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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지 한가운데라곤 해도 아침은 나름대로의 상쾌함을 간직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현재처럼 점심 때가 가까워지는 시각과 구름이 잔뜩 끼어서 찌뿌드드한 날씨라 할지라도 말이다.
생생하던 모텔 간판 불은 꺼진 지 오래였고, 그 때문인지 야릇한 분위기를 형성하던 밤의 건물은 현재 어울리지 않을 법한 평범한 건물로 돌변해있었다. 그리고 흐린 날씨 속에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나온 성진은 자신의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제지할 수 없었다. 카운터에 있던 모텔 직원이 키를 넘겨받으며 성진의 몰골을 보고는 키득거렸던 것도 같지만 어쨌거나.
성진의 얼굴은 하룻밤 사이에 핼쑥하게 야위어있었다. 그리고 그런 성진의 옆으로 얼른 따라 나와 팔짱을 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혜진은 반대로 매우 화사하다. 입고 있는 코트 자락도 무거워 보일 정도로 초췌한 그와는 달리 혜진은 원기가 잔뜩 충전된 사람처럼 행복해 보였다.
“하아…. 오빠, 어젯밤엔 참 즐거웠어. 나도 꽤 만족했고.”
성진은 그녀의 ‘꽤’라는 부사에서 다시금 머리가 핑하고 도는 것을 느꼈다. 새벽의 기운이 푸르스름하게 감돌 때까지 쉬지 않고 해대고는 ‘아주’라든지 ‘정말’ 등의 표현을 쓰지 않고 ‘어느 정도 일정 선까지 좋았던’의 상태로 표현하는 혜진의 말에 질려버렸던 것이다. 도대체 그녀와 예전에 잤던 남자들은 그녀를 만족시켜줄 수는 있었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거라는 점에 성진은 내기를 걸어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성진은 문득 한쪽 팔에 굉장한 압박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겨울로 들어서는 날씨라지만 너무 꽉 붙어있지 않냐고 언급을 주려던 성진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앞의 그녀를 보자 그 말이 도로 삼켜져버리고 말았다. 혜진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눈동자로 성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진은 얼굴이 다시금 붉어지며 먼 하늘이라도 응시하듯 고개를 도로 돌리고는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이 녀석 원래 이렇게 이뻤나? 굉장한 미모란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지금 다시 보니 흡사 연예인 같잖아…. 혹시 몰래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거 아냐? TV에서 보던 누군가가 이 녀석과 닮은 녀석이…….’
그런 성진의 망상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혜진은 잠시 팔짱을 풀고는 두 검지손가락을 서로 맞부딪치며 뭔가를 자꾸 말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뜬금없이 수줍게 머뭇거리는 모습에 성진은 곁눈으로만 그녀를 흘끗흘끗 보면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았다.
“……왜?”
“있지, 오빠…. 오늘 오후 강의 끝나고 시간 있어?”
딱히 할 일은 없었지만 성진은 한가하다고 말해야하는지 본능적으로 고민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혜진의 말은 대답을 잠시 보류하도록 한 스스로의 제지에 찬사를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괜찮으면… 오늘 우리 집에 왔으면 좋겠는데. 나 혼자 살거든…. 그러니까…….”
“됐거든?”
딱 잘라 소리지르듯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혜진은 볼을 부풀리곤 다시 성진의 팔짱을 끼면서 앵겨왔다.
“아앙~. 왜, 오빠? 우리 이제 연인 사이잖아. 그렇게 단박에 거절할 것까진….”
“됐어! 안 가!”
성진은 여자와의 성경험만큼은 아니지만 ‘사귀었다’고 할 수 있는 연애경험도 꽤 갖추고 있었다. 물론 그 기간은 짧고 서너번에 지나지 않지만, 아직 20대 초반이라는 그의 나이에 비추어보면 적다고 할 수는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 이 여자 저 여자와 사귀어본 그는 ‘연애’라는 현실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남자이기도 했다.
보편적으로 연애라는 것은 생활에 활력소가 되는 달콤함이 가져다주는 장점이 많이 부각되어있다. 그리고 그러한 면이 실제로도 큰 부분을 차지하긴 한다. 하지만 연애의 기본은 상대가 존재해야하며, 그 상대라는 것도 예측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지식, 생활, 사고방식을 가진 인격체란 게 주요하다. 연애는 자신뿐이 아닌 그러한 상대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서로가 취득하게 되는 달콤함만큼이나 서로에게 내주어야 하는 대가가 시도 때도 없이 들쭉날쭉하게 표출되고 그에 따라 심각한 수준까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부여되기도 한다.
