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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장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지듯 내려놓아져 있는 성진의 재킷은 그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 밑바닥에 그의 회색빛 슬림 바지가 구겨진 채로 떨어져있었고, 옆에 놓여진 의자에는 혜진의 숏재킷이 그나마 좀 안정되게 걸려있었다. 하지만 채크무늬 치마는 팔걸이에 걸쳐진 채 역시 아슬아슬한 자태를 보인다.
사실 벗어던져진(?) 옷들에게 생명이 있다면 그런 위태로운 모양으로 걸려있다 할지라도 그 후에 어떤 인위적 힘이 가해질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성진과 혜진은 그곳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침대에서 일련의 행위에 열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이십 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대학생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매우 뜨겁게 달아올라있었고, 거기에 성진의 분노어린 격렬한 삽입행위가 더해진 상태였다. 그들의 몸짓에 의해 모텔의 침대는 그 크기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삐걱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내뿜는 기운과 열기는 옷들이 놓여져있는 안전지대가 정말로 안전한지에 대해 한번쯤 의심해봐야 할 기분을 느끼게 한다.
“아… 아흣! 오빠…… 앗….”
혜진은 달뜬 신음소리를 내면서 자세를 바꾸었다. 방금 전까지 옆으로 누운 채 성진은 뒤에서 혜진을 끌어안고서 피스톤 운동을 하고 있었고, 이제 혜진은 똑바로 누운 자세로 전환한 상태였다. 성진은 두 무릎을 세워서 벌개진 자지를 허공에 껄떡거리며 잠시 숨을 골라갔다.
“헉… 헉. 후우…….”
거대하고 단단하게 굳혀진 자지는 그가 손으로 감싸쥐어도 끝부분이 한참이나 튀어나와있을 정도였고, 혜진은 서둘러서 다리를 양쪽으로 벌려 한 손으로 자신의 보지를 문질러갔다.
“이리… 이리, 오빠. 어서…… 흣.”
“그렇게 재촉하지 마. 젠장…. 그렇게 재촉하면…….”
성진은 혜진의 보지 속에 다시 자지를 쑤셔넣으면서 말끝을 흐렸다. 몇 번이고 박아대도 그녀의 보지는 언제나처럼 탄력있고 부드럽게 그의 자지를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성진은 지금껏 경험한 여느 여자들과 비교해봐도 혜진의 보지는 그야말로 최상급이라 자가판단을 하고 있었다. 물론 섹스를 하는 순간에는 다른 여자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도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질책했지만 사실 그녀의 보지가 그런 생각을 이끌어낼 정도로 상당한 쾌락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성진은 그녀의 익숙하면서도 도저히 절제할 수 없는 보지의 느낌을 맛보면서 자신이 하려던 말의 끝맺음을 완성시키려 노력했다.
“…나도 모르게…… 윽, 먹어버리고 싶어지잖아!”
혜진은 그녀 나름대로 성진의 크고 단단한 자지가 보지 안을 가득 채워주는 느낌을 음미하다가 문득 두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쑤욱, 퍽! 쑤욱 퍽! 정신 없이 피스톤운동을 하는 성진을 응시하던 혜진은 문득 물어보았다.
“먹어? 흑…. 뭐… 뭘 먹어, 오빠?”
“그… 그냥. 널 먹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으흑…. 아, 너무 기분 좋다. 혜진아….”
철퍽거리며 점차 격렬해지는 피스톤운동 속에서도 혜진은 살짝 주먹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하고 웃었다.
“뭐야, 그거… 기분나쁘게. 남자들이 여자와 관계를 가진 걸 꼭 그렇게 표현해야 해?”
성진은 한없이 복잡한 심경 속에서도 문득 소주집에서 혜진이 오기 전 노래방도우미를 따먹었다는 표현을 거침없이 쓰던 사내들이 떠올랐다. 적지 않게 들이마신 술기운과 더불어 꽤나 감정적으로 치우쳐 있었지만 성진은 자신을 어느 정도 절제하는 데는 일상처럼 몸에 배어있는 타입이었고, 반성해야 함을 느꼈다. 그래서 자신의 말을 번복이라도 하듯 더듬거렸다.
“아… 아니. 그냥 느낌이 좋아서. 딱히 사용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나온 것 같네. 으음. 미… 미안.”
“으응. 아냐. 곧바로 사과하기는. 근데 오빠, 보기보다 되게 귀여운 구석이 있다? 왜그렇게 나한테 안절부절못해? 쿡쿡.”
성진은 그녀가 잠시 자신을 갖고노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별로 기분나쁘진 않았다. 꼭 자신이 주도권을 잡아서 진행해야 만족감있는 섹스라고 여기지는 않았기에. 다만 본래의 선영이나 소영도 그랬고 어째 요즘 들어서 자신이 끌려다닐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들만 만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을 읽는 건지 어떤 건지. 혜진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을 참으려는 노력이 역력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 그럼 내 어디를 먹고 싶어, 오빠?”
“여기다!”
