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85)

-----------------------------------------

모니터를 바라보는 남자의 입에서 길게 담배연기가 피어올랐다. 어쩐지 한숨처럼 피어올려진 그 담배연기는 천장에 닿기 전 뿔뿔이 비산하였고, 남자는 새롭게 만들 작정이라도 한 듯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의 눈은 어두운 방 안 컴퓨터 책상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카잔 전쟁의 net플레이 화면 한쪽엔 온라인 친구 목록에 선영의 아이디 ‘실버레인’이 접속해있었고, 며칠 전부터 다시 접속한 그녀에게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다른 net대전자와 게임을 하는 데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으며, 그의 질문도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결국 남자는 포기한 것처럼 의자 등받이에 쭉 등을 기대었다. 하지만 실제론 포기한 게 아니었다. 단지 자세를 바꾸고 다방면으로 고민해보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었는지, 현재의 그녀가 누구인지, 그리고 나란 존재를 알릴 수 있을까? 자신이 은선영이란 점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데… 그런데도 나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물론 헤어졌을 땐 필요 이상으로 연락하지 않기로 확실히 매듭짓긴 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그녀의 안위가 걱정된다는 새로운 필요성이 발현된다. 그는 문득 자신이 예전에 비해 ‘카잔 전쟁’의 net플레이에 자주 접속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선영 때문이기도 하며, 헤어지고 나서 ‘알던 여자’로만 치부할 정도로 연락도 없이 지냈던 오랜 기간에 반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 돌이켜보면 은선영은 꽤나 특별한 여자였지. 함께 있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녀와 있었던 기억을 되살려본 그는 잠시 후 피식 하고 웃었다.

“지금의 내 모습을 알면 그녀가 실망할 테지만… 그래도 그녀를 걱정하는 사람이 한명 정돈 더 있다는 점을 확고히 해두는 게 좋겠지.”

그는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조금 떼고는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그리곤 마치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처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풀어나갔다. 그의 손가락들은 잠시 후 조심스럽게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선영에게 전달되는 온라인 귓속말.

「은선영. 나다」

「해신의창? 또 너냐?」

「내 아이디야 익숙하겠지만 이름은 까먹었지? 여러 번 말했던 것 같지만」

「알고 있어. 송태환」

송태환이라 불린 남자는 그녀가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는 점에서 아마 떠올리는 데 조금 신경을 썼을 거라고 짐작했다. 가볍게 웃고 싶었지만 사실상 그런 기분은 아니었다. 그랬다는 것은 정말로 자신을 잘 모르며, 연기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란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기억해주니 고맙군. 지금 게임 중이니?」

「아니…. 만만한 대전자가 별로 없어서」

「얘기 좀 했으면 하는데」

「말해두지만 전에 했던 질문들이라면 대답할 수 없어. 네가 누군지도 모르고 말할 의무도 없고, 난 예전의 은선영이 아니니까 그 때에 알던 누군가와 얽히고 싶지도 않아」

이 정도는 이미 예상했던 범위라 태환은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자신에 대해 솔직히 밝히는 게 낫겠다는 판단 하에 다시 조심스럽게 자판을 두들겼다. 카잔 전쟁 net플레이 대기실 채팅창엔 어느 새 그녀와 자신의 비밀스런(?) 귓속말로 채워져가고 있었다.

「네 남자친구 옆에 있나?」

「남자친구라니?」

「그 왜, 저번에 말했던 그 애 원룸에서 동거하고 있다며?」

「김성진? 아하하. 남자친구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야」

김성진이라… 그녀와 같은 과 클래스메이트라도 되나? 그런데 남자친구도 아닌데 동거라? 이 부분에서 태환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는 가정 하에, 돌봐주는 일시적 보호자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 애 지금 옆에 있나?」

「아니, 미팅갔어. 지금은 집에서 나 혼자 걔 컴퓨터로 게임 중」

미팅?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면 확실히 둘 사이가 그렇고 그런 관계는 아닌가 보군. 그럼 이쯤에서 본론을 꺼내볼까. 그는 손가락 가까이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모니터 옆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자판을 두들겼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네가 믿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2년쯤 되었지. 나는 네 전 남자친구다」

「알고 있어」

태환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설 뻔했다. 곧바로 모니터에 뜬 그 답변 때문이었다. 그는 살짝 떨리는 손가락으로 채팅의 귓속말을 다시 입력해나갔다.

「알고 있다니? 어떻게? 너 나를 모른다 했잖아」

잠시 정적. 그리고 태환이 재촉해보고 싶은 심경을 꾹꾹 억누르고 있을 때쯤 다시 채팅창에 글씨가 떴다.