따라서 성진은 혜진에게 사귀자고 말한 직후 약간의 각오 같은 것도 이미 다져놓은 상태였다. 고백을 받았을 때 눈물까지 흘릴 정도면 이 녀석이 나한테 기대하는 점이 적잖을 것이다…. 그래서 성진은 웬만한 친구와의 관계도 끊어버리고 수업도 최소한의 학점 수준만 커트해내기로 목표를 잡은 후 남는 시간을 모두 혜진과 함께 하는 데 쓰기로 했다. 그는 이전의 연애 경험을 되살려서 대학 주변에 시간을 보내기 좋은 음식점, 커피숍, 놀이 공간 등을 확보하고 쇼핑에 대비한 지출도 고려했다. 머리세팅도 새로 하고 옷도 깨끗한 것으로 골라 입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혜진과 함께하기 시작했을 때 성진은 낯선 허무감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혜진은 분명 성진과 함께하는 걸 좋아하긴 했다. 그리고 혜진이 얼마나 성진을 좋아하는지는 성진 자신도 딱히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부분에서 파생된 그녀의 섬세함이 문제가 되었다.
“음…? 아냐, 오늘은 이 정도면 됐어. 오빠, 나 충분히 행복해.”
“뭐야, 너 여기 가보고 싶다고 했잖아. 비용은 충분하니 부담갖지 말고 둘러보자고.”
“아니, 괜찮아. 그보다 오빠, 오늘 아침수업 있었지?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과제도 하고 좀 쉬어.”
“야, 어제 밤새도록 알아본 오빠의 성의를 무시하기냐?”
“안 가겠다고 한 거 아닌데? 다음을 위해서 남겨두는 거지, 한번에 모두 둘러보면 재미없잖아.”
성진은 보다 강경하게 권유했으나 혜진은 살짝 아쉬운 상태로 넘기는 게 더 설렌다며 그 자리에서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그런 패턴이 며칠, 일주일, 열흘 가량을 지속되었다. 성진은 그녀와 ‘사귀기’ 전에 만나던 시간과 그 후에 만난 시간을 재어보며 어느 쪽이 더 우월한지를 가리기 어렵다는 걸 깨닫곤 당황했다. 나한테 실망했나? 아니면 벌써부터 시들해진 건가. 그러나 그녀가 자신한테 대하는 태도나 말투, 문자 메시지 등을 생각해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예상치 못한 고민거리에 둘러쌓인 성진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약간의 이해를 하게 되었을 때는 감탄이란 감정도 함께 찾아왔다. 혜진은 좀 지나치게 이타적인 사랑을 지향하고 있었다. 사귀기 이전부터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지 않는 혜진의 성격을 알고 있던 성진은 그러한 부분도 은연중에 어느 정도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혜진은 성진이 자신 때문에 지나친 시간, 물질적 소비를 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어쩌다 한두번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고 하루에 몇 번 문자나 연락을 하는 게 전부였다.
사실 성진은 혜진이 얼마나 자신과 함께하고 싶어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녀의 미묘한 어조의 변화나 손짓을 포함한 약간의 접촉만으로도 그러한 갈망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미안해서라도 성진이 같이 더 있자고 하면 늘 혜진 쪽이 한사코 만류하곤 했다. 덕분에 성진은 해결할 수 없는 이상한 꺼림칙함이 깃든 한가함을 얻었고, 그녀의 배려(?)에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편히 쉬고 미뤄두었던 일을 하고 돈을 저축했다. 성진은 이것이 다른 방면으로 기억에 남을 희대의 연애가 되겠다며 실소를 머금었다.(물론 혜진과의 잠자리는 그야말로 사정 봐주지 않고 덮쳐와서 예외가 되었지만)
혜진과 사귀기 시작한지 약 3주란 시간이 흘렀다. 때는 이른 겨울로 들어섰고 2학기 기말고사란 특유의 족쇄가 학생들의 발목을 옭아오는 시기였다. 그 효험성에 약간의 의구심이 들지만 어쨌거나 컨닝을 말자는 플래카드나 포스터가 곳곳에 내걸렸고 도서관은 빈자리의 가치가 비약적인 향상을 누리며 학생들로 붐볐다.
시험공부를 한답시고 커피숍에서 프린트물을 함께 들여다보던 성진과 혜진은 가벼운 스킨쉽부터 시작해서 달아오른 몸을 주체하지 못해 또 모텔로 향하였다. 그리고 현재 성진은 차갑고도 상쾌한 아침바람을 맞으며 조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집에 가는 중이었다. 혜진은 평소 억제하던 성진과의 만남을 침대에서라도 풀어보겠다는 듯 늘 정액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쪽쪽 뽑아내곤 했다. 따라서 성진은 슬슬 그녀와의 잠자리 후에 찾아드는 빈혈과도 같은 후유증에 익숙해져 가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상급의 미모와 테크닉을 갖춘 그녀에게 당하는 것도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좋았고, 그래서 한층 활기가 도는 기분으로 원룸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아직 꽤 이른 시간이었기에 늦잠꾸러기 선영은 당연히 자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녀가 침대가 아닌 벽 한쪽에 앉아서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은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선영은 언제 구입했는지 모를 간이화장대 앞에서 파우더를 브러쉬로 조심스럽게 얼굴에 문지르고 있었다. 성진은 그녀가 화장을 한다는 것 자체는 기억의 회귀에 따른 익숙함으로 치부하고 별 신경을 안 썼지만, 스킨과 로션 등만 간단히 바르고 다니던 그녀가 왜 갑자기 화장을 다 하는지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이 익숙지 못한 현상에 건넬 말을 잠시 떠올리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는 성진을 돌아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왔어?”
