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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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은 컴퓨터 앞에서 팔꿈치를 책상 위에 기댄 채 턱을 괴고는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때는 아침이라고도 점심이라고도 하기 애매한 오전이었고, 주말이자 동시에 그들의 엠티 날짜이기도 했다. 지금쯤이면 세라임 호수행 버스나 열차를 탔거나 타기 직전이겠군. 그렇게 생각한 성진은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기라도 하듯 고개를 내젓고는 모니터 옆 문서들을 훑어보았다.

선영이 없는 원룸 내부는 적막하기 그지없었고, 간만에 조용한 공간에서 그는 어제의 미팅 회의 자료를 주축으로 합동 발표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다. 분량이 꽤 많았기에 성진은 차라리 이 기회에 잘된 일이라 생각하곤 주말을 과제에 집중하여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 조금 쉬다가 납품 일을 하러 나가본다는, 꽤나 성실한 대학생의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진 나름대로 보이콧된 주말을 보람차게 보낸다는 계획에 반해, 자꾸만 심적으로 불안정하게 방해하는 요소가 있었다. 과제를 수행하기 시작한지 불과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의 머릿속은 잡생각으로 들어차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키보드 자판을 꾹 눌렀고 그에 따라 워드에는 의미모를 초성체가 쭈욱 길게 써져나갔다. 그리고 그는 얼른 그것을 다시 지우고 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멍한 시선이 창 밖으로 향하였다. 선영의 엠티를 축복하기라도 하듯 하늘은 높고 푸르기 그지없었고, 가끔씩 새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성진은 단순히 선영이 걱정되서 심적으로 불안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지 알려주기라도 하듯 우웅 하고 울리는 핸드폰 소리.

「오빠! 지금 열차타고 세라임 호수 펜션으로 가고 있다. 창밖 풍경이 장난 아니야. 이거 완전 애니메이션에서 보던 열차 밖 풍경이랑 흡사한데. 같이 갔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아쉽다…. 오빠한테도 전송해줄게. 함 봐봐」

문자와 함께 보내어진 사진에는 폰카로 찍은 산과 들판, 나무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배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래, 혜진….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던 녀석이기도 했지. 지금은 코스 활동도 잘 안 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만화나 애니에 대한 애착은 큰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성진은 피식 웃었다. 그리곤 그녀에게 답장을 보내기 위해 핸드폰 버튼을 꾹꾹 눌러나갔다.

「잘 봤어, 임마.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몸조심하고. 잘 놀다와. 요즘 많이 추워졌으니까 밤에 이불 잘 덮고 자고」

의례적인 인사와 별 다를 바 없는 문자를 보내고 난 성진은, 아무것도 아닌 것마냥 다시 시선을 모니터로 향했다. 하지만 다시 그의 머릿속은 혜진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져나가며 시선을 자신도모르게 옆에 놓인 핸드폰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다시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는 한숨을 폭하고 쉬었다.

‘강혜진….’

요즘 따라서 거의 매일 만나고 있는 그녀. 물론 성진 나름대로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리고 지친 심경을 위로할 겸 만나고 있는 점도 분명 있었으나 사실 그건 이제 거의 구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성진은 혜진을 만나지 않고서는 하루가 허전해지고 활력이 돌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도 사실상 주말이기 때문에 혜진과 밤새도록 섹스하고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시간을 보낼 게 기정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 나름대로 친목도 다져야했기에 엠티를 빠질 수 없었고, 오빠가 가지 말라면 안 가겠다고 하는 걸 신경쓰지 말라며 겨우(?) 보낸 상황이기도 했다.

성진은 처음엔 혜진이 일방적으로 자신을 좋아하고 그냥 섹스 몇번 나눈 엔조이 관계로 남을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틈날 때마다 자신을 좋아한다 한 것도 기껏해야 치기어린 얄팍한 사랑에 지나지 않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는 성진 그 자신이 그녀에게 점점 끌리고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어째서지? 혜진은 사실상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데. 여전히 주변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예쁘다는 걸 빼고는…….

그리고 성진은 얼마 안 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을 위해 타깃지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다른 누군가의 여자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 알면서도 한번도 그것에 관해 캐묻거나 하지 않았다. 성진이 힘든 일에 온통 정신을 뺏기고 있을 때도 그녀는 언제나 옆에서 미소지은 채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다른 누구는 전혀 관심 없는 것마냥 자신만 기다리는 여자.

하지만 그렇다고 성진은 그녀가 마냥 올 수 없는 사랑을 기다리고만 있는 바보 같은 여자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증거로 요즘 따라서 성진의 머릿속은 온통 혜진 생각으로 들어차고 있는 것이었다. 선영의 아픈 추억마저 그녀로 인해 잊혀져가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저 그녀만 만나면 가슴이 편안해지고 아픈 감정들이 모조리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갈망하는 사랑은 진전 하나 없이 끝나가는데, 오히려 엉뚱한 곳에서 사랑이 감싸오고 있군.’

성진은 그만 픽하고 웃고 싶어졌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뭔가를 주물럭거리고 있음을 깨닫고는 문득 고개를 내려보았다. 의자에 앉아서 옷 위로 꼿꼿하게 솟아오르기 시작한 자지를 손으로 매만지고 있던 것이었다. 혜진의 생각으로 그리 됐음을 자각한 그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채, 하지만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한숨 아닌 한숨을 쉬었다. 이거이거… 혜진이 만일 이 모습을 봤다면 아주 좋아 죽으려 하겠군.

그는 자지에서 손을 떼어 겨우 설레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하릴없이 핸드폰이나 열어보았다.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열어본 것이었는데, 타이밍이 꽤나 기막힐 정도로 바로 그 순간 문자가 왔다. 우우웅….

「선배! 오늘 밤도 납품일 끝나고 집까지 바래다주러 오실 거죠? 벌써부터 사회에 얽매여 엠티도 못가는 불쌍한 이들끼리 위로해보자구요. 저도 편의점 알바 때문에 못가는 처지. 흑흑」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미선의 문자 메시지였다. 그의 손가락이 익숙하게 핸드폰 버튼 사이를 이리저리 노닐면서 답장을 보낸다.

「새삼스레 뭘 확인하고 그래? 내가 언제 안 간 적 있었니. 그나저나 흑기사가 밤길 안전하게 모셔다주면 공주님은 어떠한 답례라도 하사하시는 게 이치 아니었습니까?」

「……그럼 공주님 키스라도 받아보실래요?」

성진은 순간 등을 의자에 깊게 기대면서 짧게 웃었다. 부끄러워서 오빠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녀석이 무리하고 앉아 있군. 성진은 문득 과제물들이 쌓인 컴퓨터 책상 위를 보고는 점심때를 향해 진전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는 그쯤에서 얼른 마무리 짓기로 마음먹고는 답장을 보냈다.

「농담이고, 이따 보자고. 이 선배님은 주말도 바쁘구나」

아르바이트 시간이라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런 문자를 보내고 참…. 오늘 뭔 바람이 불었나? 그러고 보면 미선도 꽤나 귀여운 후배긴 하지. 음……. 그렇게 생각한 성진은 또다시 시선이 창밖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이런. 내가 또 무슨 생각을.

성진은 혜진과 미선 생각을 모두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양 고개를 한번 세차게 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방 중앙으로 걸어가서 가벼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중학교 때는 보편적으로 물질의 기본적인 최소 입자를 원자라고 배우지. 고등학교 때는 약간 알기 어려운, 하지만 더 작은 입자인 쿼크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음으론 쿼크를 갖고 다방면으로 분석하고 토론을 하는 방식의 배움을 지향하는 것. 그것이 바로 대학교의 과정이란 거야.”

‘그리고 쿼크에 관해 진행된 연구 자료와 역사를 살펴보고, 앞으로 더 작은 입자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학회에 피력하는 게 대학원이란 과정이라 하겠지.’

술기운이 어느 정도 감돈 성수가 선배의 입장에서 잘난 듯 떠들고 있었고, 규한은 그것을 보면서 다음에 이어질 말을 예상해보았다. 1학기 OT때 했던 말을 그 후에도 엠티나 술자리 등등에서 몇 번이고 똑같이 말하고 있는 걸 성수 선배 자신은 알고 있을까? 아니나다를까 학창시절 배움의 과정을 표현한 그의 말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후배들도 이제는 질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규한이 예상했던 마무리 과정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음에 이어진 성수의 말은 모인 대부분의 이들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그나저나 은선영. 선영 선배… 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겠지? 여긴 3학년도 거의 없고, 선영 씨는 조기입학으로 나이가 2학년이랑 같으니까.”