성진은 지지 않겠다는 듯 그렇게 외치면서 혜진의 커다란 가슴을 덥석 물었다. 혜진은 까르르 웃으면서 그런 그의 머리를 한 손으로 끌어안았다. 간지러움에 몸을 이리저리 꼬면서. 그리고 성진은 그런 그녀의 몸짓을 중단시킬 의도는 없는지 계속해서 그녀의 젖가슴을 빨았다. 톡 튀어나온 예쁜 그녀의 젖꼭지를 혀로 살살 핥다가 입술로 물어서 당기는 척 하면서 주변을 또다시 혀로 둥글게 핥아갔다.
한없이 이어질것만 같던 혜진의 웃음소리는 점차 쾌감이 뒤섞인 신음소리로 변해갔다. 톡톡 튀기듯 호응하는 그녀의 색스러운 살결들과 성진의 경험 어린 테크닉이 맞물리며 둘의 행위는 급속도로 달아올랐다. 그녀의 젖꼭지가 자극을 받은 듯 꼿꼿하고 딱딱하게 섰고, 성진은 두 젖가슴을 번갈아 빨아주다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그의 혀가 곱게 솟아나온 그녀의 쇄골을 거쳐갔고 부드러운 목 부분을 마찰시켜갔다. 턱과 목 사이를 가볍게 물어주자 혜진은 달뜬 신음소리를 내었다.
“아흣…….”
한참 그녀를 애무하는 데 전념하던 성진은 문득 자신이 너무 섹스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각을 해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건 위로용의 섹스가 아니라 서로 즐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 섹스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도저히 가라앉았다고 볼 수 없는 분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성진은 그녀의 귀 부분으로 살살 핥아가면서 피식하고 웃고 싶어지는 걸 간신히 참아야했다.
‘정말로 섹스를 즐기고 싶어하는 여자로군.’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동화되는 자신을 느끼면서 이번엔 고개를 가로젓고 싶어졌다. 그 때 혜진이 못참겠다는 투로 입술을 달싹였다.
“오빠… 오빠, 키스해줘.”
성진은 얼른 잡생각을 떨쳐버리려 하며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치었다. 엷은 색깔을 띤 부드러운 여자의 입술 느낌에 성진 자신도 점차적으로 흥분이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성진은 곧 헐떡거리며 그녀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가며 정신없이 빨아대었다. 조금 후 매끄럽고 부드러운 그 느낌과는 대조되게 약간 까끌하다싶은 그녀의 혀가 내어졌고, 그러한 혀는 입술보다 훨씬 유동적인 움직임으로 성진의 혀를 자극했다. 둘은 입술을 꼭 맞물린 채 상대방의 즐거움을 탐닉하려는 듯 서로의 혀를 이리저리 핥아대었다.
“움… 우웅…… 쭈웁…… 쩝…….”
“하읍… 쩝…… 쩌업…….”
혜진의 희고 고운 팔이 성진의 목을 끌어안았다. 혜진의 입술 가장자리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침이 질질거리며 흘러내렸고, 자지와 보지가 맞물린 곳에서도 흥분으로 인해 발산된 윤활액이 다량 분비되었다. 그 씹물은 혜진의 엉덩이를 타고 내려가 침대 시트를 촉촉이 적셔갔으며 얼마간은 항문에도 흘러서 그 주위를 적시었다. 성진은 다시금 자지에서 참지 못할 그 무언가의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혜진의 보지 속에다가 다시 격렬히 박아대기 시작했다.
철퍽, 철퍽, 철퍽, 철퍽, 철퍽. 퍽퍽퍽퍽!
“하아, 하아, 하아……. 하아아악……!”
그 간질간질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제지하기라도 하듯 열렬히 허리를 움직였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은 박아대면 박아댈수록 더욱 끓어오르고 있었다. 성진은 결국 혜진의 입술에서 입을 뗀 채 그녀의 보지 속에 사정없이 좆을 박아넣기 시작했다.
“아… 아윽. 안되겠어. 나 또 나온다. 혜진아. 쌀 것 같아. 이제, 이제…….”
“흐… 흑……. 오빠. 이번에도 가득…… 가득히…….”
‘또’라는 부사가 붙은 걸로 봐서 이게 첫 사정이 아님은 분명한 부분이다. 그리고 혜진의 보지는 성진의 단련된(?) 자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환상적으로 부드럽게 꽉꽉 조이는 힘을 갖고 있었고, 성진은 그의 의지가 아닌 자연스럽게 나오는 정액을 경험해야 했다. 불과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은 시점에서. 쭈우우우욱, 왈칵, 왈칵.
“허억……!”
성진은 혜진의 보지 속에 좆을 박아넣은 채 세 번째 사정의 쾌감을 맛보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지는 처음 그 기세에 지지 않겠다는 듯 힘차게 벌떡거렸고, 이상스레 성진은 혜진과 섹스만 하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정액이 분출되는 걸 느꼈다. 그녀와 내가 이렇게 잘 맞았나? 어쨌거나 세 번 모두 질내 사정이었고 성진은 그녀가 제대로 피임을 하고 있다는 언급을 듣고서도 임신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격하게 많이 쏟아내고 있었다. 혜진은 그녀대로 성진의 정액이 질 내부를 가득 채우는 느낌을 음미하며 쾌감을 간직하고 있었고, 잠시의 정적 같은 시간 후 둘은 서로 몸을 포갠 채 추욱 늘어졌다.
