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 오후임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해는 중천에 높이 떠서 화창함을 발산하고 있었다. 겨울로 접어드는 쌀쌀한 날씨도 그 햇살의 존재에 잠시 움찔하여 물러선 듯하다. 그리고 모처럼 활기찬 분위기를 띠는 캠퍼스에서 조금 동떨어진 한 공터에는 잠시의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퍼억-!
동혁은 그 퉁퉁하고 큰 체구에 걸맞도록 자욱한 먼지를 흩뿌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먹이 날아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머리를 한 손을 붙잡은 채 고개를 휘휘 내저어보았고, 성진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다.
“일어나.”
동혁은 비척비척 일어섰고 성진은 그가 제대로 다리를 뻗을 만큼 일어서기도 전에 한번 더 그의 안면을 후려쳤다. 동혁은 이번엔 고개가 완전히 옆으로 꺾이며 바닥에 볼품없이 쓰러졌다. 그는 시큰거리는 볼을 감싸쥐었고 입안은 터진 듯 붉은 피가 입가로 주륵 새어나왔다.
“일어나.”
성진은 똑같으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중압감으로 한결같이 말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는 후배 규한이 동혁의 안경을 손에 든 채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꽤나 친절하게도 성진은 동혁에게 미리 안경을 벗도록 지시했고, 덕분에 얻어터지면서도 비싼 안경에 손상이 가는 희생까진 도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혁은 현재 그런 성진의 배려(?)에 감사할 생각 따윈 들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성진의 주먹은 날카로운 주인의 성향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매서웠고 동혁은 지금 당장의 아픔을 감당하기만도 여의치 않아보였다.
몇 차례의 타격이 더 이어졌고, 쓰러진 동혁이 일어나는 게 지체되자 성진은 발로 사정없이 그의 배를 걷어찼다. 동혁은 손을 뻗어 바닥을 지탱해서 간신히 굴러가는 걸 방지했지만 사실 그런 노력은 별 쓸모가 없었다. 성진이 거의 곧바로 동혁의 멱살을 쥐어서 강제로 몸을 일으켜세웠기 때문이다.
“니가 사람이냐? 어? 정상인한테도 그럴 수 없는 걸 하물며 다쳤으니 잘 봐주라고 한 애한테 그딴 짓을 해? 말해봐 이 새끼야!”
그 큰 몸을 한 손으로 일으켜 세우느라 성진의 팔이 무리함을 호소하듯 경련을 일으켰지만, 그는 팔이 꺾여도 상관없다는 듯 동혁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동혁은 증오심에 이글거리는 그의 눈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성진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주먹을 내질렀다. 옆얼굴을 강타당한 동혁은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고 건물 벽에 등을 기대며 반쯤 쓰러져 앉았다.
하지만 성진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벽에 기대여 물러서지도 못하는 동혁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짓밟듯이 발로 연이어 가격했다. 동혁의 옷은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움츠린 몸은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비루했다. 성진은 쌓인 무언가를 풀어내기라도 하듯 소리지르며 동혁을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그래 놓고 전화로 뭐? 안 취해? 걔가 스스로 나가?”
파악-!
“아무 말 안 하고 있었으면,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콰악-!
“아주 안에까지 제대로 다 해 놨더라? 너 대체 뒷일을 어떻게 감당할려고….”
그리고 성진이 한번 더 내려찍으려고 다리를 들어올렸을 때였다. 언제까지고 쓰러져 죽은 듯이 방어만 할 줄 알았던 동혁이 갑자기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 성진은 이전까지 하던 행동을 완수하지 못하고 주춤하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동혁은 꽤 큰 몸집만큼 키도 성진보다 약간 컸고, 그래서 급작스럽게 반전된 분위기마냥 시선에서 압도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진이 자세를 바로잡는 짧은 틈에 동혁은 코와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을 생각도 않고 곧바로 말했다. 꼿꼿하게 선 자세 그대로.
“이제 그만 하지?”
“뭐…?”
“그만하라고. 강간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한다면 성폭행 관련으로 경찰에 신고하든지 하면 될 거 아냐.”
성진은 잠시 기가 막혔다. 그는 한 손을 허리에 얹은 채로 동혁을 삐딱하게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 정말 내 친구 맞냐?”
하지만 동혁은 그의 말을 듣는지마는지 그제서야 손등으로 코와 입에 흐르는 피를 훔쳐내었다. 그리곤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훑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성진은 다시금 울컥해서 주먹을 들어올렸다.
“이 자식이…!”
그 때 얼마간 떨어져있던 규한이 달려와서 그런 그를 제지했다. 안경을 한 손에 들고 있느라 성진의 팔을 끌어내는 그의 제지는 어설프기 짝이없었지만 효과는 있었다. 한참을 두들겨팬 성진의 입장에서는 꽤 지쳐있었고, 그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규한과 함께 비척비척 뒤로 물러섰다.
“그만해요. 그만… 선배.”
“이거 놔! 저 자식 전혀 반성하는 기미가 없잖아?”
“네 녀석이 만족할만한 반성을 바라는 거겠지.”
다시 이쪽을 바라보며 입을 여는 동혁. 성진은 그런 그의 말에 금방이라도 재차 달려들듯한 동작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녀의 미모에 빠진 거냐? 아니면 한 집에 살다보니 없던 정이라도 생긴 건가?”
“무슨 뜬금없는 소릴 하는 거야!”
