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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하긴. 창오빠가 가르쳐준 대로 생각 없다고 했지」
「잘했어」
태환은 꽤 오랫동안 ‘카잔 전쟁’을 플레이해왔고, 또한 선영과 몇 번 맞붙어본 경험도 있는 만큼 그녀의 실력이 비범치 않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선영의 실력이 프로게이머 구단 내에서 탐낼만한 수준이라는 점도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선영은 작은 경기부터 조금씩 경험을 쌓아가며 큰 경기에 도전할 생각이었기에, 오늘 그녀가 참가한 경기는 그야말로 조그만 규모였다. 하지만 꼼꼼한 태환은 그런 경기에서조차 프로게이머 구단의 감독이나 코치가 들러볼 경우를 배제하지 않고 미리 일러두었던 것이다.
「앞으로도 프로게이머 구단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오면 절대 가입할 생각 없다고 잘라 말해. 넌 현재 그런 데서 얽매일만한 안정된 상태가 아니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굳이 오빠 말 아니라도 전문직업으론 나도 못할 것 같아. 오늘 경기 뛰고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나 지금 팔이고 허리고 아파 죽겠단 말야」
태환은 ‘카잔 전쟁’ 대기실 채팅창에 떠오르는 그녀의 짜증섞인 귓속말을 보자 피식 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문득 커튼이 쳐진 방의 한쪽 창문가를 바라보았다. 본래가 어두침침한 방이었으나 이른 겨울에 찾아드는 빠른 밤은 인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태환은 오늘 꽤나 고생했을 그녀를 떠올리며 ‘수고했다. 푹 쉬고 내일 결승전에 대비해라’ 등의 일상적인 말을 타이핑해나갈 때쯤이었다.
문득 그는 모종의 확인을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을 띄워보기로 했다. 그의 손가락이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하나의 질문을 채팅창에 입력한다.
「그런데 선영아. 이제 그만 슬슬 오빠를 믿을 때도 되지 않았니?」
「무슨 의미야, 그건?」
「그러니까… 보다 네 안위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연락처라도 공유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거야 나쁘진 않겠지. 그런데…」
선영은 ‘아직도 못 믿겠어’ 같은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태환에게 보낸 채팅귓속말은 태환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난 사실 오빠가 누군지 아주 궁금해. 본래의 내 전 남친이기도 했을 테니. 그러니까 일단 만나보는 게 낫지 않을까? 어디 장소라도 정해서 말야」
「그건 좀 곤란한데」
「왜? 창오빠는 이상하게 다른 데선 성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매너가 좋다가도 꼭 정체에 관해서는 시크릿 모드를 고수하더라?」
「안 될까?」
「기분 나쁘잖아. 얼굴도 모르는 남자 목소리를 사적으로 매번 들어야 한다면」
태환도 그녀의 심경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겐 개인적으로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고, 그것은 일반인이 보기엔 긍휼심보다는 경멸감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큰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가리켜서 ‘본인의 의지’가 박약한 탓을 한다. 불치병도 아닌,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을 극복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본인의 의지’란 것 자체가 딱 거기까지밖에 미치지 못하는 병이라면….
태환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궤변일 것이다. 모든 것을 본질로 따져나간다면 이 세상에 분노해야 할 것은 무엇이 있겠으며, 슬프고 기뻐해야 할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사람이란 건 결국 일정 선상에서 타협하고 지내야 활력을 얻고 쳇바퀴가 돌아가듯 살아가는 존재이다. 덧붙여서 태환은 언제까지고 자신의 문제를 그녀에게 드러내보이지 않을 수는 없겠다는 판단을 했다.
「히키코모리라고 아니?」
「히키코모리?」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없어. 심지어 담배조차도 사러갈 수 없어서 언제나 피붙이에게 의존하곤 하지. 집에서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는, 지독한 히키코모리야」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야?」
선영은 아직 그가 무슨 병에 걸려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투였다.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예전 본래의 선영도 모른다는 얘긴데… 아니, 그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본래의 선영이 알고 있었다고 해도 태환에 관한 기억을 지우려했다면 그런 부문까지 아예 싹 잊어버리려 했을 것이다. 사실 히키코모리라는 것은 아직 사회에 표면적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은, 근래의 젊은이들 층에서 이제 막 증가해가는 추세의 것이니까. 아마 나로 연상될만한 특수한 것 또한 기억에서 지워버렸겠지.
지극히 논리적인 관점에서 태환은 납득을 하고는 그녀에게 알기 쉽도록 설명의 타이핑을 길게 수행했다.