때는 겨울을 달리는 늦가을이었지만 난방을 딱히 켜지 않아도 될 정도로 둘은 달아올라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껴안은 채 다시금 키스에 몰두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었다. 말은 않고 있었지만 둘은 이따금씩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약속이나 한 듯 수줍게 웃었고, 다시 또 대담하게 키스하기를 반복해나갔다.
그리고 또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다시금 발기해가는 성진의 자지. 보지에서 빼어든 채 그녀의 허벅지에 덜렁 내려놓은 자지가 서로의 몸을 어루만질 때마다 조금씩 다시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혜진은 그것을 느끼고는 손을 밑으로 뻗어 그의 자지를 감싸쥔 후 키득하고 웃으며 말했다.
“오빠것 또 부활한다. 에헤헷. 지치지도 않나봐?”
“네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기뻐. 근데 너무 좋다, 오빠… 몇번이고 다시 할 수 있잖아?”
성진은 잠시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가볍게 입맞춤을 한 후 지나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이렇게 너랑 자다보면 다른 여자하고 할 때는 어떻게 하냐. 수준 떨어져서 발기도 안되겠다.”
하지만 혜진은 그 말에는 웃지도 않은 채 가만히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큰 가슴에 볼을 비벼보던 성진은 문득 그런 시선을 느끼자 동작을 멈칫했다. 또 내가 뭘 잘못 말했나? 하지만 일종의 슬픔 같은 눈빛은 그리 긴 시간에 함유하지 않았고, 곧 그녀는 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성진의 자지를 만지작거렸다.
“근데, 오빠. 좀 너무 빨리 싸는 것 같다. 약간만 길면 좋을텐데. 뭐 살짝 아쉬움이 남는 것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지만.”
“어? 어…… 노력해 볼게.”
적당히 답하던 성진은 이번엔 그의 쪽에서 의문감이 들었다. 혜진도 나랑 첫 관계가 아님은 분명한데… 전에 같이하던 남자들은 그녀를 제대로 만족시켜주었나? 그렇다면 이거 은근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자랑할 것은 못되지만 나도 그렇게 여자 경험이 적은 건 아니니까.
물론 그것은 성진 입장에서의 생각에 지나지 않았고, 혜진은 그저 알 듯 모를 듯 신비롭기까지 한 미소만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대학로로 향하는 지하철 역은 언제나 사람이 붐비지만, 그런 곳도 가끔씩은 어느 정도 한가한 시간이란 게 존재하기 마련. 평일의 이른 점심시간이 바로 그러한 때였고, 모텔에서 나온 성진과 혜진 둘다 딱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 시각 그 장소를 걷고 있게 되었다. 성진은 오후 늦게나 수업이 있었기에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갔다가 학교에 갈 것이라고 했고 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조심해서 잘 가. 오빠.”
쏟아져내리는 따스한 늦가을 햇살에 등 뒤를 살짝 덮은 혜진의 긴 머리칼이 윤기를 형성하며 바람에 나풀거리듯 흔들렸다. 살포시 미소지으며 가방을 두 손으로 앞쪽에 모아쥔 채 걷는 그녀. 성진은 그런 혜진을 바라보다가 문득 뭔가 빠뜨린 사람처럼 물었다.
“너는?”
“점심시간 직후에 수업이 있어. 어차피 오빠랑 아침 겸 점심을 먹었으니 이대로 일찍 강의실에 들어갈 생각이야.”
그랬었나, 어쩐지 모텔에서 나오기 전 조금 오래 차림새를 고쳐입는 듯하더니 이럴 생각이었군. 성진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그녀가 걸음을 멈칫한 걸 보고 따라서 멈춰섰다.
“난 이제 이 역에서 이쪽길로 가야 해.”
“아, 그래. 그렇군. 이쪽이 대학교 정문으로 향했지…. 그럼 잘 가라. 강혜진.”
그렇게 말한 성진은 한 손을 재킷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다른 쪽 길로 몇 발자국 앞서갔다. 얼마간 걸어간 그는 슬쩍 몸을 돌려 손을 들어보였다. 하지만 혜진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 보이는 검은색 가방을 앞쪽에 모아쥔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 대여섯 걸음 떨어졌던 성진은 다시 돌아와서 그녀 앞에 섰다. 그녀의 뒷편으로 몇몇 사람들이 제각기 귀에 이어폰을 꽂거나 통화를 하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지나다닌다.
“왜 그래, 혜진아.”
“으응, 아니……. 그냥 좀 찝찝한 게 있어서….”
“뭐가?”
혜진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빠한데 어제 좀 미안했던 것 같아. 그… 내가 너무 내 위주로만 즐겁게 진행해서 오빠한텐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성진은 ‘뭐 그런 것 갖고, 괜찮아.’라고 평범하게 말해주려다 문득 멈칫했다. 그리고는 자신과 시선을 잘 마주치지 못하는 혜진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럴 녀석이 아닌데…. 그녀와 같이 한 시간이 길다곤 볼 수 없지만 성진은 여자의 작은 변화에도 어느 정도 마음을 감지해볼 수 있는 경험력은 갖추고 있었고, 그래서 한 루트를 던져보기로 했다.
