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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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은 - 적어도 현재의 선영은 -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성진은 커피포트에 물을 끓인 후 레몬홍차 티백이 담긴 컵과 커피가루가 담긴 컵에 각각 따르고는 티백의 컵을 선영에게 건넸다. 선영은 침대 사이드레일에 기대어 앉아 자신의 앞 좌식탁자에 놓여진 레몬홍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김이라도 훅훅 불어볼 만하지만 오늘따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싱크대에 기대어선 채로 커피맛을 조금씩 음미하던 성진은 의아한 시선으로 선영을 내려다보다 툭하고 물었다.

“안 마셔?”

대답 없는 선영.

“식겠다. 얼른 마셔.”

여전히 대답이 없는 선영. 대신 그녀의 시선은 위로 향하여지며 서있는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성진은 커피컵을 쥔 채로 가만이 그런 선영을 마주 내려다보다 그녀가 앉은 탁자 맞은편에 앉았다. 성진은 문득 고개를 돌려 방 한구석에 내던지듯 걸쳐진 선영의 새 원피스를 보았다. 현재의 그녀는 가벼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있었고, 성진은 시선을 더 돌려 현관쪽에 벗어진 그녀의 새 하이힐도 바라보았다.

“너나 마셔. 김성진.”

갑자기 그렇게 말하며 컵을 성진 쪽으로 쭉 밀어내는 선영. 성진은 고개를 바로 하여 자신의 가슴 앞으로 다가온 레몬홍차를 잠깐 내려다보곤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너 좋아하는 거잖아?”

“비용 문제는 걱정하지 마. 네 카드 쓴 거 아니니까.”

잠시 그녀의 대답이 홍차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짚어보던 성진은 그제서야 자신이 바라보았던 쇼핑물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비용 부담을 누가 했냐를 따지기에 앞서 성진은 후각으로 전해지는 익숙한 내음을 느끼고는 고개를 약간 앞으로 했다.

“너 술 마셨냐?”

“맥주 몇 잔 한 것뿐이야. 신경 쓰지 마.”

“맥주도 술이지. 게다가 술에 약한 네가 몇 모금도 아니고 몇 잔?”

“나 안 취했거든?”

“에라이. 가만 있어봐. 냉장고에 아키소라가 있을 테니까.”

아키소라는 현대의 숙취 해소에 탁월한 음료였고 선영도 그러한 광고를 몇 번 보았다. 하지만 선영은 별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이마가 홍차가 놓여졌던 탁자 위에 닿았고, 그렇게 졸 듯 앉아있는 선영을 뒤로한 채 성진은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분명 있을 것 같은데 없다. 녹색의 개봉하지 않은 아키소라는 성진의 눈에 반갑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성진은 과일칸까지 샅샅이 뒤져보다가 확실히 없음을 인지하고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편의점이라도 다녀와야 하나.

“이상하네. 예전에 사다 둔 게 없나?”

그 때 졸고 있는 줄만 알았던 선영이 툭하고 그를 불렀다.

“김성진.”

“왜?”

“너 요새 왜이리 늦게 와?”

“남이사.”

“외박도 자주 하더라?”

“네가 그렇게 말하니 꼭 내 와이프라도 된 것 같네, 하하. 가만 있어봐, 다른 숙취 해소할 만한 것이라도…. 그런데 왜 뜬금없이 그게 궁금한데?”

여전히 탁자 위에 고개를 숙인 채, 선영은 한결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행복한 것 같아서.”

냉장고 이곳저곳을 들춰보던 성진의 손이 멎었다. 그는 일어서서 선영을 돌아보았고 머리카락속에 파묻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그녀의 정수리가 비쳐졌다. 성진은 냉장고 문을 닫고 선영에게 되돌아 걸어갔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가 원룸 안을 적막하게 감돌았다.

“그렇게 보여?”

“응.”

