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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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은 한 가지를 목표 삼아 행동할 때 집중력이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도무지 그녀에게 방해라는 외부적 요소를 무시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선영은 음성 채팅이라도 지원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정신없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컴퓨터 모니터의 ‘카잔 전쟁’ 유닛들은 그녀의 손놀림에 따라 복잡하면서도 긴밀하게 움직였다. 상대는 엄청난 경기 수에 승률 80%이상을 자랑하는 고수였고 선영은 간만에 자신의 실력을 더욱 상승시켜줄 적절한 상대라 생각하며 고도의 정신 집중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화면 하단에 지속적으로 뜨는 귓속말 메시지가 그녀를 매우 거슬리게 했다. 물론 상대가 그녀의 심리를 이용할 목적 등으로 날리는 메시지는 아니었다. 게임의 승부와는 전혀 관계 없는 제 3자의 메시지였기에 그녀의 짜증은 기본베이스로 깔리었고, 그 장본인 또한 현재의 선영과 무관하다고 여겨질 사람이라는 게 짜증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몇 개의 부대에 중요한 명령을 완수시킨 선영은 잠깐의 틈 사이에 재빠르게 채팅을 입력했다. 답문으로 보내어진 그녀의 귓속말은 직접 보지 않아도 거부감의 뉘앙스가 적잖이 담겨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귀찮게 해, 창오빠? 자꾸 이런식이면 차단할거야」

「중요한 얘기야. 바쁜데 미안하지만 넌 늘상 게임이 끝나면 바로 나가버려서 언제 또 접속할지 모르니까…」

「지금 중요한 승부하고 있다고」

「그럼 그 판만 끝나고 잠시 대기실에서 채팅 좀 해볼 수 있을까?」

「난 이 상대가 맘에 들어서 몇 판 더할지도 몰라. 그리고 난 할 얘기 없는데? 더군다나 예전의 나와 창오빠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에겐 무슨 말이든 해봤자 의미가 없을 건 당신도 알 거 아냐?」

「네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그렇게 말해도 모르겠니?」

하지만 선영은 입을 다물어버리듯 채팅을 않고 다시 유닛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데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귓속말의 상대자에게 답답함을 가눌 길 없도록 만드는 행위의 표본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물론 선영도 그가 ‘생사가 걸린 중요한 문제’라는 표현을 몇 번씩이나 사용하는 것에 꺼림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로 하여금 태환과의 대화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기제가 하나 더 존재하고 있었다.

- 네 잃어버린 기억과 더불어서 미숙한 성지식을 이용해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존재는 너도 경험해봤듯이 널리고 널렸어. 그러니까 절대로 타인을 믿지 마. 아무리 친절하게 혹은 간절하게 요구한다고 해서 끌려가면 바로 돌변하는 게 사람이란 존재다.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서워 -

‘그렇게 말하는 김성진, 너는 믿어도 된다는 거냐.’

선영은 그의 경고를 기억하면서 혀를 쏙 빼물어 보였다. 그리곤 ‘해신의창’ 아이디로 귓속말 채팅이 올라오는 걸 철저히 무시하며 마우스를 열심히 놀렸다.

문득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성진의 원룸 한 구석에 있는 탁상시계는 저녁 7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고 아직도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는 걸로 보아 또 누굴 만나러 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혼자 밥을 챙겨먹어야 하는 귀찮음에 직면했음을 깨닫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그 귀찮음을 조금이라도 늦게 맞이하기 위한 의미 없는 안주처럼 상대와 몇 판의 승부를 더 벌였다.

체력이 떨어진 후반 1판을 제외하고는 모두 승리로 이끌어버린 선영은 나름대로 결과에 만족하며 대기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배고픔에 곧바로 밥을 차리러 일어나기 전에 ‘해신의창’ 아이디에게 귓속말 채팅을 입력해갔다. 물론 갑작스런 심적인 변화가 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집요한 노력에 따른 결과에 더 가까운 부분이었다.