“아… 응. 편하게 불러.”

“좀 자주 보자고. 사고가 있었다 하니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전에도 수업을 잘 안들어왔던데 무슨 일 있는 거야? 하긴, 시험 성적이 워낙 좋으니 학점 채우는 데는 별 영향 없는 것 같지만서도….”

“와, 선영 선배. 머리 되게 좋은가보다. 게다가 조기입학이라니… 대체 어느만큼 공부를 잘하면 그런 게 가능한 거죠? 한잔 받아요. 우리 1학년들 동경의 대상이 되겠어.”

“아하하, 별 거 아냐. 응… 고마워.”

규한은 살짝 의외의 시선으로 선영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뛰어난 미모만의 선배는 아니었군. 그녀는 후배들에게 둘러싸여 자연스럽게 술잔을 주고받았고,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이윽고 성수는 더 이상 말을 할 정신도 없어지도록 취해서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펜션 내부 바닥에는 서서히 먹다 남은 각종 안주들과 닭고기들, 그리고 술병들이 어지럽게 나뒹굴어갔다. 벌써 몇시간째 술파티가 진행되었군. 자신 없는 샌님으로만 똘똘 뭉친 학교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곤조가 있나 보네. 그렇게 생각한 규한은 바로 옆에 앉아있는 동혁 선배를 바라보았다.

기본적으로 주량이 좀 되는 동혁은 퉁퉁한 덩치의 몸을 처음 그 자리 그대로 앉은 채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종이컵으로 된 소주잔을 벌써 몇 번째 비우는지 모를 정도로 들이마시고 있었고, 윤지와 오붓하게 팔짱을 끼어 기분 좋게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그 자리에 모인 열댓 명 가량의 인원들 대부분이 늦은 시각만큼이나 제정신과 잠시 이별해있는 상태였다. 약삭빠르게 몸을 사린 규한만이 비교적 또렷한 정신으로 ‘엠티의 본 목적일지도 모를’ 그 술자리를 관망하고 있는 중이었다.

“야, 이규한!”

“네…? 네.”

규한은 갑자기 동혁이 자신을 큰 소리로 부르자 적당히 빼고 있는 게 들킨 사람처럼 쭈뼛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동혁의 목적은 후배를 추궁한다거나 하는 데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너 걔랑은 어떻게 됐냐?”

“걔라뇨?”

“지연이 말야. 예전에 성진이랑 했던 간단한 모임 때 소개시켜줬던 녀석 있잖아. 지금도 만나?”

규한은 머쓱하게 웃으며 시선을 딴 데로 두곤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게 저……. 잘 안 돼서….”

“에이, 싱거운 놈.”

동혁은 어차피 별 기대도 안 했다는 듯 술잔을 단숨에 비웠고 규한은 살짝 울컥해서 뭐라고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선배의 시선이 어딘가로 고정되어있는 걸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동혁은 붉어져 있는 얼굴, 게슴츠레하게 뜬 눈, 풀어진 듯 흐늘거리는 ‘술자리 분위기를 표면적으로 나타내는’ 여자들 사이에서 슬금슬금 일어서는 한 인영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수행해야 할 사명(?)과 관련된 점을 자각하자 각별히 주시하는 눈이 되었다.

“선영아? 어디 가?”

“으응…. 화장실. 간만에 마셨더니 머리가 좀 띵하네.”

“언제 그렇게 마셨냐? 혼자 갈 수 있겠어?”

선영은 머리칼을 옆으로 살짝 쓸어넘기곤 괜찮다는 의미로 생긋 웃어보였다. 동혁은 화장실이 펜션 바깥으로 나가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잠시 염려하는 표정이 되었지만 그뿐이었다. 동혁은 옆에서 잔을 채워주는 후배들의 이름을 기억해내는 데 정신을 쏠리게 되었다.

“동혁 선배. 윤지랑은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에요?”

“야! 니들 취했냐? 뭘 새삼스레 물어보고 그래.”

“그냥 같이 자주 다니는 것만 봤지, 그렇고 그런 사이인 줄 저희가 어떻게 확인해요. 쿡쿡. 이런 때가 아니면….”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윤지는 까르르 웃었고, 동혁은 짐짓 어깨를 펴면서 그녀와 가까이하게 된 계기를 소소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후배들의 경외감 어린 시선을 받게 되자 그는 과장을 약간 보태어 말하기 시작했고, 잠시 후 술자리 한가운데로 누군가가 걸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자는 줄만 알았던 성수가 깨어서 일어선 것이다.

아직 눈은 반쯤 감겨있었고, 서있는 모습이 위태로워보였지만 그는 잠시 주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는 데 성공했다. 그는 갑자기 그 중앙에서 술잔을 쭈욱 기울이더니 컵을 쥔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소리쳤다.

“자, 그럼 이쯤에서 분위기도 업할 겸 랜덤 넥스트 게임 한번 더!”

“뭐야, 또 게임이야?”

“벌써 몇 번째에요, 선배! 이제 좀 그만해요.”

하지만 성수는 물러설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씩 웃으며 좌중을 둘러보고는 임팩트를 주기 위한 제안을 했다.

“이번 벌칙은 술마시기 아니다. 이젠 다들 마실만큼 마셨으니 좀 더 쇼킹하게 놀아야지.”

“쇼킹하게라면…?”

“걸린 남자와 여자 각기 한명씩 뽑아서, 바로 이 자리에서 깜짝 키스! 키이이이스! 최고 아니냐?”

“아, 선배! 제발 자제 좀.”

“뭐야, 니들. 선배 말 안 들을 거냐? 뭐 어때, 학창시절 추억 만들기로 이만한 기회가 어디 있겠어!”

약간 진부하긴 하지만 꽤나 강경한 성격의 성수는 분위기를 압도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몇번의 야유에도 불구하고 직접 돌아다니며 게임에 적합한 상태로 자리를 배치해나갔다. 생기발랄한 몇 남녀의 응원에 그에게 합류했고, 절정에 달한 술파티는 다시 한번 ‘벌칙이 바뀐’ 게임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어머어머. 키스라니, 이것 봐. 어쩜 좋아…….”

혜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옆 친구들의 팔을 가볍게 툭툭 치면서 안절부절 못했고, 성수는 유독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지지만 않음 돼. 지지만’이라며 빠지지 말 것을 부추겼다. 윤지는 못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옆에 앉아있는 동혁을 돌아보았다. 그 때, 동혁이 윤지의 팔짱을 슬그머니 풀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어디 가요, 오빠?”

“응. 잠시 화장실. 나 빼고 먼저 진행하고 있으라 해.”

동혁은 별안간 다시 왁자지껄해지기 시작한 분위기로부터 잠시 빠져나오듯 복도로 나왔다. 주 술파티가 벌어지는 곳은 펜션 정중앙의 거실이었고, 복도는 칸으로 막혀져 좁고 긴 통로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그 복도를 지나 갑자기 어두워진 펜션 바깥을 조심스럽게 내딛으면서도 내심 맘에 안드는 듯 들릴락말락하게 투덜거렸다.

“기껏 아무도 터치 안하는 여기까지 와서, 하는 게 고작 시시하게 키스 게임이라니. 진부하구만.”

화장실에 도착한 동혁은 바지를 내리고 볼일을 보기 시작했고, 곧 그의 눈은 창문 바깥으로 향하였다. 세라임 호수의 잔잔한 물결이 둥실 떠오른 달빛을 은은하게 반사시키고 있었다. 꽤나 아름다운 한밤중의 절경에 그는 속으로 내심 혀를 내둘렀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그의 머릿속은 하나의 아쉬움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었지만.