곧바로 나오는 대답. 성진은 조는 건지 말짱한 건지 알아볼 수 없는, 탁자 위에 고개를 숙인 선영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그는 선영과 자신의 사이가 소원해진 기분을 받았다. 늘상 집에 돌아오면 선영이 자고 있는 시각이었고, 설령 자고 있지 않더라도 게임만 하고 있었기에 둘은 별 말 없이 각자 간단히 씻고 자는 수순이었다. 아침도 누가 늘 먼저 나가나 싶을 뿐이지 서로 얼굴을 보거나 대화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혜진과 사귀기 시작한 이후부터? 하지만 성진은 혜진 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도 선영이 집에 얌전히 있음으로써 외부 위험 요소로부터 그녀 자신을 어느 정도 보호하고, 처신을 마땅하게 한다고 여겨졌을 때부터라고 생각했다. 성진은 한 손을 허리에 얹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반면에 선영의 머릿속은 좀더 복잡한 내면에 사로잡혀있었다.

갑작스럽게 태어나서 성인의 자아를 갖게 된 자는 마치 가상현실의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별 생각 없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한다. 선영의 경우도 처음에는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모른 채 지내다가 어느 날 자신은 본래의 자신에 대한 ‘대행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뭣도 모를 사명감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본래의 선영이 나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서서히 그녀는 자신의 인생 자체가 그녀 고유의 것이 되고 말았다. 현재의 선영은 이제 아무런 사명감 없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 인생이란 것이 아무런 행복도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냥 본래의 선영이 원하는 대로 죽는 편이 나으려나?

살고 싶어서 튀어나온 이면의 나인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너무 어렵다. 나더러 어쩌라고. 해답도 주어주지 않은 채 잠들 듯 무의식의 심연 속에 가라앉은 본래의 나여. 대답좀 해주라고.

나는 어떻게 해야 좋지?

“행복하지 않아.”

본래의 자신이 대답한 건 아니었다. 선영은 고개를 들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성진은 여전히 어둠으로 칠해진 불투명한 창문으로 고개를 돌린 채 연이어서 투덜거리듯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젠장할! 야, 은선영. 내가 행복한 것 같다고 했냐? 참 웃긴다. 누구 때문에 내가 이러고 있는데. 너한테 써버린 처음 병원비 아직도 못값아서 주말엔 팔이 뻐근해지도록 납품일 다녀야 하고. 네 식료비, 공과금, 개인 용돈, 핸드폰비, 옷값, 생리대값… 아 이건 빼자, 어쨌거나 기타 등등 한달 카드값이 얼마나 나오는지 모르지? 내가 어디 부잣집 자제로 보여? 본가에서 무슨 일 있냐고 수시로 연락 오는 걸 변명하느라 아주 진땀 쏙 빼고 있다고!”

멍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선영. 꽤 긴 말을 한번에 불평하듯 토해버린 성진은 약간 격해진 얼굴로 헉헉거리며 서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선영을 마주보고 있지 않았고, 선영은 그가 일부러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고개를 조금 내려서 성진의 종아리쯤 되는 높이를 응시하고 힘없이 웃었다.

“…미안해.”

“미안한 건 아냐?”

“내가 벌어서 갚을게. 나 때문에 쓸데없이 소모해버린 시간까지… 모두…….”

성진은 그제서야 선영을 내려다보며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녀가 갚겠다고 한 부분에서 혹한 건 아니다.

“말이라도 고맙군. 알았으면 얼른 양치하고 자라. 벌써 새벽 3시가 다돼가네. 기말고사 공부도 해야 하는데 시간도 없군, 쳇.”

그리고는 구석에 놓여진 가방으로 걸어가는 성진. 그는 가방을 뒤적여 프린트물을 찾다가 문득 손놀림을 멈추고 선영에게서 등을 돌린 채 덧붙이듯 말했다.

“본래의 네가 튀어나오는 것은 나름대로 해결방법을 찾아보려 애쓰고 있어. 다행이 그녀는 바로 다시 죽을 생각은 없어보이더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나와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 넌 몸가짐을 지금까지처럼 조심히 하도록 해.”

물론 구체적인 해결방법은 여전히 암흑의 장막 속처럼 보이지 않지만, 성진은 그렇게라도 일러둬서 안심시키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당사자인 선영은 그런 성진의 말을 듣다가 그가 모르는 사실 하나가 있음을 깨달았다. 창오빠와 자신이 알고 있는 중요한 것…. 깊은 새벽이 선사하는 고요 속에서 선영은 툭하고 입을 열었다.

“성진아. 저… 그게, 사실은 나…….”

