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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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이 참가한 첫 ‘카잔 전쟁’ 대회의 우승 상금은 100만원이었다. 작은 대회치고는 꽤 거액의 상금이었고 선영의 목표 또한 그것이었기에 원하는 바는 달성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현금이 담긴 묵직한 돈봉투를 확인하고 가방속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것은 승리의 기쁨을 같이 할 친구나 애인이 없어서 때문은 아니었다. 또한 승부의 세계에서 특정인을 얕잡아보고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는 쓰레기 인간들의 저주를 받아야 하는 현실을 경험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녀는 이전까지 잘 느끼지 못했던 삶의 의미라는 정신적 과제의 기로에 맞닥뜨려있는 상태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선영은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으로 누구를 믿어야하는지, 그것이 김성진이 될지 창오빠라 불리는 송태환이 될지를 갈등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어제의 채팅으로 인해 태환이 처해있는 상황과 자신의 위태로운 두 인격을 자각했고, 이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으로 바뀌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선영은 근본부터의 회의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본래의 선영이 자살하는 순간에 제어할 수 없는 스스로의 의지로 튀어나왔기에, 그것은 얼핏 보기엔 모든 생물들이 초기에 태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선영의 경우엔 20대 초반이라는 성인의 몸과 두뇌를 가진 상태로 태어났다. 즉 머릿속의 자료만 백지화 - 이 백지화라는 것도 사실 이전 선영의 기억과 연동돼있기에 임시로 지워진 것에 지나지 않지만 - 되었기에 그녀는 보통 사람들이 자라나며 서서히 터득하는 삶의 의미라든지 방향성을 심념(深念)해볼 틈이 주어지지 않았다. 선영의 머릿속은 다양한 정보들을 엄청난 흡수력으로 채워갔고 그 능력은 가히 초인적이었으나 그것들을 지탱할만한 신념이 없었다.

게다가 선영은 보통 여자들에게 주어진 큰 행복의 권리 하나를 완전히 제거하고 살아야 했다. 그녀는 자의든 타의든 섹스를 할 수 없다.(당연히 아기 또한 만들 수 없다) 섹스를 하면 본래의 선영의 튀어나오고 그것은 목숨을 위협하게 되는 칼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본래의 선영이 직접 신체를 위협하지 않는다 해도 그런 상황이 반복은 그녀가 태환에게 일렀던 것처럼 벽 속, 즉 죽지도 못하는 미지의 공간에 갇히게 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본래의 선영을 포함한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기에, 더 끔찍한 상황이 생기기 전에 목숨을 끊는 쪽이 여러모로 ‘유리할’ 수 있다.

이 무슨 희대의 유리함이란 말인가. 죽는 게 이롭다고 여겨질 만큼 나락의 경우가 또 있을까 싶으며 선영은 차라리 허탈하게 웃어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항변하기라도 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주의 저편에서 인류에게 선사한 위대한 천체의 일각은 노을빛에 물들어 선영을 불그스름하게 감싸고 있었다.

한동안 그런 무한한 크기의 스크린을 바라보던 선영은 고개를 숙여 가방을 뒤적였다. 100만원이 든 상금 봉투가 다시 만져졌고 그녀는 계획에 없던 일부를 써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유희였다. 머리 아픈 시험이나 과제 하나가 끝나면 아무 생각 없이 먹고 마시고 노는, 그런 해방감 비슷하게 설레는 감정. 생활의 활력소를 가져다 줄 감정. 선영은 그런 평범한 여학생의 심리를 느껴보면서 이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혼자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패밀리 레스토랑을 갔다. 비싼 스테이크를 시켰다. 평소라면 카드값 때문에 바가지 긁듯 잔소리를 해댈 성진을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며 그녀는 깔깔대고 좋아했다. 팝콘을 한아름 샀다. 절대 혼자서 다 못먹을 양이었지만 선영은 그것을 품에 안아 들고 영화관 맨 앞자리에 앉아 무술과 피가 난무하는 액션영화를 봤다. 클라이맥스가 나오면 타 관중들을 따라서 감탄사를 연발해보기도 했다. 면세점을 갔다. 청바지를 벗어버리고 화사하면서도 짧은 치마의 원피스를 사 입었다. 하이힐도 새로 구입했다. 야상 점퍼는 그대로였지만 꽤 큰 키에 속하는 선영은 워낙 출중한 미모였기에 웬만한 코디는 다 스타일리시한 면모를 돋보였다.

“So I can walk my destiny. I can walk my destiny… 달빛 아래 새로운 생명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고 한참을 부르던 선영은 데스티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의 운명? 내 운명이 바꿀 수 있는 것일까? 내 자신의 의지로… 새롭게….