「내가 모르기 때문에 안 거야」

이 모순된 말에 태환은 그 말뜻을 추측해보려 미간을 부여잡았고, 사실 그렇게 고민할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실버레인’이란 아이디를 가진 선영은 조금 후 먼저 그의 마음을 떠보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베일에 싸인 여자를 보는 듯한 기분에 휩싸인 태환.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해신의창?」

「내가 했던 질문들마냥. 현재의 네 모습에 관하여」

「네가 나한테 어울릴만한 애인이었는지 시험해볼까 하는데」

「솔직히 말하지. 애인이라고까지 할만한 사이었는지는 애매해. 어쨌거나 특별한 관계이긴 했어」

「흐음. 하지만 그건 즐거웠던 기억이겠군」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마치 날 알고 있지만 제삼자가 연인과의 관계를 추측해보고 있는 뉘앙스잖아.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선영의 파격적인 제안에 태환은 그런 의문마저 날려버렸다.

「이 게임. ‘카잔 전쟁’에서 날 이겨봐. 그럼 나한테 일어났던 일 모두를 밝혀주지」

가만히 모니터를 바라보던 태환은 순간 박장대소하듯 짧고 크게 웃었다. 집안에 누가 있었으면 무슨 일인가 해서 방문을 열어볼지도 모를만큼 큰 소리였다. 하지만 어차피 부모는 지금 시간에 집에 없고 여동생 예나는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있을 시간이니.

이윽고 태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채팅을 짧게 입력했다.

「너답군」

「너답다니?」

「내가 알고 있던 선영이 맞다는 거야. 그녀는 종종 쇼킹한 일을 만들고 즐겼지. 비록 요인이 염세적이었다 할지라도. 하지만 지금의 너는 날 모르는 척 하진 않는 것 같군」

상대의 감정을 읽을 순 없지만 태환은 어쩐지 모니터너머로 그녀가 움찔하고 있다는 기분을 받았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는 아무 말도 없는 그녀에게 다시한번 귓속말을 보내었다.

「그래서 너이면서도 네가 아닌 그 정체를 밝혀볼까 하는데」

「‘카잔 전쟁’에 자신이 있나 보군」

「모르나 본데, 너한테 이 게임을 알려주어서 가입하게 만들었던 것도 나야. 네가 지금 그 아이디를 그대로 씀으로 인해서 재회하게 된 것이기도 하고」

「난 현재 그런 기억 따윈 없이 순수하게 즐기고 있는 거지만, 뭐 좋아」

어쩐지 모니터에서 불꽃이라도 튀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한 태환은 또다시 미소지었다. 그리곤 예전의 선영이라면 정말로 자신의 본실력을 발휘해야 이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의자에 앉은 채로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선영이 만든 1대 1용 비공개 방으로 접속을 하는 그의 손과 마음은 유달리 긴장돼있었다.

오빠. 머리 좀 자르는 게 어때? 딱히 꾸밀 것도 아니면서 관리도 힘들잖아.”

태환의 머리는 근 2년 가까이 자르지 않고 있어서 뒤로 묶은 머리칼이 상당 부분 등뒤로 넘어가있었다. 그리고 왜 자르지 않는지를 알고 있는 예나는 한숨을 폭하고 쉬었다. 지저분한 데다 담배연기로 가득 찬 태환의 방은 누구든 들어가기 꺼려할 게 분명한 모습이었지만 예나는 그나마 ‘가족’이라는 일말의 걱정감으로 들어와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에게 말을 걸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출장미용이라도 부를까 엄마랑 상의해봤는데….”

눈과 정신은 온통 모니터로 쏠린 채 돌아보지도 않고 딱잘라 대답하는 태환.

“귀찮으니 그만둬. 예나야.”

“하아….”

타스대 시각디자인과 3학년 재학중인 송예나. 그녀는 이미 자신의 학년보다 낮은 학년 때 대학을 중퇴해버린 오빠의 뒷머리를 바라보며 다시금 한숨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새로 사온 담배를 그의 컴퓨터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후 몸을 돌렸다.

그의 방을 나선 예나는 방문을 닫으려다 잠시 안을 조금 더 들여다보았다. 태환은 여전히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모니터에만 정신이 팔려있었고, 그건 평소의 오빠 모습이기도 했지만 오늘은 특히 더 뭔가에 집중해있는 듯했다.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그나마 학교에서 돌아오면 왔냐고 한번 바라보기라도 하고, 담배를 사다 주면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던 그였지만 오늘의 그는 완전히 그녀를 무시하고 있었다.