다시 본래의 내가 나오면 반드시 죽게 되어있어. 본래의 그녀가 설정해놓은… 창오빠에게 맡긴 죽음의 의뢰. 그리고 그 말은 그대로 목구멍속으로 사그라져버렸다. 어물거리는 그녀의 말을 들었을 터인데 못들은 척 프린트물을 찾아보는 성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선영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 나 때문에 그도 이면의 피해를 보게 되어버린 형국이니. 이 이상 얘기하는 것은 그를 더 불편하게 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선영은 그렇게 판단하고는 탁자 위로 시선을 옮겼다.

갖가지 상념이 그녀의 머릿속을 뒤얽듯 헤집고 다닌다. 그렇게 약 몇십초간을 꼼짝 않고 있던 선영은 이윽고 느릿하게 일어섰다. 간단히 프린트물을 훑어보기라도 하고 자려던 성진은 그녀의 행동에 다시 시선을 주었다. 살짝 비틀거리듯 그녀가 다가간 곳은….

“뭐야, 늦었잖아. 이 시간에 게임하려고?”

성진은 컴퓨터를 켜서 ‘카잔 전쟁’을 로딩시키는 선영의 모습을 보고는 뭐라고 언질을 주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나도 시험공부를 좀 해야 하니 이대로 불 켜진 채 놔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프린트물로 시선을 옮기던 성진. 그리고 그는 거의 곧바로 침대 위에 몸을 던지듯 쓰러지는 선영에게 다시금 의문 섞인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

성진은 그녀가 로딩시켰던 ‘카잔 전쟁’ net플레이 대기실 화면을 바라보았다. 게임 한판 하고 자려고 했지만 역시 몸이 버텨내질 못하던가? 물론 그러한 생각은 아주 잠깐에 지나지 않았다. 선영은 ‘카잔 전쟁’에서 친구 추가된 아이디의 접속 여부를 살펴보려 했었던 것이었고, 역시 이 시간엔 접속하지 않은 걸 확인하고는 그냥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진 또한 얼마 가지 않아 그런 사실을 알아챘다.

성진은 예전에 선영이 부주의로 끄지 않고 간 ‘카잔 전쟁’ net플레이 대기실에서 누군가와 나누었던 채팅 기록을 떠올렸다. 성진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모니터를 주의 깊게 응시했다. ‘해신의창’이라 적힌 아이디가 역시 오프라인으로 표기되어있다. 성진은 침대 위에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해신의창’이란 아이디는 누구야?”

“…응, 어. 봤어, 성진아?”

“누구야?”

선영은 여전히 그에게서 돌아누운 채로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창오빠야.”

“창오빠가 누군데?”

성진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살짝 높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음 말을 내뱉을 땐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후에 다시 선영의 무덤덤한 대답이 들려왔다.

“내 전 애인.”

성진은 미묘한 기분에 휩싸였을 뿐, 별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안 들어간 것 같더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오빠」

식사를 한다면 아침이라기보단 점심 대용이라고 하는 게 알맞을듯한 늦은 오전. 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카잔 전쟁’ net플레이 대기실에 접속해있었다. 그들은 이젠 익숙하게 채팅귓속말로 대화를 나누었다. 뿐만 아니라 서로가 어느 시간에 주로 접속하는지도 거의 완벽하게 알아가고 있었다. 선영의 경우 강의가 주로 오후에 있고 늦게 일어나기 때문에 - 추가로 성진이 수업 겸 외출할때까지 기다리는 점도 있었다 - 10시 반에서 11시 사이였고, 태환은 언제나 그보다 조금 일찍 접속해있었다.

「음… 뭐 됐고, 대회는 어떻게 됐어? 하긴 네 정도 실력이면 정말 출중한 프로게이머가 상대가 아닌 이상 모두 이겼겠지만」

「그래. 우승했어」

왠지 ‘우승’이란 말을 다른 누군가의 경기 내용을 보고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띄우는 선영. 태환은 이것이 비단 디지털 문자로 대화하기 때문에 느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일단 감정을 숨긴 채 평범하게 메시지를 띄웠다.

「축하한다, 선영아」

「우승 상금으로 100만원을 받았어. 그리고 난 일부를 써버렸지. 한 몇십만원쯤?」

그의 축하 메시지는 보는 건지 마는 건지, 그렇게 말하는 선영. 그리고 태환 또한 그런 점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도리어 흥미가 동하는 표정으로 키보드 자판을 두드려서 물었다.