- 연애? 섹스? 정확히는 모르는 게 아니라 계속 몰라야 할 거야 -

붉은 비의 공간에서 만났던 본래의 선영이 비웃듯 건네던 말.

…바꿀 수 없을 것만 같다.

호프집의 분위기는 은은하면서도 부산스러웠다. 조명은 아늑했으나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선영은 신경 쓰지 않고 한 구석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며 마른안주를 씹었다. 땅콩을 오물거리며 잔잔히 흐르는 팝송을 감상하고 있노라니 몇 남자들이 그녀의 미모에 혹해서 다가선다.

“어이, 아가씨. 혼자 왔나? 뭣하면 같이 놀아줄 수도 있는데.”

“야, 짜식. 뻘쭘하게 ‘놀아줄 수도’가 뭐야. 아가씨. 이 날씨에 맨다리는 반칙이라고. 그냥 나왔을 리는 없고 근처 클럽이라도 같이 가지 않을래?”

“혼자 오셨어요? 저기 우리 일행이 있는데, 이쪽으로 오셔서 함께 즐겁게 얘기라도….”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단조로운 눈빛으로 멍하니 마주보는 선영의 얼굴에 할 말을 잊어버렸다. 하다못해 튕기는 기색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그녀는 마치 생기 없는 기계처럼 그들의 말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횡설수설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몇 마디 정도 어물거리다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이런 방면으로도 베테랑급의 작업 실력을 갖춘 자는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준수한 외모를 지닌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는 자신이 마시던 맥주를 선영 옆으로 가지고 와서 같이 홀짝거리며 은근한 시선으로 떠보았다.

“아가씨.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힘이 없어 보이네요.”

“…….”

“아가씨가 들어올때부터 저는 아가씨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꽤 여기 오래 앉아있었죠. 제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바깥은 첫눈이라도 올 것처럼 흐리고 춥더군요. 하지만 눈은 내리지 않았죠. 혹시 아가씨가 들어올 때도 하얀 무엇인가 내리지는 않던가요?”

“…운명이란 게 정해져 있다면, 행복이 없는 삶은 살아갈 의미가 있을까요?”

드디어 열린 그녀의 입. 그리고 그 내용은 남자의 질문과는 전혀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뜻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말 그대로 ‘선수’였기에 당황한 빛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그는 선영의 마음에 동조라도 해보듯 시선을 허공에 둔 채 맥주를 한모금 길게 마셨다. 그리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미심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꺾어보였다.

“글쎄요. 정해지지 않았거나 모른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지로 과거를 만들어간다고 여기며 그 의미를 대신하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저는 애초부터 알고 있었어요.”

남자는 그제서야 이 멀쩡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실연 따위가 아닌, 무슨 큰 병이라도 앓고 있나 하는 시선으로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선영은 그런 남자를 다시 바라보지는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서서 인사도 없이(좌중은 무슨 화장실이라도 가는 것처럼 보였다) 간략하게 계산을 마치고 나가버렸다.

남자의 말대로 바깥은 구름이 잔뜩 끼어서 별빛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자정에 가까워가는 시각이었으나 선영은 한시바삐 집에 돌아가서 잠을 잘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거리를 여전히 배회하였다. 딱히 갈 곳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좀 더 순수하게 설레는 감정을 느끼고, 즐기고 싶었다.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DVD방이나 카지노 게임장 등을 기웃거리기도 하면서 시간을 흘러 보냈다. 하지만 행동에 억지를 쓰면 쓸수록 알 수 없는 허무감만 그녀의 가슴 속에 쌓여가고 있었다.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야 선영은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성진의 원룸이 있는 동네로 들어섰다. 가방 속에는 이미 젤리도 다 먹어서 들어있는 것도 없는데 어깨가 자꾸 그쪽으로 쏠렸다. 오랜만에 무리한 덕분인지 다 나았다고 생각했던 다리도 지끈거렸다. 밤바람은 차가웠고, 그럼에도 그녀는 이마에 진땀이 베이는 것을 느끼며 원하지 않는 귀환이라도 맞는 것처럼 터덜터덜 밤길을 걸었다. 불이 켜진 집도 얼마 없었기에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그녀의 행보를 밝히고 있었다.

