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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유리벽은 3층의 높이에서 아래쪽을 훤히 볼 수 있는 전망을 제공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안을 잘 볼 수 없지만 안에서는 밖을 잘 볼 수 있는 일종의 썬팅 유리이다. 그것은 커피숍의 한 켠을 장식하고 있었고, 성진은 그 벽을 가장한 창가에 앉아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밑의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느릿하고 질서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나 성진은 도심지 한가운데를 증언하는 움직임들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의 시선은 맞은편 건물 혹은 그 사이로 보이는 하늘로 향하여져 있었다.
선영은 오늘 아침도 식사를 마치자마자 전날과 비슷한 화장을 유지한 채 다시 어딘가로 나갔다. 그리고 성진 역시 마찬가지로 그녀를 따라가보긴커녕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아낼 수 없었다. 물론 오전 강의가 그의 행동을 붙들고 있었지만 사실상 강의가 없었다 할지라도 그녀를 붙잡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해는 느지막한 오후를 알리듯 서서히 기울어졌다. 간만에 따스한 날씨다. 성진은 슬쩍 시선을 아래쪽으로 돌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나 차의 움직임에서 보여지는 그림자들을 감상했다. 녀석은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성진은 어제도 비슷하게 궁금했지만 역시 집에 늦게 들어갔고 이미 자고 있었던 선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점점 늦게 들어가거나 아예 외박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고 자각하던 성진.
“오빠,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맞춰볼까?”
성진은 시선을 창 바깥 밑쪽에서 자신의 앞쪽으로 들어올렸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자신과는 달리 오늘은 상큼한 것이 끌린다며 키위주스를 시켜놓고 홀짝거리던 혜진. 그녀는 최근 구입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별 흥미가 없는지 성진에게 그렇게 말을 걸었다.
“맞춰봐.”
성진은 간단하게 대답하며 커피컵에 꽂힌 빨대를 한모금 쭈욱 빨았다. 이미 다 생각을 마쳤을 텐데 혜진은 볼에 손가락을 갖다 대서 잠시 고개를 다른 곳으로 향한다. 그렇게 ‘음….’하고 생각하는 척 하다가 생긋 웃으며 곁눈으로 그를 보곤 비밀스럽게 낮추어 말하는 그녀.
“예전 여자친구.”
성진도 피식 웃고는 빨대에서 입을 뗐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사랑스러운 후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으음? 이상하네…. 내 직감은 틀린 적이 거의 없는데. 특히 오빠한테는.”
니트의 긴 소매 바깥으로 빠져나온 그녀의 고운 손가락이 이번엔 입술 쪽으로 이동했다. 뭔가를 좀 생각하는 듯 입술 아래쪽을 손톱으로 콕콕 찝어보는 혜진. 성진은 그 모습을 보며 요즘 늘어나는 외박의 이유를 그녀에게서 상기해가기 시작했다.
성진의 시간을 뺏지 않으려 될 수 있으면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줄이려던 혜진이었지만 사실상 그건 한계가 있었다. 안 만나려면 안 만나려 할수록 더 같이 있고 싶었고, 자신은 현재 딱히 하는 일이 없으며 혜진과 같이 있는 시간을 더 가치 있게 여긴다는 성진의 끈질긴 설득 하에 그들은 점차 리밋트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혜진은 늘 성진과 함께 있으면 행복해했고 성진도 그런 혜진의 모습을 보며 설레는 마음을 느꼈다. 그들은 공공연히 CC를 드러내며 학교에서 틈만 나면 같이 다녔고 강의가 끝난 후에도 해가 지고 별빛이 반짝거릴 때까지 붙어다니곤 했다.
“혹시… 요즘 신경 쓰이는 다른 여자?”
그의 생각을 흐트러뜨리듯 튀어나온 혜진의 말. 성진은 조금 많은 양의 아메리카노를 목구멍 속으로 넘긴 후에 쓴웃음을 지으며 테이블 맞은편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참 그런 말을 잘도 태연하게 한다?”
“아니야? 그 비슷한 종류의 상념에 젖어있는 듯한데, 오빠는.”
성진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는 혜진을 바라보면서 이번엔 자신 쪽이 좀 궁금해졌다는 투로 말을 건넸다.
