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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질 속을 메우는 정액을 첫번째로 느꼈다면 두번째로 그녀의 감각을 사로잡은 건 두통이었다. 대행하던 녀석이 뭘 처먹은 건지 머리는 제정신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끈거렸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원인이 술 때문이란 걸 자각했다. 선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비단 대행하던 선영이 아니더라도 본래의 그녀는 술 자체가 약했다. 전혀 즐기는 편도 아니었고.
선영은 누군가가 누워있는 자신 위에서 살결을 맞비비고 있다는 감각을 세번째로 느꼈다.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가슴 위를 내려다보았다. 정신없이 젖가슴에 볼을 비벼대던 동혁은 문득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리곤 그녀가 멀쩡히 깨어있음을 알게 되자 경악하듯 입을 쩍하고 벌렸다.
“아… 그… 저… 어…….”
물론 깨어나든 말든 막나가겠다고 마음 먹었던 건 사실이었으나 그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한 사정 직전의 쾌감에 많이 기여한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정신을 완전히 잃고 있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또렷이 깨어날 수 있나? 하지만 선영은 늘상 그렇듯 별로 친절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동혁이 상황을 돌이켜볼 틈 따윈 제공하지 않은 채 강력한 일격을 선사해주었다. 정신이 바뀐 후로 자신의 질에 좆을 집어넣었던 모든 남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실 이번엔 그렇게 강한 일격도 아니었다. 그녀는 손날을 세워 뒤통수 급소 부분을 탁하고 내리쳤고, 동혁은 그녀의 몸 위에서 부르르 떨더니 깔끔하리만큼 바로 추욱 늘어져버렸다. 옷이 완전히 풀어헤쳐진 상태라 그가 엎어져있는 모습은 참으로 볼썽사나운 광경이었으나 선영은 웃지도 않고 그의 좆을 보지에서 뽑아낸 후 비척비척 일어섰다.
펜션 쪽방의 희미한 조명등만이 형형하게 밝히는 방. 그녀는 쓰러진 동혁을 뒤로한 채 자신의 팬티로 보지를 대충 닦고는 그것을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슬쩍 그를 돌아보면서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1박 2일의 엠티를 왔다면 그녀 성격상 갈아입을 속옷 정도는 가방속에 있을 것이었지만 지금의 선영에게 있어서 사실 그 부분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대행하던 선영 또한 자신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모든 경험을 ‘공유’한다. 그래서 그녀가 대행하는 동안 일어난 일들도 본래의 선영 또한 모두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의식의 세계에 잠겨있는 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두. 그건 의식이 돌아옴과 동시에 섭렵하게 되는 기억과도 같은 것이었으며, 그래서 선영은 성진의 친구한테서 자신이 범해졌음을 쉽게 자각할 수 있었다.
단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만 문제가 된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느끼는 시간은 마치 꿈 속의 그것과 비슷한지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선영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열어보았고, 요 근래 한 달 만에 세 번이나 원치 않는 현실로 돌아왔음을 깨닫고는 기가 찼다.
‘아니지. 오히려 이 기회에 확실히 ‘나간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겠지. 대행하던 녀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것 또한 나로 인해 원치않게 태어난 녀석이니.’
그녀는 잠긴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곤 복도로 나왔다. 본체나 마찬가지인 본래의 선영은 대행하던 선영이 보고 경험한 기억을, 반대일 상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되찾았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은 채 복도 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꺼질 듯 말 듯 계속해서 이어지던 술파티는 드디어 끝을 봤는지 조용했고 간간히 코고는 소리만 들려왔다. 보조등 외에는 모두 꺼놓아서 펜션 거실이나 복도나 모두 어두침침하기 그지없었다. 선영은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하며 그녀가 마음먹은 ‘일’을 치르기 위해 주방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거실 옆 복도를 지나칠 때쯤 문득 그 안에서 걸어나오는 누군가와 마주쳤다.
“선영 선… 아니, 선영아?”
“…….”
선영은 자신을 부르는 그 주인공이 누군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별로 동요하지도 않은 채 고개짓으로만 복도 입구쪽을 가리켰다.
“네 서방님 저쪽 방에 잠들어있으니 가봐.”
워낙에 감정 없는 톤이라 윤지는 ‘서방님’이란 표현에 웃지도 못하고 고개만 까딱거렸다. 그녀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선영을 보며 어디 가냐고 물어보려다 그것도 그냥 포기해버렸다. 뭐 마실거라도 찾아 다니는 건가?
그렇게 둘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떨어졌고, 선영은 거의 다 나은 다리를 조금씩 절뚝거리며 주방 내부로 들어갔다. 펜션 주방은 간단한 간이 싱크대와 식탁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주방은 보조등 하나 없이 어두침침했고, 그래서 선영은 창문으로 스며드는 도시 외부에서나 의지할만한 달빛에 목표물을 찾아나갔다.
