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은 저녁의 경고는 늘상 그렇듯 똑같은 어둠이란 무기. 하지만 인간이란 피조물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기에 늘 그런 무기를 들이대는 것처럼 접어들어왔고, 그것은 성진의 원룸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순 없었다. 성진은 자신이 어느 쪽 손을 들어올리는지도 모르는 표정으로 형광등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딸깍. 인위적인 빛이란 방어수단으로 인해 어둠이란 무기는 잠시 물러갔다. 그리고 옆에 있던 선영은 진이 다 빠진 몸짓마냥 비틀비틀 침대로 다가가 쓰러지듯 자신의 몸을 던졌다.
성진은 문득 고개를 들어서 원룸 천장의 형광등을 바라보았다. 두 개 끼워져서 빛을 발해야 할 삼파장 형광등은 한쪽만 불이 들어와있었고, 다른 한쪽은 꺼져 있었다. 수명이 다 된건지 어떤 건진 모르겠지만 전등이 나갔군. 새로 갈아 끼워야 하지. 그래. 끼워야하는데…….
성진은 선영이 쓰러져있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사이드레일에 등을 기대고는 고개를 뒤로 꺾어 침대 시트에 정수리를 대었다. 앞으로 죽은 듯 쓰러져있는 선영은 성진이 침대에 기댄 걸 아는지 모르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성진은 그녀가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확인해보기도 귀찮았다. 전등이 하나뿐이라 어두워진 방 안에서, 선영과 성진은 둘 다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상태로 수십분의 시간을 한량없이 보냈다.
고요히 퍼지는 책상 위의 탁상시계 소리.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먼저 움직인 쪽은 성진이었다. 그는 젖혔던 고개를 별안간 앞으로 숙이며 사이드레일에서 등을 조금 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꺼진 전등을 갈거나 옷을 갈아입거나 할 평범한 일상을 수행하려고 선행한 동작이 아니었다. 성진은 눈을 똑바로 뜬 채 나뭇결을 흉내낸 원룸 바닥지를 노려보았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일그러진 얼굴로 잠시 바닥지를 보면서 생각에 잠긴 성진은 갑자기 눈물이 왈칵 흘러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도대체 뭐지? 왜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울컥함이 치솟아오르는 거지? 그렇다. 선영은 결국… 나오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하마터면 완전히 없어질 뻔했던 그녀의 자아와 파괴되길 원했던 육신. 성진 그 자신이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겨우 상황이 악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으나, 사실 더 이상 악화될 것도 없는 듯했다. 성진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라곤 그녀는 두 번 다시 현세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뿐이었다.
돌아오지 않겠다고…. 그래. 그렇겠다고…. 이제 다시 본래의 선영은 볼 수 없는 건가?
볼 수 없어…?
볼 수 없다니… 볼 수 없다니….
…이런 젠장할……!
성진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쥐어 원룸 바닥을 부서져라 내리칠 뻔했고, 실낱같이 남아있던 이성이 간신히 그 행동을 제지했다. 성진은 현재 ‘대행’하고 있는 그녀가 침대에 쓰러져서 죽은 듯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지쳐있다는 점을 자각한 것이다. 소란을 피워봤자 좋은 건 없다. 손바닥에 붉게 손톱자국이 파일 정도로 주먹을 쥔 상태에서 바들거리며 경련하듯 팔을 떨고 있을 뿐. 성진은 뜨거운 그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치솟아오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소할 현실이 존재하지 않음에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 목이 메이고 타들어갈 것처럼. 여전히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
잠시 후 성진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현관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이미 밖은 꽤 어두워져있었고, 기이한 경험을 한 선영만큼은 아니지만 성진도 상당히 피로해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성진은 옷매무새를 여미며 신발을 도로 신었다.
“나갔다 올게.”
감정을 닫은 나지막하고 간단한 인사. 그리고 문 손잡이를 잡아 돌리는 성진. 대답할 기운도 없는지, 그의 짐작처럼 잠든 것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미안함에 사로잡힌 것인지, 진전 없는 결과에 말도 하기 싫은 건지. 어떤 답도 골라낼 수 없을 것만 같은 단조로운 자세로 엎어져있는 그녀는 성진의 인사조차도 완벽한 무의미라는 걸 증명해보이기라도 하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진도 그 사실에 별 감응 없이 그대로 현관문을 열어젖혀 바깥으로 나갔다.
