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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각거리던 발걸음이 벽에 붙어있는 선반 앞에서 멈췄다. 연분홍색 간호복은 재질이 꽤 두꺼운 편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반 앞에 멈춰선 간호사의 늘씬하고 육감적인 몸매는 라인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느 남자 환자라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시르 병원의 제일 가는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였지만 현재 진료실 의자에 앉아있는 의사는 그녀가 하려다 만 일에 더 신경이 쓰이는 듯하다.
“왜 그러고 서있나? 현소영 간호사.”
“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영은 고개를 돌려서 생긋 웃어보이고는 그에게 갖다 줄 커피를 타는 데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얼마 안 가 그녀의 신경은 다시금 알 수 없는 어딘가로 향하였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시선은 진료실 벽 너머를 바라보는 것처럼 움직였다.
얼마간의 정적 후 그녀의 입이 툭하고 열렸다.
“은선영 씨 깁스를 푼 게 어제였죠?”
커피를 갖다주기만을 기다렸던 의사는 의외의 질문에 약간의 실망감을 느끼며 안경을 매만지곤 간단히 답했다.
“그래.”
“그리고 그날 하루는 간단한 추가 치료와 함께 목욕을 할 것을 권했고 물리치료는 다음날부터 하라고 했던가요?”
선영을 담당했던 비쩍 마른 의사는 턱을 괴고는 넌지시 소영을 바라보았다.
“물리치료는 필수 사항은 아니야. 좀 더 원활하고 빠른 쾌유를 위해서지. 그런데 왜 네가 신경쓰고 있지?”
“아… 아뇨. 워낙에 특이한 기억상실증의 여자였는지라….”
그러나 의사는 소영의 마음 속을 떠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고 응시했다. 그리고는 그녀가 커피를 내어오자 자신의 책상 위에 살며시 얹혀지는 틈을 타 나지막하게, 하지만 정곡을 찌르듯 슬쩍 물어보았다.
“이봐, 현 간호사. 솔직히 말할 생각이야 없겠지만… 그녀가 아니라 그였겠지?”
몸을 돌리려던 소영은 멈칫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능숙하게 생긋 웃으면서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치 의외의 질문을 들어서 조금 당황한 정도의 선이라는 뜻을 완벽히 형성했고 의사도 곧 더 이상의 무언가를 캐내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이런 미묘한 신경전은 하루이틀이 아니었기에 의사는 자신의 불쾌감을 감출 수가 없다는 것을 굳이 내비쳤다.
“네가 싹싹하고 특별히 문제점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은 인정해. 웃어른들에겐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도 평이 좋아서 나도 뭐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하지만 조금 더 젊은 남자들에게 오해가 일만한 짓은 삼가하는 게 좋지 않겠어?”
“제 미모가 이런 걸 어떡해요. 그래도 원장님이 말씀하신 규정은 모두 지키고 있잖아요. 왜, 못생긴 얼굴로 성형수술이라도 할까요?”
태연하게 맞받아치는 소영의 말에 의사도 더 이상 할말을 잊고 불편한 기침만 연달아 반복했다. 그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는 옆에 놓인 신문을 거칠게 집어들어 펼쳐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이대로 질 수는 없다는 것처럼 조금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그렇게 빼어난 미모면 서른 되기 전에 얼른 시집이나 가든가! 괜스레 연하의 젊은이들에게 꼬리치지나 말고 말야.”
“아이, 원장님도 참~”
애교 있는 눈웃음을 던지고는 차트들을 집어들어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러 나가는 소영의 발걸음은 한층 경쾌해져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애교는 승리의 의미였음을 의사 역시 알고 있었기에 잔뜩 찌푸린 머릿속으로 애꿎은 신문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진료실을 나선 소영은 곧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그녀는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보았다. 이미 꽤 느지막하게 지나간 오후를 가리키는 시침. 필수 사항은 아니지만 성진이 선영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첫 물리치료를 하러 오지 않을 확률은 낮았다. 소영은 언젠가 자신이 그에게 언급하려다 만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보았다. 그건 매사에 유연하고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소영에게 있어서도 적잖게 불길한 징조로 느껴졌다.