‘하긴. 인원이 인원인 만큼 특별한 것 따윈 하지도, 일어나지도 않겠지. 학기 끝나기 전에 한번 더 소규모로 가서 바비큐 파티라도 열어볼까. 그나저나 혜진 녀석도 참…. 성진이랑 볼장 다 본 애가 키스 하나 갖고 조숙하게 안절부절 못하는 척하긴.’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다시 어둠이 그를 덮쳤지만 이젠 밤눈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에 올 때보다는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다. 왁자지껄한 술파티와 게임 소리가 펜션 바깥으로 조그맣게 흘러나왔고, 늦가을의 귀뚜라미 소리만 울려 퍼진다. 동혁은 선영이 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던 것을 떠올리고는 둘러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펜션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동혁은 자신의 임무를 무사히 견지했다는 일종의 기쁨과 동시에 서글픔도 느껴야 했다. 선영은 복도 마루바닥에 쓰러져 자고 있었다. 신발도 벗지 않은 걸로 보아 볼일을 보고 현관앞까지 왔는데 그대로 귀찮아서 엎어져있음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야, 선영아. 일어나. 일어나봐.”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보았으나 돌아오는 건 대답 없는 숨소리. 동혁은 한숨을 쉬고는 그녀의 신발을 벗겨내곤 한쪽 옆방으로 옮기기 위해 그녀를 들쳐업었다. 별로 많이 마신 것 같지도 않은데 왜이리 곯아떨어졌는지. 물론 그것은 동혁의 시각에서일 뿐이다. 정신이 바뀐 후로 술 경험이 한번도 없는 현재의 선영에게 있어선 그것에 익숙해질 틈도 없이 꽤 들어간 술기운이 먼저 그녀를 압도해버린 것을 동혁이 알아챌 리가 없었다.

처음엔 그저 부축할 생각이었으나 결과적으론 거의 들쳐업게 된 동혁은 순간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등에 업힌 선영의 부드러운 가슴이 옷 위로 동혁의 등에 밀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목 언저리까지 오는 늘어뜨린 머리칼은 동혁의 목을 살랑살랑 간지럽혔고, 그는 그러한 이성의 자극을 무시하려 애쓰며 옆방으로 간신히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펜션 복도에 붙어있는 조그만 쪽방은 희미한 조명등만이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동혁은 일단 이불을 펴서 선영을 눕인 후 허리를 펴면서도 자꾸 시선이 그녀에게 가는 걸 억제할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해서 옮겨진줄도 모르고 잠들어있는 선영은 두 팔을 힘없이 아무렇게나 펼쳐놓고 두 다리를 살짝 오무린 채 완전한 무방비로 누워있었다. 그녀의 재킷 안에 입혀진 검은색 바탕에 흰 줄무늬의 라운드티와 스키니 청바지를 입은 늘씬하게 잘 뻗어진 다리가 동혁을 유혹하듯 신선한 여대생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학기 초에 엄청난 미모로 다짜고짜 섹스하자고 다녀서 이슈가 되었던 여자지. 학교를 잘 안 나오는 그녀였기에 신입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만 않았다뿐이지 수많은 남자들의 구애를 받고도 남을 여자임이 분명했다.

-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니까 누구 하나 손대지 못하게 해 -

성진의 경고가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건 잠깐의 제지에 지나지 않았다. 술에 센 편이라곤 해도 동혁 또한 적잖게 술기운이 오른 상태였고, 그래서 방문을 슬그머니 잠그곤 자신의 안경을 고쳐쓰면서 중얼거렸다.

“다 낫지 않기는. 낮부터 아주 팔팔하더만.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애인 관계도 아닌데 동거하면서 성진 혼자만 재미보란 법 있나? 게다가…….”

동혁은 허겁지겁 선영의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리곤 그녀의 가슴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살짝 큰 듯하면서도 균형잡힌 그녀의 젖가슴이 줄무늬 라운드티 위로 동혁의 손에 말랑말랑하게 쥐어진다. 동혁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이리저리 눌러보았고 상당한 탄력감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런 미모를 가지고 이렇게 무방비로 쓰러져있는 것 자체가 죄라고.”

일반적인 ‘죄’에 대한 상식을 뒤집어엎어버리며 자기합리화를 이루어낸 동혁은 떨리는 손으로 선영의 재킷을 양쪽으로 거의 벗겨내었다. 팔소매가 그녀의 손목 부분까지 내려와 걸쳐졌고, 동혁은 곧 티셔츠까지 조심스럽게 위로 걷어내기 시작했다. 흘끗 그녀의 표정을 살핀 그는 선영이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음을 확인하자, 대담하게 그녀의 가슴 위까지 셔츠를 밀어올렸다.

동혁은 그만 탄성을 금치 못했다. 선영의 브래지어는 연분홍빛 색깔에 아름답게 무늬가 수놓아져있었고, 가장자리에 귀여운 레이스가 촘촘하게 달려있었다. 도대체 범해지는 걸 염두에 두고 온 건가? 성진이라면 쓸 데 없이 이런 걸 사 입냐고 투덜거렸을 그 속옷을 보며 동혁은 도무지 제지할 수 없는 자신을 느꼈다. 그녀의 가슴 아래로는 잘록한 허리라인이 길게 엉덩이까지 이어져있었고, 희고 매끄러운 배는 그녀의 숨소리에 따라서 살며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동혁은 선영의 브래지어를 잡아 위로 걷어올렸다. 급하게 올리느라 몇번이고 미끄러졌지만 결국 젖가슴 위로 들춰올리는 데 성공한 그는 얼른 고개를 숙여 유두를 입술로 물었다. 그리고는 혀로 살살 그 유두를 자극하며 주변을 이리저리 핥아갔다. 탄력있는 선영의 젖가슴이 그의 입술에 호응하듯 부드럽게 반응했다. 애무하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주는 최상급의 피부라 생각하며 동혁은 한참동안 그녀의 젖가슴을 핥고 빨아대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너무 시간을 지체하면 윤지를 비롯한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찾으러 돌아다닐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혁은 그러한 사실에 서글픔을 느끼며 한없이 함유하고 싶은 선영의 젖가슴으로부터 떠나 서서히 아래쪽으로 이동하며 핥아갔다. 모델같이 매끈한 그녀의 배 또한 동혁의 입술에 톡톡 튀듯 반응했다. 동혁은 그녀의 가슴 아래쪽부터 배꼽 부분까지 정신없이 핥고 빨기를 반복했다. 살며시 입술로 물어보기도 하고 키스한 상태에서 혀로 핥아가기도 했다.

“으응…….”

살짝 고개를 옆으로 한 상태로 누워있던 선영의 입에서 가벼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동혁은 순간 그녀가 깨었나 하고 얼른 고개를 들어봤지만, 머리카락들을 얼굴에 늘어뜨린 채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고 자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자극을 줬는데 깨어나지 않는다면… 동혁은 좀 더 대담하게 그녀의 아래쪽을 벗겨내기로 작정하고는 선영의 스키니 청바지 벨트를 풀어나갔다. 사실 지금 기분으로선 선영이 깨어난다 해도 강제로 진행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벨트를 모두 끄른 동혁은 서둘러서 그녀 청바지를 아래로 완전히 벗겨내었다. 짙은 청색의 양말을 신고 있는 선영의 한쪽 발목에만 걸쳐지다시피 벗겨내버린 동혁은 드러난 그녀의 팬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브래지어와 마찬가지로 연분홍빛 팬티는 역시 촘촘한 레이스들로 둘러싸여있었고, 굉장히 부드러운 실크 재질로 되어있었다. 어쩐지 그 중앙 부분이 촉촉하게 젖어있다는 기분을 받은 동혁은 자신도 모르게 덥썩 그 팬티를 입으로 물었다. 그리고는 선영의 보지 둔덕을 팬티 위로 느끼면서 천천히, 세밀하게 그곳을 빨아나가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핥으면 핥을수록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건 동혁 쪽이었다. 선영은 그저 정신을 잃은 채 자면서 이따금씩 본능적인 신음만 내고 있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보지도 조금씩 젖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축축하게 젖어가는 연분홍빛 팬티 위로 그녀의 보지 냄새를 맡으면서 자신의 침과 그녀의 애액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음을 느낀 동혁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수일을 굶은 짐승이 먹이를 발견한 것마냥 선영을 갈망하며 볼썽사나운 자세로 몸을 굽히고 정신없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하악… 하악… 하악…….”

츄르릅… 츄릅… 슈릅슈릅 츄읍…….