“그래, 그 비슷한 상념이라 치자. 경멸까지는 아닐지언정, 나를 좀 실망스런 눈으로 바라봐야 정상 아니냐? 넌 네 남자친구가 양다리 걸치는 것에 대해 아무 느낌이 없는 것 같아.”
“아무 느낌이 없지는 않아.”
“그럼 왜 그렇게 관대하게 말하는 건데?”
혜진은 시선을 주스컵으로 옮겨갔다. 그리고는 키위주스를 쪽쪽 빨면서 한 손으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돌돌 말았다 풀었다 했다.
“오빠를 믿고 있으니까. 그런 질문도 별로 무서워하고 싶지 않아서야. 설령 오빠가 다른 여자를 신경 쓰고 있다고 해도 거기에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나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 여기고, 놀라고 싶지 않아서이지.”
성진은 한 팔을 의자 등받이 너머로 넘기고 다른 손으로는 커피컵을 쥔 자세에서 입을 다문 채로 가만히 혜진을 바라보았다. 이런, 20대 후반쯤의 여자에게나 느껴질 법한 평온하게 자신을 다스리는 마인드. 이제 막 대학교 신입생을 벗어나는 그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에 성진은 문득 눈앞의 혜진이 자신에게 너무 과분한 여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그는 짧은 한숨을 쉬며 시선을 재차 창밖으로 향하였다. 사실 그런 염려까지도 쓸데없을 것이다. 이 녀석은 날 좋아하고 있으니까. 겉으로는 평범하게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내가 모르는 온갖 잡상까지 들이쳐대며 날 좋아하고 좋아하고 좋아하고 좋아할 테니까. 감정에 장막을 칠 필요가 없는 섹스에서 그녀가 나를 어루만지는 손끝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성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만일 혜진에게 헤어지자고 할 때 가장 실효성 없는 발언을 꼽는다면 ‘자신이 그녀에게 실망을 안겨줄 것 같아서’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자신의 어떤 행동도 타당한 행동으로 비추어질 혜진을 바라보며 성진은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넌 내 여자친구야. 솔직히 너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까지 적잖은 여자들을 만나오긴 했어. 실제로 그녀들과 ‘사귀기’도 했지.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알지? 지금 너와 사귀는 감정을 놓고 봤을 때 그녀들과 비교해서 결코 뒤처지지 않기 때문이야. 그런 얘기까지도 거리낌없이 할 수 있을 만큼 널 좋아해. 사랑해. 혜진아.”
그리곤 커피숍 내부에 흐르는 음악이 잠깐 귓가를 맴돈다 여겨질때즘 성진은 맺음말처럼 툭 내뱉었다.
“이 정도면 네 대답에 걸맞은 답말이 될까?”
“고마워, 오빠.”
혜진은 두 팔을 테이블에 대고 모아든 손에 턱을 괴고는 성진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성진은 어쩐지 그 미소가 혜진 자신보다 그를 더 안심시키려는 것 같다고 생각되어 기분이 꺼림칙해졌다. 역시 너무 예리한 여자다. 성진은 좀 더 신뢰를 주기 위해서라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 옆으로 의자를 옮겨 앉았다. 그리고는 한 팔로 혜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느릿하게, 하지만 멈칫거림없이 자연스럽게 키스했다. 은은한 달콤함을 주는 커피향과도 같은 키스. 설렘을 동반한 약한 숨결이 맞닿은 입술 사이로 서로를 향해 교차한다. 조용한 사랑의 확인.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행위에 전념하던 둘은 이윽고 입술을 뗐다. 혜진은 볼을 약간 붉힌 채 바닥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았고 성진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살짝 갈색빛을 띠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참으로 곱다고 생각하던 성진은 자신도모르게 손을 들어서 혜진의 머리를 쓰다듬어 내려갔다. 그 손길이 싫지 않은 듯 혜진은 눈동자를 들어 성진을 올려다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성진의 손끝이 혜진의 머리칼을 타고 내려가 턱선에 머무를 때 혜진은 미소지었다. 그리고 이번엔 그녀쪽이 성진을 감싸안으며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