「참으로 끈질기군, 창오빠. 지금 8시 반인 것 알지? 나 배고파 죽겠으니까 간단하게 말해봐」

태환은 그녀가 게임을 끝마칠때까지 자신도 식사를 안 하고 약 2시간 가량 모니터만 바라보며 기다렸다고 투덜대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황의 심각함에 따른 심적 부담감은 다급해진 그로 하여금 꽤나 직설적인 권유를 내뱉도록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이쪽으로 와서 나와 같이 지내, 일단」

「뭐…?」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지. 아무튼 네가 있는 그곳은 너무 위험해」

선영은 잠시 짜증이 사라지며 그 자리를 어이없음이 들어차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피식피식 웃으며 채팅을 입력해나갔다.

「그 말 하려고 지금까지 기다린 거야? 참 대단하다, 창오빠. 그리고 미안하지만 나는 모르는 남자가 같이 있자고 하는 걸 곧이곧대로 들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거든?」

미약한 지식은 때로는 일을 더 꼬이게 만든다. 태환은 선영이 아예 남녀 관계를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잘 알고 있기에 직설적인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채주길 바랐지만 선영의 성(性)지식은 기껏해야 중학생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태환은 한숨을 담아서 다시금 채팅을 입력해나갔다.

「이미 예전의 대화로 나는 네 옛 남친이라는 점이 증명되지 않았니? 네가 그쪽에 있으면서 자꾸 강제로 성행위를 당해 본래의 네가 끌어올려지기 때문에 위험해서 하는 말이야. 여기는 그래도 안정적으로 가족이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니 잘 얘기만 하면 너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해결 방안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본래의 내가 끌어올려지는 건 전에도 알았잖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새삼스레 위험하다고 하는 거야?」

「그건……」

태환은 이것 또한 만나서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지만 현재로선 여의치 않았기에 채팅으로라도 겨우겨우 납득시킬만한 단어를 조합해야 했다. 무의식의 심연 속에 잠식된 본래의 선영이 강제적으로 자꾸 끌어올려지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로 그녀의 내부에 머물러버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녀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내용이 길게 이어졌다. 태환이 올리는 귓속말 택스트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선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했다.

「그런 끔찍한 상황까지 임박해오고 있다면, 왜 본래의 나는 끌어올려졌을 때 다시 자신의 목숨을 끊지 않는 거지? 원래 나는 죽으려고 했던 몸이잖아」

「죽을 때의 고통이 너무 심해서 차마 다시 자살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선영은 마치 눈앞에 창오빠가 있는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아닐 거야. 본래의 나는 나도 잘 알아. 그녀는 죽을 때의 고통을 두려워할 여자가 아냐. 물론 끔찍하긴 하지만 내가 만나본 바로는 그녀는 죽은 거나 다름없는 무의식의 세계를 더 지향하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그런 고통은 감수할 거야」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그녀는 끌어올려졌을 때 언제든지 스스로 목숨을 다시 끊을 수 있어.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고, 굳이 내게 이런 잔인한 부탁을 했지?」

그제서야 자신이 받은 부탁에 이레귤러적인 면이 있음을 깨달은 태환. 감성에 젖어든 불필요한 행위는 본래의 선영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고, 그런 그녀의 성격을 잘 아는 현재의 선영과 태환은 각자 채팅을 중단한 채 원인을 찾아보는 상념에 빠졌다. 하지만 뾰족한 원인은 떠오르지 않는다.

한참 후, 그나마 현재의 선영보다는 ‘잘 아는’ 방면쪽에서 원인을 고심해보던 태환이 느릿하게 채팅귓속말을 입력해나갔다.

「그녀 스스로 죽지 못하게 붙잡는 누군가가… 있어서 아닐까?」

「죽지 못하게 한다고? 무슨 뜻이지?」

「나는 아닐 거야. 그녀와 나는 이미 헤어진 지 오래고 그럴 만한 기제가 발현될 단계와는 멀어……. 혹시, 그녀에게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나? 가족은… 아닐 테고」

본래의 선영 가족 관계에 대해서 잘 아는 태환은 뒷부분을 입력하는 데 조금 주춤했다. 하지만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 입력했고, 그걸 본 현재의 선영 또한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침묵. 여전히 돌출되지 않는 안개와도 같은 원인에 답답해진 태환이 그녀에게 실마리를 더 찾기 위한 몸부림과도 같은 채팅귓속말을 입력했다.