찔걱거리는 소리가 펜션의 좁은 방 안을 적나라하게 물들여나갔다. 동혁은 아예 그녀의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게 하곤 팬티를 핥았고, 조금 후엔 팬티 안쪽으로 혀를 살며시 집어넣어보기까지 했다. 소복하게 자라난 선영의 보지털들이 동혁의 혀를 살살 간지럽혔다. 수풀 속을 헤집기라도 하듯 밀고 들어간 동혁의 혀는 이윽고 그녀의 보지 균열을 발견하였고, 그 안쪽으로 혀를 집어넣어보았다. 팬티에 가려져서 그 작업(?)이 쉽지는 않았지만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보지 안쪽으로 혀 끝을 집어넣은 동혁은 곧바로 거기에 부합됨을 느꼈다. 그는 곧 게걸스럽게 혀를 떨면서 더 깊숙이 넣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선영의 다리가 살짝 오무려지며 안쪽 허벅지가 동혁의 볼에 와닿았다. 그는 정신을 차린 듯 흠칫 하고 몸을 떨고는 혀를 보지에서 빼어들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단순히 본능에 기인했음을 상기한 그는 그 혀를 그대로 선영의 허벅지로 이동시켰다. 그렇게 안쪽 허벅지를 핥고는 서서히 허벅지 둘레를 돌아가듯 혀를 이동시켜 골반 옆부분까지 침을 묻혔다. 그리고는 거기서 바로 팬티 끝부분을 입술과 이빨로 물고는 아래로 조금씩 벗겨내었다. 팬티 가장자리에 달린 레이스들이 하늘거리며 그의 입술을 간지럽혔고, 동혁은 그 기묘한 감각을 즐기며 계속해서 입으로 그녀의 팬티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팬티 가장자리를 오른쪽 왼쪽으로 번갈아 물어가며 어느 정도 벗겨낸 동혁은 곧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한 적나라한 보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희미한 방의 조명등은 오히려 검은 털이란 수풀 속에 자리한 보지를 더욱 야릇하게 비추었으며 동혁은 순간 급증하는 자신의 성욕을 제지할 수 없었다. 이 순간에는 그런 본능에 충실하는 게 ‘예의’라는, 또 한번의 기초 상식을 뒤엎으며 그는 그녀의 팬티를 완전히 벗겨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서 자신도 아랫도리를 모두 벗었다.

몇 인원이 화장실을 가는 듯 옆쪽 복도를 지나치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이미 단단히 잠겨있는 방문은 그의 행동에 별 제지란 영향력을 가하지 못하였다. 설령 잠겨 있지 않았다 할지라도 현재의 동혁으로선 이 상황을 탈피해야 할 행동을 이끌어내진 못할 것이었다. 그정도로 가슴이 뛰고 달아오른 그는 꼿꼿하게 부풀어오른 자지를 그녀의 보지 가까이로 서둘러 가져갔다.

한 손으로 선영의 다리를 옆으로 벌리고 한 손으로는 자신의 자지를 붙잡은 동혁은 귀두 끝을 그녀의 보지 구멍에 살며시 밀어넣었다. 이미 동혁의 침과 그녀의 애액으로 촉촉하게 젖은 보지는 주인의 의지가 어떠하든 간에 별 무리없이 그의 자지를 받아들였다. 동혁은 이젠 그녀가 깨어나도 별 상관없단 심산으로 길고 곧게 솟아난 자지를 그녀의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쑤우우우욱 푸욱.

“하읏…….”

몸을 움찔하며 본능적인 신음을 흘리는 선영. 동혁은 그녀가 행여나 크게 소리를 지를 것을 염두에 두어 거칠게 박아대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반쯤 빼어들었다가 깊숙이, 구석구석 쑤시듯 힘있게 자지를 밀어넣었고, 선영은 그에 따라 계속해서 몸을 움찔움찔 떨면서도 얕은 신음소리만 반복해서 내었다. 자지가 보지 속을 쑤셔 넣고 있는데도 전혀 깨어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동혁은 이젠 갈데까지 가보자고 생각하며 피스톤 운동을 점점 격렬하게 해대었다. 등 뒤로 풀어헤쳐진 그녀의 재킷이 이리저리 구겨졌고, 밀려올라간 줄무늬라운드 티셔츠와 브래지어 아래로 튀어나온 젖가슴은 희미한 조명등 빛에 미려한 명암을 남기고 있었다.

쑤욱 푸욱, 쑤욱 푸욱, 쑤욱 푸욱, 푹푹푹푹….

“헉헉… 허어억…… 윽…. 헉헉….”

거친 숨소리를 내며 동혁은 그녀의 보지 속에 정신없이 좆을 집어넣었다. 꽉꽉 조여주는 그녀의 보지 느낌은 실낱같이 남아있던 동혁의 이성마저도 간단히 흐트러뜨려버렸다. 자지를 박아대면 박아댈수록 더욱 더 미끈하게 선영의 보지는 동혁의 자지를 받아들였고, 그에 따라 동혁은 점차적으로 쾌감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선영의 보지털들이 동혁의 자지털과 맞물리며 역시 기묘한 쾌감의 촉매제가 되었다. 질 내부에서 분비된 애액은 묽은 좆물과 엉키어 그녀 회음을 타고 내려가 바닥에 깔린 이불을 촉촉하게 적시었다.

동혁은 이제 그녀의 가슴 옆 바닥에 손바닥을 지탱하고는 정신없이 허리를 움직여서 누워있는 선영의 보지 속에 좆을 처박아대었다. 푹푹푹푹 찌걱, 찌걱, 찌걱… 퍼억, 퍼억. 선영의 보짓살과 질 내부는 그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 정도로 기분좋게 조여대었고 동혁은 급증하는 사정감을 제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채로 사정하지 않고 그녀의 보지 속에서 자지를 빼어들었다간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무언의 압박 같은 게 내면 속에서 스멀스멀 옥죄어오고 있었다. 동혁은 그 기분을 헛되이 보내고싶지 않아 이젠 아예 대놓고 소리를 지르며 자지를 박아대었다.

“으아아아…… 아아아아아….”

퍽퍽퍽퍽퍽퍽. 푹푹푹 쑤욱쑤욱.

“하… 읏……. 으응, 으응…….”

이미 몸은 깨어버렸지만 정신은 여전히 심연 속을 거니는 듯 선영은 그저 흐트러진 머릿결 사이로 신음소리만 가늘게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동혁이 조금이라도 사정감을 늦추려고 발악하듯 괴성 같은 신음을 내고 있을 동안 그녀의 내부는 다시 한번 복잡성에 휩싸였다. 동혁이 모르는, 아니 성진이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을 그녀만의 내면 전환점이 다시금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의 선영은 원하지 않는 의식이 돌아오고 있음에 진저리를 쳤다. 또인가? 이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세계이길래, 연애와 섹스를 모르는 대행하는 녀석을 이렇게 자주 경험이 일게 만드는 거지? 아무리 성(性)에 대해 한창 경험하기 시작할 20대 초반이라곤 해도, 마음만 먹으면 섹스를 안 할 수 있도록 절제할 수 있지 않나? 그리고 선영은 곧 ‘섹스에 대해 모르니까’ 방어 기제가 없어서 더 이런 상황이 많이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쨌건 간에 그녀는 대행하는 선영을 누르고 서서히 신체의 주도권을 붙잡아가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이 세계와 이별해야지. 도대체 못할 짓이야.’

“으읏…! 으으윽…!”

찌익-.

동혁의 자지 끝에서 좆물이 쏟아져나와 선영의 질 내부로 가득 밀려들어갔다. 그 순간, 현재의 선영은 그의 정액을 느낌과 동시에 본래의 선영에 의해 의식을 꺼뜨려버렸다. 본래의 선영이 신체의 모든 부분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의지를 쥐자마자 느끼게 된 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정액이 질 속을 메우는 기분. 참으로 얄궂은 상황과 매번 첫 대면을 하는 것도 그녀의 입장에선 최악의 기분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으윽… 아아…… 선영, 은선영. 아음…….”

동혁은 사정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더 마음 속 깊이 안착하고 싶어서 정신없이 그녀를 껴안고 가슴에 볼을 비비고 빨고 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그가 여대생의 나긋나긋한 피부를 몸으로 즐기고 있을 동안 본래의 선영은 눈을 떴다. 번쩍 하고, 마치 언제 정신을 잃었냐는 것처럼.

