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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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은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문자를 확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의 핸드폰 액정에는 메인 화면만 떠있을 뿐이었고, 그래서 정확한 시간을 재어보고 있다는 추론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저녁 7시 40분. 늦가을의 바깥은 이미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져 있는 시각이다. 식사 준비는 약 1시간 전부터 끝나있어서 지금은 데운 음식들이 모두 식은 상태였지만 성진은 입도 대지 않고 있었다. 어쩐지 해가 질 무렵에 느꼈던 불안감이 자꾸만 그를 엄습해온 것이다. 그는 처음엔 침대에 기대어 TV를 시청했고, 잠시 후에는 침대에 걸터앉아 초조히 기다렸고, 이제는 아예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처럼 일어서있었다. TV는 이미 한참 전부터 꺼져있었지만, 사실 성진은 처음부터 시청 자체엔 별 의미를 품고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결국 나가서 찾아봐야 하나라는 심정으로 벽에 걸린 재킷을 돌아보았을 때였다.

쾅-! 쾅-!

원룸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 동시에 흩어지는 그의 생각. 초인종을 놔두고 왜 저렇게 거칠게 손으로 두드리고 있는지에 대해 기분나쁜 의문감을 가지며 성진은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현관 앞에서 큰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누구십니까?”

“문 열어, 김성진. 나야.”

선영의 목소리에 성진은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

“뭐야, 초인종을 놔두고 왜….”

성진의 의문섞인 목소리는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선영은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발로 거칠게 그의 배를 밀어내었기 때문이었다. 걷어차인 것마냥 뒤로 한참동안 비틀비틀 물러나다 결국 엉덩방아를 찧고 마는 성진. 그의 멍청한 시선이 선영에게 보다 구조적으로 접근했을 때였다. 성진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열린다.

“은선영…?”

“대행하던 녀석을 부르는 음성은 아닌 것 같군. 그래, 나야.”

“선영… 선영아……!”

성진은 반가움에 배의 통증도 잊고 벌떡 일어서서 그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선영은 성진을 밀어붙였던 이유가 있었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힘없이 서있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성진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자리에서 멈칫했다. 그리고 그의 눈이 그제서야 경악으로 물들며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한다.

“너… 너 왜이래, 이게… 이 피들은 뭐야? 그… 그러고 보니 왜 다시 본래의 선영이…….”

퍼억-!

이제야 상황이 좀 자각되나보군. 그런 포상마냥 성진의 배에 연이어 가격된건 그녀의 무릎이었다. 성진은 이번엔 꽤나 극심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본래의 선영이 돌아온 게 확실하다는 기쁨과 의문과, 그녀를 여기저기 물들이고 있는 피에 관한 의문들이 한데 뒤섞여 몰려오는 기분을 받았다. 그리고 성진이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동안, 선영은 현관문을 닫고 들어와 한 손을 허리에 얹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컴퓨터를 한 대 더 사주든지, 네 컴퓨터를 쓰게 하든지. 그리고 ‘카잔 전쟁’ 이란 게임 알지? 그거 계정을 그녀 이름으로도 등록해 놔.”

당연히 성진의 입장에선 이해 못할 명령들뿐이었고, 그래서 고개만 들어 묻는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선영은 그 순간 다른 곳을 바라보며 연이어 말했다.

“이 녀석 혼자 PC방을 갔다가 강간당했다.”

“뭐…?”

“양아치 쓰레기 녀석들이 PC방에 포진해있더군. 내기를 빌미로 접근해서 강간한 모양이야.”

자신을 제삼자처럼 표현하는 그녀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겐 충분히 위화감을 심어줄법하지만, 성진은 이미 그녀의 화법에 익숙해있었다. 그래서 대행하던 선영이 강제로 성교를 당하였고, 그로 인해 본래의 선영이 튀어나왔음을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의 눈이 분노로 물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자식들 있는 PC방 어디야?”

“이미 내가 다 처리했어. 한 명은 운이 나쁘면 식물인간이 될지도 모르겠군.”

“뭐라고……?”