“뭐 할말 있니, 혜진아? 괜찮으니 오빠한테 슬쩍 말해봐.”
하지만 혜진은 눈을 감듯 조용히 내리깔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여전히 그 평온한 미소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성진은 그런 후배를 말없이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얼마간 걸어가서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정말로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한결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혜진을 보게 되었다.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선영의 생각과 혜진에 대한 미묘한 감정 등등을 곱씹어보며 두 다리를 무의식적으로 놀리듯 걷는 성진. 멀어져가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혜진은 그녀 나름대로 자신의 감정을 정립하고 있었다. 혜진이 느끼던 것은 일종의 애달픔 비슷한 것이었고 그녀는 사실 그러한 감정이 밀려오는 것에 별로 당황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이십 대 초반의 당당한 여대생 표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 감정에 쓸쓸함을 느낄지언정 혼란스러워하지는 않았다.
이제 손바닥으로 가릴 수도 있을 만큼 멀어진 성진의 뒷모습 옆에 천천히 손을 들어올린 혜진. 그녀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었고, 그것을 열어젖혀 화면이 보이게 한 후 예전에 찍었던 하나의 사진을 로딩시켰다. 성진과 첫 관계를 가졌던 모텔에서의 사진이었고 이쪽을 바라보며 씩 하고 웃고 있는 성진의 모습과 현재 그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던 혜진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짙은 간절함을 담아서.
“성진 오빠…. 내가 얼마나 오빨 좋아하는지 오빠는 잘 모를 거야.”
그녀는 문득 산들바람에도 추워진 듯 핸드폰을 들지 않은 다른 쪽 팔로 자신의 가슴을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어제의 그 연예인을 방불케 할 블라우스에 숏재킷, 체크무늬 미니스커트, 롱부츠를 신은 화사한 옷차림 그대로였고 주변을 지나가던 몇몇 청년들은 잠시 고개를 돌리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자신이 너무 데이트차림새로 혼자 오래 서있다는 걸 자각한 혜진은 귀찮은 집적거림이 다가오기 전에 갈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을 도로 가방 속에 집어넣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그녀. 이어서 이런 차림으로 강의에 들어가도 될까 하는 애매한 문제에 봉착하려는 찰나 설마하던 집적거림이 다가왔다.
그 집적거림은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였다. 그리고 그건 정확히 말하자면 집적거림이라 표현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같은 여자이자 그것도 같은 학번의 여대생이었기에. 하지만 혜진은 그런 사실이 무색할 만큼 놀라버렸다. 언제부터 같이 걷기 시작했는지 모르게 그 여대생은 옆에서 앞쪽으로 몸을 숙이고는 혜진을 쳐다본 것이었다.
“채… 채미선?”
“흐음, 강의 들어가는 거야 혜진아?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
그녀 특유의 포니테일 머리를 살랑거리며 생긋 웃는 미선. 티셔츠에 청멜빵반바지차림의 그녀는 가벼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곤 가방을 앞쪽으로 모아 쥐고 있는 혜진과는 달리 그녀는 뒷짐을 지듯 모아들고 있었다. 꽤나 귀여운 인상이었지만 모텔에서 정사를 나누고 방금 성진과 헤어진 혜진에게 있어서는 가슴 철렁한 등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으응…. 점심시간 끝나고 바로 강의가 있어서. 그런데 언제부터 옆에 있던거야?”
“음? 조금 전부턴데?”
“조금 전 언제?”
“핸드폰을 들어올리고 뭐라고 중얼거리던데. 나는 셀프 사진이라도 찍는 줄 알았지. 그런데 왜 그렇게 민감해?”
혜진은 얼른 평소의 표정 상태를 연기하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성진 오빠와의 관계를 들켰나?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들켰다고 해서 별로 위해될 건 없거니와 과도 달라서 서로 얼굴도 잘 모를 정도이니 이상한 소문을 낼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보다 혜진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미선이 이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이유가 더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편의점에서 커피와 비스킷 등을 살 때 자신에 대한 디테일한 평을 했지…. 나는 잘 모르는데 미선은 나를 그렇게 주의깊게 관찰했단 건가?
“대화도 거의 해보지 않은 동급생이 왜이렇게 달라붙는지 궁금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나란히 걷던 미선이 앞서 질문한 대답을 듣기를 포기했는지 쿡 웃으며 다른 질문을 던졌고, 물론 그것은 혜진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어, 어, 어?”
“피, 왜 그래? 죄지은 사람처럼. 확대해석하는 건지 뭔지…. 아니면 나랑 같이 걷는 게 불편한가 보다.”
일부러 삐진 듯 고개를 홱 돌리자 혜진은 모든 잘못이 자신에게 있는 것마냥 자꾸만 허둥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아니, 아냐. 방금 전까지 너무 생각에 빠져있어서 그래. 마침 학교까지 거리도 많이 남았는데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고 생각하던 참이야.”