가건물처럼 조잡하게 여기저기를 판자와 시멘트로 대충 때운듯한 가게. 컨셉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대학로에서 꽤 멀리 떨어진 장소이거니와 주변 건물들도 낡았다는 점이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게는 싸구려 소주집이라는 걸 굳이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 듯 빛이 바랜 메뉴판과 탁자 등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다.
사실 공간이 싸구려라 해서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까지도 인성이 싸구려라고 판단하는 건 초등학생도 범하지 않을 실수이다. 그러나 혼자서 조용히 술을 마시는 성진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모인 남자 셋의 대화 내용은 별로 고상할 것이 못 되었고, 그래서 누구라도 그런 실수를 범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그년 따먹었냐?”
“야 씨발. 그 정도까지 가서도 안 따먹으면 그게 남자냐? 말로 살살 구슬리며 술 존나 처먹이니 결국 꼬리 내리더라고.”
“크핫핫. 대단한데… 노래방도우미 년들 은근 콧대 높던데.”
천막처럼 쳐진 천장에 달린 백열등이 그들의 목소리에 호응하듯 흔들릴것만 같다. 말 그대로 이런 저렴한 곳에서는 딱히 다른 손님을 위해 제지한다거나 하는 점장의 움직임도 존재할 리가 없었다. 불과 몇 발자국 내인지라 그들이 소리높여 떠드는 소리는 귀에 거슬릴정도로 크게 들려왔으나 성진은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채 아무 말없이 소주만 들이키고 있었다. 안주로 내어온 오징어볶음에도 거의 손대지 않은 채.
성진은 그들의 생각없이 떠드는 소리를 한귀로 흘려버리려 애쓰면서 다른 생각으로 그 내부를 채워나갔다. 본래의 선영을… 다시 볼 수 없다라. 그래. 이것도 지금까지 겪어온 나름대로의 수많은 추억 중 하나로 마감지어진 게 기정사실이란 거군.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마음이 편치 못한거지? 뭐가 이리 조바심이 나는 거지…? 뭐가 이리 불편하게 내 내면을 자리하고 있어서… 이 어두워진 시간에 굳이 밖으로 나와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거지? 도대체… 선영이란 존재는 내게 있어서 무엇이었나?
성진은 그의 말마따나 이성을 처음 만나고 접촉해본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십 대 초반인 그의 나이에 비추면 보통 사람들보다도 많은 여자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열일곱 살 때 다섯 살 연상인 대학생 누나와 첫 관계를 가지고서 그녀를 잠시나마 사모하던 마음이 있었던 과거를 돌이켜본 그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후 수많은 연하, 연상, 혹은 동갑의 친구들과 원나잇이나 데이트메이트 관계를 이루면서 섹스를 했었고, 중간중간 그녀들을 놓치기 싫어한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곧 그의 고개를 가로젓게 만들었다. 그들은 모두 성진에게 호의적이었으나 한 때의 쾌락을 증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발현되는 게 더 짙었고, 경험이 많아질수록 그런 것에 회의성 비슷한 것이 몰려왔던 것이다.
성진은 문득 픽하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제대로 된 연애란 것을 해본 적이 없는 남자군. 그리고 나이에 비해 섹스와 회의감이란 감정을 일찍 깨달은 보다 평범하지 않은 존재란 것도. 성진은 여자 경험이 많기는 했지만 헤프다고 표현할 정도로 많지는 않았고 그 스스로도 그렇게까지 여자와 자는 것에 목표를 두지는 않았다. 나이트 클럽에서 분위기를 한껏 돋구다가도 그 자신이나 상대가 조금이라도 석연찮은 기분이 엿보이면 미련 없이 돌아서곤 했다. 물론 정말로 맘에 드는 상대가 보이면 그의 주특기를 살려 꽤나 날카롭게 파고들어보기도 했지만….
별 쓸데없는 생각까지 미친다고 느낀 성진은 다시금 술잔을 기울여서 들이켰다. 뒤쪽에서 떠들어대는 사내들의 음성이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그의 귓가를 찔러왔다.
“그 년의 보지 맛은 어떠디? 잘 노는 년들은 보지도 대개 쌔끈하던데.”
“뭐 그런 것까지 물어보냐, 큭큭. 왜, 니도 한번 따먹어볼려고?”