본래의 선영이 이해못할 정도로 강한 건 성진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성진은 그 양아치 패거리들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싸움을 못하거나 수가 한둘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자신을 이해시켜보려 노력했다. 그리고 썩 친절한 여자는 못 되는 선영은 그가 고민해볼 시간을 별로 부여해주지 않고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녀는 고개를 조금 삐딱하게 기울여서 성진을 쏘아보았다.

“너 도대체 어떻게 된 녀석이기에 다친 여자 하나 제대로 보호 못하냐?”

성진은 순간 울컥했지만 이 상황에서는 말을 삼키는 게 낫다는 판단을 하고는 이성적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바로 어떤 변명도 대지 않는 것.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

“용서를 구할게. 이럼 될까?”

선영은 자신의 앞에 쉽사리 무릎을 꿇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성진은 고개를 숙이고 반성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선영은 짜증이 난다는 듯 옆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내가 별로 신경쓰고 싶진 않은 문제지만, 대행하던 녀석이 섹스를 하게 되면 그것이 내게도 적잖게 전해진단 말이야. 정말이지…. 애초부터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연애와 섹스를 내 기억속에서 모조리 지우려 했고, 그것은 대행하는 녀석에게 그대로 적용되었지만 이놈의 귀찮은 현실은 섹스를 피해갈 수 없게 만드는군.”

성진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 그대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연애와 섹스를 하던 때가 네 인생에서 그나마 즐거워서이겠지?”

선영은 성진을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성진은 선영이 분명히 그것에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재차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흔히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라고 하면 그 중 하나는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라고들 하지. 그리고 그건 네게도 적용되는 것이었겠지? 네 피폐한 삶에서 잠시나마 탈피할 수 있고, 살아갈 만한 가치를 부여했던 건 연애와 섹스로부터 느껴지던 감정 아니었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돌아가지 마. 이채로 나와 살아가.”

선영은 성진을 내려다보았다. 성진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 자세 그대로 애원하듯, 하지만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를 마주보면서 힘을 담아 말했다.

“내가 네 삶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사랑해볼게.”

선영은 다리가 아파왔다. 그렇잖아도 무리하게 움직인 신체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쉴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성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포기를 모르는 지겨운 남자라고 생각하면서.

사랑이라고? 사랑이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을까? 선영은 예전에 사귀었던 수많은 남자들과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그들과 연애를 하면서, 섹스를 하면서 사랑한다는 말은 수없이 많이 들어봤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꽤나 재미있는 자가당착이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종종 쉽사리 사랑이라는 단어에 의탁하려 하지만, 사실상 모호하고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이 뭉뚱그려져서 만만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건네지는 말은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굉장히 어긋난 감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랑이란 단어는 대부분의 인류들에게 공통적으로 가장 아름답게 비추어지는 것이기도 하지.

이 남자도 삶이란 것을 사랑이란 단어에 의탁하여 살아갈 의미를 발현시켜보려는 것일까? 하지만 곧 선영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 의미 없다. 어차피 그런 고민 따위가 필요 없는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안주하면 그만이니까. 단지 한가지 걸리는 건… 눈앞의 이 멍청이가 나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거다. 나 자신은 괜찮은데, 그는 그렇지 않고 설명을 해도 알아먹는 것 같지도 않다. 도대체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그것도 곧 끝내버려야겠군.

“네 사랑은 에고이즘인가, 앨트루이즘인가?”

“뭐……?”

“설령 둘 다라고 대답한다해도 앨트루이즘쪽에 기울어져있겠지? 희생이란 것이 없고서는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으니까. 최소한 너희들에게는.”

마치 자신은 차원이 다른 세계의 누군가인 것마냥, 성진을 가리켜 ‘너희들’이란 표현을 건네는 선영. 그리고 성진은 그녀의 말과 지칭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선영은 한가롭기까지 한 음성으로, 하지만 귀에 또박또박 못박듯 또렷하게 말했다.

“그럼 네 사랑하고 싶다란 감정 또한 희생시켜. 궁극적인 사랑의 완성을 위해서.”

“그게 무슨… 어떻게……?”

“이해가 느리군. 내가 편안히 있을 수 있도록 날 그대로 놔두란 거야. 네가 선영이란 존재를 좋아하나? 그럼 그녀가 원하는 세계에서 안주할 수 있도록 놔주라는 거야. 그것으로써 네 앨트루이즘은 충족되고 사랑이란 것은 완성되겠지.”