원룸 건물앞에 도착해서야 선영은 자신이 돈을 얼마나 썼는지 궁금해져서 걸음을 멈추고 가방을 열어보았다. 흡사 열쇠를 찾는, 그런 모습일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때까지 숨죽이고 몰래 숨어서 선영을 바라보던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기에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판단한 듯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

선영은 인기척을 느끼고는 돈봉투가 들어있는 가방을 얼른 닫고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꽤 빠른 반응이었다고 생각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늦은 행동이었다. 상대는 이미 몇 발자국도 안 되는 거리까지 다가와서 선영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은 여전히 답답할정도로 희미했고 그래서 얼굴 윤곽을 잘 볼 수는 없었지만 선영은 낯설지 않은 모습임을 상기해내었다.

“홍준석…?”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나와서야 준석은 표정에 변화를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미묘하게 진지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선영이 너무 놀라서 그 이후에 해야 할말을 잊고 있을 무렵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지만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을 내었다.

“기억해주니 고맙군. 네가 날 지명해준 덕분에 난 ‘메지즈’ 구단에서 프로게이머 제의를 받았고 당연히 그것을 수락했지.”

하지만 준석은 전혀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너무 진지해서 오히려 약간 화가 난 표정으로까지 보였다. 그리고 선영은 그의 이 예상치 못한 등장과 반응에 대한 추론으로 한가지 가설을 입각해보기로 했다. 그녀는 조금 바래졌지만 여전히 윤기나는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싱긋 웃어보였다.

“원하던 대로 된 것 아닌가요? 하지만 말투나 표정을 보아하니 저한테 감사의 말을 하려고 온 것 같지는 않군요. 게다가 미행까지 한 걸 보면.”

“그래.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다.”

역시… 그건가? 한낱 시시콜콜한 쓰레기 인간은 아니었던가 보군. 선영도 따라서 진지하게, 하지만 맞받아칠 준비가 돼있는 미소로 그를 마주보았다. 날 선 칼과 같은 반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자존심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나? 의외로 멋진 구석이 있네. 하지만 네겐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을 텐데? 게다가 다시 승부를 벌인다고 해도 승산이 없다는 것은 네 쪽이 더 잘…….”

한창 말을 이어가려던 선영은 문득 준석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미소를 거둔 선영이 그를 따라서 미묘한 표정을 지을 무렵, 준석은 고개를 까딱 하고 옆으로 꺾었다. 의아함이 가득한 음성이 그의 목구멍 속에서 흘러나왔다.

“싸우러 온 게 아닌데.”

“그럼…?”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한걸음 다가오는 준석. 선영은 그의 뭔가에 홀린 듯한 눈동자를 보고는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기억의 회로가 그를 처음 만났던 낮의 대회로 거슬러올라가며 이 상황에 대한 위화감을 표출해내고 있었다. 매우 얄궂게도 그런 위화감을 상쇄시킬만한 해답을 떠올리게 되자 선영은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기분을 받았다.

대회장에서부터 줄곧 나를 따라왔나…? 이 시각, 이 장소까지?

“으… 은선영. 이름도 이뻐. 선영. 나를 그렇게 완벽하게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준… 여, 여신 같다고나 할까. 나… 난 네게 아주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 그리고 그보다 더… 주체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계속 따라왔어. 그… 그러니까.”

그의 말은 반나절 가량을 고민했다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더듬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선영은 그의 스토커와 같은 행각에 충격을 받아 뭐라 제지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만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종일 혼자였던 선영의 모습에서 당연히 남친 따위는 없을 거라 판단한 준석은 용기를 내어 입 밖으로 단숨에 뱉어내듯 말했다.

“나… 나랑 사귀어줘, 선영아! 너… 너랑 함께라면 그 험난한 프로게이머 일도 잘해낼 수 있을 거야!”

선영은 한걸음 물러섰다. 그에 따라 준석은 한걸음 선영에게 다가섰고, 그녀는 다시 한걸음 더 물러났다. 그러자 원룸 건물 벽에 그녀의 등이 닿았고 선영은 뒤돌아보진 않았지만 더 물러설 수 없는 막힌 곳임을 깨달았다. 선영은 당황했지만 준석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심적인 동요가 인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촉매제나 마찬가지기에 그녀는 일부러 무덤덤한 눈으로 그를 마주보려 애썼다.

하지만 선영의 그런 노력은 사실상 애초부터 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준석은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가에 대해 인터랙티브한 행동 개시 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런 단계를 뛰어넘어 자신의 행동만이 모든 걸 결정짓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 러니까 선영아. 나랑 사귀면… 나는 프로게이머에 걸맞은 애인을 얻게 되는 거야. 너는 무슨 사정이 있어서 프로게이머 자리를 기피하는 거겠지? 하지만 너의 그 엄청난 실력으로… 나를 지도해주고 내 실력을 상승시켜주면… 나는 더욱 뛰어난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하면 우리는 환상의 콤비가 될 거라고. 멋지지 않아?”