물자를 가득 실은 커다란 트럭이 밤공기를 휙하고 가르며 편의점 문 앞에 정차했다. 부르르르릉, 덜컹.

“1900원이요… 아!”

손님의 계산을 수행하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채미선은 바깥의 그 소리에 반가운 탄성을 질렀다. 물건을 산 손님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와 바깥의 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선은 그런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산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계산대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거울을 보며 머리와 옷매무새 등을 얼른 다듬은 그녀는 편의점 문을 활짝 열었다.

“성진 선배!”

“어이어이, 잘 근무하고 계셨습니까 공주님?”

재고 상자 서너 개를 한번에 안아서 들어오던 성진은 그녀를 보자마자 기운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미선은 그가 물건을 안쪽으로 운반하는 걸 도와주면서 살짝 눈을 흘겼다.

“뭐에요, 그 호칭은. 놀리는 것도 아니고….”

“대접받기 싫으십니까, 공주님? 아, 그럼 그냥 미선이라 할까?”

“아 몰라요. 그냥 선배 좋을 대로 불러요.”

‘싫지는 않은가 보네?’라고 반문하려던 성진은 그냥 말없이 웃어넘겨버리고는 재고상자들을 계산대 옆에다가 적당히 쌓아놓았다. 미선은 차트 종이를 가져와서 성진이 불러주는 대로 재고품들을 체크해나갔다. 행여나 잘못 체크할까봐 카운터에 엎어지듯 집중해서 적고 있는 그녀의 뒷머리를 내려다보며 성진은 그만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다음… 응? 끝이에요?”

더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의아해진 미선은 고개를 들었고 성진과 눈이 마주치자 더 미심쩍은 표정이 되었다. 성진은 애써 웃음을 참느라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고, 그녀가 바라보자 얼른 시선을 외면했다. 가만히 그런 그를 올려다보면 미선은 순간 얼굴이 빨개지며 다시 차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 뭐에요, 선배!”

“아니아니, 미안. 그냥 좀… 네가 너무 귀여워서.”

“빨리 남은 물품이나 마저 불러요.”

성진은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고 남은 재고품들을 불러주었고 미선은 귀까지 빨개진 채 겨우 체크를 끝마쳤다. 한껏 콩닥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긋 웃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다 됐어요.”

“머리, 위쪽으로 좀 더 올려 묶은 거 같다?”

“눈치챘어요? 히힛. 어때요? 좀 더 활발하게 보이죠?”

“그래. 좀 더 귀엽게 보인다.”

미선은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는 성진을 마중이라도 하듯 뒤따라가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쳇. 뭐에요 그거. 칭찬인지 뭔지 애매하게….”

“칭찬이야 임마. 그럼 돌아갈 때 데리러 올게. 이따 보자고.”

“예. 선배. 다녀오세요.”

‘어차피 난 혜진이처럼 스타일이 좋지도 않아요’라고 쏘아붙일까 하는 충동을 살짝 느낀 미선은 그냥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성진은 다른 편의점으로도 납품을 하기 위해 서둘러 트럭에 올라탔고, 마치 조용한 공기가 바뀐 듯 그렇게 들어왔던 납품 트럭은 부산스럽게 떠나갔다. 미선은 그 트럭을 가만히 바라보다 편의점 내부로 도로 들어와서 새로 온 물품들을 정리해나갔다.

재고 상자들을 정리해가는 미선의 손이 한 상자에서 멈칫하였다. 그녀의 입술이 조용히 미소지으면서 한 남자의 이름을 불러본다.

“김성진 오빠….”

오빠라니! 미선은 부끄러움과 어색함에 얼른 고개를 들어 편의점 입구를 살펴보았고, 아무도 없음에 안도하고는 총총히 물품들을 마저 정리했다.

겨울을 향해 달리는 늦가을의 밤공기는 차가웠다. 이젠 쌀쌀함이라고 표현하기도 부족할 듯한 그 공기를 느끼며 성진과 미선은 나란히 걸어갔다. 뜸해진 네온사인 대신 가로등이 조용하게 그들의 길을 밝히고 있었다. 미선은 조그만 백을 팔에 걸고는 두 손을 입 가까이 모아서 따뜻한 입김을 불어보았다.

“하-. 날씨가 많이 추워졌네요, 선배.”

“팔짱은 껴도 됩니다, 공주님.”

“아 진짜, 선배!”

미선은 주먹을 꼭 쥐고는 그의 옆 팔을 후려쳤다. 하지만 그 손에는 힘이 없었고, 성진은 킥킥 웃으면서 짐짓 시선을 딴 방향으로 향했다. 미선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재킷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있는 그의 한쪽 팔을 슬그머니 안았다. 성진은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지만 걸음걸이를 조금 늦추었고 미선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가만히 기대었다. 가로등의 불빛은 마치 한 쌍의 연인을 축복하기라도 하듯 길고 미려한 그림자를 그들의 뒤편에 장식해주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이어질듯한 일정하고 느릿한 걸음걸이. 그 호흡을 느끼는 것처럼 미선은 성진의 팔에서 한동안 말없이 기대어있다가 지나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근데 낮에 뭘 했어요, 선배?”

“음? 뭘 했다니?”

“문자로 보냈잖아요. 이 오빠는 오늘도 바쁘구나! …라고.”

성진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것처럼 미선은 손가락을 들면서 중성적인 음성을 내었다. 성진은 그랬었나? 하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낸 문자함 확인을 해보았다. 그리곤 곧 고개를 끄덕인다.

“음. 이제 기억나네. 이 ‘선배님’은 오늘도 바쁘구나라고 했지만”

“아, 아무튼! 그래서 뭐 했어요? 선배.”

다시금 얼굴이 빨개지며 재촉하는 미선. 성진은 볼을 긁적이며 별 것 아니라는 투로 간단히 대답했다.

“과제.”

“학교 과제요?”

“응. 조별로 과제가 있어서 어제 카페에서 회의하고 오늘 종합적으로 정리한 후 살을 붙이고 발표 준비 끝낸 거야.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리더라고.”

“헤에, 성진 선배가 발표자에요?”

“엠티 못갔으니 그거라도 맡아서 해야지 뭐. 음…? 왜 그런 시선으로 보는 거야?”

성진은 무심코 대답하다가 바로 옆에서 어깨에 머리를 기댄 미선이 가만히 올려다보는 걸 느끼고는 물어보았다.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로 조용히 선배를 바라보던 그녀.

“으응, 아니에요. 왠지 멋있다… 랄까.”

성진은 그만 픽하고 웃었다.

“뭐가 멋있어?”

“발표 과제를 도맡아서 하는 거잖아요, 그거.”

“얘는 별 걸 다 멋있다고 하네. 할 걸 하는 것뿐인데. 아……! 너 혹시 범생도 아닌 녀석이 의외로 성실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미선은 태연하게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성진은 곤혹스러운 듯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 미선이. 너 그러는 거 아니다. 선배를 여자만 만나고 다니는 날라리로 알았단 말이지.”

“쿡쿡. 사실이 그렇지 않아요? 선배 주변에 은근 마음품고 있는 여자 많은 것 같던데.”

하지만 성진은 그 말엔 별로 웃지도 않고 슬쩍 하늘만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어쩐지 가볍게 넘기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간직하는 것처럼. 미선은 그런 선배의 옆얼굴을 아리송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다가 다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늦가을의 바람이 불면서 미선의 뒤로 묶은 머리칼을 살랑 스치고 지나간다. 그녀는 볼을 이리저리 부풀려보면서 생각에 잠기다가 나지막이 툭하고 내뱉었다.

“그냥 반 농담이에요, 선배. 사실 정말 꽤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언뜻 보기엔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학업에 충실하는 거잖아요 그거. 이렇게 놀기만 바쁜 주말에 일도 다니면서.”

“네가 정말 바쁜 애를 못만나봐서 그래. 그리고…… 딱히 책임감이라든지 학생의 본분을 다할 생각에서 하는 것도 아냐. 뭐 네가 알것도 아니겠지만 우리 집도 그다지 잘사는 집은 아니라서,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알아보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것뿐. 학점 펑크내지 않고 교수님 눈밖에 나지 않아서 어느 기업 추천 하나라도 받아보려고 이 짓을 하는 거지.”