미선은 곁눈으로 그런 혜진을 살피다가 곧 고개를 원래대로 하고는 ‘에헤헷’하고 웃어버렸다. 그 순수한 모습은 혜진마저도 잠시 넋을 놓을 정도로 귀여웠고 그래서 혜진은 잠시 동급생이란 사실을 잊고는 챙겨주고 싶은 후배를 보는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둘 다 1학년이기에 후배 따윈 아직 없었지만 실제로 미선의 키는 혜진에 비해 조금 작다는 점도 작용하는 듯했다.
잠시 후 미선은 산책을 거니는 소녀처럼 전방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 우린 아직 잘 모르는 사이지만 친하게 지내고 싶어. 나는 솔직히 말하면… 2학기가 된 지 꽤 지났는데도 친구도 거의 사귀지못했어. 성격이 내성적이거든.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지만 조금이라도 사람들을 많이 접하면 성격이 바뀌지 않을까 해서 시작했던 일이고 말야. 그리고 내가 몰래 좋아하는 오빠도 있긴 하지만… 으응, 이건 쓸데없는 말. 어쨌거나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혜진이 네가 부러워. 오늘도 그렇지만 정말 예쁘게 차려입고 나왔잖아?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며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다닐 수 있지?”
허세부리기 좋아하는 인간이 아닌 이상,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갖고 있는 장점을 어느 정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혜진이라고 해서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따라서 혜진은 미선이 부러워하는 점을 대충 머릿속으로 모두 필터링해버리고는 ‘몰래 좋아하는 오빠’부분에 신경을 집중해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내성적이라 표현할 정도로 이 자신감없고 귀여운 녀석이 좋아할 정도면… 그게 누굴까? 광범위하고 과대망상일 수도 있겠지만 혜진은 어쩐지 성진과 그녀가 같은 과라는 사실이 신경쓰였다.
하지만 혜진은 더 이상 당황하지는 않았다. 미선과 달리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그녀는 어떤 타입의 사람에겐 어떻게 대하는가를 상당 부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고, 그래서 미선의 말 속에 담긴 구체적인 부분을 파고들 여유까지도 되찾았다. 초반에 꽤나 의기양양하게(?) 끼어들었다가 더 이상 할말이 없어지자 입을 다물어버린 미선과는 달리 혜진은 슬슬 그녀의 본심을 자극해서 베일을 벗겨보는 놀이를 진행해나갔다.
“내가 저번에 편의점에서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자신의 단점을 굳이 보완하려 노력하기보단 그것을 장점으로 되살려보라고. 누군가를 비춰보며 자신을 똑같이 베껴나가기엔 우리 같은 이십 대 주체에게 부여된 자유란 게 너무도 아깝거든.”
“우웅…. 알고 있어. 하지만 너무 어려운걸.”
혜진은 고개를 조금 숙이며 픽하고 웃고는 한 손으로 머리칼을 귀 너머로 쓸어넘기었다. 그리고는 짐짓 안타까운 시선으로 미선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너, 그렇게 아무한테나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다간 쉽게 상처받는다.”
하지만 미선은 그 말에 눈을 똑바로 뜨고는 혜진을 마주보았다.
“너도 그 ‘아무나’에 해당하는 거야?”
“뭐 그렇게 굳이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린 아직 알고 지낸지도 얼마 안 됐고. …그럼 이렇게 하지. 우리 이제부터 말벗. 소울메이트? 음, 그건 오버지만 그 못지않은 친구 해보기로 하는 게 어때?”
어쩐지 챙겨주고 싶은 기분에 그런 관계도 하나쯤 정립해보는 것도 신선할 듯해서 내뱉은 말이었지만 미선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뭐야. 난 잘 몰라. 어려워. 그냥 친구해. 난 이미 널 친구로 생각하고 있지만서도…….”
혜진은 그만 입을 가리고 조금 격하게 실소했고,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래, 그래. 친구. 후우…. 근데 너 보기보다 조금 화끈한 데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미선은 그 말엔 별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여전히 뒷짐진 자세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타박타박 걸어갔다. 사람마다 성격의 차이마냥 중요시하는 관점도 다르기 마련이고, 말싸움을 하려면 그런 관점이 아주 어긋나지 않는 일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혜진은 미선과는 그런 말싸움의 기제도 존재하지 않을 예감이 들었고 그래서 소리없이 웃으며 전방을 응시했다.
하지만 대학교 정문이 보일 때쯤까지 걸어온 혜진에게 있어선 또한번 격한 파동이 일듯한 말을 듣게 되었다.
“성진 오빠 만났어?”
미선이 좋아하는 오빠란 게 누군지 어떻게 유도해볼까 머릿속으로 구상해보던 혜진. 그녀는 미선의 이 직접적이고 단순한 물음에 뜻밖의 선공을 당한 사람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혜진은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말하려 했으나 특별한 상황 외에는 매사에 요조숙녀처럼 연기하는 데 익숙한 그녀에게 있어서도 억양은 살짝 떨리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만났구나. 흐음.”
무의식적인 되물음이 그 어떤 진실성보다 더 진실된 대답이 되었음을 자각한 혜진은 스스로를 다그쳤다. 왜이리 답지 않게 안절부절 못하지? 그녀가 그걸 봤다고 해서 무슨 큰 문제가 된다고. 혜진은 짐짓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다시 연기해 들어갔다.