성진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함을 느꼈다.

“이봐! 은선영! 같잖은 말장난으로 날 납득시키려 하지 마! 사랑하니까 놓아준다? 좋아하는 여자가 헤어지자고 하면, 나는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냥 떠나보내야 한다는 가장 만만하고 비겁한 변명거리를 앨트루이즘이란 근거로 포장하여 건넬 셈인가? 사랑이란 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냐! 사랑이란 건… 사랑이란 건……!”

그는 결국 못참고 몸은 반쯤 일으킨 채 격하게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선영은 토론하는 사람이 반박하는 걸 지켜보는 시선으로 덤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성진은 그런 그녀의 시선이 못견디게 싫었다.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저 무표정.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어 자신을 죽여버릴 수도, 또 그렇게 했던 과거의 기억 또한 떠올랐기에. 그래서 성진은 그런 그녀의 시선이란 올가미로부터 빠져나가려고 발악이라도 하듯 소리를 질러댔다.

“상대가 OK라고 해서 안심할 수 없는 것이란 말야! 무슨 뜻인지 아나, 은선영? 그, 혹은 그녀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끊임없이 걱정하고 아파하고 마치 나 자신이 그런 것처럼 괴로워하는 것. 그로써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사랑… 그것이 그렇게 만만해 보여? 그것은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정립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런데 너는… 네 뇌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있는 거야……. 사랑이란 걸 감히 그런 식으로 정의할 수 있어……?”

성진의 말은 사실 어떻게 보면 사랑이란 감정에 가장 근접한 고유의 특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내뱉는 성진 자신도 그녀가 그 말 속에 포함된 진심을 알아주길 바랐다. 그녀의 마음을… 마치 기계마냥 아무 감정 없는 듯 굳어버린 그녀의 마음을 흔들 수만 있다면…….

하지만 성진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선영은 그런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증언으로 툭하고 내뱉었다.

“전제부터가 잘못되고 있잖아. 네가 말하는, 감히 정의할 수 없다는 사랑이란 건 같은 선상의 존재들에게나 통용되는 것이지, 그것이 다른 선상으로 넘어가면 적용 자체가 불가능해져. 무의식의 세계를 지향하는 존재에게 사랑이란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그 세계는 말 그대로 무의식이라, 경험하고 나오면 다른 선상의 존재가 되지. 방 안에만 살던 사람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가 온 사람을 보고 알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바깥을 향해 왜 자꾸 나가냐고 따질 수 있는 것일까?”

성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말로는 이길 수 없는 여자다. 그리고 성진은 그녀의 반박을 들으며, 그녀가 이미 잡을 수 없는 한없이 먼 곳에 있는 존재가 되어버렸음을 다시 한번 뼈아프게 느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진 성진의 말은,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심코 내뱉은 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럼 지난번에 캠퍼스 옥상에서… 내가 거치적거려서 맘 편히 나갈수 없다고 한 것은 무엇이었지?”

“…….”

성진은 아무 말도 없는 그녀에게서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선영은 시선을 슬쩍 피하고는 덤덤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미묘한 떨림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김성진. 네 녀석이 죽어버리겠다고 했잖아. 도대체 뭐가 그렇게 너로 하여금 나에게 부합하게 만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문을 열고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 다른 누구 때문에 이루어진다면, 그 다른 누군가는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았거든.”

‘그 다른 누군가’는 물론 선영의 입장일 것이다. 의도치 않은 질문이 이렇게까지 효과를 보자 성진은 마치 신의 도움이라도 얻은 듯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요행이었기에 다음에 더 그녀를 강하게 붙잡을만한 말은 생각해낼 수 없었고, 그래서 약간의 효과에 만족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선영은 한숨을 크게 한번 쉬고는 다시 성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난 죽었지만 언제든지 깨어날 수 있는 애매한 상태로 이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나 그것도 여기까지야. 김성진. 이제 난 완전히 죽은 걸로 생각하도록 해.”

“선영…? 그게 무슨 말…….”