하지만 미선은 그의 말에 동요하는 기색 따윈 전혀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성진은 어쩐지 자신의 팔짱을 끼고 있는 미선의 힘이 더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뭐야, 이 녀석의 속도 참으로 알 수가 없단 말야.

미선은 마치 추위를 타는 것처럼 그의 팔을 꼭 끌어안고 몇걸음 더 걸어가더니 생긋 웃으며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성진의 마음을 꾹꾹 누르는 듯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온다.

“선배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요.”

“모르다니, 뭘?”

“전 바로 그런 선배의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한 거에요. 포림대, 으음…. 뭐 모든 학생들이 그렇단 것은 아니지만 선배처럼 이십 대 초반에 현실적인 앞일을 대비하고 성실하게 보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기도 하거든요. 대부분이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고 이것저것 체험하며 보내기도 바쁜 시기일 터인데. 선배는 분명 사회생활도 안정적으로 잘하실 거에요.”

“어이어이, 너무 띄우는 거 아냐? 나도 놀러다니기 좋아하고 오늘처럼 과제로 종일 소비한 건 정말 몇 안 된다니까? 그리고 너 모르나 본데 내 나이에 벌써 사업하고 다니는 애들도 찾아보면 널렸어.”

“피, 칭찬해줘도 뭐라 하네. 흐음, 사업이라… 그런데 난 그런 남자들은 오히려 별로더라.”

성진은 그런 미선을 가만히 마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듯 시선을 다시 앞으로 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다. 아니지…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도 생각해보면 사실…. 여자를 많이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할지는 알 수 있어도, 속내가 어떠한지는 여전히 알기 어렵다. 남자와 여자는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란 게 이런 경우를 말하는 건가? 뭐 그건 비단 남녀로 나누어서 국한할 문제도 아니긴 하지만.

그리고 성진이 그런 문제로 머릿속을 헤집어나갈 때쯤에 건네어진 미선의 물음은 적절한 임팩트를 주기에 충분했다.

“선배는 좋아하는 사람이라든가 있어요?”

성진은 순간적인 기습을 당한 사람처럼 말을 더듬었다.

“어? 어… 글쎄.”

“있어요?”

“있다고랄까, 어떨까….”

“그럼 없는 거네.”

“아니, 없다고 하기엔 그렇고.”

“있어요?”

성진은 왜 그녀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묻는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울컥하는 표정을 지으며 윽박지르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쏘아주려고 고개를 돌린 성진의 얼굴 바로 앞에는 두 눈을 또렷하게 뜬 채 밀착한 미선이 있었고, 그는 그만 할말을 잊은 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얘 오늘 왜이러지? 성진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하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어서 고개를 다시 회피했다.

미선은 그런 선배의 반응에 킥하고 웃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화의 주도권을 이끌어나갔다.

“흐음. 그럼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정돈 있다고 결론을 내죠. 그런데 선배.”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면서도 가끔씩 너무 날카로운 면이 있는 후배라고 생각하며 성진은 일부러 건조하게 대답했다.

“왜?”

“친구도 애인도 아닌 사이로 애매한 관계를 지속시키는 건 상대와 자신에게 달콤한 설렘을 제공하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죠. 하지만 그 달콤함에 너무 안주해있으면 좋은 결과는 나오기 힘들 거에요. 사람의 마음이란 건, 특히 남녀관계에서는 설렘이란 선물이 커질수록 그 선물상자 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받는 상처 또한 커질 테니까요.”

그럴 듯한 얘기긴 했지만 도대체 왜 미선이 그런 얘길 자신한테 하는지 성진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 또한 곱씹어볼 겨를을 그녀는 별로 제공해주지 않았다. 미선은 갑자기 성진의 팔을 풀더니 앞쪽으로 몇걸음 총총총 앞서나간 것이다. 성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비스듬히 내리비치는 가로등 아래에서 그녀는 고개를 반쯤 돌려 눈동자를 뒤로 해 성진을 마주보았다.

“저도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표현할 정도의 감정이 지금 깃들어있는 상태에요.”

“…그게 누군데?”

“흐음, 글쎄요. 누구일까요?”

“뭐야, 잔뜩 듣도록 해놓고 사람 긴장시키게.”

“선배도 제대로 대답 안 했잖아요. 후후훗. 복수에요, 이건.”

그리곤 뭐가 그리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무대 위를 거닐 듯 몸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녀는 현재 밝은색 미니원피스에 검은 스타킹, 부츠를 신고 있었고 롱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뒷짐진 자세로 조그만 백을 들고 돌고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는 착각을 일게 한다. 성진은 몇 걸음 뒤에서 그런 미선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뜨리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두 손을 재킷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로 제자리에 서서 미선의 이름을 부르는 성진.

“예?”

“다 왔다. 여기 너희 집 대문이잖아.”

“아! 그렇네요.”

미선의 집은 담으로 둘러싸인 주택이었고 그들은 대문 앞에 서있었다.

“정신 좀 차려 임마. 어떻게 자기 집 앞을 그냥 지나치려 하냐?”

하지만 미선은 그의 말에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슬쩍 미소짓고는 통통 뛰듯 그에게로 다시 다가왔다. 성진이 작별 인사라도 하려나 하고 관망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열고는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었다. 성진은 그 물체가 무엇인지를 곧 알아챘고 의문 섞인 음성을 내뱉을 때쯤.

“목도리?”

차가운 밤공기가 목에서 사그라들듯, 미선은 베이지색 목도리를 살며시 선배의 목에 둘러주었다. 별 거 아닌 동작이긴 했지만 성진은 어쩐지 그녀의 손이 제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고, 어느새 목도리는 그의 목에 휘감겨있었다.

“이건….”

“흑기사에게 하사하는 답! 례! 낮의 문자마냥.”

사양할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멘트를 형성하는 그녀의 모습에 성진은 그만 또한번 웃고 말았다. 미선은 다시 가방을 뒷짐져 들고선 마주 헤헤 웃었고, 성진은 자신의 목에 둘러진 목도리를 매만져보았다. 부드러운 재질의 따뜻한 감촉이다.

“산 거야?”

“별로 안 비싸요. 근데 감촉 좋죠, 선배? 이래봬도 고르는 데 꽤 신경 썼거든요.”

하지만 성진은 어쩐지 그 감촉보다는 그녀가 자신을 위해 마련해주었다는 사실로 인해 더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 기분을 받았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애틋하고 따스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이런 상황이 아니면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은 매우 특별한 감정. 그래서 성진은 잠시 고맙다는 말도 잊은 채 자신의 목에 매어진 목도리 한쪽을 들어서 관찰하듯 바라보고만 있었다.

“선배! 그럼 내일 봐요. 우리, 내일도 근무니까.”

한 손을 흔들며 미소 가득한 얼굴로 대문 앞을 향해 걸어가는 미선. 성진은 그제서야 목도리에서 손을 떼고는 그녀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성진은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선아.”

“네?”

그녀는 대문 손잡이까지 다가갔다 멈칫하곤 뒤돌아보았고, 성진은 슬쩍 그녀의 담 너머 주택을 바라보았다. 불이 켜져있었고 아마 그녀의 부모님이 아직 주무시지 않고 있다는 걸 짐작하고는 넌지시 물어보았다.

“지금 곧바로 들어가봐야 해?”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왜요, 선배?”

성진은 대답 대신 한 손을 들어서 이리로 와보라는 손짓을 했다. 미선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동그래진 눈으로 자신을 가리켰고, 성진은 피식 웃으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선은 다시 선배에게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성진은 그녀가 앞까지 오기도 전에 몇 걸음 더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미선은 그가 담 모퉁이 너머로 가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진 표정으로 따라갔다.

“선배. 어딜 가는 거에요? 왜 이런 으슥한 곳으로….”

하지만 그녀가 선배의 모습을 쫓느라 모퉁이를 돌아설 때쯤 그의 한 손이 미선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미선은 깜짝 놀라며 비명을 삼켰고 바로 그 순간 성진은 자신보다 키가 꽤 작은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술에 키스를 했다.

“합…!”

“…….”