“뭐야, 그 오빠랑 헤어지는 걸 본 거야? 그러면서 아까는 모르는 척 셀프사진 찍는 줄 알았다고 한 거니.”
“헤어지고 나서 찍은 줄 알았지. 흐음,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부분을 자꾸 찔러보는 걸 보니…….”
혜진은 살짝 가슴이 뛰면서 꺼림칙한 눈으로 옆에 걷는 미선을 바라보았다. 미선은 마치 퀴즈를 맞추기라고 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혜진을 가리키며 싱긋 웃어보였다.
“남몰래 연애하고 있구나! 성진 오빠랑.”
혜진은 결국 한숨을 폭하고 쉬었다. 이 녀석… 겉으론 내성적이라면서…. 아니, 실제로 자신이 없는 게 맞겠지. 하지만 이상스레 날카로운 면이 있단 말야. 아니면 내가 너무 민감한 건가?
어쨌거나 혜진은 일단 난처한 미소로 수습 단계를 밟기로 했다.
“에이, 들켜버렸네. 뭐 하지만 비밀로 해줘. 아직 연애하는 건지 뭔지도 애매한 단계이니까.”
친구니까 그정도 비밀은 지켜줄 수 있겠지? 라는 미소를 능숙하게 건네는 혜진. 그러고 보니… 연애라. 그 단어가 갑자기 와닿네. 혜진은 정말로 성진과 자신이 연인 관계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올려보았다. 물론 몇 번 잠자리를 같이 하긴 했지만 성진에게 있어선 그 무언가를 쫓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성진이 딱히 애인이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를 붙잡기에는 정리되지 않은 무언가가 가득 들어찬 느낌. 예전에 미팅 때 그의 귓가를 때려대던 전화 소리와, 한 여자를 알고 싶었지만 그냥 떠나보냈다고 괴로워하던 어제의 모습에서 자신이 들어설 공간은 없음을 직감적으로 안 것이다.
혜진은 적극적이긴 하지만 급하게 밀어붙여서 성진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기에 언제까지고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기약 없는 기다림이란 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이러다 성진이 또 다른 여자를 만나서 가버린다면…? 이 옆에 걷고 있는 미선만 하더라도 같은 과니까 혹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돼버리면…….
그런 갈등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선은 자신만의 판단으로 그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에에. 애매한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 성진 오빠가 ‘그것’까지 사다줄 정도면…….”
“‘그것’이라니?”
“몰랐어? 여자라면 다들 갖고다니는 그것 있잖아. 내가 골라주기까지 했는데.”
“……?”
“흐음……. 정말 모르나보네. 그럼 다른 사람인가.”
혜진은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더 물어볼까 했지만 미선은 미선 나름대로 복잡한 관계를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래서 혜진은 결국 타이밍을 놓쳤고, 둘은 그렇게 각자의 상념 속에서 터벅터벅 걷기만 할 뿐이었다. 긴장되었던 탓일까. 혜진은 어느 새 학교 정문을 통과해서 강의실이 있는 건물까지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에스프레소라도 하나 마시고 들어갈까 생각한 그녀는 구내 커피숍으로 향하며 미선을 돌아보았다.
“커피 마실래?”
“아니.”
곧바로 나오는 그녀의 대답. 혜진은 가방 속에서 지갑을 찾아들며 한번 더 권유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틈도 없이 거의 연이어지듯 미선의 입이 열렸다.
“그보다 혜진아.”
혜진은 미선을 바라보았다. 미선은 뭔가 고백하는 소녀처럼 잠시 땅을 보면서 쭈뼛쭈뼛하더니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서곤 생긋 웃어보였다. 살짝 고개를 들면서.
“네가 애매한 관계라고 하니까 말해도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어, 어…?”
“나, 사실은 성진 오빠 좋아해.”
“뭐……?”
여기까지 오는 동안 미선의 별 거 아닌 말들마다 잔뜩 경계의 기분이 들었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랬나. 그녀도 선배가 아닌 오빠란 호칭을…. 그리고 혜진은 다음에 이어진 그녀의 말에서도 다시 한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네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성진 오빠 애인으로 있으면 나는 끼어들 자리가 없을 것 같았거든. 하지만 이젠 나도 노력해야지. 네가 충고해준 나만의 장점을 되살려서 말이야. 헤헷.”
“채미선…….”
그녀는 여전히 뒷짐진 자세로 몸을 조금 앞으로 숙이고는 혀를 살짝 내밀어보였다. 어쩐지 놀린다기보다는 경각심을 부여하는 몸짓.
“혜진 네가 성진오빠를 좋아하고 있더라도 난 안 질거야. 그럼 밥 맛있게 먹고, 다음에 또 보자고.”
이미 식사는 한 거나 마찬가지였던 혜진이기에, 커피를 마시겠다고 했던 것이지만 미선은 당황함 속에서 말을 헛나오고도 눈치를 못 챈듯하다. 곧바로 몸을 돌려 뛰어가는 그녀의 얼굴이 어쩐지 빨개져있다고 생각하던 혜진. 강의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을 텐데. 정말 귀엽긴 하군, 무슨 고등학생도 아니고…….