곧 그것은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요리를 하는 데 쓰였을 부엌칼이 싱크대 한쪽에 놓여있는 것을 보고는 손을 뻗었다. 그리곤 자루 부분을 움켜쥐었다. 살아있는 자의 힘에 의해 일시적인 생명력이 부여된 것마냥 서서히 들려진 그 칼은 곧 선영의 눈앞에 수직으로 세워졌다. 잘 씻겨진 스테인리스 날이 달빛에 푸르스름하게 비쳐진다.
“…….”
선영은 칼날을 왼쪽 손목에 비스듬히 갖다 댔다.
날카로운 부엌칼 날은 선영의 여린 손목에 살며시 접촉했다. 차갑기보다는 섬뜩함이 베어나오는 감촉이 그녀의 팔을 타고 전해지고 있었으나 선영은 조금도 움찔하지 않았다. 선영은 탁한 눈동자로 칼날 부분과 손목의 동맥 부분을 면밀하게 조준해나갔다. 달빛은 주방 창문을 통해 꽤 잘 스며들어왔고, 그래서 선영은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게 조명등을 끈 상태에서 별 무리 없이 그것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미 한번 죽었던 그녀는 죽음 자체에는 별 두려움이 없었다. 단지 자신의 몸과 뇌를 괴롭힐 죽어가는 ‘과정’이 진저리날 뿐이었고, 한번에 죽지 않으면 ‘치료’라는 더 최악의 현실이 덮칠 것이었기에 확실하게 해야 했다. 그리고 사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도 별 문제는 없었다. 그녀의 지나갔던 과거 중에는 이런 자살 방법에 도움이 되는 경험도 존재했으며, 어떻게 힘을 주면 확실하게 목숨을 끊을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자신의 과거를 파노라마처럼 떠올려본 선영은 곧 핏하고 웃었다. 살아있는 사람처럼 왜 그래? 난 이미 죽은 것 아니었나? 선영. 그래, 넌 이미 죽었어. 그것은 네게 어울리지 않아. 죽음을 목전에 두고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네가 인생의 지나간 추억을 돌이켜보는 것은 캠퍼스 별관에서 떨어지기 직전 매달려있었던 그 때뿐이야.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매달려있었던.
죽지 말라고 붙잡아온 손에 매달려있었던.
“……!”
선영은 그 손이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그것을 지워버리기라도 하듯 눈을 날카롭게 떴다. 그리곤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동맥을 제대로 끊기 위한 목적으로 점철된 손가락들이 바짝 긴장했다. 그 손가락들을 관장하는 팔의 근육들도 순간 짧지만 팽창하듯 그녀의 의지에 부합했다. 그녀는 주저 없이 칼을 옆으로 그었다.
“…….”
그리고 그녀는 몸을 떨었다. 부들거렸다. 고개는 더욱 숙여졌고, 목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그녀의 얼굴에 늘어뜨려져 눈가를 가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미한 자국만 났을 뿐 피는 거의 나오지 않는 왼쪽 손목. 임무를 실패한 자책감마냥 칼자루를 쥔 그녀의 다른 쪽 손은 심하게 떨렸다. 이런 병신 같은 년. 미끄러진 거야? 그래, 미끄러졌겠지. 다시 제대로 해봐. 죽는 것 하나 제대로 못하는 멍청한 녀석.
그리고 선영은 칼자루를 제대로 쥐지도 못한 채 한참을 그 자세로 떨고만 있었다. 왜 그래? 대체 왜….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할 때인데….
어째서 그 녀석 생각이 나면서…….
선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나 왜 이렇지? 왜 그 녀석이…… 그 녀석이 왜…….
챙캉-! 타각-.
결국 바닥에 떨어뜨리고 마는 부엌칼. 그리고 선영은 두번째로 충격에 휩싸였다. 떨어뜨린 것은 칼만이 아니었다.
한 방울, 두 방울씩 칼 주변으로 떨어지는 알 수 없는 액체.
눈물…? 어째서…….
얼굴을 거의 가릴 정도로 늘어뜨린 머리칼 사이로 떨어지는 눈물들. 선영은 두 다리로 지탱하고 서있기 어려울 정도로 다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그렇게 주춤주춤 서있던 그녀는 결국 옆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대었다. 몸은 계속해서 떨렸다. 눈물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꽉 깨문 입술은 이제 거의 피가 나올 정도로 물려져 있었으나 그녀는 그것을 완화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알 수 없는 뜨거움에 속이 삭아 없어질 것만 같았기에. 심장을 옥죄는, 심장을 괴롭히는 몹쓸 감정이란 것은 잊어버리고 싶었던 그녀의 내면 깊숙한곳에서 다시금 끌어올려져서 사정없이 헤집어대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비스듬한 달빛만이 겉의 몸이라도 식혀주려는 듯 그녀를 시리도록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