「신체적 결점이라기보다는 정신적 결점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할 질환이지. 집에만 틀어박혀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 타인과의 접촉을 꺼리는 것 자체가 히키코모리의 증상이야.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거나 대인관계를 불편해하는 수준이 아냐. 기피하다못해 무서워지는 거지. 그래서 자신의 성역인 가장 안정된 ‘방’이란 공간에서 나가지 못해.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어. 학교 혹은 직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든가, 아주 혐오스러운 일을 당했다든가 혹은 사람이란 존재에 실망을 받았다든가. 나 같은 경우엔……」
다 비워진 젤리로 인해 빈 숟가락만 입에 물고 까딱거리며 태환의 이어질 말을 궁금해하던 선영. 그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 채팅귓속말이 올라오지 않자 자신 쪽에서 채팅을 입력해나갔다.
「특이한 병이군.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창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태환은 문득 건조한 느낌을 받았다. 하긴 비단 그녀뿐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질환이 히키코모리일 테니. 오히려 그런 걸 본인 쪽에서 타인한테 얘기하는 것 자체가 꺼려질 수밖에 없는 행위이다. 물론 이 경우엔 손으로 타이핑하는 문자로의 전달 방식이긴 하지만.
태환은 더 이해하거나 생각하기도 귀찮다는 듯 넘겨버리는 선영의 말투를 탓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리고 선영은 그런 그의 마음가짐에 따른 선물이라도 되는 양 연이어서 채팅귓속말을 입력했다.
「하지만 그건 오빠 사정이고 나는 여전히 당신이란 존재를 신뢰할 수가 없어. 하지만 그간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의 루트는 열어줄 수 있지. 지금 연락처를 보내줄게. 그러나 이건 내 핸드폰 번호는 아니야」
「그렇다면 누구…?」
선영은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거의 곧바로 대답을 타이핑해서 엔터를 눌렀다.
「김성진」
보지 않아도 모니터 너머 저 편에서 태환이 고개를 갸웃하는 게 느껴질 것 같다. 선영은 그렇게 생각하곤 빈 플라스틱 수저를 이빨로 조금씩 씹어보며 다음에 이어질 내용을 가만히 응시했다. 예상대로 얼마간 사이를 두고 태환의 꽤나 당황한 메시지가 띄워졌다.
「지금 널 맡고 있다는 그 남자야? 그의 연락처는 왜…」
「최소한 현재의 나보다는 창오빠와 연락하며 지내도 될지에 관해 판단하는 기준이 나을 테니까. 오빠가 먼저 성진이랑 연락하고 얘기해 봐. 그럼 녀석이 알아서 내게 어떻게 하라고 알려 주겠지」
태환은 성진이 선영과 동거를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녀와의 어떤 감정적 접점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물론 본래의 선영이 스스로 죽지 못하는 것이 그와 관련이 있다는 추측도 해보긴 했으나 이렇다할 근거가 없는, 말 그대로 추측에 불과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직 학생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선영을 계속 돌보아줄 자금이라든지 시간적 여유가 적을 것이다. 따라서 태환이 김성진이란 남자와 통화를 하면 그가 선영의 행방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려줄 가능성은 높아보였다. 더군다나 그렇잖아도 언젠가 한번 기회가 되면 얘기를 나눠볼려고 마음먹은 점도 있었다.
그러나 태환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선영과 채팅을 하며 간만에 담배를 태워본다는 기분을 받으며 그것을 하나 피워 물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띄워보낸 채팅귓속말은, 앞서 들어맞았던 선영의 여러 예상들에 필적할 정도로 그녀를 의아하게 했다.
「그건 됐어, 선영아. 다음에 얘기하자」
「필요 없다고?」
「응」
간단한 답변. 뭐야, 어떤 방법을 써서든 나와 연락할 방법을 찾고 싶었던 것 아니었나? 이렇게 되자 선영은 거꾸로 자신이 태환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선영은 보다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현실 - 즉 내일의 결승전 - 에 관심이 치중되어 있었기에 이 이상 파고들기 귀찮아짐을 느꼈다. 그가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현재의 선영에겐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잘 자라는 작별인사나 간단히 하고 접속을 끊으려 했다.
그리고 그렇게 둘 사이를 연결하는 불규칙한 연락망 - 즉 ‘카잔 전쟁’의 대기실 - 이란 실이 끊어지기 직전, 태환은 그것을 슬쩍 더 연결해보기라도 하듯 메시지를 띄워올렸다.