예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방 안에서만 생활해온 사람은 감정이 무뎌지고 점점 더 타인과의 접촉을 꺼려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가족이라고 해서 뭘 어떻게 개선할 방법이 없었다. 본인의 의지가 저런 이상…. 그저 예나는 그런 사람이 자신의 친오빠란 사실과 상태가 점점 악화되는 듯한 현실에, 창피함과 안타까움이란 감정을 교차하며 문을 마저 닫았다.

물론 친동생한테 그런 걱정을 안겨준 장본인은 문이 닫히는지 마는지도 모르는 시선으로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우스를 쥔 태환의 손이 바짝 긴장하여 민첩하게 이리저리 움직인다. LCD와이드 모니터에서는 그래픽으로 짜맞춰진 ‘카잔 전쟁’의 중세 시대 병력들이 태환의 명령에 바쁘게 이동해 다녔다. 유닛의 수는 태환이 약간 많았고, 확장 진지를 방해하려는 선영의 기습 공격도 대부분 차단한 상태라 상대적으로 공격 실패가 많은 선영쪽이 불리해보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태환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선영의 고급 중장기병들이 물밀듯이 태환의 본진을 향하여 쳐들어갔다. 선영의 이전 공격은 경장기병대로 적당히 치고 빠지기만 하는 식이었고, 그래서 본 병력을 따로 어딘가에 숨겨 모으고 있다는 점은 태환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예상해서 방어에 집중하려던 찰나 들이닥친 중장기병들은 수가 너무 많았다.

태환은 이판사판이란 심경으로 방어에 쓰일 유닛까지 전부 우회하여 본 병력과 합세해 선영의 본진으로 쳐들어갔다. 그 결과 선영의 본진도 상당량 타격을 입었지만 결과적으로 완전히 쓸린 것은 태환의 본진이었다. 남은 것은 자원을 충당하는 보조 진지들뿐이었고, 그래서 태환은 적당한 시점에 두 손을 들 듯 GG를 쳤다.

「휘오. 엄청나군. 언제 중장기병들을 그렇게나 모은 거야?」

「경장기병으로 견제하고 다니는 그 순간부터」

‘카잔 전쟁’ net플레이 대기실에서 태환과 선영은 게임의 결과를 귓속말로 몇마디 주고받았고, 태환은 선영의 실력이 엄청나게 상승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그녀에게 채팅을 입력했다.

「솔직히 말하지. 나도 카잔 전쟁에서 중수란 소리만 들어도 서러울 정도로 net플레이를 많이 했어. 그런데 네 플레이는 거의 프로게이머 수준인데」

「나도 솔직히 말할게. 특별한 작전은 아니었어.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 위해 보편적인 작전 중 하나를 택한 거지. 아직 시험해보고 싶은 작전은 많고, 너라면 꽤 적당한 상대가 될 것 같군」

자신을 고작 새로운 전략을 시험해볼 연습상대 정도로 표현하는 그녀의 대응에 태환은 또한번 탄성하듯 웃었다.

「그래, 네 예전의 성격을 확실히 보는 것 같군. 그런데 왜 갑자기 ‘카잔 전쟁’에 그렇게나 열을 올리게 되었지?」

「개인적인 질문은 네가 짐으로 인해서 효력을 잃었다고 보는데」

「음, 그래. 그렇지…」

그렇게 채팅을 입력한 태환은 전투의 긴장감과 여운이 가시자, 보다 현실적인 부정적 결과를 자각하고 속으로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잘하는 줄 알았으면 대결을 회피하고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볼걸. 그러나 잠시 사이를 둔 후 전달되어진 선영의 귓속말은 채팅창을 보는 그로 하여금 밝은 심경이 일게 만들었다.

「뭐 하지만 유닛 운용이 노련하더군. 상당한 실력이라는 점은 인정하지. 나에게 이 게임 net플레이에 가입하라고 했던 게 너라고 했나?」

「그래. 그리고 너라는 표현은 이제 좀 그만 썼음 하는데」

「어째서지?」

「존댓말은 쓰지 않아도 돼. 예전에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난 너보다 3살 위인 오빠다」

돌아오는 채팅 입력은 조금 지체되었다.

「…그럼 아이디로 부르지. 해신의창 오빠라고. 어쨌거나 난 예전의 나는 아니니까」

채팅창을 바라보던 태환은 피식 웃었다.