「노는 데 썼니?」

「노는 데 썼어」

그리고 역시 길지 않은 사이를 두고, 선영은 다시금 전혀 연관성이 없는 메시지를 띄웠다.

「나 말야. 오빠한테 연락처를 알려줄까 해」

그것은 태환이 꽤 오랫동안 - 체감상의 시간까지 더해 - 고대해온 것이기도 했기에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빛이 스스로도 바뀌고 있다는 기분을 받았다. 그는 하마터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날뻔한 자신을 제어하곤 얼른 책상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핸드폰을 옆에 가져다 놓았다. 하지만 태환은 대부분의 감정을 내면적으로만 처리해버리는 참작성에 연유한 성격이었고, 그래서 먼저 그녀의 속마음을 한번 떠보기로 했다.

「괜찮겠어?」

「어」

「왜 갑자기 그런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더 나은 선택권을 찾을 수 없다는 보편적인 결론이지」

「같이 있다던 김성진이란 녀석은… 널 잘 안 보호해주니?」

잠시 채팅창에 메시지가 올라오지 않았다. 태환은 괜한 질문을 했나 하는 기분을 받으며 모니터 옆에 있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가 한 개비를 빼어들기 직전에 어렵게 말을 삼킨 것으로 보이는 조금 긴 메시지가 올라왔다.

「성진에 대한 얘기는 여기서 별 의미가 없을 것 같군. 그리고 창오빠. 한가지 오해하지 말아줬음 하는 게 있는데, 난 언제든지 안부를 교환할 수 있는 연락처만 알려주는 거야. 지금 당장 오빠가 정해주는 거주지나 집으로 가겠다는 게 아냐. 나는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태환의 눈동자가 그녀의 채팅귓속말로부터 내포된 의미를 추출하려고 애쓰며 조심스레 훑어나간다. 하지만 역시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내용들뿐이다. 태환은 현재의 선영이 예전 본래의 선영이 가지고 있던 타입이나 성격 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했다. 아마 시간이 지나고 세상 경험이 많아질수록 더 그런 점이 늘어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태환은 한가지 사실 정도는 약간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야 할 일이란 것은 아마 ‘카잔 전쟁’ 대회를 통한 상금 획득으로 모종의 자금을 마련하려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 용도의 목적과 기간 등은 여전히 떠올릴 수 없다. 태환은 용도에 앞서 보다 대답을 얻어내기 쉬운 ‘기간’쪽에 초점을 맞추고 그녀에게 다시금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미안하지만 대충이라도 대답할 수가 없겠네. 나도 모르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기간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는 날이 가까워가면 오빠한테 연락을 줄게」

하긴, 프로게이머도 아닌 그녀가 고정적으로 수입을 벌어들일 수는 없겠고, ‘카잔 전쟁’ 대회란 게 일정한 날짜를 두며 열리는 것도 아니니. 짧으면 몇 개월에서 길게는 1~2년, 그 이상이 흐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태환은 현재의 그녀가 그렇게 불분명한 날짜에 의거해서 하염없이 기다릴 만큼 양호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굳이 촉구하지는 않기로 했다.

태환이 이어서 선영의 상금 획득 목적을 짐작할 수 있는 방향으로 어떻게 이끌어볼까 하고 고심하는 단계로 넘어갈 즈음이었다. 그의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창문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늘 모니터 불빛 외에는 불이 꺼져있다시피 한 침침함이 서려 있는 방이었지만 사실상 그건 태환의 방에 국한된 것이었다. 다른 방이나 거실은 여타 주택과 별 다를 바 없이 환하였다. 그래서 방문이 열리자 마치 불빛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듯 비추었고, 그 조명을 받으며 젊은 아가씨가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듯 들어왔다.

태환은 몸매 굴곡이 잘 드러나는 착 달라붙는 흰색 셔츠에 짧은 플리츠 스커트 팬츠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픽하고 웃었다. 검은 스타킹 허벅지가 여대생의 환상적인 다리 라인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고 머리는 긴 머리칼의 웨이브가 강조된 러블리펌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코디에 어울릴법한 눈부신 미인은 어찌된 건지 꽤나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태환은 불 붙이지 앉은 담배를 입에 문채로 자신의 매력적인 여동생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뭐야, 또 미팅 다녀온 거야?”

“아니, 소개팅.”

