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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은 물론 달빛도 무색하게 만드는 현대의 네온사인 조명은 길거리 옆을 형형색색으로 비추었다. 그리고 성진은 그것을 피하기라도 하듯 조금 떨어진 어두운 구석 쪽으로 걸었다. 나이트 클럽이 존재하는 거리인 만큼 각종 술집과 모텔 등이 줄지어 서있었고 그 옆으로는 젊은 남녀들이 비밀스러운 웃음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짝을 지어 걷는다. 커플이나 파트너가 아닌 사람을 도리어 찾기 어려운 환락가를 통과하며 성진은 밤하늘을 향해 한숨을 한번 길게 내쉬었다. 짙은 연기까지는 아니어도 희뿌연 연기가 허공에 머물다 스러졌다.
성진은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방금까지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메시지가 로딩되었고, 그 내용은 타인이 보기에 참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 정도로 평범하기까지 했다.
「오빠! 나 MT 다녀올 동안 잘 있었어? 주말 잠깐 못 본 것뿐인데 되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헤헷. 근데 오빠는 오늘 내내 학교에서 보지도 않고 연락 한번 없고… 무슨 일 있어? 나 오빠 보고 싶어」
‘강혜진….’
물론 MT 가기 바로 전날까지도 만났던 만큼 성진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영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지금, 성진으로 하여금 그녀의 안부까지 신경 쓸 정도로 행동하지는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나이트룸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할 생각이었기에 그녀에게 일부러 연락도 하지 않고 무관심한 것처럼 넘겼던 것이다.
평소 같으면 자신을 보고 싶다는 이쁘장한 후배의 이와 같은 메시지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법하지만, 성진은 웃는 대신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메시지를 보낸 상대에게 연결되는 통화음. 얼마간의 전화 연결 소리가 성진의 귓가를 맴돌더니 익숙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 오빠? -
“그래, 나다. 강혜진.”
- 메시지 보구 연락 준거구나, 그치? -
반가움과 함께 딴에는 꼭 먼저 문자를 보내야 연락을 주냐고 살짝 섭섭한 뉘앙스를 비쳤다. 성진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전자는 완전히 무시한 채 격앙된 어조로 딱딱하게 일렀다.
“도대체 이 늦은 시간에 문자메시지라니 남 생각은 조금이라도 하는 거냐? 게다가 뭐, 연락 한번 없어? 내가 무슨 이유로 네 엠티 다녀온 날까지 챙겨가며 잘다녀왔냐는 인사를 해야 하는 거냐?”
‘왜 그래, 오빠? 무슨 일 있어?’라든지 ‘그러지 마 오빠, 무섭단 말야’라든지 혹은 충격을 먹어서 아무 말도 없길 내심 기대해보는 성진. 자, 어떤 반응이 나올까? 루트형으로 기대해보는 것도 꽤나 흥미롭군.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 시뮬레이션 같은 미소녀 게임 등을 플레이하는 건가? 선택지에 따라 나오는 반응을 즐기는 것….
그리고 성진은 예상 밖의 상황이 항상 등장하는 현실의 구조를 인정해야 했다.
- 피, 아직 11시밖에 안 됐는걸. 그리고 뭐 그런 거에 그렇게 신경을 쓰고 그래? 미안하다 싶으면 연락하는 거고, 귀찮으면 그냥 넘기면 되는 걸 갖고. 오히려 오빠가 그렇게 신경 쓰는 게 이상하다? -
성진은 그만 할말이 없어져버렸다. 이 녀석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그가 말문이 막혀서 어물쩡거리는 동안 혜진의 목소리가 다시금 핸드폰을 통해 흘러들어왔다.
- 오빠 지금 어디야? 바람소리랑 차소리 들리는 걸 보면 바깥 같은데, 이시간에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고 있어? -
“어? 어…… 일이 좀 있어서. 네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고.”
- 그래? 음…… -
잠깐의 정적. 그리고 어쩐지 재미있다는 음성으로 전해진 그녀의 목소리는 성진으로 하여금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 오빠, 지금 다른 여자랑 만나고 있지? -
“뭐? 야, 무슨 근거로…”
- 음…. 당황하는 걸 보면 내 직감이 맞는 것 같은데 -
그리고 혜진은 성진이 뭐라고 변명할 틈을 주지 않고 나긋한 음성으로 연이어서 말했다.
- 그래서 내 문자 메시지를 보고 그렇게 동요했구나. 오빠 착하네? 그런데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오빠는 나랑 정식으로 사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오빠의 사생활까지 간섭한다면 그건 오지랖이 되는 거겠지. 오히려 내가 미안한데 -
뭐가 미안하냐고 묻고 싶은 것을 참으며 성진은 길거리에 서서 가만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 오빠가 그렇게 방황하는 건 분명 안 좋은 일이 있어서이고 그럴 때 내가 힘이 되어줄 수 없기 때문일 거야. 게다가 오빠는 늘 그렇잖아? 자신이 힘들 때만 여자를 찾는다는 건 남자로서 이기적이라고 자책하고 그럴 때마다 날 더 안 만나려 하잖아. 하지만 이젠 좀 알아주었으면 해. 난 오빠를 좋아하고 나를 통해서 그런 오빠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그만큼 기쁜 것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오빠는 자괴감 같은 거 없이 마음껏 나를 활용해도 돼 -
성진은 감추고 싶은 자신의 내면까지 모조리 꿰뚫어보는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얼마나 혜진에게 신경 쓰고 있었는지, 그리고 혜진이 얼마나 자신을 좋아하는지. 학기 시작 때부터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졌던 시간 동안 혜진은 상당부분 성진을 이해해버렸고, 그 또한 혜진의 미모와 상냥함에 끌리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성진은 문득 지금 당장 혜진이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역시 입 밖으로 꺼내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좀 지나치게 섬세한 혜진은 성진의 그런 속내를 살짝 떠보기라도 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오빠가 마음 놓고 행동하지 못할 것임은 알아. 아마 업소 같은 데 가서 잠시 바깥으로 나왔지만 다시 들어가진 못하겠지. 어쩌면 내 메시지 받을 때부터 영영 뛰쳐나와버렸는지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심하게 착각하는 건 아닐 거야. 그러니까 오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우리 좀 만나는 게 어때? -
“이 시간에? 어디서?”
- 알면서 다 묻는다, 오빠도 참. 후후…. 달아오른 몸 해소하지도 못했을 거 아냐? 내가 판을 다 깨버렸으니 내가 책임을 져야지 -
“니가 무슨 책임을 진다고?”
-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나로 만족할 수 없나 보다. 히잉… -
성진은 내숭떠는 자신과 그녀의 마음에도 없는 자학에 따른 의미 없는 대치를 종결시키기로 했다. 무엇보다 혜진은 뭇 여자들끼리도 동경의 대상이 될 정도로 최고의 미모와 테크닉을 겸비한 여자이기도 했으니. 성진은 근처 모텔의 위치를 훑어본 후 약속 장소를 말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층 쾌활해진 음성이 그의 핸드폰을 통해 그녀에게 전달되어진다.
“그래, 이 잘나신 후배 녀석아. 어디 네 뜻대로 한번 해보자고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