“나… 나는 그저…….”

“네가 날 후원해주는 거야. 그러니까 선영아! 나와 사귀어줘!”

선영은 질린 얼굴로 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귀어달라는 상대의 의사를 물어보는 말투와는 달리 그의 어조나 눈빛은 이미 ‘다 사귀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준석은 결승이 끝난 대회장에서부터 여기까지 끈질기게 선영의 뒤를 몰래 밟으며 머릿속으로 ‘그녀와의 프로게이머 생활’이라는 상황을 이미 다 전개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연을 끊다시피 한 본가에 연락을 해서 프로게이머가 됐다는 명목으로 새 거주지를 하나 마련해달라고 한 후 선영과 동거를 한다는 상상의 나래에 흠뻑 취해있었다.

“너한테도 좋을 거야. 게다가 나 이정도면 꽤 잘생긴 편 아니냐? 요즘 연습 때문에 배가 좀 나왔지만 그정도는 운동으로 얼마든지 뺄 수 있어. 네 미모에 전혀 위해될 게 없다는 거야. 네 미모… 선영의 미모…….”

한참 떠들던 그는 문득 웅얼거리며 두 눈에 광채를 띠었다. 아무도 없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 하에, 걸쳐진 야상 점퍼 안쪽으로 가슴골이 적잖게 드러나보이는 짧은 치마 원피스. 그것은 선영의 성적인 매력을 은근하면서도 짙게 함유하고 있었다. 그 밑으로 훤히 드러난 허벅지와 하이힐의 코디는 늘씬한 그녀의 몸매를 유혹적으로 발산해준다.

여자와의 접점이 거의 없다시피한 프로게이머 길을 걸어온 준석에게 있어선 눈앞의 고혹적인 선영이 솟구치는 욕망을 제어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는 선영을 반드시 소유하고 말겠다는 뇌리 한쪽의 사명감 아닌 사명감에 휩싸여 그녀를 끌어안듯 다가갔다.

선영이 그가 무슨 짓을 할 것인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등 뒤에 벽을 기대고 두 손목이 그의 손아귀에 붙들린 후였다. 그녀의 가방이 힘없이 툭하고 떨어졌다. 준석은 얼굴이 붉어져서 가뿐 숨결을 내뱉으며 선영의 몸에 밀착해갔다. 선영은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늘상 모든 치한들에 의한 보편적인 매커니즘처럼 경악에 의해 옭죄어진 심장이 그녀의 행동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리고 준석은 반항다운 반항도 못하는 연약한 ‘현재의 선영’에게 더욱 자신감을 얻고 행동을 점차 대담하게 넓혀갔다.

“선… 영아. 그냥 여기서 의식을 치르자.”

“의식이라니… 무슨……. 이거 놔… 놔.”

“우리가 하나가 되는 증거로서의 의식이야. 하아… 하아……. 여기 분위기도 좋잖아. 누가 오기 전에 얼른 끝내버리자고.”

“하나가 돼? 어… 야, 지… 지금 뭐하려는……!”

선영은 처음엔 자신의 한쪽 손목을 풀고 밑으로 떨어지는 그의 팔에 약간의 안도감을 얻었다가 곧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은 바지주머니 속에 넣어져서 참지 못한 듯 ‘그것’을 문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미 섹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각하게 된 선영은 남자의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두려움에 물든 눈으로 준석의 행동을 지켜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얼굴이 확확 하고 달아오르진 않았다. 하지만 선영은 거의 맞닿듯이 밀착하여 흥분하는 그의 숨결에 불쾌하면서도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속을 헤집는 느낌을 받았다. 잠깐, 지금 이 녀석 나를 범하려고 하는 거잖아. 빠져나가든지 소리를 지르든지, 하다 못해 몸부림이라도 쳐야 하는 것 아냐? 그런데… 왜 몸이 굳지? 이상한 일이다. 왜 몸이 굳어버리는 거지? 자신의 손에서 떨어뜨린 가방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 정신적 공황에 휩싸인 선영은 꿈결처럼 다가오는 그의 안면을 보고도 아무런 제지조차 하지 못했다. 준석은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하게, 하지만 거리낌없이 선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차가운 밤바람이 새삼스럽게 피부를 훑어내는 현실로 정신이 돌아오게 된 건 선영이 아닌 준석 쪽이 먼저였다. 그녀의 한쪽 손목을 붙들고 벽에 밀고 있는 자신의 손목을 또 다른 누군가가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강하게 그를 뒤쪽으로 밀쳐냈고, 단지 한쪽 손에만 그런 힘이 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쏠아내는 거센 기세를 내포하고 있었다. 준석은 그만 자세를 풀 틈도 없이 밀려나듯 몇 발자국 선영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너 뭐야?”