“어? 어….”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성진은 살짝 안쪽으로 휘어진 바디펌 스타일의 머릿결을 보고 미용실까지 다녀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요사이 그녀가 뭘 하는지를 주의 깊게 보지 않은 것 같군. 얌전히 집에서 게임만 하고 있는 것 같았기에 성진도 마음을 놓고 혜진이랑 외박하거나 과활동을 했던 것이다. 설령 집에 있다곤 해도 그녀에 대한 관심이 옅어진 것은 사실이다. 성진은 이것이 비단 그녀가 최근 들어서 거의 집에서만 생활하는 패턴을 고수하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나오지 않을 본래의 선영을 기다리는 것은 이제 슬슬 무의미하다고 은연중에 여겨지기 때문일까.
“뭘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봐?”
마스카라까지 살짝 바르고 연한 루즈로 입술에 윤기를 내던 그녀는 문득 성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그제서야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가만히 서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휙 돌아섰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어디 누구라도 만나러 가는 거야? 안 하던 짓까지 다 하게.”
“어.”
“누구?”
“왜?”
“남자야?”
“글쎄.”
“왜 모호하게 대답해?”
“알고 싶어?”
“알고 싶다기보다는… 네가 걱정되니까 그렇지. 너도 알다시피 그… 육체적 관계를 심하게 맺으면 위험해지니까.”
성진은 무난한 당위성을 내었다고 생각했지만 선영은 거울만 응시하며 역시 시원스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구체적으로 어딜 가냐고 재차 따져보려던 성진은 그냥 같이 가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을 고쳐잡았다. 하지만 그가 침대에서 반쯤 엉덩이를 떼는 순간 선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젯밤도 누군가 만나느라 못 온 거야?”
“어? 어… 그렇긴 한데.”
“누구?”
“왜?”
“여자야?”
“글쎄.”
“왜 모호하게 대답해?”
성진은 그제서야 그녀가 입장을 바꾸어서 물어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입을 다물어버렸고 선영은 이만하면 될까 싶은 표정으로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보고 있었다.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이 톡하고 터지듯 열린다.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거면 따라올 생각도 하지 마.”
“야…. 나는 네가…….”
“나도 이젠 예전과 같은 위험한 상황이 어떤 건지 짐작하게 되었고, 그런 상황이 엿보이면 먼저 피할 거야. 무슨 어린애를 돌보는 것마냥 네가 계속 따라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나도 스스로 사회에 적응해야지.”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성진을 바라보는 선영. 자연스럽게 화장을 마친 그녀의 입가가 마치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 것처럼 올라갔다.
“이쁘지?”
성진은 할말을 잊었고, 선영은 화장대를 대충 정리한 후 한 켠에 미리 준비해둔 얇지만 따뜻해보이는 야상 점퍼를 걸치며 일어섰다. 그녀는 맵시 있는 스키니 청바지에 폴라티를 입고 있었고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는 한 구석에 걸려있는 기다란 거울로 걸어갔다. 모자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시늉으로 머리에 손가락을 이리저리 갖다 대보던 선영. 그녀는 이윽고 여전히 침대에 앉아있는 성진을 마주보며 엄지손가락으로 싱크대 쪽을 가리켰다.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따라간 성진은 곧 겹겹이 쌓여있는 식기류들을 보게 되었다. 선영은 싱긋 웃으며 손바닥을 올려 설거지 부탁한다는 시늉을 해보이고는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성진은 멍하니 그녀가 나간 문쪽을 바라보다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터벅터벅 싱크대로 걸어갔다. 그녀 말마따나 이상한 곳으로 갈 것 같지는 않았기에 뒤늦게라도 재차 따라가볼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꾸미고 아침부터 갈 곳이 있다는 건 분명 궁금하긴 하다. 학교 수업이나 동아리 활동 같은 데를 가는 건 아닐 것이다. 성진은 선영이 먹어치운 식기들을 씻으며 그녀가 갈만한 곳을 이리저리 추론해보았다. 달그락, 달그락….