「좋을 대로. 그런데 너무 길지 않나? 그럼 그냥 창오빠라 불러」

「난 예전의 기억 중 연애에 관련된 기억은 모조리 사라졌다」

여유있는 자세를 취하던 태환은 미소를 지우고는 모니터에 바싹 다가앉았다. 그의 손이 다시금 긴장하며 키보드 자판을 두들긴다.

「네가 이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고. 이해가 가지 않는데, 납득시켜 줄 수 있니?」

「본래의 선영은 죽었어. 캠퍼스의 별관 옥상에서 뛰어내렸지. 하지만 사실상 완전히 죽었다고 표현하긴 애매해」

태환은 머리 한쪽을 강타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녀석이 결국…. 하지만 그는 일단 계속해서 채팅 입력을 해나갔다. 지금이 아니면 그녀의 현 상황을 알아낼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기에.

「기억상실증인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냐. 본래의 선영은 죽으려 했고 건물에서 뛰어내린 것도 그녀의 의지가 맞아. 하지만 죽기 직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살고 싶다’는 본능이 발동됐고, 그건 혼란스러웠던 내 뇌의 천재성에 입각해 방탄작용이 극대화되며 인격이 둘로 나뉘었다. 이 세계를 떠나고 싶었던 본래의 선영은 그녀 의지대로 계속 죽은거나 마찬가지인 무의식 세계로 들어갔고, 반대로 살고 싶다는 욕구로 튀어나온 나는 이 세계에서 대행하는 것마냥 돌아다니게 됐지」

「비상식적인 상황에 이해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싶어질 정도군, 젠장. 그런데 그게 연애에 관한 기억이 사라진 것과 무슨 상관이지?」

「그녀를 죽기 직전까지 망설이게 만든 건 현세를 살아갔을 때의 즐거웠던 기억. 그녀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미련을 떨쳐버리려고 ‘잊어버리려’ 했으니까」

「‘잊어버리려’ 했다는 건…?」

「그래. 본래의 선영에게는 그런 기억이 ‘존재는’ 해. 하지만 인격이 둘로 분리되어 내가 나오고 나서는… 나는 사실 처음엔 내 이름도 모를 정도로 백치였어. 하지만 여러 가지를 경험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억들은 차츰차츰 돌아왔고, 그건 사실상 본래의 선영과 연결돼있던 만큼 익숙하게 나도 되찾아갔지. 그러나 문제는… 그녀를 즐겁게 했던 ‘연애와 관련된’ 기억들이야. 그것을 내가 되찾고 연애라든지 섹스를 하고 다니면 나와 연결된 그녀에게도 그 느낌이 전달되어 현세로 돌아오고 싶게 되어버린단 거지」

돌아오고 싶지 않아서 철저히 잊어버리려 하고, 그로 인해 현재의 선영에게도 연애와 관련된 기억이 일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군. 납득할 만한 논리긴 하지만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믿어야 할지…. 태환은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담배연기를 쉴새없이 피워대고 있었고, 그의 손은 기계적으로 자판을 두들겼다.

「그럼 게임을 하기 전에 네가 말했던 모순된 말이 이해가 가는군. ‘내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에’ 나는 연애와 관련된 전 남자친구란 점을 추측할 수 있었다는 거네」

「연애와 관련된 기억은 모조리 지워졌으니 남자친구라 했던 사람들도 기억날 리가 없지. 이 ‘카잔 전쟁’ 아이디와 비밀번호도 기억은 나지만 그게 처음에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

「그렇겠지. 앞서 말했듯 내가 만들어준 거니까」

그 대화를 끝으로 한동안 채팅창에는 글이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태환은 계속해서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 할 것 같은 초조함에 휩싸였다. 어쩐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선영은 다시 게임을 하러 가거나 연결이 끊어질 것 같았기에. 그는 온라인 채팅이란 시스템이 가지는 디지털 문자의 한계점을 새삼 안타까워하며, 갑자기 현재의 선영을 직접 만나보고 싶은 충동이 강렬하게 일었다.

그러나 태환이 짧은 시간 내에 간신히 용기를 다잡고 그 말을 건넸을 때 선영의 대답은 허무하리만큼 논리적인 거절이었다.