그리고 대화의 주도권을 이끌어가던 남자는 득이양양한 웃음으로 의자 뒤에 한 팔을 걸친 채 말했다.
“야 이것들아. 꼭 경험없는 녀석들이 조바심은 존나 내어요. 노래방도우미라 해서 별 것 있냐? 벗겨보면 다 거기서 거기지. 말랑말랑하고 쫀득쫀득하고….”
거리낌없이 음탕한 말을 지껄이던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더듬거리듯 늘어졌다. 그리고 그의 무디어진 입과는 반대로 눈은 점차적으로 커져갔다. 앞에서 그의 경험담을 듣던 두 사내는 그런 그의 변화를 눈치채곤 의아함을 담아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얼거리듯 계속해서 열리기는 하고 있는 남자의 입.
“쫄깃… 쫄깃하고…….”
“……?”
성진은 떠들어대는 소리가 잦아들자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엔 다른 의미로 픽하고 웃어버렸다. 한 순간 가게 내부의 시선을 사로잡아버린 그 주인공은 손을 앞쪽으로 모아 치마 앞에 가방을 든 채 천천히 성진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성진은 그런 그녀를 두 번 보지는 않은 채 나무젓가락으로 오징어볶음을 하나 건져 입 안에 넣었다.
“오라고 해서 정말로 오냐?”
“오라고 해서 왔는데 그 반응이 뭐야, 오빠.”
검은색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숏재킷, 붉은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체크무늬 미니스커트와 종아리부분을 살짝 덮은 롱부츠를 신은 혜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예뻤다. 앞에서 떠들어대던 사내들은 그녀의 등장에 놀랐고 이어서 그녀가 만나려 온 사람이 별 존재감도 없이 후줄근하게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청년이었다는 점에서 또한번 놀랐다. 파전을 굽던 중년의 주인조차도 자꾸만 이쪽을 흘끗거리며 바라보았다. 그렇게 부러움과 시기성을 한몸에 받기 시작한 성진은 정작 당사자답지 않게 심드렁하게 말했다.
“할 것 없으면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그 간단한 권유를 의무성으로 받아들인것처럼 보이는데, 내 눈에는.”
“나 그럼 그냥 갈까, 오빠?”
“가지 않을 거니까 그 대답은 패스야.”
혜진은 입술을 비죽 내밀면서도 맞은편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아르바이트생이 소주잔을 가져와서 혜진 앞에 놓았고, 그녀는 감사의 표시로 생긋 웃어보였다. 아르바이트생은 그 화사한 웃음에 얼굴이 붉어진 채 ‘조… 좋은 시간 되세요’란 말을 남기며 비척비척 물러섰다. 어쩐지 한 손으로 머리모양을 자꾸만 다듬는듯한 동작으로.
성진은 혜진의 잔에 술을 따라준 후 연거푸 자신의 잔을 들이켰다. 혜진은 앞에 술잔만 놓은 채 입도 대지 않고 있었지만 성진은 그녀가 마시든 말든 전혀 상관없다는 동작으로 계속해서 들이키고 있었다. 술잔이 비면 곧바로 자신의 손으로 술을 다시 채워넣고를 반복하였다. 갑자기 대화가 뚝 끊긴 분위기. 누가 보면 성진이 굳이 혜진을 불러서 술을 마실 이유가 없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왜 저런 재미없는 남자랑 같이 있는 건가요, 천사 당신?
한량없이 이어지던 침묵 속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역시나 성진이었다. 마치 혜진을 시험해보기라도 하듯 지속적으로 자신의 술잔만 기울이며 생각에 빠져있던 그는 이윽고 눈만 조금 들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녀가 처음 들어와서 무릎 위에 가방을 놓아 앉은 자세 그대로 꼼짝도 안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툭하고 물었다.
“안 물어보나?”
“뭘?”
“내가 왜 이시간에 널 불렀는지, 그러고선 그냥 아무 말 없이 나 혼자 마시고 있는지에 대해서.”
“세상 고민 다 짊어진 삼사십대 아저씨처럼 이러고 있냐고 놀려대어도 오빠는 한번 웃기만 할 뿐 별 반응이 없을 거잖아?”