“뭔가 또 잘 안 된 모양이군. 우리 이쁜 예나에 어울릴만한 남친이 없나?”

송예나는 자신의 오빠 송태환의 달래는 듯한 말투에도 기분을 풀지 않았다. 그녀는 팔에 걸쳐진 핸드백으로 어깨만 움직여 그의 머리를 가볍게 툭 치고는 여전히 짜증 반 한심 반으로 태환에게 말했다.

“내가 얼마나 기분이 나빴으면 이 한심한 방구석폐인 오빠한테까지 한탄하러 왔겠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오빠의 가치가 아직은 너에게 그렇게까지 떨어진 건 아니었나 보군. 하하.”

“나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

예나는 태환의 옆 책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되는대로 엉덩이만 걸치고는 다리를 꼬아 반쯤 선 자세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물론 태환의 방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기에 바깥을 볼 순 없었지만 그녀는 단순히 시선 둘 곳을 찾은 것만으로 만족하는 듯하다. 예나는 핸드백이 걸린 한 팔을 가슴에 두르고 다른쪽 팔은 검지손가락을 들어 차 키를 걸어서 빙글빙글 돌린다.

“도대체 내 친구라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괜찮아보이는 애인들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소개해주는 상대는 늘상 왜 그 모양인 거야?”

태환은 예나의 푸념섞인 말을 들으며 선영에게 잠시 손님 왔다는 말로 둘러대는 채팅귓속말을 전달했다. 그리고는 다시 싱긋 웃으며 회전식 의자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동생을 생각해서 물고 있던 담배를 내려놓은 채.

그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깍지낀 상태로 턱을 대었다 떼었다 하며 장난스럽게 맞받아쳤다.

“야, 정말 괜찮은 상대면 걔네가 소개시켜주겠냐. 자기들이 중간에 낚아채지.”

“오빠의 말대로라면 나는 괜찮지 않아서 소개팅에나 의존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

“아니, 너만큼 괜찮은 여자도 드물걸? 내 동생이긴 하지만 엄청나게 이쁘지, 옷빨 잘 받지. 명품 코트나 워커힐 한두개 정돈 착용하고 다닐 정도로 돈없어보이지도 않지. 게다가 어느 여자가 자가용을 직접 운전하고 대학로 등을 활보하며 다니겠어? 것도 중형승용차를.”

하지만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고, 예나가 남친 구하기 어려워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할 이유가 깃들어있었다. 그녀는 너무 잘났다. 학생회장까지는 아니어도 과대표를 맡고 있는 그녀는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시킬 수 있는 여력과 화끈함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모 프로젝트에서 여자 매니저로 선출되기도 했고, MT나 각종모임 주관, LT참석 등 등록금이 아깝지 않을 만큼 활발한 학교 활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누군가 보면 히키코모리의 태환과 완전히 반대되는 성격에 남매 맞는지 의심부터 하고 볼 것이었다.

그러나 늘 시간이 바쁘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여자는 반대로 연애에 소원해질 수 있는 법이다. 게다가 예나는 적당히 입에 발린 소리로 남성들을 ‘일단 꼬시고’ 보는 법이 없었다. 뭔가 좀 아니다 싶으면 대번에 상대의 단점을 파고들기 일쑤였고, 행여나 그녀의 미모에 끌려서 다가갔던 남성들도 부담스럽고 기가 드센 여자라며 얼른 손을 떼고 마는 것이다. 태환은 그런 여동생의 타입을 잘 알고 있었고, 예나도 스스로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아는 나이였기에 더 토를 않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투덜거림은 끊길 듯 말 듯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도대체 요즘 남자들은 왜 그렇게 찌질할까. 자신감도 없고 책임감도 없고… 방금 만나고 온 녀석만 해도 졸업해서 뭐할지 물어보니까 아직 정해진 게 없다며 빌빌거리질 않나. 어쩌다 붙는 녀석들을 보면 하나같이 돈 좀 있어보이는 여자 꼬시려 다니는 애들이거나, 성욕에 발정난 자식들뿐이니….”

태환은 소개팅 자리에서 진로 문제나 물어보는 그녀의 대화방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일러주진 않았다. 그는 문득 예나의 한쪽 손가락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차 키에 시선을 두고는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나야. 조만간 그걸로 오빠 부탁 좀 들어줘야겠다.”