「…무슨 이유로? 창오빠는 이미 그녀와 헤어진 것 아니었어?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만나봤자 나는 당신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이 여기에서 했던 것 이상의 것은 없어. 연애에 관했던 기억은 모조리 지워져서 난 창오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현재의 내가 된 상황만 채팅으로 했던 것처럼 똑같이 말해줄 수 있을 뿐이야」

「그렇긴 하지만… 네가 걱정되서 그래」

「난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 마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성진이가 날 신데렐라처럼 떠받들어준다니까」

태환은 웃지 않았다. 그는 그 자신도 설명하지 못할 안절부절함이 마음 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었고, 그래서 계속해서 담배만 피워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만날 만한 당위성을 하나 생각해둘 것인데…. 그러고 보니 난 왜 그녀를 만나고 싶은 것일까. 오랜만이라서? 예전 연인이라서? 잘 지내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변한 그녀를 직접 만나면 혹시 기억이 돌아올지도 몰라서? 그럴 듯한 가설은 연이어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딱히 이것이라고 집어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태환은 ‘변한 그녀를 직접 만나면’이란 가설에 집중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허겁지겁 자판을 두드렸다.

「네 연애와 관련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날 보면 너도 기억이 돌아와서…」

보이진 않았으나 태환은 모니터너머로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동안 글이 올라오지 않았고, 이윽고 채팅창에 띄워진 귓속말은 그로 하여금 더 깊은 시름에 잠기게 했다.

「겨우 보는 정도로 기억이 돌아왔다면 난 예전부터 연애를 알았을 거야.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런 기억은 본래의 선영이 꽉 쥐고 있어서 오빠를 봐도 난 기억을 못해. 한가지 방법이 있긴 하지. 강렬한 경험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 그러나….」

‘강제’라는 말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렇듯 별 긍정적인 효과를 주지 못한다. 더군다나 선영의 성격이라면…. 태환은 그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고무적인 대답이 나올 거라곤 기대할 수 없었다.

「섹스를 함으로써 신체와 정신 모두에게 예전의 그리움이란 충격을 주면 본래의 선영 자체가 깨어버려. 그리고 앞서 말했듯 본래의 선영 목적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지 않아. 어쩌면 다시 죽으려할지도 모르지」

태환은 본래의 선영이 나왔을 때 자신이 설득해보겠다고 채팅을 입력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선영의 남자친구였던 만큼 그녀의 성격을 상당부분 잘 꿰뚫고 있었다. 그녀의 의지가 부합하지 않는 이상… 마음을 돌려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제기랄. 그녀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주변에서 보아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단 말인가? 아무리 선영이 나를 떠나면서 마지막 남자친구는 나일 것이라고, 그녀 자신을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쓸쓸한 미소를 보내왔지만…. 그러고 보니 그 김성진이란 녀석이 선영을 돌봐주고 있다고 했지. 그나마 그럼 그녀의 곁에 있는 사람은 한 명 정돈 있다는 건가….

「어쨌거나 난 이제 과거의 기억은 깨끗이 잊어버린 새사람처럼 살아갈려고 해. 몸도 거의 다 나았고 학교 생활에도 익숙해지고 있다고. 나 내일은 엠티도 갈 거라니깐」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해보려는 듯 선영은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왔고, 태환은 잠시 손가락으로 미간을 부여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형용할 수 없는 슬픔 같은 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올랐다. 그 정체모를 무언가를 울컥하고 발산해보려는 본능의 지시를 억누르며, 태환은 힘없이 얼굴을 들었다. 그리곤 두 손을 키보드 자판 위에 얹었다. 또박또박 적기라도 하듯 약간 느리게 채팅을 입력해나가는 손.

「그래. 잘 다녀와라. 선영아, 그리고…」

「음?」

「……네가…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해서 죽으려고 하지는 마. 목표가 없어도, 의미가 없어도… 너를 이해할 순 없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사랑해보려고 하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그로 하여금 너라는 존재는 세상을 살아가야 할 당위성이 부여되는 거야. 그 누군가는 너라는 존재를 이해할 목적으로 살 것이니까」

그게 누가 될지 태환은 당연히 답을 알 순 없었다. 그리고 선영도 모를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대답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물론 본 의미와는 다른 대답이긴 했지만.

「본래의 선영에게 던지는 메시지 같군. 하지만 나한테는 얘기해봤자야」

「알아.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전달할 방법이 없잖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조금 후 선영의 아이디 ‘실버레인’은 오프상태로 표시됐다. 다른 대전자와 더 이상의 게임 플레이도 없이 접속을 끊은 것이었다. 그리고 태환은 불이 꺼진 듯 어두워진 그녀의 아이디를 친구 목록에서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숙였다. 손바닥으로 살며시 눈을 가리며.

담배는 모두 꺼진 듯 재떨이에서 연기조차 피워올리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