“누구…?”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다 자세를 바로잡은 준석이 간신히 정신을 회귀했을 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선영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 옆에 또다른 그림자가 서있었고 조금 더 자세히 보자 그것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준석 자신과 비슷해보이는, 아니 오히려 좀 더 왜소해보이는 몸뚱이었지만 방금 전에 자신을 밀어낸 걸로 보아 팔힘은 꽤나 셀 것으로 짐작했다. 아니면 뭔가 굉장히 분노한 것이 그를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거나.

“성진아…?”

문득 들려온 여신, 아니 선영의 목소리. 준석은 그녀가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챘다. 성진은 선영을 막아선 채 그의 앞으로 두 걸음 정도 다가와 대번에 말했다.

“꺼져.”

순간 준석은 울컥했다. 그것은 그가 내내 착각 속에 벌이던 노력을 한순간에 무효화시킬 걸 지시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말하려했을 때 그것은 목구멍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갔다. 똑바로 선 성진은 한 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지만 다른 쪽으로 내어진 손은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도 똑바로 보일 정도로 꽉 움켜쥐고 있었다. 여차하면 그 단단해보이는 주먹이 어느 만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을지 원하지 않는 검증을 얻을 것 같은 기분에 준석은 소리없이 침을 삼켰다.

그러나 준석은 왠지 모를 억울함을 느꼈다. 내가 그녀를 소유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게다가 이대로 돌아가면 감당 못할 정도로 엄청난 쪽팔림을 느낄 것 같았다. 그는 의미없이 돌아서진 않겠다는 다짐마냥 게슴츠레하던 눈을 똑바로 뜨고는 손을 번쩍 들어 성진 뒤를 가리키며 소리질렀다.

“야…! 은선영! 너… 너 남친 같은 거 없다고 했잖아! 그렇게 나… 날 유혹하고서는…!”

빠악-!

성진은 빼어들었던 손등으로 그의 옆얼굴을 강타했다. 흡사 손등으로 뺨을 후려치는 모습이었지만 주먹을 쥐고 있었기에 그 일격은 날카로웠고 그래서 준석은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상체가 옆으로 고꾸라진다. 아찔한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 한숨을 쉬며 나지막하게 입을 여는 성진.

“…그냥 가라. 죽여버리기 전에.”

준석은 그제서야 볼을 감싸쥐고 비척비척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선영 쪽을 다시 바라볼 엄두도 못 낸 채 몇 번이고 넘어질 듯 달아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진. 소란이 잦아들자 그제서야 그는 원룸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선영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심히 놀란 듯 미세하게 떨며 준석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성진은 선영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 옆에 떨어진 가방을 주워들었다.

“괜찮아?”

선영은 여전히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가방을 탁하고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성진의 손가락이 한동안 허공에 갈 곳을 찾지 못한 듯 꼼지락거린다. 그는 그 손을 코드 주머니속에 넣고는 주변을 돌아보다 다시 선영을 보며 말했다.

“운 좋게 때마침 귀가하게 됐네. 아니, 근데 너는 이 시간까지 뭘 하다가 저 따위 녀석이랑 같이 집앞에 있게 된 거야? 어어? 옷은 또 그게 뭐야. 너 설마… 어제오늘 쟤랑 데이트하다 온 거야?”

선영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로부터 시선을 외면했다. 그리고 성진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함묵적인 대답을 얻었다고 착각하곤 기가 막혀 그녀와는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얼어붙은 김이 긴 한숨과 함께 그의 입에서 빠져나온다.

잠시 후, 성진은 불편한 시선으로 달래듯 선영에게 말을 건넸다.

“야, 은선영. 내가 몇 번이고 주의를 주었잖아. 지금 네 외형은 평범한 20대 초반 여대생이고 네 미모에 혹해서 친절한 척 다가서는 남자들이 많을 거라고. 거 봐. 내 말을 무시한 결과가 어떤지를. 너 또 하마터면 끔찍한 일을 당할 뻔했잖아. 세상에는 여자를 단순히 성욕 도구로만 여기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그리고 성진은 언제나그랬듯 자신의 잔소리를 다 듣지도 않고 먼저 무시해버리는, 현재로서는 휙하고 몸을 돌려 들어가버리는 선영의 행동에 익숙한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왠지 오늘은 그 반응이 좀 더 빠른 것 같다. 계단을 올라가는 선영의 구둣발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생각하던 성진. 그리고 그녀에게 할당해준 원룸 보조 열쇠로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도 성진은 코트 자락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로 건물 바깥에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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