“마치 그녀가 네 애인이라도 되는 양 행세하지 말라는 거다. 대체 네가 이렇게까지 나서는 이유가 뭔데? 네가 말한 그 친구라는 관계도 뒤엎을 정도의 정의감에 불타는 거냐? 단순한 보호자라며. 지금도 네가 보살펴줘야 할만큼 다쳤는지부터가 의문이 들지만.”
성진은 뭐라고 반박하려다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복잡한 내면적 변화를 이 녀석에게 일일이 납득하도록 설명을 해야 하는 건가? 그러나 이미 언급하지 못한 부분도 있기 때문에 성진은 더 이상 그를 두들겨팰 당위성을 떠올리지 못했다. 성진은 뒤에서 제지하는 규한의 한쪽 팔을 뿌리치듯 털어내며 내뱉었다.
“궤변은 집어치워. 관계 없다면 아무 여자나 강간하는 걸 지켜만 봐야 한다는 거냐?”
“내가 맞을만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굳이 신고한다고 해도 할말 없다는 것도 알고. 그런데 너.”
성진은 동혁과 눈이 마주치는 게 왠지 꺼림칙해짐을 느꼈다.
“거울이나 좀 보고 얘기했음 좋겠군.”
성진은 결국 그에게서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렸고, 옆의 규한이 ‘성진 선배 지금 복수의 화신이 깃든 감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표상으로 사진을 찍어두면 볼만할 것 같아요’라는 부연 설명이 담긴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도 외면했다.
약 몇 초 후, 동혁 역시 성진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건 성진에게 다른 방향으로 꽂아오는 화살과 같은 기분을 안겨주었다.
“혜진인 어떡할 거야?”
“걔는 또 왜.”
“몰라서 묻냐? 걔가 널 좋아하는 것은 비단 그때 첫만남 자리에서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알아챌 정도인데. 요새 너희 둘이 얼마나 자주 붙어다니는지 정작 너 자신은 잘 모르나본데,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도 남아.”
“네가 퍼뜨린 건 아니고?”
동혁은 그런 성진의 반박은 부정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픽하고 웃었다. 성진은 불필요하게 말을 퍼뜨리고 다닐 계제가 되지 않는, 그의 합리적인 성격을 인지하고는 그쯤에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동혁은 그 물음은 완벽하게 무시한 채 거의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어쩐지 주도권이 전환된 모습.
“설령 네가 그 선영인가 뭔가 하는 년하고도 사귀고 있다고 치자. 얄팍한 연애에 홀려서 툭하면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는, 우리 같은 이십 대 초반의 보편적인 시대의 눈물을 보는 것도 뭐 새삼스러운 건 아니니까. 네 진심은 어디에 있지? 이렇게 나를 쥐어팰 정도로 분노하게 만드는 그 선영인가? 그럼 혜진하고는 단순히 연애놀이를 하는 건가? 일종의 데이트메이트 이상의 감정은 없는 걸로? 혜진도 그걸 알고 인정하며 너와 만나고 있는 거냐?”
“…닥쳐! 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대?”
성진은 이번엔 규한이 제지할 틈도 주지 않고 단숨에 동혁 앞으로 달려와서 주먹을 쳐들었다. 하지만 동혁은 이번엔 눈을 감거나 방어 자세를 취하는 대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성진은 쳐든 주먹을 허공에 정지시킨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동혁의 말은 상당부분 그의 복잡한 내면을 구체화시키고 있었고, 그것을 부정하지 못하는 성진의 심경이 그로 하여금 상대방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었다.
“애인이라고 얘기하지도 못할 상대에 흔들려서 정신 없이 두들겨패고 있다니, 정말 친구 맞는지는 내 쪽에서 물어보고 싶을 정도군. 우리 사이가 이정도밖에 안 됐냐?”
“그래서 네 애인님인 윤지는 다른 여자를 겁탈한 후의 상황을 두눈으로 보고도 계속 너랑 사귀겠다고 했던 거냐? 참 대단하다.”
동혁도 그 말에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고 성진은 그런 그를 한동안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규한 옆을 지나쳐 몇 발자국 걸어갔다. 문득 성진은 내리쬐는 햇살에 입고 있던 재킷이 후덥지근해지기라도 한 듯 거칠게 벗어제꼈다. 그는 재킷을 바닥에 힘껏 내동댕이쳤다. 파악-!
“제기랄!”
이어서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성큼성큼 그 공터를 걸어 떠나갔다. 남겨진 동혁과 규한은 제각기 무덤덤하고 근심 섞인 눈길로 그런 성진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떠나자 공터는 갑자기 쥐 죽은 듯 적막감이 감돌았고, 아련하게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속에서 규한은 문득 정신을 차린 듯 동혁에게 달려왔다. 그는 재빨리 가방속에서 휴대용 티슈를 꺼내어 동혁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괜찮아요, 선배?”
하지만 동혁은 그런 그의 손길을 본채만채 여전히 성진이 사라진 방향만 바라보았다. 아무렇게나 구겨진 채 남겨진 그의 재킷 쪽으로.
“답지 않군. 저 녀석 요새 왜 저리 흔들리는 거야?”
한편, 쌀쌀한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겉옷 바람으로 큰 보폭을 내딛으며 걸어가던 성진은 바지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누르며 연락처를 검색해나갔다. 적당한 상대가 보이자 그는 통화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뭐야, 성진이냐? 간만이네. 무슨 일인데?”
“어, 형. 아니, 별일은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