“…칫. 자기가 먹은 것 정도는 좀 씻으라고. 설거지를 바로 안 하면 찌꺼기들이 눌어붙어서 잘 안 닦인다는 것도 모르나.”
성진은 식기들에 수세미질을 박박 하면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의 중얼거림이 끝나자 성진의 고무장갑 낀 손은 서서히 멈추었다. 마치 빠져드는 생각마냥 다가오는 침묵처럼. 달그락… 쏴아.
“…….”
한동안 그릇을 씻을 생각도 않은 채 싱크대 수도로부터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던 성진. 선영이 간 곳을 생각해낸 건 아니다. 그와는 별도의 상념이 그의 머릿속을 찾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딘가 허전한 그의 기분을 증언하는 상념.
그는 문득 원룸 한쪽에 놓인 컴퓨터로 눈길이 갔다. 컴퓨터는 켜져 있었다. 선영이 깜빡하고 안 끄고 갔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식기들을 대충 헹구어서 건조대위에 올려놓고는 고무장갑을 벗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모처럼의 휴강이 그를 반기었기에 성진은 오늘 하루 푹 쉬면서(혜진에게 뺏긴 정기(?)도 보충할 겸) 기분전환 겸 게임을 할 요량이었다.
그는 선영의 아이디로 ‘카잔 전쟁’ 대기실 화면이 띄워져있는 것을 보았을 때만 해도 별 생각 없이 로그아웃 후 자신의 계정으로 접속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의자에 앉아서 마우스를 붙잡은 순간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커서를 로그아웃 메뉴로 이동하지 않고 대신 채팅창의 스크롤바를 위로 쭉 올려보았다. 선영이 채팅귓속말로 누군가와 대화한 내용이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해신의창…? 이 녀석은 누구지?”
물론 상대도 접속을 끊은 지 오래였기에 직접 물어볼수는 없었고 성진은 그녀와 그 누군가의 대화기록을 보며 추론해야 했다. 문득 그는 선영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정도는 그녀의 부주의에 따른 대가 정도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넘겨짚고는 채팅창을 읽어보았다. 사실 내용도 별 거 없었다. 그저 ‘카잔 전쟁’을 하다 온라인에서 만난 불특정인이겠거니 생각될법한 단조로운 안부 교환 정도였다.
단, 한 부분만 제외하면.
「오늘이 그 날인가?」
「그래」
「그래…. 그럼 잘 다녀와라, 선영아」
그 날? 그 날이 무슨 의미지? 선영이 방금 나간 것과 관련있는 부분은 분명한데…. 다녀오라고 하는 걸 보면 여기 ‘해신의창’이란 아이디를 쓰는 녀석을 만나러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 어디로?
성진은 차라리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냥 뒤쫓아 나가볼걸, 하나하나마다 신경 쓰이게 하는 제멋대로의 성격 같으니라고. 추가로 성진은 그 누군가가 선영의 이름을 부르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디지털 문자이지만 어쩐지 다정함이 담겨져 있는 어투였던 것이다. 게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그들은 알고 있지만 성진은 모르는 것.
그 때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핸드폰음이 울렸고, 성진은 괜히 심통이 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그것을 빼들어 하마터면 바닥에 팽개칠뻔했다. 순간 그는 그 팔힘을 멈칫하고 제지했다. 혜진의 메시지라고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오빠, 잘 들어갔어? 어젯밤 나 때문에 너무 힘들었지? 후훗… 미안해, 오빠. 하지만 나도 더 오빠를 기분 좋게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어. 오늘 강의 휴강이라고 했었나? 좋겠다…. 나는 이제 좀 있으면 수업 들어가봐야 해. 히잉…」
성진은 메시지를 보고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꺼림칙함이 남아있는 웃음이었다. 성진은 일어선 채 자신의 손에 들린 핸드폰의 혜진 메시지와 모니터의 선영 메시지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물론 선영 쪽은 다른 남자와의 대화였기에 성진은 다시금 불쾌하면서도 묘한 기분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성진은 곧 자신이 이 쓸데 없는 대화 기록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다고 다잡았다. 선영이 누구와 친하게 지내든 인연이 닿았든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그녀는 본래의 선영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현재의 선영이기에, 그녀를 보호해주고 싶을지언정 좋아하는 감정은 없다. 본래의 선영에게 끌린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녀가 안 나오겠다는데 무슨 수가 있겠는가? 내가 무슨 희대의 일편단심 민들레도 아니고.
나는 그저 나를 좋아하는 혜진과 알콩달콩 연애의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다…. 성진은 그렇게 생각하곤 핸드폰을 열었다닫았다 하며 짐짓 상쾌하게 방안을 선회하듯 걸어 돌았다. 휘파람이라도 불어볼 것처럼, 오늘 그녀가 수업이 끝나면 같이 영화라도 한편 보러 갈까 생각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