예나는 자신의 내면적인 불만감 표출 위주에서 관심이 급이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태환을 바라보았고, 다시금 관심이 그의 옆 책상위에 놓인 데스크탑 모니터 화면으로 옮겨졌다. 예나는 시력이 꽤 좋은 편이었고, 그래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모니터에 뜬 아이디를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오빠, 혹시 그 아이디…….”

“아아, 실버레인? 그러고 보니 너도 알만한 아이디겠군.”

“그 여자와 다시 연락하며 지내는 거야?”

“글쎄…….”

태환은 예나도 알고 있는 자신의 예전 애인의 아이디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주체가 똑같은 선영이라고 하기엔 애매했기에 말끝을 흐렸다. 예나는 고개를 갸웃했고, 태환은 동그랗게 오므리는 동생의 보드라운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버릴까 생각하다가 의자를 돌려 모니터 앞에 바로 앉았다.

예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태환의 옆얼굴을 향해 말했다.

“오빠, 그 여자와 다시 시작하려는 건 아니겠지? 2년 전에 오빠가 회사에서 짤리고 방에 틀어박힐 무렵, 헤어진 게 은선영인가 하는 그 여자잖아. 도대체가… 남자가 힘들 때 더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바로 떠난 애한테 무슨 미련이 있어서…….”

그리고 예나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태환이 무표정한, 하지만 쓸쓸함이 어려있는 눈으로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멋대로 판단하지 말라는 무언의 요구. 예나는 히키코모리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그 우수 어린 표정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자신이 얼굴을 붉히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곤 얼른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한동안 태환의 방 안에 놓여진 탁상시계 소리만 채칵채칵 넘어갔다. 태환은 짧게 한숨을 쉬고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모니터를 바라보고 타자칠 준비를 하였다. 그의 입에서 억누른 듯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러나온다.

“뭣도 모르고 너무 일찍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던 내 경솔함이 화근이었지, 선영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 게다가 그녀도 그녀 나름 자신의 문제로 힘들었고.”

예나는 셔츠 위로 두근거리는 봉긋한 가슴을 움켜쥔 채 말없이 오빠를 바라보다 책장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태환은 다시 선영과 ‘카잔 전쟁’ net플레이 대기실에서 대화를 진행시키려하고 있었고, 그것을 보고 있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적인 영역은 가족이라도 지켜져야 하는 법이다. 예나는 그렇게 태환과 등을 마주한 채 방을 걸어나가며 지나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엄마 좀 볼일 있다고 점심 우리끼리 해먹으래. 나 얼른 옷갈아입고 오후 동아리활동 가야 해. 오빠 뭐 먹을래?”

“그냥 어제 저녁에 먹던 카레 데워서 밥에 얹어 갖고 와.”

곧바로 대답하는 태환에게서 약간의 용기를 얻은 예나는 문 앞에서 그를 돌아보곤 다시금 물었다.

“그런데 오빠, 정말 그 머리 천년만년 기를 거야? 여자도 아니고 뭐야, 그러다 뒤로 묶은 머리 엉덩이까지 내려오겠어.”

태환은 대답 않겠다는 의미로 시선은 모니터로 향한 채 한 손을 들어올렸다. 예나는 그 뒷모습에 한숨을 폭하고 쉬고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새 친구와 지인들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면서. 그리고 태환은 선영이 기다리다못해 게임이라도 하러 갔을까 하는 예상을 해보며 일단 귓속채팅말을 띄웠다.

“오래 기다렸지, 선영아. 하하…. 남아도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발랄한 손님을 좀 상대해주느라 말야. 지금 게임 중이니?”

“010-XXXX-XXXX야. 이 번호로 연락 줘. 지금 당장.”

물론 대기실에 여전히 있을 거라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곧바로 메시지를, 그것도 번호를 올릴 거라곤 짐작하지 못했기에 태환은 살짝 당황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익숙한 당황감이라 생각하고는 띠어지는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다. 역시 대행하는 그녀라 해도 선영은 선영이다. 태환은 핸드폰을 열어 들고는 채팅귓속말로 입력된 번호를 조심스럽게 눌러갔다.

컬러링은 평범한 최신가요였다. 익숙한 그 가요음을 들으며 태환은 갑작스레 올라오는 긴장감을 죽이듯 소리 없이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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