“대행으로 내어진 선영을 나로 생각하고 잘 보살펴주든지, 아니면 헤어지든지 네 마음대로 하라고.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거야. 자꾸 나오니 이것도 못해먹을 짓이군. 굉장한 정신력의 소모가 있고 그건 내게 있어선 너무나도 귀찮아. 푹 잘 자고 있는데 자꾸 누가 흔들어서 깨나는 게 반복된다고 생각해봐. 물론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차원이긴 하지만…. 만일 네 녀석의 그 같잖은 좆을 나한테 집어넣든지,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강간을 당하든지 해서 또 내가 나오게 되면….”

선영은 갑자기 키득 웃으며 허리를 숙여 성진을 바라보았다. 불과 몇 센티도 안 되는 거리에서 갑자기 마주한 성진은 흠칫 놀라며 앉았던 몸을 뒤로 젖혔다. 하지만 오랫동안 꿇었던 무릎은 그에게 저림이란 고통을 선사했고 성진은 이빨을 꽉 깨물며 한 손으로 다리를 쥐었다.

선영은 그런 성진의 반응을 재밌다는 듯 뒷짐을 지고 허리를 숙여서 잠깐동안 바라보다가 말을 이어갔다.

“그 때야말로 대행하던 녀석과 함께 이 세상에서 바이바이하겠어.”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기분이 잘 들지 않을 정도로 센스있는 경고였다. 그리고 성진은 그런 그녀의 평온하기까지 한 아름다운 미소에 전혀 감사하지 않은 채 외치듯 말했다.

“닥쳐! 은선영! 네가 뭔데 대행하던… 아니, 네 스스로를 그렇게 버리려하는 거야!”

치밀어오르는 감정 그대로 말하려다 ‘대행하는 선영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이므로 생사의 주도권은 그녀가 쥐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비켜말하려 했고, 그래서 퍽이나 이상한 말뜻이 되고 말았다. ‘네가 뭔데 네 마음대로 죽으려 하는 거야? 너는 내 허락 없인 못 죽어’란 뜻 말고는 다른 의미로는 생각할 수 없게 된 그 화법에 선영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쿡쿡 웃었다.

그리고 성진이 다음으로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선영은 몸을 뒤틀며 옆으로 쓰러졌다. 대행하던 그녀가 도로 끄집어내어진 것이었다. 마치 바람처럼 몸을 돌려 헤어져버리듯 그렇게 사라진 본래의 선영. 성진이 주저앉은 채로 멍하니 있는 사이 그렇게 전환된 선영은 심하게 옆으로 쓰러져 벽에 머리를 부딪치곤 인형처럼 바닥에 널부러졌다. 콰당-!

“선영…? 은선영……?”

성진은 잠깐동안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르는 어조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황급히 다가갔다. 그녀의 등을 받치고 조금 일으켜본 성진은 가늘게 눈을 뜨고있는 그녀의 모습에게서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는 안도감을 받았다.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별 위로가 안 되는 안도감이나 마찬가지였다.

선영은 시야를 방해하고 있는 흐트러진 머릿결 사이로 힘겹게 눈을 떠 성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피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이긴 했지만 성진은 본래의 선영이 그녀 안으로 사라졌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또다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오르며 울컥하는 성진. 그런 그를 바라보는 현재의 선영은 그의 팔에 뉘어진 채로 힘없이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성진아…. 그들이……. 그들이 날…….”

성진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가 무리해서 말할 필요는 없다는 걸 인지시켜주기라도 하듯.

“알고 있어. 끝났어. 상황은…….”

“성진……. 나…… 나…….”

“미안해! 내가… 내가 참았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마!”

“나…… 흐…… 흑…… 끅…….”

“말하지 말라고! 젠장할… 윽….”

“끄…… 흑…….”

“내가…… 잘못했다고…….”

쾅! 쾅!

“이봐! 당신들 좀 조용히 할 수 없어? 여기가 당신들만 사는 곳인 줄 알아?”

연이은 외침과 감정이 실린 커다란 목소리에 결국 옆호에 사는 사람들 중 한 명이 짜증을 내며 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하지만 성진은 그런 누군가의 항의로부터 선영을 보호하기라도 하듯 더욱 꼭 끌어안았다. 흐느끼는 선영마냥 그의 두 눈에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시리도록 단절된 세상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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