하지만 혜진은 곧 그렇게 그녀를 여유있게 평가할 상황이 아님을 자각하고 있었다. 후우……. 불안감이 사실로. 예리한 자신의 예감에 자부심이 들 법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결과가 별로 고무적이지 못했기에 혜진은 힘없이 웃으며 커피숍의 메뉴판을 눈으로 읽어나갔다. 하긴 성진 같은 남자가 같은 과에서 좋아하는 여자 한명도 없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지. 그럼 나에게 불리한 건가? 뭘 하더라도 성진은 그녀와 같이 행동할 테니….
그러나 미선이 동경할(?) 정도로 매사에 적극적이고 당당한 대학생의 표본이란 것은 괜히 그녀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혜진의 머릿속은 벌써부터 다른 생각으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이렇게 있으면 안 되지. 강혜진. 너답지 않게 왜이래. 네가 성진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몇 명이 가로막든 헤쳐나가서 쟁취해버려.’
혜진은 이것을 각성의 기회로 삼기로 마음먹고는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의 선영이 아닌 현재의 선영에게 있어선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계를 계속 살아가야 하는 꼴이 됐기에, 딱히 그녀를 탓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물론 본래의 선영이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순간에 튀어나온 건 그녀의 의지이긴 하다. 하지만 모든 생물이 자신의 의지를 자유자재로 구현해보기도 전에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그녀에게는 매우 애꿎은 본능과도 같은 의지였다. 그러므로 성진은 현재의 선영을 미워해서도 안 되고, 예전 본래의 선영이 (잠식은 했지만)그녀 내부에서 살아(?)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대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 정황을 모를 정도로 성진이 철없는 청년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속되는 그녀와의 동거 생활에서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성진은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덩어리를 갖게 된 기분이었다. 늘상 수업이나 운동, 납품 작업, 기타 외출 등을 하고 돌아오면 방안은 항상 언제 그랬냐싶게 어질러져 있었다. 그녀와 동거를 하기 전보다 두세배가량을 더 청소에 신경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은 항상 청소를 잘 안 하는 불성실한 인간상을 나타내는 듯했다.
“이봐, 은선영. 몇 번이나 말하지만 제발 빨래는 세탁기 옆 빨래통에다가 넣어두라고. 너보고 빨래를 하라는 건 아니잖아?”
침대에 앉아 젤리를 떠먹으며 TV를 시청하던 선영도 지지않고 맞받아쳤다.
“다리 불편한 사람보고 꼭 그렇게 얘길 해야 해? 세탁기가 있는 보일러실까지 왔다갔다하는 것만도 아파 죽겠다고.”
“지금 열 발자국도 안 되는 거리를 이유로 들고 있는 거냐?”
“보일러실 문 여는 건 또 어떻고? 나 팔도 다쳤다는 걸 자각해주었음 하는데. 한 팔로 생활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안 다쳐봤으니 모르지? 그리고 그렇게 간단해보이면 팔다리 성한 사람이 금방 해결하면 될 텐데 그게 그렇게 화낼 문제야?”
“젠장할!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 좀 정리하는 성의라도 보임 안되냐? 왜이렇게 입다 만 옷들을 여기저기 내팽개치듯 던져놓는 건데?”
하지만 선영은 더 대꾸하기도 귀찮아졌는지 시선을 TV에 고정시키고 남은 젤리나 마저 떠먹고있었다. 방금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 성진은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을 생각도 않고 서서, 한 팔을 허리에 얹은 채 그런 선영을 노려보았다. 그리곤 오늘만은 못참겠다는 듯 삼키고 있던 잔소리들을 연이어서 내뱉었다.
“샤워실 벽에 거품들은 봤냐? 그것도 아픈 다리 핑계댈거야? 배수관 주변 머리카락들 아주 가관이 아니더라? 샤워를 하려면 좀 똑바로 하든가. 너 그리고 과일 좋아하지? 하지만 먹다 버린 사과껍질에 벌레가 모이는 걸 아는지 모르겠군. 과일 껍질 같은 것들은 제대로 싸서 버리든가 음식물 쓰레기로 분리수거해서…….”
“아 정말 시끄러워 죽겠네. 야, 김성진! 나는 지금 내 문제만으로도 머리아파 죽겠다고! 그냥 좀 참고 내버려두면 안 돼?”
“왜, 네 안의 본래의 선영이 또 계속 말걸어오기라도 하냐?”
성진은 이젠 아예 대놓고 빈정댔고, 선영은 침대에 앉은 상태로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쏘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진은 오늘만큼은 그냥 못넘어가겠다는 눈빛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의 정적 후 선영쪽이 결국 입술을 깨문 채 빈 젤리통을 옆에 놓고는 TV쪽으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성진은 ‘카잔 전쟁’ 경기를 시청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TV를 꺼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 채 몸을 돌렸다. 그리곤 방 안에 어질러진 빨래들을 하나 둘 주워갔다.
그 중에는 성진의 옷도 상당수 있었고, 선영은 그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그의 옷도 멋대로 꺼내 입고있는 중이었다. 그런 점을 새삼스레 자각하자 성진은 가라앉으려던 감정이 다시금 울컥하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그녀 때문에 외출용 옷을 선택하는 데 상당한 애로사항이 피어나는군. 구질구질하게 따지고 싶지 않아 내버려두는 것도 하루이틀이어야지, 젠장할!