놀라움과 당황함으로 몸이 굳는 미선. 하지만 성진은 그녀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머리를 붙잡았고, 그로 인해 성진의 입술은 미선의 입술에 꼬옥 맞대어진 채 한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정지한 듯한 충격이 그녀를 감싸 쥐었지만 미선은 몸이 굳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리친다거나 저항할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약간 건조하면서도 마음이 담겨있는 듯한 그의 입술 느낌이 뇌리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성진은 한 손으론 그녀를 끌어안듯이 허리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론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붙잡은 채 입술을 조금씩 움직였다. 미선의 팔이 스르르 올라갔지만 그것은 그를 밀어내려는 동작이 아닌 끌어안는 형태를 띠고 있었고, 그에 따라 그녀 머리를 붙잡던 성진의 손은 점차 내려와서 그녀 어깨에 얹히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오히려 그들의 따뜻함을 더욱 빛나게 하듯, 몽환적인 키스.

미선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가며 느릿하게 빨던 성진은 이윽고,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서 자신의 것을 떼어냈다. 의외로 미선은 눈을 꽉 감는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녀는 살포시 눈을 감은 채 성진의 입술을 느껴가고 있었고, 그가 입술을 떼자 역시 천천히 눈을 떴다. 차분하고 깊은 눈동자. 성진은 그녀의 눈동자가 미려한 구슬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고, 잠시 후 미선은 눈을 내리깔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놀랐어?”

“다… 당연하죠. 그렇게 갑자기 입을 맞추면….”

그녀는 히죽 웃으며 물어보는 성진의 말에 얼굴을 붉히면서 더듬거렸다. 하지만 그 말끝에는 미묘한 기쁨 같은 게 간직되어 있었고, 별 생각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던 성진도 얼굴이 슬쩍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하여튼 정말 귀여운 후배라니깐. 그는 약간 흐트러진 미선의 앞머리칼을 매만지듯 옆으로 쓸어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잠시 후, 미선은 내리깔았던 눈을 반쯤 들면서 입을 열었다.

“…이것도 설렘이란 선물이겠죠?”

“뭐… 일단은.”

애매한 관계를 빗댄 미선의 말을 상기한 성진은 역시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둘 사이엔 한동안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성진은 다르게 대답했어야 했나 하고 머릿속으로 고민해보았다. 그러나 이 이상 최선의 대답은 생각해낼 수 없었고, 사실 그건 미선도 마찬가지였기에 그저 말없이 서로의 눈치를 흘끗흘끗 살필 뿐이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쪽은 성진이었다. 그는 짐짓 옆쪽 허공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떨어? 아, 너 혹시… 이 선배가 첫키스냐?”

반 장난으로 물어보는 것이었지만 미선은 볼을 부풀리며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탁하고 쳤다.

“아, 무슨…! 선배도 참.”

“제대로 부정하지 못하는 걸 보니 첫키스 맞나 보네.”

성진은 낄낄거렸고 미선은 더욱 얼굴이 붉어진 채 그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성진은 휘파람이라도 불 듯 두 손을 재킷에 다시 찔러넣은 후 몸을 한바퀴 빙글 하고 돌렸다.

“야, 요즘 시대에 무슨 스무 살 되도록 키스 경험 한번 없을까.”

어색해진 분위기를 타파하고 긴장을 풀어보려 건넨 말이었지만 성진의 말은 미선을 꽤나 자극시킨 모양이다. 그녀는 이번엔 눈을 치켜떠서 그를 노려보면서 각인시키듯, 또렷하게 한마디한마디 내뱉었다.

“저도 고등학생 때 이미 경험이 있다구요!”

“헉… 그래? 누구지?”

짐짓 놀란 척 하며 엄지와 검지를 턱에 갖다대곤 하늘을 올려다보는 성진.

“음… 누가 이 공주님의 순결을 빼앗아갔을까…….”

아무래도 놀림의 정도가 심했던 것 같다. 미선은 진지하게 골똘히 구상해보는 듯한 그의 모습에 갑자기 알 수 없는 울컥함이 치밀어올라 뭐라고 소리치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한가지 제대로 반격할 거리가 머릿속에 떠오르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흐음, 선배. 난 선배가 짐작하지 못할 만한 경험도 했지요.”

허공을 올려다보던 성진의 고개가 대번에 내려왔다. 정말로 놀란 듯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그것은 미선을 상당량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뭐…? 짐작하지 못할 경험이라니?”

“저를 한낱 어린 동생이라고만 여기시면 곤란하죠. 훗훗훗.”

그리곤 성진이 멍청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틈을 타 그녀는 검지손가락을 자기쪽으로 뒤집어 세워 입술에 갖다 댔다. 나긋하게 늘어지는 그녀의 음성.

“여기뿐만이 아니라….”

이어서 슬쩍 밑으로 내려가는 손가락. 그 손가락이 가리키듯 갖다 댄 곳은 미니원피스의 치맛자락이었고, 그녀는 다른 쪽 팔로 자신의 가슴을 끌어안으며 유혹적인 눈빛을 보내었다.

“여기도 경험이 있거든요.”

성진은 그 밑으로 뻗어나온 그녀의 검은 스타킹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오늘 특별히 예쁘게 꾸미고 나온 것은…. 미선은 치맛자락을 손가락으로 살포시 붙잡더니 성진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성진은 흠칫 하고 놀랐고, 미선은 그런 선배가 귀여운 듯 킥킥하고 웃었다.

“보고 싶어요, 선배?”

“어? 어…. 뭐… 뭘?”

“싫다아…. 모르는 척 하긴.”

“미… 미선아. 이제 슬슬 들어가봐야….”

“선배. 나 오늘 시간 많아요.”

다시금 치마를 슬쩍 들어올리면서 한걸음 다가오는 미선. 성진은 그녀가 밀착하는 걸 회피하기라도 하듯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다가 뭔가에 등을 걸치게 되고는 기겁해버렸다. 하필이면 내 쪽이 담을 등지고 서있었을 줄이야! 순간 미선의 두 손이 성진의 양 어깨를 지나쳐 뒤쪽 담벼락에 착 달라붙듯 갖다댄다. 그녀의 양 팔 사이에 끼게 된 성진.

“헤에. 이젠 도망칠 수 없겠다.”

“그… 그러니까 미선아.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거 좀…….”

“뭐 어때요. 내일 수업도 없는데. 여기서 해버려요.”

“뭐? 여기서?”

“전 괜찮아요.”

성진은 그녀에게 ‘여기서 뭘’ 할건지는 되묻지 않았다. 어쩐지 스위치가 올라간 듯한 그녀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당연하게 ‘섹스’라고 대답할 게 뻔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미선은 한 팔을 내려 대담하게 미니원피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는 치맛자락을 붙잡은 손가락 중 하나를 내어서 아래를 가리켜보였다.

“선배. 혹시 팬티스타킹 취향 있으세요?”

“그러니까 미… 선아. 여기서는 좀…….”

“흐음….”

미선은 자꾸만 머뭇거리는 선배가 이젠 갑갑해졌는지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는 똑바로 뜬 눈으로 불과 몇 센티도 안 되는 거리까지 얼굴을 마주 갖다댔다. 급작스럽게 자신의 앞에 밀착해온 미선의 모습에 성진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것마냥 허둥거리는 그를 보면서 미선은 강압적인 분위기로 또박또박하게 입을 열었다.

“이것 봐요, 선배. 설마 키스만 하고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죠? 제 마음을 설레게 했으면 이 순간만큼은 끝까지 책임을 지라구요!”

“아… 알았으니까 일단 좀 떨어져서…….”

“흐음…?”

미선은 그의 부탁은 듣지도 못한 것처럼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성진은 그녀와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고, 미선은 그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픽하고 웃고는 치마를 도로 내리었다. 어쨌거나 제대로 된 반격을 취하게 된 그녀의 입장에선 고무적인 현상이라 생각하며 미선은 즐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뭐야, 선배. 이제 보니 선배가 더 숙맥이네.”

성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그녀의 감옥(?)에서 빠져나와 옆으로 비켜섰고, 미선은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끌어안으며 그의 앞에서 원을 그리듯 통통 걸었다. 한 손을 입가에 갖다댄 채 헛기침을 하는 성진을 곁눈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약간 더 도발을 가해보기로 했다.

“선배. 혹시 여자 경험 많다는 것도 다 거짓말 아녜요?”