「혹시 본래의 네가 나왔을 때 하던 행동이나 말을 현재의 너도 기억하고 있지 않아?」

선영은 이번에도 창오빠를 면전에 둔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으며 채팅을 입력했다.

「나는 그녀의 일부분일 뿐이야…. 굳이 비유하자면 그녀가 뒤에서 내세우고 있는 꼭두각시랄까. 따라서 본래의 그녀가 끌어올려졌을 때 현재 내가 하는 행동과 말 등은 모두 그녀의 기억 속에 자리잡지만, 반대로 나는 그녀가 했던 행동과 말을 공유하지 못해. 본체나 다름없는 그녀는 내게 생활에 필요한 지식만을 단방향적으로 보내고 있어. 물론 그런 지식 또한 내가 완전히 섭렵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점 또한 두말할 필요가 없고」

「주도면밀하군」

본래의 선영 의지가 어디까지 작용하는지는 몰랐지만 태환은 그렇게 소감을 한마디로 타이핑하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복잡해지는 머리를 가눌 길이 없어 그는 담배라도 하나 물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허공에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다시 고쳐 앉았다. 사실 여유 있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현재의 선영은 여전히 그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않고 있었고 언제 곧바로 로그아웃을 해버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쪽으로 올 생각은 없니? 지금 당장 대답하라고 하진 않겠어. 연락처를 남길 테니 결심이 서면 바로 전화 줘」

‘되도록 빨리 정하는 게 좋을 거야’를 덧붙이려던 태환은 손가락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선영이 먼저 대답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안 가. 아마 이 생각은 변함없을 걸?」

「왜 그렇게 생각하지?」

「먼저, 창오빠가 거주하는 곳은 내가 다니는 학교와 너무 멀어. 내 다쳤던 다리가 아직 약간 불편하단 점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창오빠를 신뢰할 수가 없어. 예전의 나야 어쨌을진 모르겠지만 난 지금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집에 가야 한다는 거잖아. 왜 오프라인으로 먼저 만나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 거지, 창오빠는?」

「시간이 없잖아. 그리고 네가 말했듯 현재의 너와는 만나봤자 통할 수 있는 얘기가 없다는 점도 있었고」

「그것이 그렇게 걱정되는 사람의 집에 한번 찾아와보지도 못할 이유란 말이군…?」

별로 인정하는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태환은 조금 놀랐다. 사랑에 관해 잘 모르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태환은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특수한 질환 비슷한 것을 얘기해야 하나라는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선영은 그가 새로운 문제의 전환점을 제대로 섭렵할만한 여유를 제공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나는 그러한 이유로 갈 수 없어」

「그곳에 있는 것도 불안하긴 마찬가지 아닌가?」

「성진이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하던걸. 뭐 상황이 이상스레 녀석의 뜻대로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날 지켜주겠다고 하는 걸 보면 나름 안심은 돼. 사실 치료비도 걔가 다 대주고 얹혀 사는 비용도 모두 부담하고 있으니 현재로선 그나마 가장 믿을만하달까」

태환은 그녀의 거절에 실망하기에 앞서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어쩐지 예전부터 자꾸 거론된 익숙한 이름이 그의 직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태환은 황급히 자신의 가설을 확인해보기 위한 타이핑을 해나갔다.

「혹시 널 돌봐주는 그 김성진이란 녀석이… 본래의 네가 신경 쓰고 있는……?」

「글쎄, 어떨까」

선영도 전에 붉은 비가 내리는 자신의 내면적 공간 속에서 본래의 자신과 조우했던 일을 떠올리고는 궁금해졌다. 하지만 현재로선 확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그렇게 일축하고는 간단한 인사 후 로그아웃해버렸다.

태환은 손가락으로 입술 밑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문득 그는 현재의 선영과 같이 지낸다는 김성진을 만나봐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럴 수 없는 자신의 현 상태를 되새겼다. 성진의 연락처나 집 주소를 모르는 것 정도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보다 고질적인 문제가 태환을 감싸고 있었고, 그는 이것이 쉽게 풀리지 않을 일로 엮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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