「네가 정말로 나와 연락하며 지내야겠다고 생각됐을 때 직접 알려줘」
선영은 어이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조건을 만족하지 않는 한 오빠한테 핸드폰 번호 따위를 알려줄 경우는 없을 거라고 봐. 이만 잘래」
「그럼 어쩔 수 없는 거고」
선영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주제에 여유있는 답변을 하는 그의 메시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욱하고 뭔가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재빠르게 타이핑을 했다.
「왜지? 오빠가 정말로 걱정하던 그녀 아니야? 비록 현재는 내가 대행하고 있지만 그래도 오빠가 보호해주고 싶었던 것 아니었어? 그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야 하는 것 아냐? 나… 난 사랑에 관해 잘 모르지만 그렇게 하는 게 틀리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그런데… 창오빠는 왜 그렇게 안 되면 말고 식으로 미적지근해? 내가 가능성을 다 알려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환은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톡톡 털어내고는 다시 입에 물었다. 그의 눈은 선영이 띄워보낸 채팅귓속말에 고정되어있었다. 메시지는 항의하는 듯한 내용을 품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환의 눈동자는 담담하기까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입으로 말하지 않고 손으로 타이핑해서 의사를 전달하려니 담배를 물고 있어도 아주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군. 태환은 그러한 사실에 새삼스레 묘한 기분을 받으며 키보드에 얹혀진 손가락들을 움직었다.
「미적지근하다라… 그런 표현이 적합할 수도 있겠군」
「오빠, 나 사랑했던 것 맞아?」
태환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 ‘나’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지칭되는 ‘나’가 아니겠지. 그럼에도 그런 방식의 항의는 그녀에겐 어색하지 않아 보였다. 태환은 이 특이한 상황을 머리로 느끼면서, 몸으로는 이미 담배연기를 깊게 들어마시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타들어가고 있는 심정을 그녀에게 굳이 내비치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그는 참으로 생뚱맞은 메시지를 하나 띄워보냈다.
「재미있는 것 하나 알려줄까, 선영아?」
「뭐…?」
「네가 MV에서나 볼듯한 황금마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전국의 이상형들을 손바닥안에 쥔 것마냥 찾아다니다가, 아침에 눈을 뜨고 그런 간밤의 꿈에 대한 황홀감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상태로 핸드폰을 열어보았을 때 부재중 표시란 낯선 번호가 떠있을 거야. 세 번 정도면 한낱 광고라는 의심도 들지 않으려나?」
선영은 뒤에 이어진 그의 ‘본래의 너라면 참으로 어울리지 않을 꿈이겠지만’ 같은 메시지는 거의 읽어보지 못했다. 그녀는 약간 긴장하여 조금 거칠다싶은 손놀림으로 타이핑을 했다.
「하긴 프라이버시 따윈 스티로폼 울타리로 보호되어있다고 여겨질 만한 현대니까. 창오빠도 내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것도 없겠지」
물론 태환은 애써 침착하게 맞받아치는 그녀의 메시지도 한 눈으로 흘러버렸다.
「스티로폼까지는 아니고 나무벽 정돈 되겠지. 그리고 아무리 비밀이 없는 인터넷 바다라곤 해도 실질적인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기 마련이야. 선영 네가 의도적으로 인터넷 한 구석에 연락처 등을 직접 기입해놓지 않은 이상」
「그럼 뭐가 오빠를 자신만만하도록 하는 거지?」
「내 예전 특기 중 하나가 보안 시스템을 뚫는 자신의 능력에 쾌감을 얻는 타입의 구성원이기도 했으니」
선영은 ‘흥!’하고 어이없는 코웃음을 치고는 그 메시지에 대한 화답을 간략하게 보냈다. 그리고 그것은 태환이 원하는 화답이기도 했다.
「오빠가 해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이런이런, 여기서부터 벌써 믿지 못하면 다음은 더 힘들어지는데. 네가 만일 본래의 너 자신이 가졌던 암적 전적들 중 하나를 알고 있다면 좀 더 흥미로워질 거야」
태환은 이어서 그녀가 궁금해할 만한 메시지를 띄워 올렸다. 하지만 잠시란 사이를 두었고, 그것은 선영과의 예전 추억을 떠올려보는 데에서 나온 일종의 부산물과도 같은 지체였다.
「내가 본래의 네게 알려주었던 건 ‘카잔 전쟁’ 게임뿐만이 아니지. 해커의 능력 또한 나를 통해서 알게 되었으니」
- 그런데 네가 해커였다면 믿겠어? -
시르 병원에 입원해있었던 당시, 성진을 통해 들었던 자신의 예전 정체를 떠올리게 된 선영. 그녀는 점점 더 태환과 예전의 ‘나’에 대한 과거가 궁금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