“야. 은선영.”
선영은 그의 부름을 못들은 것처럼 TV의 브라운관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성진은 마치 그녀보고 보라는듯이 옷가지들을 한 손으로 들어올렸다.
“도대체 하루에 빨랫감을 몇 개나 생산하는 거냐? 이게 다 네가 입던 거야, 봐봐. 정말이지… 집에만 있으면서 속옷도 그렇게 꼭 하루 한번씩 갈아입어야 해? 쉴새없이 세탁기를 돌려도 내가 쓸 수건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라니까.”
“집에만 있는 거 아냐. 너 없을 때 밖에 나갔다오기도 해.”
조금은 미안한 감정이 들었는지 약간은 더듬거리는 목소리를 입밖에 내는 선영. 물론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성진을 돌아보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성진은 마치 이쪽을 한번 보기나 하라는 것처럼 빨래더미를 바닥에 다시 흩뿌리듯 던졌다. 꽤나 쌓여있던지 다시금 빈정대는 음성이 그의 입에서 나온다.
“하, 그래? 잘난 물리치료라도 갔다 오셨나 보지?”
“그건 아니지만….”
“놀러 쏘다닐 다리는 있고, 청소할 다리는 없다? 네가 생각해도 좀 그렇지 않냐? 차라리 물리치료라도 다니지 그래? 시르병원 거기 치료 잘 하던 것 같은데. 아니, 제발 다니고 온다고 거짓말이라도 해라! 그렇게 빨리 나아서 민폐 끼치지 말고 본래의 네 집으로 얼른 돌아…….”
거침없이 독설을 내뱉던 성진은 자신을 바라보며 입을 꽉 다문 선영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는 얼마 안 가 자신이 할 말 못할 말을 구분짓지 않고 쏟아냈다는 것을 자각하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쨌거나 현재의 선영은 가족은 물론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고 집으로 돌아가봤자 혼자선 며칠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런 정황을 떠나서 본래의 선영 또한 그녀의 내부에 ‘존재’는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현재의 선영 또한 그런 그녀의 일부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됐는데….
선영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고, 성진이 사과할 타이밍을 잡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리모콘을 집어들어 TV를 끄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성진의 앞을 지나쳐갔다. 잠시 힘겹게 신발을 신는 부산스런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는 정말로 자기 집에 돌아가겠다는 것처럼 현관문을 열고 원룸 바깥으로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목석처럼 서있던 성진은 그녀 발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리치듯 던졌다. 본래의 선영이 나왔던 그 별 수확 없던 날을 기점으로, 현재의 선영과의 사이도 점차적으로 나빠지고 있었다.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받는지 예전보다 더 제멋대로 행동을 하고 있었고, 성진의 입장에선 어린애 뒤치닥거리를 하다 지친 사람처럼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말은 좀 심했지…. 그렇게 떠올려보던 성진은 좀 떨어진 싱크대쪽 쌀포대와 옆의 냉장고를 보고는 그 생각조차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대행이라 해도 현재의 선영 또한 어쨌거나 여자였고, 그녀 특성상 많이 먹는 타입은 아니었다.(젤리는 꽤 많이먹긴 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늘어난 2인분의 식사 분량은 자금이 여유롭지 못한 학생 신분의 성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의 병원비로 빠져나갔던 돈과 현재의 생활비 충당은 그가 열심히 납품 아르바이트를 한다 해도 간당간당했다.
늘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려 해보지만 자신에게 주어지는 상황은 전혀 나아지는 게 없다는 걸 자각한 성진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지친 눈을 들어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뒤적였다. 몇 친구들과 여자들 전화번호가 지나갔고, 혜진의 전화번호에서 손가락이 멈칫했다. 성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만 하자, 김성진. 너 그렇게 자꾸 못쓰게 놀면 안 된다.”
성진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핸드폰을 닫아 도로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방금 자신이 바닥에 흩어놓았던 빨랫감들을 주섬주섬 다시 모아가기 시작했다. 문득 선영의 브래지어를 들어올리게 된 성진은 그것을 잠시 살펴보다가 다시 한숨을 쉬듯 한 손에 안아 든 빨래더미 속에 쑤셔넣었다. 아직 환자인 주제에 굳이 레이스달린 걸로 골라서 입기는.
그러다가 이번엔 그녀의 팬티를 들어올리게 된 성진. 조그맣고 하얀 그 팬티 또한 연한 보랏빛 선을 경계점으로 귀여운 레이스들이 촘촘히 달려있었다. 손에 전해지는 감각만으로도 매우 부드럽고 야릇한 느낌.
“…….”
성진은 가만히 선영이 입었던 팬티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냄새를 맡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곤 흠칫 놀랐다.
“칫….”
성진은 얼굴을 붉히면서 브래지어와 마찬가지로 얼른 빨래더미 속에 쑤셔넣었다. 주변을 둘러보아 더 이상 빨랫감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는 잠시 후 머리를 긁적이며 세탁기가 있는 보일러실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