벌써 몇 번째 잔인지 모를 정도로 입가에 술잔을 가져가던 성진은 그 동작을 멈칫했다. 그리고는 혜진을 한번 바라보더니 기운 빠지는 웃음을 내면서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나를 잘 아는 것처럼 말을 하는군.”
“어느 정도는. 난 오빨 좋아하니까. 그런데 뭐가 그리 심각한 거지?”
성진은 그녀의 ‘좋아하니까’란 말에 미묘한 감정을 받으며 나무젓가락으로 오징어볶음 안주를 만지작거렸다.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 채 그 동작을 반복하는 성진. 그런 그의 표정을 고개를 약간 앞으로 해서 살펴보던 혜진은 곧 포기하고는 처음 자세 그대로 똑바로 앉았다.
다시 침묵. 그리고 성진은 한참동안 만지작거리던 오징어 하나를 들어서 입에 넣고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아르바이트생에게 새 소주를 주문하는 동작 이외에는 어떤 특징도 찾아볼 수 없는 단조로운 동작의 일색이였고,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인내심의 한계로 답답함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성진은 말 그대로 기계적으로 술을 들이마실 뿐 혜진의 질문에는 전혀 대답을 않은 상태였다. 마치 그녀의 물음 따윈 잊어버린 것처럼.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이상한 건 성진이 아닌 혜진 쪽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완벽하게 무시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인사도 없이 돌아서서 가고도 남을 것이었다. 하지만 혜진은 묵묵히 의자에 앉아 성진이 술을 들이키는 모습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나 그런 상태가 오래 갔던지 가게 내부에 있던 다른 손님들까지 이 분위기를 흘끗거리며 바라볼 정도였다. 참으로 평범하지 않은 모습.
그리고 결국 그 자신을 보다못해 나서는 사람처럼 성진은 술병을 쥐고는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짧게 한마디 했다.
“가.”
하지만 직접적인 수단으로 건네진 그 짧고 강력한 말에도 혜진은 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듯 일어서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살포시 미소지으며 성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성진은 자신의 발언에 대한 그녀의 반응을 살펴보려다 여전히 앉아있는 그녀에 한번 당황했고 그 아름답고 푸근한 미소에 또한번 당황했다. 뭐지, 이 여자? 아무리 날 좋아한다 했지만 어이가 없어서라도 뒤도 안돌아보고 갈 법한데…. 성진은 선영의 생각에서 혜진의 정체성으로 관심사가 기울어지는 자신을 발견해갔다.
“왜 그러고 있는 거야?”
“오빠… 정말로 심각하구나?”
“네가 신경 쓸 문제는 아냐. 칫… 괜히 불렀군.”
혜진은 틀린 답이라 지적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리고는 자신 앞에 놓여있는 잔을 내리깐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빠는 내가 정말로 필요해서 부른 거야. 하지만 오빠의 그 착한 심성이… 자신의 행동으로 하여금 후회성이 일게 만드는 거지.”
“내가… 착하다고?”
성진은 잠시 어처구니가 없는 듯 술잔을 기울이던 손을 탁자 위에 놓은 채 똑바로 혜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를 평소에는 별 관심 없게 대하다가, 자기가 힘들 때만 불러내는 그 이기심을 작은 것으로 치부할 수가 없어서이지. 대다수의 사람들이라면 자기 문제만으로도 너무 힘들어서, 지쳐서 그런 것까지 되짚어볼 여력이 없지만 오빠는 특별해. 그리고 난 그런 오빠를 좋아하고… 그래서 오빠는 그런 사실을 자각해도 신경 쓰지 않고 얘기해도 돼.”
성진은 그런 그녀의 평에 고맙다는 말 따윈 하지 않았다. 대신 이를 드러낼 정도로 히죽 웃으며 그녀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군, 이 가증스런 후배녀석아. 내가 너와 잤다고 해서(이 부분을 얼핏 듣게 된 가게 내부의 몇몇 손님들은 마셨던 술을 조금 입밖으로 뿜어낼 뻔했다) 내 모든 것을 꿰뚫어본다고 착각하지 마. 네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그 성진이란 사람은 다른 여자와의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고, 그런 문제 때문에 너란 녀석을 위안삼아 불러낸 것뿐이야. ‘네가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의 문제’로 말이야! 자각이 안 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진은 담담한 미소로 성진의 표출되는 분노를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성진은 잠깐의 정적 속에서 결과적으론 혜진이 짐작하고 있던 게 맞다는 걸 알려주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급작스럽게 울컥한 성진은 괴성을 지르며 탁자 위에 한 손을 힘껏 휘둘렀다. 쓸어내듯 휘둘러진 성진의 팔에 의해 그의 술잔과 쌓여있던 술병들, 안주들이 돌바닥에 떨어졌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적잖은 유리파편들이 넓게 퍼져나가 아수라장을 방불케 한다. 가게 주인은 물론 모든 이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지만 성진은 그런 것 따윈 관심 없다는 듯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혜진을 죽일 듯 노려보며 한마디한마디 또박또박 말했다.
