀하고 깊숙한 부분까지 자신의 것을 삽입하고, 내어주기 시작하는 행위. 주변의 각종 애니메이션 포스터, 피규어, 팬시들은 그 둘을 축복이라도 하듯 변함없는 미소와 표정들로 바라본다. 비스듬히 걷혀진 커튼의 창문 바깥으로는 높다란 야경 속에 눈발이 온 세상을 점찍듯 흩뿌리고 있었다. 성진과 혜진은 그렇게 사랑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