상진은 다시 재킷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는 그 말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아리송한 미소만 지었다. 미선은 고개를 갸웃해 보였지만 성진은 역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는 김빠진 한숨을 폭하고 쉬었다. 여기까지인가. 그럼 슬슬 들어가봐야 할까나. 미선이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왔던 담 모퉁이 쪽을 슬쩍 바라본 찰나였다. 그의 음성이 툭하고 귓가에 꽂힌다.

“좋은 데 보여줄까, 미선아?”

그녀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성진을 돌아보았다.

“좋은 데요?”

“내가 여기서 너랑 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해. 장소의 협소함 때문이지. 추운데 길바닥에서 하는 건 모양새가 별로 좋지 않거든. 게다가 너희 부모님이 나왔다가 맞닥뜨릴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성진은 핸드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해보았고 곧 그의 입에서 의미모를 말이 다시 한번 흘러나왔다.

“이왕 할거면 즐겁게 해야지. 아직 한창 시작했을 때겠군. 오늘 좀 늦게 들어가도 되지?”

“즐겁게…? 시작…? 그게 무슨…….”

“돼, 안 돼?”

미선은 그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추리해보려다가 그의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는 더듬거렸다.

“아, 저…….”

성진은 물끄러미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한 손을 빼어들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안 된다고 해도 오늘은 그냥 따라오라는 것처럼. 졸지에 그런 성진에게 끌려가게 된 미선은 당황스럽게 반쯤 뛰며 간신히 물어보았다.

“서… 선배. 도대체 이 시간에 어디로 가겠다는 거에요?”

“네 내성적인 성격에 한줄기 임팩트를 가해줄 수 있는 곳.”

마치 시적인 표현을 하는 그의 말에 미선은 더욱 당황했고, 그녀는 내키지 않는다는 의지를 완곡히 표출했다. 미선은 있는 힘껏 성진의 팔을 뿌리쳐서 그의 손과 자신의 손목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성진은 별로 동요하지도 않고 슬쩍 그녀를 돌아보았을 뿐이었다.

“그냥 집에 가려고?”

강제적인 기세에 비해 그의 물음은 허무하리만큼 원점으로 돌려놓는 뉘앙스를 띠고 있었고, 그래서 미선 쪽이 오히려 뻘쭘해져 버렸다.

“아…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니 무섭다는 거야? 흐음, 이 선배를 못 믿나 보네.”

“그런 게 아니라구요!”

그녀의 외침이 밤공기를 갈랐지만, 몇 걸음 떨어져있는 성진은 몸을 돌리지도 않고 고개만 돌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미선은 한 손을 가슴폭에 갖다댄 채 나지막이, 하지만 또렷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것처럼 얘기했다.

“거기… 거기서 왜 제 성격 얘기가 나와요? 선배가 데려갈 곳이 어딘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지만… 제 성격에 반하는 거라면 저는 가고 싶지 않다구요. 그건… 아무리 선배라도 용납할 수 없어요. 저도 저 나름대로 견지하고 싶은 영역이 있고, 그래서…….”

감정의 기복이 심해져 약간 정리되지 않은 말들의 연속이었으나 성진은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방어기제를 확고히 하는 사람을 강제로 끌어가고 싶은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대신 그는 터벅터벅 미선에게 걸어와서,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침묵 속에 파문을 그리듯 툭하고 던져지는 그의 말.

“내성적인 성격을 견지하겠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군. 너는 그 성격을 싫어할 줄만 알았는데. 그걸 고치려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다니는 거 아니었니?”

“그렇긴 하지만… 최근에 생각이 바뀌어가고 있는 점도 있어요.”

성진은 설명을 요구하는 제스처로 고개를 갸웃했고, 미선은 한참동안 머뭇거리다 결국 자신이 혜진에게 들었던 조언을 그에게 말하였다. 그 내용은 남의 평이나 세간에서 지적하는 단점을 굳이 보완하려 하지 말고, 자유로운 대학생답게 그것을 자신의 스타일로 되살려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최근 자신만의 색감으로 다져진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이기도 했다.

성진은 관심 없다거나 귀찮다는 표정 없이, 마치 상담사가 된 것처럼 미선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땐 단지 살짝 한숨을 쉬듯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웃었다. 그 반응을 본 미선은 의아한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 앞에서 성진은 넌지시 중얼거리는 듯한 음성을 내었다.

“그 녀석도 참… 가끔씩 너무 감당하기 어려운 조언을 건넨단 말야.”

“……?”

미선은 무슨 뜻이냐고 더욱 더 의혹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성진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몸을 돌렸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앞서 걸어갔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멈춰 서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네가 그 편이 좋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해도 돼.”

“성진 선배…?”

“어차피 우리는 누군가의 명령으로만 움직여야 할 시기는 지난 성인이니까. 혜진의 말마따나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도 곧 답이라 할 수 있지. 그런데 미선아.”

성진은 그녀의 몇 발자국 앞쪽에 있는 가로등 밑에 서있었지만 고개는 여전히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허공으로 얘기하는 듯한 그 목소리는 밤바람에 실어지듯 조용히 미선에게로 다가와 안착한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답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답이라 단정지을만한 입지에 위치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대학생이라고 완전한 성인은 아니지. 어떻게 해야 된다고 결정하고 단정지을 수 있는 입지에 서기에는 불안정한 게 너무 많아. 학업쪽이면 몰라도 인생에 있어서 우리는 아직도 어린애일 뿐이야. 왜 세간에서 20대에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지 알아? 20대라는 위치는 학생과 사회인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자유를 어찌할 줄 몰라서 떠내려가는 존재와도 같거든. 그러나 누구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답을 제시하지는 않지. 그건 성장을 위한 배려 차원에서 제시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들도 모르기 때문이야. 당연한 말이지. 말 그대로 어느 쪽에도 속해있지 않은 경계에 선 존재에게 해줄 수 있는 답이 있겠어? 하지만 그렇기에 하나만큼은 확고히 할 수 있는지도 몰라.”

성진은 그쯤에서 실어 보냈던 목소리들을 회수하는 것마냥 미선을 돌아보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위에서 짧지만 날카로운 앞머리칼이 바람에 살포시 미동한다.

“훗날 선택할 수 있는 답의 선택지를 늘려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입지일지도.”

미선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지만 그녀의 마음 속은 한가지 종소리가 울린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그랬었나…. 그래서 우리는 잘 느끼지도 못하는, 왜 중요하다고 하는지도 모르는 자유를 끌어안고, 현재를 그저 보내고 있음에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는 것. 그러나 이 순간은 사실 창창하게 남은 훗날의 인생 무엇과도 견주어서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음을.

잠시 후 성진은 어쩐지 민망해진 듯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시선을 전방으로 보냈다.

“피곤한 사설이 길었네. 이런 말이 필요할 정도로 대단한 곳을 가는 것도 아닌데.”

“으응, 아니에요. 선배. 나 어쩐지 가보고 싶어졌어요.”

그의 어조와는 상반되게도 미선의 말은 한층 밝아져있었다. 그녀는 성진에게 한달음에 달려오듯 가볍게 발걸음을 놀리었고, 그도 그런 후배의 모습을 보며 씩하고 미소지었다.

“그래? 가서 놀라도 책임 못 져.”

“저 이래 봬도 나름 경험이 좀 있거든요? 게다가 선배가 데려가는데 뭐 이상한 데 데려가겠어요.”

“어이어이, 너 그렇게 남자를 쉽게 믿다가 쉽게 상처받는다?”

“혜진이랑 비슷한 말하네. 후후후후.”

성진은 무슨 비슷한 말이냐고 되물으려다 찰싹 달라붙으며 자신의 팔짱을 껴안아오는 그녀를 보고는 그냥 웃어버렸다. 다시금 가로등 너머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두 남녀. 자정에 가까워지는 시간인 만큼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둘의 대화는 적막함 속에서 꽤나 또렷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참이나 멀어진 후에도 아스라히 들릴 만큼 바람에 실려져 보내어졌다.

“그런데 선배. 말 되게 잘한다. 솔직히 나 아까 조금 감동 먹었어요.”

“감동이란 건 의외의 면모에서 빛날 소지가 많지. 그러니까 미선, 너는 이 선배를 여전히 날라리로 보고 있단 말이야.”

“부정하진 않아요~. 하지만 정말, 음… 뭐랄까. 역시 멋있다고나 할까요.”

“뭐가 자꾸 멋있다는 거야, 얘는.”

“저도 몰라요. 쿡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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