“그 따위로 사람을 믿지 마! 나… 난 착한 녀석이 아니라고. 내가 남을 피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이정도 난장판을 만들어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냐! 내 멋대로 막나가고 살아갈 수도 있어! 네가 바라보는 성진이란 녀석은 네 안위로 구성지어진 환상에 불과해! 내가 나는 별로 좋은 남자는 아니라고 했던 것 기억나나? 그게, 그게 괜히 말했던 건 줄 알아? 그리고… 거기에 나는 무능력해. 무능력해서…….”
붉게 타오르는 그 무엇마냥 감정의 기복이 최고조에 달했다가 점차 잦아드는 목소리. 그의 고개가 떨구어지고 흐느끼기 시작한다. 주인은 이제 이쪽을 사납게 노려보기 시작했고 아르바이트생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는 다가왔다. 혜진은 최대한 죄송하다는 말로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지갑에서 현찰을 꺼내어 청소비를 따로 지불하겠다고 내밀었다.
그리고 그러한 소동을 만들어낸 성진은, 혜진이 그 소동을 잠재울 동안 자리에 도로 주저앉듯 엉덩이를 붙이고는 몸을 옆으로 돌렸다. 마치 그 소동으로부터 등지듯 반쯤 돌아앉아서. 한 팔을 테이블에 걸친 자세로 외면하는 것처럼 먼 곳을 응시하는 자세를 취하던 성진은 주변이 잠잠해졌다는 것을 느끼자 억눌린 음성으로 말했다.
“한 여자를 알고 싶었어.”
혜진은 성진의 손놀림으로 인해 싹 쓸려나간 테이블 위에 달랑 남아있는 자신의 잔을 그제서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살짝 입만 대듯 음미한 후 도로 다시 내려놓았다. 그 작은 소주잔에 1/3도 비워지지 않았지만 둘 다 그 사실에 별 의미는 두지 않는 듯하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들지 않아서 자신 혼자 그 자신과 싸워나가야 했던 여자야. 보통 사람 같으면 너무 어려운 문제라, 생각의 방향을 일정 한도 내에서 뻗어나려 하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그 여자는 달랐어. 그 여자의 뇌가 그렇게 명령을 하지 않지. 그리고 그녀의 심장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혜진은 여전히 하염없는 깊이를 가진 물처럼 성진의 말을 경청하고만 있었다.
“동정심이라 표현해야 하나? 모르겠어. 젠장할. 사랑이란 건 너무 어려워. 도대체 사랑이란 게 뭐지? 동정심과 호기심과 특별함과 좋아함이란 감정이 조합되면 사랑이란 걸 어느 정도 정의할 수 있으려나? 어쨌거나… 그것이 어떤 감정이었건 간에 나는 그녀의 그런 면까지도 알고 싶었어. 아무도 알아주지 못할 그녀를 이해해보고 같이 살아가려 노력하고 싶었어. 그녀에게도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 그런데… 그런데…….”
옆으로 돌아앉은 성진의 어깨가 다시금 떨려왔다. 짧지만 날카로운 머릿결 사이로 자신의 눈을 감추듯 고개를 숙이면서.
“나는… 그녀를 사랑해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그녀를 떠나 보냈어.”
“이제 오빠가 뭐라고 말할지 나는 알고 있어.”
성진은 또한번 화를 내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이제 지치고 질리고 두 손 들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금 들어 혜진을 바라보았다. 혜진은 그의 힘없는 시선을 느끼면서 소주잔의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알싸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갔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녀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몇 마디 손가락으로 머릿결을 쓸어넘겼다. 살짝 풀어진 눈을 연기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혜진에게 성진은 굳이 자신을 감추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날 위로해줘. 혜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